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 작성자 진주토끼
- 작성일 201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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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781
여자는 아침마다 서울의 빽빽한 도심이 훤히 보이는 오피스텔 창가에 앉아 원두커피를 음미하며 시집을 읽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창밖을 바라본다. 뿌옇게 낀 도심의 매캐한 연기마저 그녀에겐 그저 사랑스럽게 보이고 쓰디 쓴 원두커피를 도시여자는 꼭 먹어야한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꿋꿋하게 먹는다. 그리고 다시 시집을 읽는다. 그녀가 읽고 있는 시집 위로 날개가 달린 조그마한 물체의 그림자가 떠다니자, 그녀는 창밖을 응시한다. 창가에는 벌 한 마리가 그녀를 지켜보기라도 하는 양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벌을 보자마자 씩씩거리며
“이 놈의 벌은 날 아주 괴롭히려고 작정한 거야!?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날아와?”
라고 말했다. 그리곤 그녀는 시집을 덮어 벌의 그림자를 뭉개어버리지만 벌의 그림자는 시집표지위에 여전히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오피스텔에 입주하기 전 행여나 벌이 창가에 집을 지을까봐 높은 층에 입주했건만, 그 높은 곳에도 벌들이 집을 지었다. 그녀는 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인상을 찌푸리며 원두커피를 벌컥벌컥 마시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벌 그리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린그녀는 아침마다 창밖에 벌들의 웅웅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일찍 깨 아버지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다.
“아, 아부지요! 잠 좀 자입시더, 잠 좀! 벌들은 왜 내 방 앞에다가 분봉을 해가꼬, 아침에 잠도 못자게 하니껴!”
그러면 아버지는
“가시나야, 해가 떴으니께 벌들이 일하러 가는 긴데, 니는 지금 잠이나 자싸코, 지금이 몇시고 핵교갈 준비 퍼뜩 안하나!”
“ 아, 그러문요, 창문이라도 좀 이중으로 해 주든지요. 집은 다~ 낡아 빠져가꼬, 아니면 벌을 안 하든가요. 내 창문에는 벌들이 똥칠갑을 해싸코, 창문이 이래이래 와 이래가지고 벌 소리는 또 얼매나 잘 들리는 데요.”
그녀는 옛날 생각은 뭐 하러 하냐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지만 그녀는 이미 벌이 싫어지고 아버지가 싫어진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어린 그녀는 교실의 창가 맨 뒤쪽에 양 갈래로 정갈하게 땋은 머리를 하고 레이스가 풍성하게 실린 블라우스를 입고 최대한 촌스럽지 않게,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수업을 듣고 있다. 그녀는 어릴 적 시골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토종벌을 하며 살았다. 아침마다 앵앵거리는 벌이 싫고, 벌 박사라 불리는 아버지가 싫고, 나무가 빽빽한 산이 싫어 언젠가 꼭 벌이 없는 고층에서, 나무대신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곳에서 살 것이라며 촌에서 그나마 읍내로 나와 청소년기를 보내던 중이었다. 화기애애한 수업분위기를 깨고 한 아이가
“벌이다! 선생님 벌 들어 왔어요.”
라고 말하자 여자아이들은 암흑 속에 있다가 막 불빛을 본 바퀴벌레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남자아이들은 용감함을 자랑하려는 듯 벌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그녀는 왜 하필 벌이냐라고 생각하며 벌에 대해 오기가 발동한 탓에 의자에 앉아 꿋꿋이 가만가만 책장을 넘기다, 그녀를 돌아보는 민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머릿속엔 하얀 백지가 그려졌고 그 위에 일주일 전 민수와 민수아버지가 산골짜기 그녀의 집까지와 꿀을 사갔던 것이 영사기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민수에게 절대 비밀이라며 눈깔사탕을 한통 사줬던 것 까지. 그녀의 눈빛은 초조했다. 마음에 드는 머리핀을 사려고 모은 돈으로 눈깔사탕까지 사줬는데 설마 말하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민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단 1초도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곧장
“ 야, 너 벌 박사 딸이잖아. 저번에 봤잖아. 야, 어떻게 좀 해봐 벌!박!사! 딸내미!”
라며, 민수는 고의가 아님에도 벌 박 사 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어린그녀의 얼굴에 있던 도도함은 온데간데없고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맺히고 볼은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자 아이들의 관심은 벌에서 그녀로 쏠렸고
“ 벌 박사 딸내미래”
하며 키득거렸다. 그녀는 수치심을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눈깔사탕을 줬던 개수만큼 때려주리라 마음먹고 민수의 얼굴을 날렸다. 그녀는 아이들이 놀린 것 보다, 이 일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 때문에 어렸던 그녀는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의 소식을 듣자마자 벌을 보다 말고 양파자루를 뒤집어쓴 채로 학교로 달려왔고 그녀는 또 한 번 놀림감이 되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듯이 높은 그녀는 마음에 생긴 상처에 딱지가 앉기 전에 다시 한 번 상처가 생겼다. 그 이후도 아버지는 꿀단지를 한가득 가져와 교무실에 돌렸고 용서해달라고 잘 봐달라고 굽실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난 저렇게 안살아. 왜 빌빌거리는지 왜 구질구질하게 사는지.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그 날 그녀의 일기장엔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은 아버지라고 쓰여졌다.
그녀는 몸 속 깊숙이 숨어있던 신경들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한숨을 쉬며 그녀의 아픔을 다 토해냈다. 가슴을 치고 쳐도 먹먹했다. 언제나 아버지를 미워했고 지금도 여전히 미워하는 그녀에게 상처란 절대 아물지 않는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탁자위의 전화기 앞으로 갔다. 그녀의 손이 수화기에 가지까지 수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도 그리 좋은 딸은 아니었다는 것.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다는 것.... 아버지와 통화를 안 한지도 어느덧 반년을 향해가고 있었고 언제나 아버지가 전화를 먼저하고 단답형이었던 부녀간의 삭막한 통화였다. 그녀가 수화기를 드려는데,
띠리리링, 띠리리링
정적을 깨고 벨이 울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
“ 김 현주씨 되시죠? 아버님이 많이 위독하십니다. 시골로 하루 빨리 내려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꾸 딸 이름만 부르셔서 전화드렸....”
그녀의 손에서 수화기가 미끄러지고 그녀는 창가에 맴도는 벌 한 마리를 바라본다.
“아빠... 나한테 인사하러왔구나.”
그녀의 눈동자의 눈물은 아른거리는 꽃이 되어 벌 한 마리가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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