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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 작성자 연민
  • 작성일 2011-07-05
  • 조회수 136

날은 후덥지근했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에어컨이 찬바람을 내뿜던 마트의 내부와는 달리 바깥은 이러다간 녹아버리겠다 싶을 정도로 무더웠다. 훅 끼쳐오는 아스팔트 도로의 열기와 고무 냄새와, 안팎의 온도 차에 나는 머리가 어찔해진다. 갑작스런 현기증에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마트 주차장의 한복판에 멈추어 선다. 얼굴에 더운 바람이 불어와 신경을 거슬렸다.

네 손가락을 끊어버릴 듯이 짓누르는 대형 마트의, 불투명한 비닐봉투의 무게와 후끈한 태양의 열기와,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고무 냄새. 빵빵거리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같은 소음들-. 그것들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로 한꺼번에 휘몰아쳐와 내 감각을 지배했고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불쑥 짜증이 치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비닐 봉투를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통조림 캔들이 서로 부딪혀 쨍- 하고 깨지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황망히 서 있었다.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할 태양의 언저리를 보며 짜증을 내다가 문득 내가 내려놓은 비닐 봉투의 안에 든, 머리만 큰 자식들을 주기 위해 산 한 더미의 아이스크림들이 다 녹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무거운 비닐봉투를 양 손에 들고 이 쨍쨍한 햇볕 아래를 터덜터덜 걸어갈 것을 떠올리자니 스스로가 너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없는 돈에 택시를 타고 가기도, 뒤뚱거리며 양 손에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비닐 봉투를 들고 걸어가기에도 집은 너무 멀었다.

지금의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의 빛줄기를 가리기 위해 손으로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바닥 하나 만큼의 그늘은 내 더위를 가시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피난처를 발견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비닐봉투를 다시 양 손에 하나씩 들고 뒤뚱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발견한 피난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난처였기에, 은행은 때 아닌 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은행은 내가 본 그 어떤 때보다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게임 효과음 같은 ATM의 기계음과 차례가 된 손님을 찾는 창구 직원의 목소리와 큰 소리로 통화 중인 사람, 어머니를 따라왔을 초등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아이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와글와글 뒤섞여 들렸다.

나는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앉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심보로 시간이나 죽이기 위해 은행에 들어온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불평하던 것을 멈추고 잠시 앉아 쉴 자리를 찾아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은행 안은 이미 사람들로 포화 상태였고 조금이라도 앉을 수 있을 만한 자리는 커다란 엉덩이들이 빈틈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이 비집고 들어앉아 있었으므로 나는 앉을 자리를 물색하던 것을 멈추고 온 김에 돈이나 찾아가기 위해 구석 자리에 내가 들고 온 짐을 내려놓고 번호표를 뽑으러 갔다.

우습게도 은행 안의 사람들 수에 비해 대기자 수는 이제 두 자리 수가 될까 말까한 정도였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적어서 나쁠 것이야 당연히 없었기에 내가 구석에 내려놓은 짐을 지키러 그득히 들어찬 사람들을 헤치고 돌아가려는데 발에 무엇인가 툭, 채였다. 누군가의 발인가 하기에는 너무 가벼웠고 작았으며 채인 사람의 불평 또는 시비가 없었기에 나는 바닥을 살폈다.

여성용 지갑이었다. 분홍색의 가죽 지갑은 누가 버렸다고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새 거였고, 또 비싸보였다. 아니, 확실히 비싼 지갑이었다. 미용실 같은 곳에서 흔히 들여다보곤 하는 여성 잡지에서 디자인에 감탄하고 가격에 기겁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갖고 싶은 마음에 남편에게 생전 안 부리던 애교도 부려가며 졸랐다가 다 늙어서 뭐가 그렇게 갖고 싶은 게 많으냐고, 저런 건 젊은 애들이나 들고 다니는 거라며 타박을 들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일단 지갑을 주워든 상태에서 나는 고민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로 정신이 없었으므로 내가 이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 대도 눈치 챌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손에 잡히는 무게와 두께로 보아 돈도 꽤 많이 들어있는 듯하였다.

지갑은 젊은 여자의 것임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돈이 많이 들어있다는 것에 나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반백년 가까기 살아온 내 지갑은 찌는 듯한 더위 속을 걷는 대신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것조차 고민해야 하는데, 이 지갑은 내 것과 너무도 비교되지 않는가. 졸부집 딸 정도 되시나 보군, 하고 비웃음을 지으려 해도 내심 부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서둘러 지갑의 주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 것도 그런 부러움과 이대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한 달, 아니 일주일 정도는 나도 아무런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욕심 때문이었다. 문득 참고서를 사야한다면 툭하면 돈을 타 가던 아들 생각이 났다. 입을 옷이 없다며 투덜대던 딸 생각도 났다. 곧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아이들이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지갑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지갑을 쥔 손을 주머니 속으로 우겨 넣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져서 나는 금방이라도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아줌마, 그 지갑 아줌마 꺼 아니죠?

하고 다그칠 것만 같았다.

나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내가 내려놓은 커다란 비닐 봉투의 곁으로 돌아왔다. 차례를 보니 내 순서는 이미 훌쩍 지나가 있었다. 나는 차례를 놓친 번호표를 구겨 버리고 은행을 나갈 채비를 했다. 나가기 전 물을 한 잔 마시려는데 창구 쪽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악! 내 지갑! 어떡해, 그 안에 카드며 돈이며 다 들었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그 사이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울상이 되어 주변을 샅샅이 살피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확실히 앳된 얼굴이었다. 나는 불쑥 죄책감이 치솟았다.

지갑도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난 몰라!

여자는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몇몇은 여자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인상을 썼고, 몇은 혀를 쯧, 하고 찼으며 몇은 지갑의 모양이며 언제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냐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흥미 있게 지켜보다가 이내 자기 할 일에 다시 집중했다.

나는 마음이 양 손에 식료품으로 가득 찬 비닐 봉투를 들고 있는 것 마냥 무거워진 채로 은행을 나섰다. 문 바로 앞에 우뚝 서서 나는 다시 고민했다. 이대로 다시 들어가서 그 지갑을 내가 주웠노라고 말한다면? 여자는 우선 내 손에서 저의 지갑을 낚아채가고 안을 확인할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내게 고맙다며 겉치레뿐인 감사를 전하겠지. 사람들은 한참 후에야 지갑을 찾았다며 나선 나를 보며 조금쯤 의심할 지도 모른다.

저 여자, 아까 나가지 않았었어?

나는 애써 머리만 자란 내 자식들을 떠올린다. 손가락을 내리누르는 비닐 봉투의 무게는 여전했고 내리쬐는 햇빛도 여전했다. 나는 은행을 나서고 망설임 없이 택시를 잡아 탈 때까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좀 전의 앳된 얼굴로 소리를 지르던 여자가 나를 붙들고

아줌마가 내 지갑 가져갔죠?

따질 것만 같았기 때문에.

나는 택시에 올라 타 집 주소를 말하면서 욱신거리는 손가락으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지갑을 매만졌다. 손에 땀이 차는 바람에 가죽으로 된 지갑의 표면이 유난히 미끈거렸다. 나는 귓가에 메아리치는 여자의 목소리를 애써 안 들리는 척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택시는 금세 집 앞까지 날 옮겨다 놓았고 나는 내가 주운 여자의 지갑을 열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택시비를 지불했다.

거스름돈을 받아 챙기고 다시 양 손에 비닐 봉투를 들고 집 앞에서 열쇠를 꺼내면서도 나는 저질렀다, 하는 죄책감과 여자에 대한 미안함과 돈을 이미 써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로 뒤범벅된 심정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지금까지 내 손가락을 끊어놓을 뻔했던 비닐 봉투를 냉장고 앞에 내려놓았다. 세수를 하고 냉장고 앞으로 와 아이스크림이며 두부, 생선, 당근 등을 냉장고 속에 하나하나 채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통조림 캔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놓고 나서야 가득 들어찼던 비닐 봉투는 속이 텅 비어 간간히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 버스럭거릴 뿐이었다. 나는 냉장고의 냉기를 맞으며 저녁에 뭘 준비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무언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닐 봉투 속에 들어있던 영수증의 목록과 내가 냉장고에 집어넣었던 식료품들의 목록은 빠짐없이 일치했다. 시간은 6시 30분으로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오기에도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열쇠도 신발장 위에 놓여있었고, 내가 주운 지갑도 식탁 위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아차, 했다.

내 지갑이 보이질 않았다.

마트에서 계산한 후에 터질 듯한 비닐 봉투 속의 식료품들 사이로 집어넣었던 내 낡은 지갑이, 사라지고 없었다. 돈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텅 비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비닐 봉투를 한 번 더 뒤져보았고 이내 은행에서 상당 시간 내 지갑이 든 비닐 봉투를 방치해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고 인과응보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가 내 비닐 봉투의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으나 곧 허무해졌다. 내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여자의 지갑을 주워 그녀의 돈을 써버렸듯 이제 와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것이다.

나는 허무해진 마음에 헛웃음을 흘리며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네, **카드회사죠? 카드 분실 신고를 하려는데요. 네, 네.

나는 생각나는 대로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어 분실 신고를 했고 더 이상 생각나는 곳이 없을 즈음에야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몇 십분 후 남편과 자식들이 거의 동시에 번갈아 들어왔고 저녁 준비가 아직도 안 되어있냐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들을 달래었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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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천둥소리가 요란해 잠에서 깼다. 어둠이 익숙하지 않은 눈을 거푸 깜박이며 나는 안경을 찾아 썼다. 그 사이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울렸다. 야광으로 된 시곗바늘이 세시 반을 가리켰다. 잠든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지개를 켠다. 요란한 천둥소리에 잠은 달아나버렸다. 나는 창문을 열어 거리를 내다본다. 어슴푸레히 가라앉은 안개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실은 천둥소리만큼이나 빗소리도 요란했다. 창문을 닫으니 빗소리가 한층 조용하게 들렸다. 방 안이 습하다 못해 온 몸이 끈적거렸다. 잠들기 전에 열대야로 뒤척이던 것이 생각났다. 샤워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래봤자 더운 건 소용이 없을 듯 하여 그만두었다. 이불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벗어 머리맡에 내려놓고 눈을 깜박였다. 모자이크 처리한 듯 어두운 방 안에 흰 벽지로 발라진 천장이 뿌옇게 보였다. 빗소리는 여전히 드세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밖에 뛰쳐나가 비를 맞고 싶다던 너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에 맞장구치던 내 모습도 생각났다. 사실 나는 젖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 말은 거짓이었다. 지금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다가 번개가 번쩍이는 모습에 눈을 빠르게 깜박인다. 비를 맞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머리카락이 젖어 얼굴에 찰싹 달라붙으면 보기 흉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비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밖에 나가서 비를 맞아보고는 싶었다. 번개를 맞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번개를 맞을 확률과 로또에 당첨될 확률을 비교했던 표를 봤던 적이 있다. 어느 쪽의 확률이 더 희박했던가는 지금은 가물가물하여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다시 너와 만나 어제 비 많이 왔더라, 또 비 맞으러 나갔었니? 하고 말을 걸 수 있는 확률보다는 크다고 생각했다. 비를 맞으러 나갔다가 너무 아파서 금방 들어와 버렸다는 너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하다가, 비를 맞으러 나가볼까 생각하다가, 너무 아파서 울어버릴까봐, 빗방울에 멍이 들어버릴까봐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안경을 주워 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신호등은 꺼진 지 오래였고 가로등은 주홍으로 빛났으며 차도의 신호등도 노란불을 깜박거렸다(분명 주황색인데 왜 노란불일까). 간간히 차들이 도로를 달렸다. 옅게 내려앉은 안개 사이로 차들의 안개등과 헤드라이트가 함께 빛났다. 비는 조금 잦아들은 듯 했다. 천둥과 번개도 더 이상 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하려 창문을 닫고 이불 위에 누웠다. 새벽 공기를 쐬서인지 아까만큼 덥고 습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불을 덮었다. 안경을 다시 벗어 머리맡에 내려놓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나는 너를 떠올렸다.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가 비를 맞았을지도 모르는 너를 떠올렸다. 빗방울이 너를 너무 아프게 때려서 울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너를 떠올린다.

  • 연민
  • 2011-09-20
호읍하듯 호흡하기

좋아해. 난 너 안 좋아해. 싫은 거야? 어쩌면. 왜? 몰라. 그냥 그렇네.   단순한 고백과 거절이었다. 지나치게 덤덤한 거절의 말은 그렇기에 쉽게 뱉어졌고 또한 단호했다. 그 단호함이란 마치 벽돌과 같아서 바닥으로 팽개쳐짐과 동시에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상한 것은 부서진 것은 단호함이요, 벽돌일진대 어찌하여 그 조각은 유리와 같이 날카로워 내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인지? 그에 나는 할퀴어진 가슴을 부여잡고 모르는 체 태연함을 덧씌운 웃음을 그려내었다. 상처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 그래, 나는 너의 한 치의 자비도 없는 단호함과 무심함에 상처받았다. 별것 아니리라 생각했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고 그 상처는 날이 갈수록 곪고 썩어가 이내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우습게도 나는 깊숙이 새겨진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내 나름의 치료였을지도 모른다. 용기를 내어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내 눈에는 너의 잔상이 비쳐 조금 나아지려던 상처를 투둑, 뜯어내었으니. 나는 한 달이 가도록 집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한 달이 되던 날, 나는 집을 나섰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내 가슴에 상처는 아직도 낫지 못하고 진물이 흘렀지만 나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 푸르스름한 아름다움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주섬주섬 채비를 하고 현관문을 엶과 동시에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따금 찾아와 현관 앞에 서 있던 너의 모습을 떠올리고, 바라보았다. 베이지색 칠이 벗겨져 가는 벽과 그 위로 보이던 연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네가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눈가에 고인 눈물을 짜내고 손등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일어나 비틀거린다 싶은 걸음을, 처음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조심조심 걸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았다. 정면을 바라보며 걷는 아기와 내가 다른 점, 세상을 마주하기 어렵다는 것. 기차역까지 가는 동안 내내 고개를 숙인 채였다. 앞을 보지 못해 다른 이들과 부딪힐 때마다 나는 이미 숙인 고개를 더 숙이며 꾸벅꾸벅 사과했고, 그 사람들은 무심하게 나와 부딪힌 어깨를 툭툭 털고 지나갔다. 몇 번의 부딪힘과 사과, 무심함의 반복 끝에 기차역에 도착해 나는 바다로 가는 편도선 표를 한 장 끊었다. 기차에 타고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커다란 굴곡이 없이 지내온 너와 나였기에, 그냥 아는 사이라면서 친구 이하로 남아 간간이 얼굴만 마주치는 사이였기에 함께 바다를 보러 기차를 탄 적 없는 것은 슬프게도 다행이었다. 바다는 서늘하게 짠 기운을 풍기며 나를 반겼다. 파도 소리가 귀를 때렸고, 사람들이 드물었기에 나는 넋 놓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둥글다는 것을 발견한 이가 누구였더라. 그이는 결국 시샘으로 죽었던가.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아무리 봐도 일직선으로만 보이는 수

  • 연민
  • 201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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