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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 작성자 진주토끼
  • 작성일 2011-08-20
  • 조회수 1,291

 

핏빛으로 물든 세상 속,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기어린 비웃음을 듣지 않으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위태롭게 달린다. 그저 세상을 핏빛으로 만들어 버린, 내 심장을 뜨겁게 달궈버린 노을을 향해 달린다. 내 눈에는 핏물이 괴여 내 뺨을 타고 꽃잎이 되어 흩날리고 내 다리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달궈진 내 심장에 방망이질하는 뜀박질로 인해 심장이 단단해질 때까지 나는 달린다. 내 몸이 산산이 흩어지고 있다. 손을 뻗어 노을을 잡아보지만 내 손이 자꾸만 달아나 버렸다. 노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흩어지는 내 몸을 감싸 안고 끝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내가 있던 곳은 절벽의 끝이었고, 노을은 사라졌다. 나의 몸은 산산이 흩어져 바람이 되어 바닷물의 포말과 함께 사라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악몽이었다. 되풀이 되는 꿈 때문에 지칠 때로 지쳐 버렸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런닝에서 땀 냄새가 진동했고, 머리칼에선 쉰내가 났다. 다리 근육 속에선 북장수가 북을 두드리는 마냥 다리가 욱신거렸다. 눈을 다시 감아본다. 내 꿈속은 언제나 힘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을을 잡기위해 나는 달렸지만 노을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난 곧 절벽으로 추락했었다. 그래도 견딜 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하면 그만이었고, 기분은 나빠도 떨쳐버리면 그만이었다. 나는 노을을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왜 떨쳐지지 않을까. 다시 눈을 감았다. 내 방에 감도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날 짓눌렀다.



앉은뱅이 낡은 책상 위에는 유통기한이 지나버렸을 법한 수많은 약봉지들이 놓여있고, 반 지하 방의 창문사이로 한줄기 햇볕이 들어와 나갈 곳이 없어 정처 없이 떠돌다 내려앉는 먼지들이 보인다. 거실 한쪽엔 앞을 보지 못하는 인형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 옆에는 각각의 인형의 눈들이 소복이 쌓여 있다. 인형에게 앞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건 엄마 였다. 엄마가 인형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주면, 인형은 우리 집에게 밥벌이가 되어 주었다.

 “영광아 밥 먹자”

쇠 수세미 같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된장국이 놓인 동그란 반첩 밥상 앞에서 엄마와 단둘이 마주 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엄마의 얼굴이 요 며칠사이 수척해졌다. 얼굴에 핏기가 돌지도 않았고, 눈은 점점 뻐끔해지고, 입술을 부르텄다. 숟가락을 쥐는 손은 뼈의 윤곽이 드러나 보였고, 몸은 점점 야위어 갔다. 내 마음도 점점 야위어 갔다.

 “엄마 어디 아파? 약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야? 며칠 쉬는 게 어때?”

라고 하자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만 괜찮다고만 하신다. 환기가 되지 않아 본드 냄새가 진동하는 반 지하 방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tv대신 오래된 라디오를 친구삼아, 하루에 몇 만개씩 인형에게 눈을 붙이는 엄마. 우리 집이 왜 이렇게 가난해 졌을까. 가.난. 이 두 글자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난은 아빠가 우리의 곁을 떠난 뒤부터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며, 엄마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고, 시인 이라는 내 꿈을 몇 차례나 고민하게 했다. 왜 아빠가 아무 말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인지, 오늘따라 아빠가 원망스럽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집을 나섰다. 하늘을 바라본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구름들이 곧 울 것만 같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벌써 8시를 가리킨다. 늦었다. 휴, 오늘도 혼날게 뻔하다. 서둘러 걷는데, 툭하더니 신발 끈이 끊어져 버렸다. 신발 끈마저 떨어져 버렸다. 신발 밑창은 본드로 붙인지 세 번째고, 하얀 운동화는 빛을 바래 잿빛으로 변한지 오래다. 오늘따라 잘 풀리지가 않는다. 모든 게 싫어진다. 닳을 대로 닳아 뭉툭해진 신발 코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잿빛 운동화에 예쁜 물방울 모양이 새겨졌다. 구름들이 눈물을 흘린다. 비가 온다. 내 마음속에도 비가 내려 내마음속에 말라 있던 이끼들이 금방 촉촉해 졌다. 나는 비를 맞으며 가려져있던 내 마음속의 가면을 벗을 수 있었다. 언제나 엄마를 위해서 슬픔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항상 밝게 행동해야 했던 나를 비가 올 때만큼은 가면을 벗고 슬픔으로 채워진 내 마음속에 비가 내려 슬픔과 비가 섞여 내 슬픔의 농도가 묽어 지길 바랬다. 그리고 보슬비든, 소나기든, 장마 비던지 내리고 나면 흐렸던 세상이 말끔해지는 것처럼 내 흐렸던 시야에 안경 같은 존재 였다. 낡은 운동화와 함께 비를 맞으며 길가의 작은 웅덩이 속의 고인 물들을 신나게 발로 차버렸다. 나에게 고인 모든 것을 떨쳐버리듯이.




온몸이 젖은 채 교실 뒷문을 살며시 열었다. 드르륵- 칠판위의 시계는 벌써 아홉시 반을 가리킨다.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나 늦어버렸다. 칠판 위를 열심히 달리던 분필의 소리가 멈추고, 아이들은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듯이 일제히 날 쳐다본다. 수학선생님은 눈을 흘기신다. 난 이제 죽었다. 나는 까치걸음으로 내 자리로가 앉았다. 도수가 꽤 될 듯한 두꺼운 안경에 울긋불긋 여드름이 난 내 짝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속닥이며

 “왜 이렇게 늦었어? 선생님이 1교시 마치고 교무실로 오래 너 혼날 지도 몰라 ”

라고 했다. 한숨은 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문학 수업을 듣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 선생님 몰래 책상 밑 서랍 속에서 연습장을 꺼냈다. 오늘은 무슨 시를 써볼까. 처음으로 썼던 시를 읽어본다. 매일 밤 꿈속에서 날 괴롭히는 노을이자, 내가 좋아하는 노을이다. 노을 때문에 난 문학에 빠져버렸다.


노을


빨갛게 빨갛게 물들어 버린 하늘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꿈과 열정이 담겨 있고


노랗게 노랗게 물들어 버린 하늘엔

엎어지고 또 엎어지지만 다시 일어 날 수 있는 패기가 있고


하얗게 하얗게 물들어 버린 하늘엔

모든 것을 잃고 새롭게 도전하는 희망이 있고


까맣게 까맣게 물들어 버린 하늘엔

그 하늘에 푹 빠져서 앞조차 못 보게 되지만


파랗게 파랗게 물들어 버리면

무엇인가에 도달했다는 성취감에 해맑은 미소가 담겨있다.

어릴 적부터 난 공부를 잘했다. 집안도 잘 살았고, 공부면 공부, 피아노, 바이올린, 악기라는 악기는 다 다룰 줄 알았으며 축구면 축구, 농구면 농구, 뭐든지 뛰어났기에 아이들의 동경의 눈빛과 동시에 질투를 받는 대상이었고, 선생님들 사이에선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부모님이 시켜서도, 친구들을 이기고 싶어서도 아니였고, 중학교에, 고등학교에, 대학교에 진학하기위해서도 아니였다. 그냥. 학교에서 배우니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공부를 배우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어린아이의 눈에 그냥 멋있어 보여서 경찰이 되고 싶다 는 것처럼 남들에게 보여지는 부분을 중요시되는 꿈을 가지고 살았지, 진정으로 나만 가질 수 있는 꿈이 란걸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목표의식이라곤 없이 하루하루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시험기간이 끝나고 석차가 1등인 성적표를 받았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공부를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뭘까. 그때부터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고민의 시간은 나를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무인도로 데려갔다. 얼른 구조대가 와서 나를 구해줬으면 했지만, 망망대해속의 무인도라 쉽지 않았다. 수업시간에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항상 나를 탐구했었고,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 날도 이 생각에 휘둘려 있을 때, 아빠가 산에 가자고 하셨다. 아빠는 닦이지 않은 길. 토끼, 노루의 길을 고집했다. 동물들의 행적을 밟으며 마치 내가 아기토끼가 되어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울창한 숲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산도 아닌 우리 동네 뒷산은 꽤 예뻤다. 나는 이제야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라는 것에 목을 매달며, 주위의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근데 산은 왜 오자 그랬어?”

 “노을 보여주려고, 노을 본 적 없지?”

나는 노을을 본적이 없었다. 19년의 세월동안 거무죽죽한 시멘트 건물 속에서만 생활만 했던 나에게 노을이 있었던가. 아빠는 우리 동네가 훤히 보이는 소나무 밑 큰 바위 위로 날 데려갔다. 몇 분이 지났을까, 빨갛던 해가 순식간에 노을이 되었다. 물결무늬를 하고 있던 구름들이 분홍색 바닷물이 되어 일렁거렸다. 노을은 마치 스펀지에 빨간색 물기가 머금어 지듯이 온 사방이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세상을 물들이다가 마지막이라고 말하듯이 한껏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갔다.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노을 보면서 뭐 생각한거 없어?”

나는 대답할 수 없었고, 아빠는

“아빤 초등학생 때 노을 보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는데, 감정 너무 메마른 거 아냐?” 라고 말했다. 난 그때 그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처음 보았다. 언제나 책 속에서 모든 걸 배웠지만 그 감정을 느낀 감정은 내 감정이 아니 란걸 깨달았다. 나는 노을을 보며 느낌 감정을 모조리 일기장에 적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조합해 시를 썼다. 그때의 시가 내 첫 시였다. 나는 시인이 되어 노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뿜어내는 열정을 가진 사람, 온 세상을 물들여 버리듯 이 세상을 감싸 안을 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우중충한 하늘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노을처럼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 그렇게 노을은 나에게 외로웠던 무인도에서 꺼내 주었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나온 지도 얼마 안 되어, 아빠가 돌아가셨다. 나는 내 마음 속안에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무인도를 만들어 나를 가뒀다. 구조요청을 하지도 않았고,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지평선 위로 지고 있는 노을이었다. 그리고 아빠대신 나타난 사람. 키다리아저씨.



딩동댕동-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교무실로가 두리번거리며 창가 쪽에 있는 선생님 자리를 찾았다. 창 밖에는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께 말하기에 쉼 호흡부터 했다. 우리 선생님은 가시를 감춘 장미 같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얼굴과 좋은 향기가 났지만 가시를 감추고 있는 냉철하고 현실적이신 분이었다. 선생님의 책상위의 책은 키 순서대로 정리되어있었고, 선생님의 성격을 보여주듯 하나의 흐트러짐이 없어보였다.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몰라 마음의 준비를 하듯 교복 단추를 단단히 여몄다.

“선생님 저 왔는데요.”

선생님은 코에 걸쳐진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쓸어 올리며,

“왔니?”

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표정은 아직까지 온화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시가 나를 찌를 수 있기 때문에 긴장을 풀지 못했다.

“옷이 다 젖었네, 오늘 비가 와서 많이 늦었니? 일단 여기 앉아봐, 지각한거 혼내려고 부른건 아니구”

평소와는 다른 말투였다. 말하려는 의도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네 라고 선뜻 대답하고 선생님 옆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은 하시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시며 너, 요즘 성적이 계속 떨어진다. 이 성적으론 대학교 못가. 하시며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시더니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안 되겠다는 듯, 목소리 톤을 점점 높이셨다.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발등이 타 들어가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니? 눈에 불을 키고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글이나 쓰러 다니고, 솔직히 수상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 뭐하는 놈이니? 나는 놈이었다. 내 이름 김영광에서 놈으로, 내 성적이 떨어짐에 따라 내 이름의 격도 떨어졌다. 저 시인 될껀데요, 시인? 선생님의 말투와 목소리는 꿈속의 비웃음 소리와 똑같았다. 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너희 집 가난한거 알면서 글쟁이나 되겠다고? 가난 그리고 글쟁이. 내 가슴속 깊이깊이 묻어두었던 내 상처라는 지뢰들이 터질 것 같다. 대학을 간다고 치자, 이 성적으로 어딜 갈 것이며, 국어국문? 문예창작? 가서 밥벌이는 하겠니? 난 네가 하는 소리가 굶어 죽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리는데? 너 진짜 큰 코 다친다. 너네 88만원 세대야 멀쩡한 과 나와도 취업 못하는 세상이야. 뻔한 거 아니니 다시 생각해봐, 그리고 네 성적으로 택도 없어, 할말 없으면 가봐. 내 손이 떨렸다. 몸속의 모든 기관들까지 떨었다. 더러웠다. 역겨웠다. 웅덩이의 고인 물들을 차버리며 비웠던 웅덩이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구정물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더러운 세상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내가 상위층이었을때 느끼지 못했던 서러움들과 잘 살기위해 대학을 가야하며 가난한 사람은 꿈조차 꿀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들이 마치 올바른 인식인양 자리 잡아가고 있는 세상 그리고 그곳에서 그렇게 살아야 할 수밖에 없는 내가 미치도록 싫었다.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목구멍 까지 하고 싶은 말들이 차올랐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억억- 빗물과 내 눈물이 하나가 되어 물구덩이에 떨어져 희미한 노을처럼 퍼졌다. 서러웠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지금 깜깜한 어둠 속의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무엇이 올바른 선인지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붉은 노을의 세상 속 노을의 아름다움과 포용력 속에서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세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근데 왜……. 나를 막는 것들이 이토록 많을까. 언제부터, 내가 이토록 사회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나는 나를 스스로 무인도에 가둔 것도 모자라 무인도를 빙 둘러가며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문득, ‘소설 외딴방의 소설가론 세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야 ’ 라는 구절을 읽으며 판단을 못했던 내가 생각났다. 이제 확신이 든다. 소설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 내가 깨겠다고, 시인이 되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별들이 밝혀준 길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반 지하 방의 우리집, 가는 길마저 어둡다. 창문 사이로 인형 눈을 붙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꾸벅꾸벅, 고개가 앞으로 까딱, 뒤로 까딱, 마치 오뚝이처럼. 우리 엄마는 오뚝이 같은 분이 시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는, 아빠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아버지를 다시 일어나게 해준 건 엄마의 내조 덕분이었고,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엄마가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았더라면 엄마와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갔을 지도 모른다. 반지하방 앞 녹이 쓸어버린 우편물통에 편지가 꽂혀있다. 어-! 내가 기다리던 키다리아저씨편지인가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 앞 가로등에 기대어 편지를 펼쳤다.

  

잘 지내니? 답장이 많이 늦었지? 요즘 조금 바빴단다.

네가 쓴 시 노을은 잘 보았단다. 노을은 열정 하늘은 마음,

노을이 꼭 너 같구나.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 속에서 꿈을 위해 고민하고,

지켜내려는 네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단다.

이 세상이 밉다고 했지? 그래, 맞아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의 올바른 인식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이 있단다.

네가 있다는 게 증거라고 할 수 있겠구나, 세상을 미워하지는 마렴, 네가 세상을 미워하면 할수록 세상은 너에게 멀어지게 되어있단다. 그 대신 세상을 넓게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네가 세상을 바꾸렴. 네 말대로 펜은 칼보다 강하니까.

이 말을 보고 나도 네 삶을 반성하게 되더구나,

네 편지를 받으면서부터 나의 삶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단다.

그 신념 잊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




편지의 내용을 내마음속 우편함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키다리 아저씨는 나에게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달콤한 사탕 같은 존재였고, 내 인생의 표지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 꿈과 현실 속에서 방황할 때 바보같이도 소설속의 키다리아저씨를 기대하며 편지만 써서 우체통에 넣었던 이후로 답장이 왔고, 그렇게 계속해서 키다리 아저씨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아저씨의 편지를 읽을 때는 몹시 흥분해서 두세 번은 읽어야 했다. 그리곤 마치 내가 키다리 아저씨 책의 주인공 주디가 된 듯한 착각에 들 때가 많았다. 아저씨는 어떤 분일까? 나를 지켜보시는 분일까? 정말 키가 크실까? 난쟁이처럼 작으시진 않으시겠지? 남자가아니라 여자라면!?

“영광이 왔니?”

내 웃음소리를 들으셨는지 엄마가 밖으로 나오셨다.

“네, 저 왔어요.”

엄마의 수척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눈 안에는 반짝이는 내가 있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왜 안 들어 오구 있니, 오늘 우산도 안 가져 가가지구 비 맞을 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엄마가 걱정 하실까봐 비를 맞았단 말도, 선생님께 혼났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등 뒤로 편지를 감추고

“엄마 아들이 뭐 비 맞고 다닐 아들인가? 엄마 하늘 너무 예쁘지?” 라고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엄마는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엄마의 온기가 느껴졌다. 엄마에게 내 꿈을 단 한차례도 말 한 적이 없었다. 엄마를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언제나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해야 했다. 엄마는 하늘을 바라다보시며,

“비 그치고 나니까 별들이 반짝 반짝한다 그치? 별 보니까 오늘따라 아빠 보고 싶다 영광아 그치? 아빠는 잘 있겠지? 너희 아빠도 별 반짝이는 날에 돌아가셨는데”

엄마의 눈에는 내가 아닌 아빠가 별이 되어 아른거린다. 아빠는 참 좋으신 분이었다. 집에선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였고, 밖에선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아빠가 왜 죽음을 택하셨는지, 우리에게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더 아빠를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했다.

 “응, 엄마랑 나랑 둘이 놔두고 갔으니깐 아빤 더 잘살겠지, 에이, 아빠 생각하지 말고 우리생각 만 하자, 엄마! 나 추워 빨리 들어가자~ ”

엄마는 별을 바라보며 아빠와의 추억을 더듬는 듯 했다.

“오늘은 엄마 혼자서 인형 눈 붙일게 씻고 얼른 자”

도와 드리고 싶었지만 비를 맞은 탓에 머리가 아렸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며, 푹신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속은 엄마 품처럼 따뜻했다.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기분, 현실과 부딪히는 내 꿈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다짐을 하며, 키다리아저씨, 엄마, 아빠, 그리고 시인이 내 머릿속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어? 노을이 없다. 희미한 빛 속에서 누군가가 다가온다. 서글한 눈매, 뭉툭한 코끝, 잇몸이 드러나는 웃음,

“아빠!”

내 눈을 다시 비벼 본다. 분명 아빠였다. 어릴 적 기억 그대로의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빠는 내가 보고 싶었을 때도 단 한번도 내 꿈에 찾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아빠를 향해 달려가 안겼다.

“영광이 잘 있었어? 키도 아빠 키 보다 더 크네? 임마, 다 큰애가 아빠한테 안기기는”

아빠가 어릴 적 나를 앉아 주셨던 것처럼 내가 아버지를 안아드렸다. 아빠의 품은 여전히 따뜻했다.

“임마, 숨막혀 아빠 안 놓아 줄 거야? ”

아빠를 놓아주기 싫었다. 금방 사라질까봐, 다시 나를 놔두고 가버릴 까봐, 왜 이제야 내 꿈에 나타났는지, 왜 엄마와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난 건지 묻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더 아플까봐 묻지 못했다. 아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빠를 점점 닮아 가는 것 같다. 풋- 웃음이 나왔다. 어릴 적부터 못생겼다고 생각했던 아빠의 얼굴이 내 얼굴이라니,

“왜 임마, 내 얼굴이 그렇게 잘생겼냐?”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엄마는?” 

“응?” 

“엄마는 어디있냐구, 싱겁기는 짜식”

차마 엄마는 내가 곤히 잠자며 아빠를 만나는 시간동안 한 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인형 눈을 붙이고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겁이 났다. 나에게서 엄마를 데려갈까 봐 두려웠다.

“엄마랑 데이트하려고 왔는데”

“ 아빠 나랑해~”

“ 싫어 다 큰 게 징그러워, 다시 올 테니까 엄마한테 꽃단장해놓으라고 말해줘, 아빠 간다!”

 가지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기도전에 아빠는 나에게 등 돌린 채 점점 멀어져갔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멀어지는 아빠를 향해 내 손을 뻗어보지만 잡히지 않는다. 희미해지는 불빛 속으로 걸어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왜 즐거워 보일까.

아빠의 얼굴을 꿈속에서라도 볼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멀어져 가는 아빠를 잡지 못했다. 이때동안 노을도 잡지 못했다. 뜨거운 눈물이 내 턱을 타고 흘러 베개를 적셨다. 엄마마저 잡지 못할까봐 겁이 난다.  밤사이 아빠가 엄마를 데려가 버렸을 까봐, 어젯밤 꿈이 현실이 되어 있을까봐, 일어나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며,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방문 넘어 부엌에서 된장국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방문을 열어젖히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응? 엄마는 의아한 얼굴로 대답하시며, 언제나 그랬듯이 된장국을 끓이고 계셨다. 오늘따라 엄마가 더 야위어 보였다.

“엄마 오늘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 장보지도 말고, 내가 학교 마치고 일감 받아 올게.” “왜? 뭐 아들이 그렇게 하라면 그래야 겠다~”

 엄마의 얼굴위로 곰팡이가 핀 꽃 이 활짝 피었다. 엄마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빠가 꿈에 나왔단 말을 하지 못했다. 아빠가 엄마를 데려갈까 봐. 아니 엄마가 아빠를 따라갈까 봐, 세상에 나 혼자 남겨 놓을 까봐. 엄마에게 밖에도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아빠와 엄마는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내가 맞서야할 상대는 가족이 아니라 이 사회였으니까, 딩동댕동-1교시..2교시 ......8교시, 오늘따라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책상 밑 서랍속의 내 습작 노트를 꺼냈다. 노을, 음 더 예쁘게 고칠 순 없을까? 그때 누군가 내 등 뒤로 “노을? 뭐냐?”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습작노트를 뺏어 들었다. 우리학교에서 좀 논다 하는 녀석이었다. 자신이 시인인 마냥 오버하는 표정연기를 하며 내 시를 읊어댔다. 나는 내 노트를 뺐었다. 순간 그 녀석은 호기심이 가득 찼던 눈빛에서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변했다. 야 뭐냐 너, 하며 내 노트를 다시 뺏었다. 나도 내 노트를 놓지 않았다. 내 노트가 찢어졌다. 내 노을이, 내 꿈이 찢어져버렸다. 그 아이는 계면쩍었는지 그러게 그냥 주지 왜 그러냐. 찢어졌잖아 라고 말했다. 허무했다. 내가 잘 길러놓은 곡식들에게 하루아침에 태풍이 닥친 것과도 같았다. 그 녀석은 말했다. 뭐, 그거 가지고 그러냐. 니가 시인이이라도 되게? 빈정대는 말투와 손짓 그리고 표정. 그녀석의 소중한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 녀석은 또 말했다. 너 네집 가난하다며 근데 시인되려고? 정신이 있냐? 현실성 좀 갖춰라 니가 이상적이니까 시나 쓰고 그러지, 넌 티비도 안보냐? 얼마 전에 작가가 굶어죽은거 못 봤냐? 부모님한테 안 부끄럽냐? 차라리 내가 낫겠다. 반성 좀해라. 하며 내 찢어진 노트를 내 머리위로 던지고 가버렸다. 나는 반항을 할 수도 순응을 할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 녀석의 말이 다 맞았다. 내가 하늘을 빌어 한 치 부끄럼이 없고, 당당했더라면 이 자리에서 그 녀석에게 시인이 되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말을 했겠지, 언제나 난 이 사회를 부정하면서도 인정하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사회를 싫어하는 것 밖에 못했다. 난 정말 시인이 되고 싶었던 걸까.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것이 단지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떨리는 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조각나버린 내 시를 주었다. 노. 을.  두 글자에 내 눈물방울이 떨어져 노을이 희미하게 번졌다. 순간,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



12살 때 처음으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왼쪽 팔에 두 줄난 완장을 둘렀다. 그리고 다시는 두르지 않겠다던 완장을 너무 일찍, 19살에 다시 두르고 구석진 빈소에 홀로 서서 액자 속의 엄마를 바라본다. 하얀 국화꽃에 둘러진 엄마의 모습은 겨울을 나던 나뭇가지 같이 앙상하지도,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얼굴도 아니었다.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다. 엄마의 죽음을 위해 눈물 흘릴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지만 내 눈물샘은 먼지들로 막혀 고장이 났나보다. 엄마의 병을 알지도 못 한 채 같이 살아 온 아들인, 내가 돌아가신 엄마를 위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다. 그저, 엄마의 옆에서 엄마를 바라볼 뿐. 향이 피어오른다. 엄마의 영혼도 피어오른다.



엄마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고, 결국 나는 엄마를 잡지 못했다. 성인이 되는 신고식을 이렇게 힘들게 치러야 했을까. 사회와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놓쳐 버린 내가 다시 용기를 내어 잡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엄마의 온기가 있었던 곳 반지하방. 바닥에는 책상위에 있어야 할 약봉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엄마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아들도 없는 곳에서 혼자서 쓸쓸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왜 나에게 아프다는 말을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약에 대해서 물으면 언제나 비타민이라고만 둘러대던 엄마였다. 차가운 바닥에서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나를 부르는 엄마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수많은 약봉지들, 단 한번도 엄마가 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 엄마가 작업하던 낡은 책상위엔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아 벌써,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쌓인 먼지를 후- 불고 책상을 어루만져본다. 엄마는 이 책상 앞에서 행복한 얼굴로 인형의 눈을 붙이며 우리 집의 꿈을 생각했겠지, 엄마가 아직도 내 옆에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만 같다. 낡은 책상 밑 서랍장의 문고리가 차갑다. 드르륵- 내 가슴을 두 손으로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두 눈 속엔 내가 키다리아저씨께 보냈던 편지들이 비친다. 그제야 내 눈물샘에 막힌 먼지들이 사라지고 내 눈물들이 흘러 빛바랜 편지들 위로 뚝뚝 떨어졌다. 키다리 아저씨가 엄마라는 걸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 엄마가 나를 지지해 주는데도 왜 난 항상 두려워하며 사회를 미워하며 도피하려고만 했을까. 왜 현실과 맞서지 못했을까. 날 믿어주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는데. 나는 왜 항상 혼자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시인이 되고 싶으면서도 시인이 되는 것은 엄마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부모님과 꿈에 대해 얘기 할 때 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말에 당당하지 못했고, 그 녀석에게 그 말을 들으면서도 당당하지 못했다.



왜 난 두려워했을까…….


키다리 아저씨가 아닌 엄마의 편지를 펼쳤다.


영광아,

아마 내가 아빠를 따라 하늘나라로 갔을 때쯤, 네가 읽을 것 같구나.

내가 키다리아저씨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어느 날 네 편지가 반송되어왔더구나.

네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네 속을 알고 싶어서 뜯어봤단다.

영광이가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어. 언제나 밝게 행동하는 너를 보면서

네 가슴속에는 슬픔이라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단다.

엄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모든 것에 구애 받지 않고, 너의 뜻을 당당하게 이세상속에 펼쳤으면 좋겠단다. 엄마 때문에, 사회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멋있는 시인이 되렴. 엄마가 이렇게 가서 미안해. 영광이 잘 살 수 있지?

꿈을 가지고 있다는 건 행복한거야. 누구에게든 네 꿈을 말하렴.

어떤 상황 속에서든 그 꿈을 잡으렴....


그리고 엄마의 눈물자국.



핏빛으로 물든 세상 속 오늘도 난 어김없이 달린다. 노을을 잡기위해. 나는 이제 귀를 막지 않는다. 행복한 얼굴로 달리고 있다. 내가 달려간 자리 뒤로 꽃들이 피어올라, 산들바람에 흔들어 보인다. 눈물을 흘리지도, 숨이 차오르지도, 다리가 아프지도 않다. 나는 사뿐히 달려가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나에게 비웃음을 보낸다. 나는 아랑곳없다. 엄마,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나를 향해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를 응원 해주는 사람이 있다. 엄마 아빠가 내 곁에 없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힘껏 내달렸다. 노을을 향해. 곧 다와 간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어 노을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난 노을 속에 빠져 버렸다.

 

<선생님! 처음으로 쓴거라 신경도 많이쓰고 되게 많이 고쳤어요 ㅠㅠ 미숙하지만 정말많은 조언!부탁드려요>

진주토끼
진주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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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토끼
  • 201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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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토끼

    조언 많이 해주셔서 감사해요!ㅠㅠ 막...글도 그렇고 소재도 많이 미숙해서 부끄럽지만 칭찬도해주시고 충고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글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라 언제 또 올릴지 모르겠지만 올리면 또 이렇게 조언 많이 해주세요~ㅎ 더 좋은 글 쓸수 있을 것 같아요~ㅎ

    • 2011-08-22 22:32:05
    진주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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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아, 댓글이 거꾸로 달리네요. 밑에서부터 읽어주세요. 또 [more]를 눌러서 댓글 전체를 읽어주세요.

    • 2011-08-21 17:42:2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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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없는 열아홉이 무턱대고 '시인이 되겠어'라며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인의 꿈을 좇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무튼, 태클은 아니었구요. 위에서도 말했듯이, 첫 글 치고는 퀄리티가 괜찮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부탁드릴게요 :-)

    • 2011-08-21 16:43:5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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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그러나 사회에 발을 딛는 순간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는 열정이기에 안타깝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통장에 잔고 한푼 없는 열아홉이 현실을 외면하고 '세상을 바꿀' 시를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저는 보헤미안이지만 대책없는 보헤미안은 아닙니다. 조건이 충족될 때, 즉 최소한의 삶의 수준을 유지할 때에 '세상을 바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종이와 볼펜을 살 돈은 있어야 소설을 쓸 수 있으니까요.

    • 2011-08-21 16:43:5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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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다음으로 현실과 소설이 겉도는 느낌이 듭니다. 소설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는 법칙이 있다면, 내가 깨겠다. 치기어린 젊은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장이네요. (저도 열아홉이지만, 제게는 없는 열정이라 부럽기도 합니다.)

    • 2011-08-21 16:43:2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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