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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 작성자 한 장의 날개
  • 작성일 2011-08-01
  • 조회수 422

폭풍

  저녁노을이 태워버린 듯한 검은빛 구름들이 걸린 붉은 하늘이 이학년 삼반 교실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어느새 주황색이 되어버린 햇빛은 앙상한 빈 책상, 의자 다리들의 그림자를 길게 잡아 늘어뜨렸다. 그 그림자들이 학생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들을 유일하게 메워주었다.

  “사각 사각.”

  그림자위로 연필이 움직이는 소리가 합세하였다. 불 꺼진 교실 안, 왼쪽 창가 맨 뒤에 앉은 진우의 손은 종이 위에서 연필을 쥔 채 열심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손이 아파와 팔을 흔들기도 했다.

  “야! 다했어?”

  뒷문이 벌컥 열리면서 붉은 햇살을 등진 기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우는 그림자에 둘러싸인 기수의 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얼씨구.”

  기수는 신발을 벗지 않고서 교실로 들어와 진우 쪽으로 뚜벅 뚜벅 발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아직 다 안 했지?”

  기수가 진우 옆자리의 의자를 소리 나게 끌어당기고서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기수의 대답에 진우는 엷게 웃으며 또 한 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얼만큼 쓴 거야? 우와, 많이도 썼네.”

  진우 앞에 놓인 열 장의 에이 포 용지에는 ‘다시는 지각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단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각…… 야, 그러니까 쌤한테 말하라니까? 쌤도 너희 집에 어떤 일이 있는 줄 알면……”

  “미라랑 주연이는 어디서 기다리고 있어?”

  진우는 기수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며 물었다. 진우의 눈은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둘 다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어. 당최 왜 맨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빨리 써줘. 해지기 전에 축구 한판은 땅겨야지.”

  기수는 진우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순간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우는 자신의 집안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내가 괜한 말을 했지.’

  기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자신을 책망했다.

  “그럼 운동장에서 기다릴게. 빨리나와.”

  기수의 말에 진우는 손만 위로 들고서 흔들었다. 그러자 진우의 손이 햇빛을 가려 진우의 모습이 더 어둡게 보였다. 기수는 그런 진우를 보며 뒷문을 열었다.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귀여운 나의 친구는 검은 고양이.”

  반짝이는 노을빛으로 물든 둥근 운동장 주변에 있는 그네 위에서 미라는 땅을 발로 차면서 쉼 없이 삐걱거리는 그네를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흠흠흠 흠흠흠 흠흠흠흠흠 랄라라라라 라랄라!”

  그리고 입과 코로는 몇 줄 밖에 모르는 노래만 연신 흥얼대었다. 미라는 콧소리로 대체한 가사를 움직이는 그네 위에서 생각해 보았지만 글자의 형태만 보일 뿐, 그 형태를 눈으로 가져다 대면 손에 쥔 모래덩이마냥 바스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노래 부르는 것도, 그네를 타는 것도 지루해져서는 발끝으로 그네 밑에 불룩이 쌓인 모래를 차고, 다시 발로 쌓고, 다시 부수는 일만 반복적으로 했다.

  “아, 심심해. 기수는 진우 데리고 오겠다고 했으면서 여태까지 안 나오고 뭐하는 거야!”

  투덜대던 미라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벤치에 앉은 주연이 시야에 들어왔다.

  “넌 뭐해?”

  주연은 대답은 하지 않고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미라는 주연이 보고 있는 곳을 보았지만 구름 무더기가 쌓여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주연이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미라에겐 들리지 않았다. 미라는 그네에서 내려 주연 앞에 섰다.

  “뭐라고?”

  “폭풍이 오고 있어.”

  주연은 미라를 슬쩍 보더니 음의 높낮이가 없는 억양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약간은 여운을 남기는 듯한 말투였다.

  “폭풍?”

  미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조금 하늘이 어두워진 듯 했지만 폭풍이 몰려올 날씨는 아니라고 미라는 생각했다.

  “일기예보에서 폭풍이 온데?”

  “폭풍이 오고 있어.”

  주연은 미라의 질문은 무시한 채 같은 말을 다시 되풀이 했다. 미라는 한숨을 쉬고서 다시 그네 위로 주저앉았다.

  “후우…… 언제까지 저럴 건지.”

  몇 년을 다시 앞으로 뒤로 왔다갔다한 미라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아까보다 더 많아졌고 하늘도 한층 더 우중충해졌다.

  정말 폭풍이 올 것도 같았다.

  “탕! 탕!”

  축구공이 땅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 메아리쳤다. 기수는 연신 공을 땅에 튀기면서 미라와 주연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운동장 절반쯤 왔을 때 그네와 벤치에 각각 앉아있는 미라와 주연의 모습이 기수의 눈에 들어왔다.

  “흐음……?”

  기수의 입에서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건드리면 때릴 것 같은 차가운 눈을 가진 여학생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장애인이라니, 참 묘한 조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다 말없는 진우와 돈 없는 나까지.’

  그네 앞으로 다가가자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나마나 주연일 거라고 기수는 확신했다.

  “폭풍이 오고 있어.”

  “이젠 저 말에 꽂힌 거야?”

  기수는 미라를 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고개의 끄덕거림이 돌아왔다.

  “근데, 진짜 올 것 같기도 해.”

  확신 아닌 확신을 가진 목소리로 미라는 하늘을 가리켰다.

  미라가 손으로 가리킨 하늘은 급속도로 뿌연 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기수는 그런 구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늘은 비만 조금 온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아닌가?”

  “몰라. 오늘 텔레비전을 안 봐서. 근데 그건 그렇고 진우는? 데리고 나온다면서?”

  “아직 반성문 쓰고 있어.”

  “흠…… 그래? 어, 그럼 저 분은 대체 누구실까?”

  미라의 말을 들은 기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수의 눈에는 진우가 가방을 느슨하게 맨 채 터벅터벅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제 다 쓰셨나보네.”

  진우는 걸어오더니 잠시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마 먹구름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괜찮아. 아직 축구 정도는 할 수 있어. 빨리 와.”

  기수는 진우를 부르며 손짓을 했다.

  뻥! 하는 소리가 운동장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졌다. 골대 앞에서 자세를 숙이고 있던 진우는 가볍게 기수의 공을 막아냈다.

  “읏샤!”

  다시 공을 차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공이 진우 옆을 빠져나가 골대의 그물을 건드렸다.

  “나이스!”

  기수가 팔을 치켜 올리며 웃었고. 진우도 따라서 미소 짓는 것을 보며 미라는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한쪽은 공만 차고, 한쪽은 막기만 한다. 한쪽은 말이 많은데, 한쪽은 말이 없다. 그런데도 둘은 항상 붙어 다닌다. 그리고 항상 이 사람이 없는 이 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

  ‘그래도 보기는 좋네.’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항상 무표정인 진우가 방과 후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기수와 축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미라는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땀 많이 흘릴 텐데…… 음료수나 사다줄까?”

  미라는 치마에 묻었을지도 모를 모래를 털면서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때 벤치에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연일 거라고 미라는 생각했다.

  ‘역시.’

  뒤를 돌아보자 주연도 자신의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고 있었다. 그리고 미라가 정문을 향해서 움직이자 미라를 따라 움직였다. 미라의 걸음이 잠시 느려지면 역시 주연의 걸음도 느려졌다.

  ‘대략 사 미터 정도.’

  더 멀어지지도 더 가까워지지도 않는다. 주연은 아무리 같이 다니는 사람이라도 - 그래봤자 기수, 진우, 미라 뿐 이었다 - 항상 그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라는 가슴이 약간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무섭니…… 사람이?’

  미라는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아까보다 더 짙어졌다. 이제 막 비가 떨어진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사실은 나도 무서워…… 사람이.’

  ‘집에 빨리 들어갈까?’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구름. 먹구름. 그리고 먹구름이었다. 기수는 그런 회색 덩이들을 보면서 빨리 집에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됐어.’

  하지만 곧바로 그런 느낌을 먼 곳으로 치워버렸다. 집. 집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일어나자마자 기수의 마음속에선 무언가가 숨 가쁘게 요동쳤다.

  “기수 엄마. 이제 어떻게 하실 참이세요?”

  어젯밤 기수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문을 살짝 열고 들어보니 옆집에 사는 아파트 청소부 아줌마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막막해요. 가게도 이제 거의 다 망했고. 기수 아빠도 가게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계속 술만 마시고……”

  “좀 있으면 반 강제적으로 여기 불도저 이끌고 밀어버린다면서요. 어떻게 사람들이 그래요? 자기네들 고층 건물 짓는다고 여기 옛날부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그것도 살 곳이 없어서 이런 판자촌에 사는 건데……”

  기수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수도 문에 기대어서 자신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숨죽이고 있었다.

  “돈은 얼마나 준다던가요?”

  “얼마 되겠어요? 기껏해야 여기보다 별로 낫지도 않은 판자촌으로 이사할 돈이나 주겠죠. 아니면 입주권이나.”

  기수 엄마의 말에 이웃집 청소부 아줌마는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입주권! 돈이 없어 판자촌에 사는 걸 알면서도! 돈도 많이 안 주면서 입주권!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네. 짐승만도 못한 것들. 아니, 여기가 대한민국 맞댑니까? 기수 엄마, 우리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기만은 너무 억울하잖아요.”

  “……어쩌겠어요. 우리는 너무 힘이 없는데. 판자촌에 살잖아요. 돈이 없잖아요.”

  이번에는 이웃집 청소부 아줌마가 말이 없어졌다. 기수는 조용히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억지로 호흡을 규칙적으로 맞추었다. 돈이 없잖아요…… 이 소리가 자꾸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좆같아…… 시발…… 좆같아……”

  낡은 옷차림으로 시위하는 이웃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기수가 처음 보는 모두들 성난 이웃들. 할아버지들과 아저씨들은 목이 벌게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할머니 아줌마들은 바구니, 피켓을 든다. 대걸레를 높이 들고 소리 지르는 이웃집 청소부 아줌마도 보인다. 아빠도 가게 청소할 때 쓰는 빗자루를 가지고 달려간다. 엄마는 소리에 놀라서 우는 동생을 눈물을 삼키며 달랜다. 그리고 노란 헬멧에 작업복을 입은 똑같이 생긴 인부들.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포크레인이 소름이 끼치는 소리를 내면서 움직인다……

  “어머, 기수야 뭐하니?”

  쪼그려 앉아있던 기수가 눈을 뜨고 기수의 엄마가 들어오자 모든 환영들이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안 좋은…… 꿈을 꿨어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엄마는 괜찮아요?’

  연신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기수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눈을 감자 다시금 그 환영이 찾아왔다. 환영, 이 아니다. 진짜다. 곧 올 거야. 아니야.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이천 팔백 원입니다.”

  미라는 삼천 원을 주고 거스름돈을 받으면서 슈퍼에서 나왔다. 그러자 슈퍼 안에 비해 더운 바람이 불쾌하게 몸을 휘감았다.

  “어?”

  슈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던 주현을 찾던 미라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로등 밑에서 주현이 초등학교 오, 육학년 정도 되는 애들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거 병신 맞지?”

  “어. 병신 맞아. 우리 형이 이 병신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데 발견하면 그냥 좀 갖고 놀다가 보내래.”

  “좀 때리면서 학원 스트레스 풀까?”

  머리를 짧게 깍은 덩치 큰 아이가 복싱 선수처럼 뛰며 말했다.

  “미쳤냐? 누가 보고 경찰에 신고하면 어떡할라고.”

  “야. 그럼 바지 벗겨버리자. 병신도 쪽팔리는 거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해 보자고.”

  안경을 쓴 마른 아이가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아이디어 좋다고, 천재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웃어댔다.

  “어이, 병신. 너 우리나라 말은 알아듣지?”

  “폭풍이…… 오고 있어.”

  주현의 말에 아이들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병신이 확실하다면서.

  “큭큭. 뭐래, 미친놈. 야, 우리들이 게이는 아닌데 병신이 옷 벗고 동네를 싸돌아다니는 건 보고 싶거든? 곧 비도 올 거 같은데 샤워 하는 셈 쳐라. 응?”

  “야. 우리말 안 들리냐? 옷 벗으라고. 내가 지금 좋은 말로 하고 있잖아.”

  “그래. 야, 얘 화나면 무섭거든? 빨리 벗어라.”

  “벗어봐. 빨리 벗어봐.”

  미라는 이 모습들을 눈에 담으면서 음료수 캔이든 비닐봉투를 꽉 쥐었다. 그리고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걸 느끼면서 주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벗어봐. 벗어봐. 벗어봐. 벗어. 벗어. 벗겨. 벗겨……

  “야. 니들 뭐냐.”

  미라가 말을 하자 주현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그쪽은 뭐냐는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교복을 보고서는 살짝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미라는 혼자였다. 다시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니들이 뭔데 걔를 괴롭혀.”

  아이들은 미라의 말에 호기심이 인다는 표정으로 응답했다.

  “오…… 누나, 이 병신 여친이야?”

  아까 그 복싱 선수 포즈를 취한 초등학생이었다.

  “니가 이 애새끼들 리더냐? 그럼 너한테 말해줄게. 내 친구 괴롭히지 말고 당장 꺼져라.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안 꺼지면 안 봐준다. 너하고 나하고 어차피 청소년 법 때문에 소년원 들어가도 금방 나오겠네.”

  미라의 말에 초등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머리를 짧게 깍은 덩치 큰 아이가 입을 씰룩이더니 돌아서서 가자고 말했다. 나머지 아이들도 끝까지 마치 자신은 지지 않았다는 듯 미라를 노려보면서 돌아섰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조그만 소리가 미라의 귀를 건드렸다.

  “씨발 병신 갖고 노는 거 가지고 별 지랄하는 거 다 보겠네. 예쁘게 생긴 게 아깝게.”

  뒤이어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 그리고……

  “퍽!”

  순간 둔탁한 소리가 들리면서 덩치 큰 초등학생이 악, 하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 초등학생의 등을 때린 음료수 캔이 도로 위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나머지 아이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달려갔다.

  “내가 안 봐준다고 했지.”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주현은 나뒹구는 음료수 캔을 주었다. 그러자 미라가 낚아채서는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런 거 줍지 마. 더러운 거니까.”

  미라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슈퍼로 향했다.

 

  기수는 땀을 흘리며 음료수를 들이켰다. 진우도 앉아서는 캔을 입에 대고 홀짝였다. 그런 진우의 모습을 보며 참 급할 것 없는 애라고 기수는 생각했다.

  “떨그렁.”

  속이 비어버린 음료수 캔이 철봉 밑으로 내팽개쳐졌다. 그 소리에 진우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차린 기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캔을 주어서는 벤치 옆 쓰레기통 안으로 넣었다.

  “갈래, 쫌 더 할래?”

  진우는 기수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신호였다.

  “쫌 더 하려면 빨리 하는 게 좋을 걸? 누구 말대로 진짜 곧 폭풍이 올 것 같아.”

  먹구름을 보면서 미라가 말했다.

  “알았어. 안 힘들면 조금만 더 하자. 난 어차피 지금 집에 들어가도 딱히 좋을 건 없으니까.”

  그 순간 약간의 정적만이 텅 비어버린 운동장과 구름으로 꽉 찬 하늘 사이를 울렸다.

  “나도 그런데?”

  미라가 정적을 깨면서 말했다. 하지만 정적의 틈은 금세 메워졌다. 진우는 다 마셔버린 캔에 남은 몇 방울의 음료수만 홀짝 댔고, 주연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래서 우리가 같이 다니는 건가?’

  운동장 안에 있는 학생들은 침묵 아래서 말하기 힘든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기수는 이런 침묵과 공유가 어쩐지 싫었다.

  “자, 자. 진우야 일어서. 비오겠다. 빨리 하자.”

  기수의 재촉에 진우는 캔을 쓰레기통에다가 넣고서 천천히 골대 앞에 섰다.

  “이얏!”

  기수는 힘껏 공을 찼다. 진우는 힘껏 공을 막았다. 아까 음료수 마시기 전과 똑같은 장면이지만 뭔가 다르다, 고 미라는 생각했다. 그들의 행동과 표정에 아까는 보지 못한 딱딱함이 깃들여져 있었다.

  “땅!”

  공이 골대를 맞고서 튕겨져 나왔다. 기수는 냅다달려서는 굴러가는 공을 잡았다. 그리고 공을 내려놓고 다시 찼다. 이번에는 공이 진우를 지나쳐 골대 안에 들어갔다.

  “나…… 이사 가게 될지도 몰라.”

  기수가 골을 넣고 갑자기 주저앉아 숨을 헉헉 들이쉬며 말했다. 진우와 미라는 기수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부잣집 나리들한테로 완전히 기울었어. 곧 있으면 포크레인이랑 불도저랑 이끌고 우리 동네로 쳐들어올지도 몰라.”

  미라는 입을 굳게 닫고 그네 위에서 앞뒤로 살짝 씩 움직였다. 진우는 그물에 걸린 공을 주워서는 기수 앞으로 굴려주었다. 하지만 기수는 공을 차지 않고 쪼그려 앉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집은 왜 고급 아파트가 세워질 곳에다 만들어졌을까? 난 왜 그런 집에서 태어났지? 왜 그 돈 많은 인간들은 하필 우리 집이 있는 땅에다가 건물을 세우려고 해?”

  공을 이리저리 굴리던 기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씨발 그래…… 지어도 좋다 이거야. 우리 집, 그 좁아터진 냄새나는 내 방, 그거 다 부숴버리라고 해. 그런데 부수게 해줬으면 최소한 다른 곳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는 해줘야 하잖아.”

  기수는 공을 힘껏 찼다. 공은 골대를 넘어서서 정문을 향해 굴러갔다.

  “근데 썅. 그런 거 없데. 망할! 우리가 살 형편도 안 되는 그런 비싼 아파트에서 살 입주권이나 준대. 그딴 거 줄 거면 안 비킨다고 하니까 그럼 법으로 해결하제. 그러고선 하는 말이 자기네들 아는 변호사들이 많대. 아, 우리보고는 고소할 돈은 있냐고 했어. 씨발 더러워서 진짜.”

  두 손에 얼굴을 묻고서 기수는 한숨을 쉬었다.

  “나, 고등학교에 갈 수나 있을까? 고등학교가면 지금보다 학원도 많이 다녀야 하고, 문제집도 많이 풀어야 한다며. 고등학교 돈 내고 다녀야 한다며. 그래, 교복도 사야 되지.”

  미라는 주저앉아 있는 기수를 보며 그네의 체인을 꽉 붙잡았다. 기수가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이렇게 힘없어 하는 모습을 바깥으로 본 것은 처음인 것이다.

  “그 때도 이렇게 모여서 축구나 할 수……”

  그때 갑자기 진우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기수와 미라의 어리둥절한 표정과 시선은 진우를 향했다. 진우는 멈추어선 축구공을 주워서 기수 쪽으로 걸어갔다.

  “툭.”

  그리고 기수 앞에 멈추어 서서 축구공을 땅에다 내려놓았다.

  “이젠 내가 찰게.”

  기수와 미라는 눈에 휘둥그레해 져서 진우를 쳐다보았다. 처음 공을 차보겠다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진우가 먼저 기수에게 말을 한 것이다. 기수와 미라에게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뻥!”

  진우는 세게 찬다고 한 것이었겠지만, 공은 힘없이 굴러가기만 했다.

  “툭.”

  굴러온 공을 보고 기수는 별 희한한 날도 있다고 생각했다. 진우가 차는 공, 모두가 듣는 앞에서의 미라의 집에 가기 싫다는 대답, 당장 떨어져야 할 비, 하지만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

  “자.”

  기수는 공을 진우에게 던져주었다. 공을 받은 진우는 또 힘껏 찼다. 이번에는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곳으로 공을 차버렸다. 나무 밑을 향해 굴러가는 공을 쫓아가면서 기수는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기수의 머릿속에 아까 운동장에 앉아서 갑자기 신세한탄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쪽팔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그런 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는데. 내가 병신이지. 다 같이 힘든 애들인데 불평해서 어쩌자고.’

  기수는 공을 잡고서 고래를 돌려 그네에 가만히 앉아 있는 미라를 보았다.

  ‘미라는……’

  미라의 눈은 멍하게만 보였다. 마치 하늘의 구름이 가득 찬 것 같았다. 기수는 마음이 우중충해지면서 동시에 무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그 골목길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낙서와 전단지 조각들로 둘러쳐진 그 골목길이 머릿속에 그려지자마자 기수는 고개를 흔들면서 눈을 꽉 감아버렸다.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내가 거길 좀 더 빨리 지나갔었더라면……’

  미라는 계속 골대와 진우 앞을 왔다갔다하는 축구공만 고개를 돌려가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기만 할 뿐 영상은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미라의 머릿속에는 몇 달 전의 일들만 자꾸 되풀이 되고 있었다.

  ‘집에 가기 싫어.’

  미라가 집으로 돌아가면 미라의 부모는 집에 없을 터였다. 흐리고 폭풍이 올 것 같은 이런 날, 미라는 혼자 집에 있기가 싫었다.

  축축해져버린 하늘을 보며 미라는 떠올리기도 싫은 생각에 허우적거렸다.

  “야, 너 일로 와봐.”

  그 날 사건의 시작이었다. 앞으로 남은 미라의 삶을 지배할 사건의 시작.

  “예쁘게 생겼네? 야들아, 내가 오늘 이년으로 세 명 달성한다.”

  골목길로 울려 퍼지던 메아리 같은 웃음소리.

  ‘도망쳐야 해.’

  미라는 당장 골목길을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야만 했다.

  ‘그런데 어디로?’

  사방을 둘러싼 종이쪼가리와 테이프 이끼가 붙어있는 낙서투성이 벽들과 인상을 쓴 건지 웃음을 짓는 것인지 분간키 어려운 커다란 남학생들이 미라를 가두었다.

  “사…… 살려주세요.”

  미라는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 모습에 남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미라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야, 내가 언제 너 죽이려고 했어? 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그래, 그리고 벗기만 하면 돼.”

  들리는 천둥 같은 웃음소리.

  “벗어봐. 벗어봐 빨리. 우리 착한 오빠들이야.”

  “아, 답답하네. 야, 벗겨, 벗겨.”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던 미라는 사방이 막혀있는 것만 깨달았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오지 못한다.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올 사람이 없다.

  “흑……”

  미라는 끊임없이 울었다. 남학생들이 골목을 돌아서 뛰쳐나가듯이 빠져나갈 때까지, 빠져 나가고 나서도.

  ‘왜 아무도 안 지나가는 거야. 엄마…… 아빠……’

  미라는 한참을 울다가 일어섰다. 아랫도리가 저려왔다. 그리고서 치마를 올리고서 한걸음을 내딛다가 한 남학생과 눈을 마주치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수야.”

  기수였다. 미라는 위험한 남학생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을 하고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왜, 왜, 그래?”

  미라는 울면서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기수에게 아까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다 들은 기수는 양 옆을 돌아보더니 미라에게 말했다.

  “당장 경찰서로 가자. 아니면 병원으로. 내가 데려다 줄까?”

  그 말에 미라는 고개를 힘차게 내저었다. 엄마 아빠가 알면 안 되었다.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면 안 된다. 그런 생각만 미라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안 돼. 제발. 기수야 비밀로 해줘. 너만 알고 있어줘. 아, 아무 말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뭐? 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당장 가자. 안 그러면 위험해!”

  기수가 열심히 설득했지만 미라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엄마 아빠에게 평생 따라다닐 강간당한 자식의 부모. 그리고 자신에게 따라다닐 평생의 비웃음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야, 그렇게 불쌍한 사람인 척 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너 좋아서 했던 거지? 변태 새끼. 싫었으면 소리라도 질렀으면 되는 거 아니야? 싫으면 싫다고 무조건 저항했으면 됐던 거잖아. 예쁘게 태어났다고 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었네.

  “흑…… 제발. 제발 기수야. 비밀로, 해줘.”

  “……”

  “우르릉!”

  그리고 비. 기수가 마지못해서 알았다고 하고서 헤어진 뒤 내린 비. 그 비를 맞으면서 미라는 실컷 눈물을 흘렸다.

  “흐, 흐흑.”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런 일을 당해서 어쩌냐는 위로가 아닌, 그냥 순수한 위로가 받고 싶었다. 미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을 열었다.

  "끼익."

  “엄마!”

  젖은 신발을 벗고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미라의 기대와는 달리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엄마?”

  다만 먹구름이 집 안 전체를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오늘의 골목길 색깔처럼.

  "우르릉!"

  미라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 잠시 아빠와 할머니 집을 갔다 온다는 쪽지와 함께 엄마를 기다렸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 안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회색빛으로, 사방을 둘러싼, 그 방은, 골목길, 같았다.

  “나, 설마 임신하게 되고 그런 거, 절대 아니겠지?”

  사건이 있던 그 바로 다음 날 방과 후 미라가 기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 기수는 미라를 쳐다보았다. 슬픔. 좌절. 두려움.

  “제발, 병원이라도 가면 안 될까?”

  “안 돼. 병원에 가려면 보호자가 필요하잖아.”

  기수는 그 말을 듣고서 더 걱정이 되어서 말했다.

  “하……. 너희 최소한 너희 부모님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을까? 너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야.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잖아.”

  “우리 부모님이라고 무슨 수가 있는 거 아니잖아. 어제도, 내가 그런 일을 당하고 집에 돌아갔을 때 우리 부모님은 없었어. 나 혼자 밤까지 있었다고.”

  “그건,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너희 부모님이라고 그런 것 까지 다 알고 계실 수는 없잖아. 네가 전화로 말씀드렸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셨을 거야.”

  기수의 말을 듣고 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네에 앉아서 발로 모레를 툭툭 치면서 텅 비어버린 교실만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건 안 돼.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안 돼. 얼마나 충격을 받으시겠어.”

  ‘네가 아기를 가진 걸 확신하고 나서야 실토한다면 그게 훨씬 더 충격일거야.’

  기수는 이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만 두었다. 하지만 그러는 미라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라고 기수는 생각했다.

  서로 아무 말이 없다가 해가 완전히 저물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기수가 말했다.

  “미안하다. 그 자리를 더 빨리 지나갔어야 하는 건데.”

  그 말을 듣고 미라는 깜짝 놀라서 기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네에서 일어서서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지금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다행인데.”

  “내가 그 자리를 더 빨리 지나갔으면 이런 일이 안 생길 수도 있었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건, 네가 아까 말한 것처럼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래도……”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미라를 보면서 기수는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기수는 눈물을 미라가 보지 못하도록 소매로 빨리 닦았다.

  ‘평생 동안 따라다닐 거야. 나하고 미라한테. 미라는, 아마 평생 동안 괴로워하겠지. 나보다 훨씬, 생각지도 못할 만큼 훨씬.’

  “아깐 그렇게 남자들을 잘 내쫓았는데…… 초등학생이라서 그랬나.”

  미라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료수 캔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하지만 계속 떠오르는 기억. 그 기억들이 지금 미라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기억들이 모두 사라지면 지금의 자신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가끔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딱딱하고, 말 없고, 무서운 인상을 주는 여학생인 미라는 아마 없어져버릴 것이었다.

  “그 새끼들…… 만나면 진짜 죽여 버리겠어.”

  그 일 이후로 미라는 그 남학생들을 만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늘 주머니 속에는 커터 칼이 있었다. 하지만, 그 남학생들은 끝내 보이지도 않았다. 근처의 모든 학교를 뒤져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미라는, 그 날의 남학생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미라의 기억에는 그저, 눈, 코, 입이 그늘진 표정 없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생물들이었다. 그래서 결국 미라는 찾는 것을 포기했다. 커터 칼도 강에 버려버렸다.

  강에 떠내려가는 커터 칼을 보면서 모든 것들도 저렇게 시원하게 떠내려갔으면 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두려워하는 것들이 아직도……

  ‘설마, 정말 임신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공을 주워오는 기수를 보며 미라는 두려움을 생각했다. 그리고서 손을 들어 배를 살짝 만져보았다.

  그 사건이 있던 날 이후로 미라는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수시로 검색창에 ‘임신’이라는 단어를 쳤다. 임신하고 난 뒤의 여성의 몸 상태나 심리 상태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해서 자신과 대조해 보았다. 꿈에서는 임신한 자신의 모습이 나왔고, 배에 살이 조금 쪘을 때는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공포심을 느꼈다.

  ‘엄마. 내 아빠는 누구야?’

  온몸에 소름이 끼치던 꿈을 꿨을 때 미라는 근처 아파트의 옥상에 올라갔었다. 임신하고 나서 12주 뒤, 배가 나온다는 그 시기에 정말로 자신의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그 사건이 지난 지 12주가 넘은 날이었다. 미라는 배를 만져보았다. 분명히 그때보다 배가 아주 조금 나왔다. 하지만 그때보다 전체적으로 살이 조금 쪄서 임신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지방인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입덧 같은 건 없었잖아.’

  애써 밝은 생각만 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미라로써는 당연한 것이었다.

  ‘밝지 않잖아. 밝지 않은데 어떻게 밝은 생각을 할 수가 있겠어. 먹구름이…… 이렇게나 가득한데.’

  구름이 정말로 장난을 치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비는 쏟아질듯 하면서 쏟아지지 않았다. 정말로 답답했다.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왔다.

  ‘이걸로는 안 돼. 더 세게 불어. 지금 내 두려움과는 비교도 안 되도록. 그리고 날려버려. 내 걱정, 기억, 숨겨놓은 프린트 되어 있는 임신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우르릉!”

  ‘쌓여만 가는 휴지통의 새 생리대.’

  “툭.”

  진우는 공을 차려다가 그냥 발로 건드렸다. 그리고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땀이 진우의 몸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렀다. 기수도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기수는 그네에 앉아 있는 미라를 보고 이제 그만 가자는 손짓을 했다.

  “진우야 이만 하면 많이 했다. 이제 빨리 집에 가야지.”

  하지만 진우는 기수의 말을 듣고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땅바닥을 보고서 거친 숨만 내쉬었다.

  기수는 그런 진우의 모습을 보고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우야.”

  아무 말도 없었다. 오늘따라 진우가 이상했다. 스스로 공을 찬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기수는 생각했다.

  “……미안해.”

  한참동안 모래알만 바라보던 진우가 입을 뗐다. 하지만 기수는 진우의 갑작스런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그게…… 너희 집 그렇게 되는 거, 미안해.”

  기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진우를 쳐다보았다. 진우도 그 이상 덧붙이지 않았다. 미라는 그네를 움직이면서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기수를 보았다. 기수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집, 철거 될지도 모르는 거는 너 때문이 아니잖아.”

  기수의 말에 진우는 그저 기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다시 땅바닥을 바라보며 기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맞아. 니 말이 맞아. 우리 엄마 아빠가 너희 집을 철거하는 거는 아니지. 하지만……”

  진우의 말을 들으면서 기수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진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밧줄달린 갈고리가 되어서 기수의 마음을 낚아채 저 깊은 어둠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 집. 우리 집도 너희 집 철거하려는 사람들이랑 똑같은 집이잖아.”

  “우르릉!”

  천둥이 운동장의 공간을 울렸다. 기수의 마음도.

  “우리 집도, 돈 많아. 재개발 하는 거 때문에 다른 집 무너뜨리지. 나도 알아. 그런 거 나쁜 짓이라는 거. 그런데 나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천둥소리 때문에 들릴락 말락 한 소리였지만 기수는 알 수가 있었다. 어쩌면 진우와 친하게 지냈을 때부터 줄곧 그 소리를 들어왔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드디어 실체를 가지고서 나타난 진우의 말.

  “나도 엄마 아빠한테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집이 없어지는 사람들 힘들다고, 내 친구도 지금 당장 막막해서 너무 힘들어한다고 최소한 말이라도 해보고 싶어. 그런데……”

  진우는 대답을 흐리면서 기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걸. 아니다. 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거야. 매일 싸우니까. 이렇게 해야 돈이 더 많이 들어온다. 이렇게 해야 더 이익이다. 어떻게 자신밖에 생각할 줄을 모르냐. 그렇게 매일 싸우니까. 그런데 그것도 매일 아침마다 싸워. 그게, 그게 너무도 듣기 싫어서 말이야, 엄마 아빠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일어나. 그리고서 가방을 싸들고 밖으로 나오지. 휘청거리면서 등교를 해.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탄식을 하면서. 그러고선 반성문을 쓰지. 매일 늦거든. 당연하지, 우리 집 여기에서 엄청 머니까. 아, 물론 더 일찍 나오면 지각할 일은 없어. 하지만 매일 건너오는 다리 위에서의 떠오르는 해가 날 붙잡아. 그리고 계속 생각하게 만들어 줘. 난 도대체 뭐하는 놈인지, 남들에게 난 뭔지, 왜 그런 집에서 태어나서 남들과는 다르게 이렇게 일찍 집에서 나서야 하는지.”

  띄엄띄엄 말하는 진우의 말에 기수는 진우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진우의 이 이야기를, 기수는 알고 있었다. 아침에 느릿느릿 걸어오는 진우에게 말을 붙이면서 함께 걸어오다가 같이 지각해서 친구가 된 사이였다. 그래서 기수는 진우가 지금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라에게, 말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아마도 진우는 자기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을 터였다.

  ‘역시 내가 아까 집 없어진다고 말한 게 잘못된 것이었을까.’

  “사실, 나도 막막해. 집은 잘 사는데, 공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학교생활 원만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 아빠는 내가 아빠 일을 물려받기를 원할 텐데. 난, 그게 싫어. 특히 기수…… 너가 생각나서.”

  진우는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낙서를 하다가 지우다가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어떡하지. 이렇게 가다가는 내 돈이 없어서 독립 못하고 아빠가 하라는 거 어쩔 수 없이 하게 생겼어. 세상에, 부잣집 아들이 돈이 없어서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다니.”

  손가락에 묻은 모래알갱이들을 멀리 튕기면서 진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날 친구로 생각하는 애의 집도 못 지켜 주고. 충분히 지켜줄 능력이 되는 집에서 살면서도. 다른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진우는 이제 말하는 것 자체가 괴로워 보였다.

  “너도, 꽤 힘들게 사는구나.”

  미라였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서 미라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느냐는 표정으로.

  “그래, 다 힘들게 사는 거 같아. 우린 아직 중학생인데.”

  기수는 예의 그 진우가 짓던 헛웃음을 따라 지었다. 그리고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면서 미라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주연이는 아직도 중얼거려?”

  벤치에 앉아서 몇 십분 째 똑같은 자세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주연을 가리키면서 기수가 미라에게 물었다.

  “폭풍이 오고 있어.”

  “응. 그런 거 같네.”

  “그런데, 주연이…… 왜 저렇게 된 거야?”

  “몰랐어?”

  “안 물어 봤으니까. 물어봤자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항상 저러니까 오히려 익숙해져서 별로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아채고서 기수 쪽을 보는 것인지는 몰라도 주연은 멍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빠 때문에 그래.”

  “아빠?”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이 아빠도 뭐랄까…… 그래, 정상이 아니야. 정신지체 그런 건 아닌데, 술만 마시면……”

  미라의 끝을 맺지 못하는 말에 기수의 머릿속에는 술 취한 주연의 아버지가 살려달라고 비는 어린 주연이를 구타하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설마, 그럴 리가. 아니, 아들을 구타하는 부모얘기는 텔레비전에서도 많이 봤긴 했지만, 그래도 아들이 저렇게,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됐는데.”

  하늘에 깔린 먹구름처럼 기수의 마음에도 점점 먹구름이 피기 시작했다. 어둡고, 습하고, 바람만 세게 부는 날씨. 왜 여기엔 이런 아이들만 모이고, 얘기하고, 서로가 아프다는 것만 확인하고, 그럴까. 기수는 생각했다. 그리고 답답하리만큼 구름 속에 갇혀서 내려오지 않는 비.

  “왜 아무도 주연이가 그렇게 살고 있는데 보호하려 하지 않지? 최소한 안 맞고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러게.”

  미라가 살짝 웃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웃음.

  “그래줄 수 있지.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져줄 수 있지. 당연히 네가 살 수 있는 집도 마련해 줄 수 있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 가끔 이세상은 한낱 중학생들인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곳이라서 말이야.”

  툭. 모래가 저 멀리 튀겨져 간다.

  “어른이 되면 이해가 되려나.”

  이해하고 싶지 않는데. 기수는 속으로 바로 대답했다.

  “왠지 저거 우리들 미래 같아. 저 먹구름들. 저 회색 구름처럼 너무 불투명하잖아.”

  “그만큼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가 되는 것도 되지 않을까?”

  “그래? 너 답지 않게 너무 긍정적인 말투인데? 모두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야? 뭐, 긍정적인 것도 나쁘지만은 않으니까.”

  미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네에서 뛰어 내려 벤치로 걸어갔다. 기수도 진우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자, 집에 가야지. 아무리 싫더라도 갈 수 밖에 없잖아.”

  기수의 손을 보면서 진우는 슬쩍 웃었다. 그리고 잡았다. 기수의 손을. 기수는 그 손을 잡고 힘껏 잡아당겨주었다.

  "터벅. 터벅."

  학교에서 빠져나온 네 명의 학생들은 가로등의 주황빛으로 밝혀진 학교 담벼락 옆에 난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우르릉!”

  “폭풍이 오고 있어.”

  “……”

  주연의 말에 그 누구도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하늘도 보지 않았다. 알고 있었기에. 폭풍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 누구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폭풍이 오고 있어.”

  ‘그래. 폭풍이 오고 있어.’

  기수는 속으로 대답했다.

  “비가 너무 안 오는데……. 천둥소리도 지겨워. 비라도 확 내려줬으면.”

  미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울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속으로 작게 덧붙였다. 중얼거리듯이.

  “비 좀 오지. 찝찝하게 천둥소리만 잔뜩 들리고. 비 좀 세차게 내리면 축축해도 땀도 좀 씻고 개운할 텐데. 이건 너무…… 답답하잖아.”

  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에서는 천둥소리만 요란했고, 먹구름만 더욱 짙어졌다. 마치 곧 폭풍이 오는 것을 예고하는 듯. 폭풍이 오니까 두려워하라는 듯.

  “잘…… 가.”

  넷 모두 각자 갈 길을 향해서 갈라졌다. 기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발걸음을 빠르게 내딛었다. 도로 맞은편 공사소리가 시끄러웠다.

  쿵. 쿵. 쿵. 두두두두 . 팅. 팅.

  “망할. 진짜 시끄럽네.”

  발걸음을 더 빠르게 내딛었다. 소리가 멀어지도록 빠르게. 더 빠르게. 눈물도. 빠르게. 더 빠르게. 주르륵. 주르르륵.

  “씨발. 비 좀 내리라니까! 엿같이 폭풍 오기만을 무서워하면서 기다리고. 이게 뭐야!”

  미라는 근처에 있는 하얀색 건물에 붙은 초록색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십자가는 먹구름 아래에서 초록색 네온사인을 더해서 더욱 밝게 보였다. 마치 손짓하는 것 같았다. 어서 오라고.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설마. 아니겠지.’

  미라는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아니야.”

  초록색 십자가에서 등을 돌린 미라는 반사적으로 손을 배에서 뗐다.

  “그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래선 안 돼.”

  ‘엄마. 내 아빠는 누구야?’

  “아니야. 넌 누구야? 난 널 몰라. 네 아빠? 몰라. 네 아빠가 누구니? 같이 찾아줄까? 응? 응? 응?!”

  “우르릉!”

  이윽고 어두운 밤이 되었다. 어둠 속에 가려진 먹구름. 아니면 먹구름 속에 가려진 어둠.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진우는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비웃고 있는 구름을 발견했다. 용접불꽃, 주상복합아파트, 공사장의 불빛과 산부인과의 불빛. 그들을 배경삼아 먹구름은 당당히 자신의 검은색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역시 비는 오지 않았다.

  “후.”

  진우는 한숨을 쉬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서 잠시 중단된 공사장의 철제 구조물을 내리쳤다.

  “지잉 .”

  철제 구조물이 진동을 했다. 울었다. 속 깊이 울리면서.

  “우르릉!”

  하늘을 더 이상 올려다보기가 싫어졌다. 진우는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도 굽혔다.

  “우르릉!”

  ‘비는 안 와.’

  “우르릉!”

  ·

  ·

  ·

  “폭풍이 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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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2-29
도피

도피   “모르겠어…….”   나는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방안에 혼자 있는데다 엄마는 TV를 보고 있고, 아빠는 야근에다 창밖은 별 한 점 없이 컴컴했지만 어디선가 그거 하나 못 풀어서 대학 어떻게 가려고 그러냐는 소리가 들릴까봐 조용히 말한 것이다.   “후……”   샤프를 소리 없이 문제집 옆으로 굴려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문제집을 째려보았다. ‘순간변화율’이란 놈이 ‘미분의 곱’, ‘도함수’ 친구들로는 모자랐는지 이젠 ‘전하량’까지 데리고 나왔다.   “어이! 학생. 이것도 못 풀어? 이걸 봐봐. 이걸. 별 3개짜리야. 이래가지고 대학……”   나는 계속 나불대던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닥치라고 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도로 삼켜버렸다. 그리곤 문제집 더미 속에 끼어있던 공책을 꺼냈다. 몇 장을 슥슥 넘기자, 글자들이 빽빽하게 써져있었다. 소설. 그냥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막 휘갈겨놓은 것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건 나의 소설집이다. 단편도 있고, 장편도 있고, 구상만 잔뜩 써놓고 중간에 그만 둔 것도 몇 개 보였다. 이것들은……   “진훈아! 숙제 다 했어?”   엄마의 목소리는 두꺼운 문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뚫고 들어와서는 내 귀를 때렸다.   “어, 응.”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숙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공책을 꽂아놓고 덮어두었던 문제집을 다시 펼쳤다. 그러자 문제집이 또 나불대기 시작한다.   “여, 학생. 빨리 빨리 풀어야지. 안 그래? 학원에 있는 수학선생 무섭잖아. 안 풀어온 문제 하나당 한 대씩 패고. 그치?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 너도 잘 알잖아? 그 수학선생 힘세다는 거. 맞으면 아프잖아. 맞는 것 보단 지금 빨리 집중해서 다 푸는 게 낫지 않냐? 안 그래? 그리고……”   다시 문제집을 덮어 버렸다. 듣기 싫었지만 다 맞는 말이다. 안 풀면 맞는다. 그런데 왜?   “왜 일까?”   나는 왜 맞아야 할까? 내가 한 문제를 안 풀어오면 - 몰라서 못 풀었다 하더라도 - 나는 나보다 덩치가 두 배쯤은 커 보이는 수학선생에게 매를 맞는다. 이건 정당하지가 못하다. 엄마한테 말했더니 돈을 받았으니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시켜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자기 학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두 가지 대답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힘든 학원생활을 조금이라도

  • 한 장의 날개
  • 2012-02-10
지팡이소리

지팡이소리 1   “쯧쯧, 세상 말세야. 어떻게 경찰이……”   “그러게. 국민들을 지켜야할 경찰이 저렇게 되니까 이거 어디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서 우신과 태준은 신발을 신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아직 태양이 완전히 지지 않아 주황빛과 노란빛으로 꽤나 아름다웠다.   칙       태준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서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마신 뒤 후, 하고 불자 연기가 공중에 엷게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서 우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끊는다며.”   우신의 말에 태준은 마치 자신이 담배를 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담배. 안 끊어지더라고.”   몇 모금 더 빨아 마시고서 아직 불이 붙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비벼 꺼버리는 태준을 보며 우신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고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형사라는 직업,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풀어야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막 경찰관의 장례식장에서 나온 직후였다. 태준도 우신도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다.   “이번 사건, 우리 담당 맞지?”   “맞지.”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뭘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이 질문에 우신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냥 평범한 살인사건이라면, 즉 범인이 잡히지 않은 상태라면 아주 할 일이 많았다. 증거 수집과 탐문 수사 등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 범인이, 사건 발생 한지 12시간 채 되지 않아 잡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엔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이상한.   “일단 어제 범인이 잡혔으니까, 장례식도 다녀왔고, 이제 다시 한 번 사건현장에 가봐야지. 여기랑 가까운데. 범인 취조도 해야 하고.”   “사건 현장? 증거물 수색 다 끝났잖아. 그리고 취조도 이미 했고. 취조한 결과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야지. 사건 현장에 다시 가보자고.”   그 말에 태준은 바지를 털면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하늘을 보자 오늘의 해가 곧 저물 기세였다. 매일 매일 꿋꿋이 오는 고단한 하루가 저 저무는 해처럼 빨리 지나가버리길 태준은 그렇게 빌었다.   “왜 그렇게 빨리 장례식을 시작 한 건지…… 단서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유족들이 빨리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잖아. 부검도 빨리 끝났고. 게다가 범인도 바로 잡혔잖아.

  • 한 장의 날개
  • 201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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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장의 날개

    아, 중간에 '주현'이라고 오타가 좀 났네요;;; 죄송합니다. '주연'이 맞습니다.

    • 2011-08-06 20:03:30
    한 장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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