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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면서

  • 작성자 창지자
  • 작성일 2011-11-28
  • 조회수 475

너를 기다리며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1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대피소 밖에는 검은 먹구름들이 파란하늘을 가리고 굵은 비들을 쏟아 부었다. 창문은 굵은 빗줄기에 부딪혀 흔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습기, 그리고 어둠 속에서 덜덜 떨었다. 이 악몽이 언제쯤 끝날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악몽은 꽤 오래갈 것 같았다.

내 오랜 친구가 이 악몽을 끝내기 위해서 이 안전한 대피소에서 위험한 저 밖으로 나갔는데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꽤 많은 목숨을 구했다. 혼자서, 18살의 나이로 군대조차도 못할 일을 혼자서 해냈다. 마치 만화속의 마법소녀나 슈퍼우먼처럼 말이다. 그런데 믿기지 않겠지만 그 친구는 정말로 그런 존재였다.

그 친구는 나와 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였다. 동성의 친구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 그래서 어릴 적에는 자주 서로의 집에서 잠을 자기까지 했었던 적까지 있었다. 그런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아니, 내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아니었다. 얼마 전 그 친구가 내게 자신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은 낌새가 있는 것 같아서 그 친구에게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머뭇거리면서 내게 답하기를 주저했다. 내가 대체 무엇이냐고 계속 되묻자, 하는 수 없다는 듯 그 친구는 내게 자신이 숨긴 것을 털어놓으며, 털어놓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친구의 고백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고백의 내용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그 친구에 대해서 웬만한 것은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친구가 밝힌 비밀은 이랬다. 최근 1년 사이 내가 사는 도시에서 괴생물들에 의한 기이한 테러들이 일어났는데, 그 테러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뉴스에서 보았던 그 테러를 해결한 사람은 우리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그 소녀가 한 복장이 마치 만화 속의 캐릭터가 입는 복장이었다.

마법소녀. 그때 소녀가 입었던 옷은 마법소녀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 분홍색의 조금 짧은 치마와 그 속의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누군가 보기에는 코스프레처럼 보이겠지만 코스프레는 아니었다. 만일 그것이 코스프레였다면 금방 옷이 찢어졌을 것이었다. 코스프레 소재는 아주 싼 면직물을 가지고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스컴에서는 그 소녀의 정체를 가지고 꽤 많은 논쟁이 일었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였다니 놀라 노자였다.

어쨌든 그렇게 자신의 비밀을 밝힌 그 친구에게 나는 농담하지 마라면서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거듭 그 친구는 내게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내게 자신의 파트너라면서 말하는 족제비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그 족제비는 그 친구가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내게 설명했는데, 그 이유도 헉 소리가 나올만한 어이없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랬다. 자신은 정령이고, 세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만들려하는 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마법의 힘을 가진 내 친구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어째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 족제비도 몰랐지만, 아마도 선천적으로 천년의 한 번 지구의 순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친구가 마법소녀로서 그 범죄조직과 싸우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친구의 싸움이 종착에 이르렀다. 범죄조직의 간부들은 친구에게 무릎 꿇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뿐이었다. 세상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상을 만들려는 음모를 꾸민 그 자만이 말이다. 그러나 그 애가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와 싸우러 간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우두머리라서 그런지 여태 잘 싸워오던 그 애도 고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떠나면서 내게 자신의 가족을 부탁한다고 했다. 대피소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가족들이 알게 된다면 찾으러 다닌다면서 난리가 날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그러니 내가 잘 말해달라고 하면서.

하지만 나는 그녀의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해야지만 안심을 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잘 말한다고 해도, 정작 그 애가 없는데 가족들이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엄마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얘, 우리 지윤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대피소에 와서 그녀의 가족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와 시선을 그녀의 가족들과 반대방향으로 돌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방법을 사용할 수도 다른 방법으로 이 상황을 모면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감감무소식인 지윤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윤이 말이에요? 지윤이는 말이죠.…”

“그래, 우리 지윤이는 말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변명거리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학교 지각할 때마다 내놓던 변명거리는 잘 만들어냈는데, 아주 필요한 이때에는 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는지 몰랐다. 식은땀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그리고 머리가 약간씩 아파왔다. 생각나지 않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려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 의무가 있는 나는, 쥐가 날 것 같은 머리를 쥐어짜내어 변명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지, 지윤이는 오늘 학교 마치고 반 친구랑 시내에 잠시 나간다고 했었어요. 아마도 이 대피소가 아니라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몸을 피했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원래 똑부러졌던 애였으니까 자기 몸 하나는 챙길 수 있는 애예요.”

 

라 말하며 아주머니를 안심시켰다.

아주머니가 내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 그렇다면 좋겠지만…”

 

여전히 아주머니는 지윤을 걱정했다. 하긴 나도 아주머니처럼 그 애의 생존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아주머니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믿는 것이다. 조금 남자로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그 애가 반드시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를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해줄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지윤이는 꽤 정의감이 투철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불량스러운 아이들이 약한 애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지나치지를 못했고, 중학교 때에는 자진해서 선도부에 들어가서 학교의 불량아들을 모두 개도하기 까지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에는 입학자마자 불량서클의 가입한 학생들을 모두 제압해 불량서클을 폐쇄시키는 또 한 번의 전설을 만들어냈는데, 누군가가 듣는 다면 뻥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사실이다.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그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도록 직접 단련시키기까지 했는데 나도 그 단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마 그때가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나는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지윤은 자신의 오래된 친구인 내가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다니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나를 단련시켰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불량스러운 친구들의 눈밖에 있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지윤이는 목소리도 아주 크고 명랑했다. 발표를 할 때마다 무슨 정치가가 연설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정말 지윤이의 발표를 듣고 있으면, 언젠가 저 녀석 정치가가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를 멸망 직전에서 구하는 영웅, 마법소녀가 되어있다니 뭔가 아이러니하다. 마법소녀인 만화 속 캐릭터가 실제로 현실에 나온다면 과연 지윤이와는 다른 성격일까 아니면 똑같은 성격일까. 살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드라마와 만화, 애니메이션 속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옛날을 회상할 때마다 왜 미소가 지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대피소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려진 하늘 아래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서 그 애가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를 물리쳐줬으면 싶었다.

그때, 창밖 멀리 한줄기 빛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대피소의 사람들은 일제히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여우비처럼 마른하늘에서 비가 내릴 수는 있어도 먹구름 사이에서 빛이 지상을 비추고 그 주위로 비가 내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충격음이 발생해 대피소의 창문을 두드렸다. 충격음은 그 후로도 몇 번 간격을 두고 발생했는데, 창밖너머에서는 충격음이 발생해서 창문을 두드릴 때마다 불꽃이 번쩍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들이 보이지도 발생하지도 않게 되자 먹구름으로 가려져 있던 파란하늘이 살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파란하늘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하늘이었다는 듯 푸른 빛깔은 더욱 푸르게 보였는데, 그 하늘 아래로 대피소로 다가오는 작은 점이 보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 점을 자세히 보았다. 작은 점은 지윤이였다. 지윤이가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를 이긴 것이었다. 이겨서 저 파란 하늘을 되찾아 준 것이었다.

그런데 지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안 순간 눈에서 짠물이 흘러내렸는데, 친구의 무사함을 알아서 다행이라는 의미를 품은 짠물은 아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감정을 담은 물이었다. 안도, 한숨, 방금 전까지는 알아채지 못한 마음속의 뭔가 텅비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 이 모든 것을 안고 있는 짠물이었다. 짠물이 흘러내리면서 짠물에 담고 있던 모든 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대피소의 누구보다도 빨리 대피소 문을 나서 지윤에게로 달려갔다. 그 애에게 달려가면서도 내 눈에서는 짠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지윤이와 마주했을 때, 지윤이는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는 쓰러져버렸다. 나는 팔로 쓰러지는 지윤이를 받았다. 지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엄청 격렬하게 싸웠다는 것이 현장에 없던 나에게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입고 나갔던 옷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는데, 지윤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으면서 내 안부부터 물었다.

 

“내가 많이 늦은 건 아닌가, 했는데 다행이네.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바보 같긴. 네 꼴을 봐. 네가 그런 걸 무를 처지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괜찮은지 무를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괜찮아. 그러니까 네 몸부터 챙기라고 이 바보야.”

 

내가 그렇게 말하며 핀잔을 주자 지윤이는 내 품에 안겨 파란 하늘을 향해 크게 웃었다. 지윤이가 그렇게 큰 웃음을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웃든 푸른 하늘 아래에 지윤이가 있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웃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웃음은 그녀가 되찾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 나도 따라 웃게 했다.

창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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