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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썬더볼트
  • 작성일 2011-06-08
  • 조회수 97

 

이른 밤 여자는 남은 음료수를 들고 고민하고 있다. 곧게 뻗은 1.5리터 페트병에는 사이다만이 이따금씩 트림을 하고 있다. 지나가는 할머니께서 “어이구, 아가 오늘도 고생이 많어.” 하고 고개를 끄덕이신다. 양 무릎을 번갈아가며 페트병을 치고 있던 여자는 “아니에요.” 하고 뒤돌아 꾸벅 인사했다. 여자는 한참을 고민하다 폐식용유 통 뚜껑을 열었다.

“그거 거기 버리면 안돼요.”

여자는 뒤돌았다. 젊은 여자가 서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쯤 돼보였다.

“거긴 폐식용유 버리는 곳이에요.”

젊은 여자는 물음표를 담고 있는 여자의 손에서 음료수 병을 뺏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뭐 김도 안 빠진 걸 아깝게 버리려고 해요.”

여자는 물음표를 비워내고 환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리고 “고우맙숩니다.”하고 어눌하게 말했다.

“안냐하쎄요.”

여자는 오늘도 쓰레기를 한가득 들고 있다. 젊은 여자도 인사 했다. 오늘은 술병뿐이었다. 한 집에서 나오리라기엔 엄청난 양이었다.

“와, 무슨 술병이 이렇게 많아요?”

“우리 집 아저씨가 먹습니다.”

여자는 도와줄 틈도 없이 빠르게 한 손에 세병 씩 양 손 가득 움켜쥐고 세 번을 왔다 갔다 했다. 여자의 손길로 유리 분리수거함이 안정적으로 차올랐다. 여자는 바지에 손을 쓱쓱 문질렀다. 옆머리를 잠시 다듬다가 대뜸, “물어볼 게 있습니다.” 하고 물음표가 아닌 반점의 표정으로 물어왔다. 지금 말해야할지 한 번 쉬고 말해야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단어를 발음하기 힘든지 몇 번 연습하고 제 목소리를 냈다.

“찢어죽일 년이 무슨 뜻입니까?”

젊은 여자는 당황했다. 자신에게 처음 물어보는 한국말이 찢어죽일 년이라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요즘 새로 나온 말인가? 하하.”

여자는 거짓말임이 티 나는 어색한 연기를 했다. 과장되게 가방을 더듬다 퇴근길에 받은 경우네 떡집 개업 기념 떡을 그녀에게 건넸다. 떡은 아직 따뜻했다. 여자가 손을 뻗고 먹으라는 표정으로 떡을 몇 번 흔들자 여자는 “간싸함니다.”하고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젊은 여자는 은근히 여자를 만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흙모래 이는 코너를 돌자 여자가 보였다. 오늘은 쓰레기를 쥐고 있지 않았다. 시멘트로 대충 펴 바른 뭉툭한 계단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낯빛은 시멘트보다 더 짙고 딱딱했다. 눈과 턱에 아이들이 씹다 뱉은 껌이 질게 붙어 있는 모습도 똑같았다. 젊은 여자는 깜짝 놀라 걸음을 재촉했다.

“얼굴이 왜 이래요?”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추다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의 멍이 순간 선명해졌다. 여자는 코를 크게 킁킁이곤 입을 뗐다.

“아저씨한테 맞았어요.”

젊은 여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 그랬군요.’ ‘왜요?’ ‘어이없네요.’ ‘오마이갓.’ 그 어떤 말도 대답에 어울리지 않았다. 괜찮냐는 말도 조심스러웠다.

“매일 밤마다 맞아요. 나는 밤이 싫어요. 그리고……”

“야, 이 찢어죽일 년아! 어디 갔냐! 남편이 왔으면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어딜 싸돌아 댕겨! 이 년이 그래도 안 오네? 야!”

여자는 떨리는 느낌표를 안고 뛰어 들어갔다. 안에서는 한동안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는 전화 카드를 샀다. 그녀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 이름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젊은 여자 혼자서 멀어지다 전화카드를 꼭 쥐었다. 검은 마그네틱이 번뜩였다. 여자는 오늘도 밖에 있었다. 젊은 여자는 살금살금 다가가 그녀를 왁!하고 놀랬다. 여자도 왁!하고 놀랐다. 여자는 어깨를 몇 번 떨다 “안녕하쎄요.” 하고 보다 나아진 발음으로 젊은 여자를 맞았다.

“어디 같이 좀 갈 데가 있어요.”

젊은 여자는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고 으차, 엉덩이를 털었다. 여자는 걷다가 서로의 발을 맞췄다. 같은 발을 딛고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젊은 여자도 어느 순간 인식했는지 걸음에 신경 썼다.

“곧 보름이네요.”

젊은 여자가 거의 다 찬, 지금도 서서히 차오르고 있는 달을 가리켰다.

“네. 저는 오늘이 보룸? 보름? 아무튼 그거인 줄 알았어요.”

“아, 맞다.”

여자는 가방을 들썩였다. 그리고는 덜그럭이며 뚜껑을 열었다. 뚜껑 주위에 붙어있던 마른 잔 연고들이 부스스 떨어졌다. 약을 푹 떴다. 여자는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오른 손으로 연고를 발랐다.

“연고 색이 꼭 달빛이네요. 얼굴에 달이 피었어요.”

여자는 순간 부끄러워하다

“간싸합니다.”

미음에서 비읍으로 발전한 발음을 보였다.

“여기도 좀 발라주쎄요.”

여자가 팔을 걷었다. 팔은 더 심했다. 팔꿈치의 뼈와 뼈가 맞닿는 곳은 피멍으로 가득했다. 젊은 여자는 혹시라도 자기 얼굴의 느낌표가 읽힐까 다시금 가방을 들썩였다. 가방에 연고가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팔도 달입니다.”

여자는 달을 만들겠다며 손가락 끝을 어깨에 대고 최대한 구부렸다.

“달 맞습니다. 좀 못난이지만 !”

여자는 팔을 흔들었다. 연고 위로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다.

둘은 공중전화 박스에 도착했다. 젊은 여자가 전화카드를 건넸다. 물음표가 다시 피어올랐다. 좁은 공중전화 박스에 둘이 들어갔다. 달칵달칵 소리를 내며 전화를 시도했다. 국가 코드에서 손을 멈추고 여자를 바라봤다.

“어디에서 왔어요?”

“베트남요.”

이제껏 들었던 대답들 중 가장 빨랐다. 젊은 여자는 재빨리 이름도 물었다.

“속씨나입니다.”

이번 대답이 아까보다 약간 더 빨랐던 것 같다. 하긴, 한국 와서 가장 많이 한 말이자 가장 뜻을 잘 알고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었을 테니까. 젊은 여자는 여자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여자 얼굴 위 물음표는 아직도 약간 덜 마른 책 귀퉁이 같았다. 젊은 여자는 박스를 빠져나와 다섯 걸음 크게 걷고 그 옆 바위에 앉았다. 박스 바깥 젊은 여자의 눈은 계속 박스 속의 여자를 향했다.

순간 수화기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났다. 눈물은 달빛을 지우고 숨겨진 분화구를 드러냈다. 10분 쯤 지났을까, 여자는 허둥거리며 달려왔다.

“갑자기 안 들립니다! 엄마 더 듣고 싶습니다.”

분화구밖에 남지 않은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엄마 더 듣고 싶습니다.”

니와 다 사이에 묘한 떨림이 있었다. 젊은 여자는 지갑의 동전을 모두 털었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하고 싶은 말로만 쓰세요.”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뒤돌아 달려갔다. 수화기를 들다 내려놓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젊은 여자는 또 크게 다섯 걸음 걷고 그녀의 집을 향해 천삼백 원을 넣었다. 그녀는 천삼백 원에 공을 두개는 더 붙인 듯한 통화를 했다. 여자는 계속해서 울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의문은 숨에서 조차 일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 젊은 여자는 자꾸 울면 연고 지워진다고 짐짓 화난 목소리를 내곤 여자의 얼굴에 달빛을 한 번 더 칠했다.

약간 늦은 밤이었다. 남색이 짙어져가는 하늘에 보름달이 빛났다. 여자의 얼굴은 한결 나아보였다. 젊은 여자는 “보름달이 두 개나 떴네요.” 하고 달보다 더 빛나는 여자와 마주섰다.

“달이 무지 큽니다.”

여자는 키읔에 큰 신경을 쓰며 발음했다. 여자는 두 손을 뒤로 지고 발뒤꿈치를 까딱였다. 모래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두 여자는 한참을 그렇게 달을 바라봤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여자는 까딱이기를 그만뒀다. 모래 소리마저 잦아지자 나뭇잎이 바람에 짧은 입맞춤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다 개미의 발소리까지 쿵쾅일 것만 같았다.

인간의 존재를 먼저 드러낸 건 여자였다. 계속 손을 뒤로 지고 젊은 여자 앞에 섰다.

“선물입니다.”

젊은 여자는 달에서 방금 깨어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선물을 받아들었다. 형광펜 세트였다. 분홍색, 주황색, 노란색, 파랑색, 보라색 다섯 색깔이 들어있었다. 젊은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놀란 여자가 바지 실밥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물었다.

“마음에 안 듭니까?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여자보다 더 놀란 표정의 젊은 여자가 대답했다.

“아니요, 정말 맘에 들어요. 맘에 들어서 웃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여자가 젊은 여자의 손에서 형광펜을 뺏었다. 그리고는 비닐 뚜껑을 뒤로 젖히고 “아가씨에겐 분홍색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고 분홍색 형광펜을 꺼냈다. 아가씨라는 말에 젊은 여자는 한 번 더 웃음이 터졌다. 허둥거리려는 여자의 표정을 보고 젊은 여자는 재빠르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젊은 여자의 새끼손가락에 조심조심 분홍을 칠하기 시작했다. 손톱 옆 살을 바짝 당겨서 손톱 끝까지 구석구석 칠했다. 달빛이 닿은 곳은 주황색으로 빛났다.

“다 했습니다. 예쁘지요? 한국에 신기한 것 정말 많습니다.”

여자는 형광펜을 매니큐어로 아는 것 같았다. 젊은 여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끄덕였다. 둘은 다시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정말 큰 빛을 뿜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못 볼 존재이기에 둘은 더 집중했다.

“쪼그만한 별들만 보다가 이렇게 큰 달 보니까 신기합니다. 항상 깜깜했는데 오늘은 밝습니다.”

젊은 여자는 또다시 달에 취했는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안경에 달이 바싹 달라붙었다. 여자는 반점의 표정을 지었다. 계속 만지작거리던 실밥을 뜯고 젊은 여자의 어깨를 톡톡 쳤다.

“할 말이 있습니다.”

젊은 여자는 말을 듣기 전에 달을 하나 더 만들어야겠다고 하고 여자의 얼굴에 연고를 한 번 더 발라줬다. 여자의 연고 통은 밑에 점 하나가 빠끔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자가 말을 시작하자 반점은 사라지고 오로지 여자만이 존재했다.

“어제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에게 나의 요즘을 이야기 했습니다. 아가씨에게도 제 이야기 들려드리겠습니다.”

여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푸, 하고 내뱉었다. 젊은 여자가 손을 잡아 주려할 때 여자는 빠른 속도로 말을 뱉어냈다.

“한국에 온지 일 년입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왔는데 아저씨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아저씨는 성진이 보고 오늘부턴 자기 자식이 아니라 우리 자식이니까 잘 대해라고 말했습니다. 성진이 정말 착합니다. 내가 모르는 거 다 가르쳐주고 학교에서 배운 노래도 자주 불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성진이한테 잘 못합니다. 돈도 못주고 맛있는 것도 잘 못합니다.”

여자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아저씨는 술을 좋아합니다. 아저씨, 낮에는 밭에 나갑니다. 그런데 밤만 되면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나와 성진이를 때립니다. 저보다 성진이 얼굴이 더 아픕니다. 그래서 성진이 할머니 집에 보냈습니다. 보고 싶지만 우리 아들 또 맞을까봐 할머니한테 말 못하겠습니다. 못 본지 한 달입니다. 저는 밤이 싫습니다. 아저씨만큼 싫습니다. 밝으면 아저씨가 나를 얼마나 많이 때렸는지, 내가 얼마나 울고 있는지 보여 줄 수 있는데 어두워서 보여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가씨 만나고 밤이 조금 좋습니다. 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으면 아저씨가 많이 때립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우리 집으로 갈 겁니다.”

“찢어 죽이세요.”

여자가 놀라서 물었다.

“그 말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가르쳐 주세요.”

젊은 여자는 앉은 바위 옆에 난 풀을 뽑았다. 그리고는 세로로 길게 죽 찢었다.

“제가 방금 풀을 찢어 죽인 거예요.”

“저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아저씨 나쁜 놈이에요!”

여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젊은 여자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맞댔다.

“어두운 거 싫죠?”

“네.”

“찢어 죽이세요, 이딴 어둠. 밤은 원래 어두운 게 아니에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나쁜 신 하나가 우리가 밝은 걸 오래 누리는 게 싫어서 잠시 비닐봉지로 감싸둔 거예요. 착한 신이 한 달에 한 번 비닐에 큰 구멍을 뚫어서 오늘같이 밝은 날이 존재하는 거고요. 저 검은 하늘은 지울 수 없는 유성매직이 아니에요. 한 손가락으로도 찢어버릴 수 있는 한낱 비닐봉지일 뿐이라고요. 달도 이따만한 거 떴으니까 할 수 있어요. 찢어 죽이세요, 이딴 어둠.”

여자는 젊은 여자의 마지막 말을 반복했다. 이에 젊은 여자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같이 해요. 속씨나는 달의 왼쪽을 잡아요. 저는 오른쪽을 잡을 게요. 우리 둘이 할 수 있어요.”

여자는 젊은 여자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다가 끅끅 소리를 내며 눈물을 닦았다. 젊은 여자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맞댔다.

“우리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제가 같이 있어 줄게요, 지금 바로 가요.”

“네? 베트남 같이 갑니까?”

젊은 여자는 이 집이 그 집이 아니었구나, 하고 이마를 쓸었다. 집의 위치를 깨달은 후 여자의 머릿속엔 현실적인 요소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베트남까지의 비행기 표 값이랑 성진이는요?”

여자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은 하나도 듣지 않고 오로지 고향만을 생각했을 거다. 여자의 하루는 고향의 꽃, 아득한 새벽을 닮은 엄마 냄새, 이웃들로 가득 찼었을 것이다. 힘 풀린 눈동자와 꽉 찬 미소가 대비되는 얼굴로 있었을 것이다. 젊은 여자가 어쩔 줄 모르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성진이랑 같이 가고 싶으세요?”

“네, 하지만 안 됩니다. 성진이는 한국에 있어야 합니다.”

“성진이는 걱정 마시고 속씨나 비행기 표 값이나 구할 궁리나 하세요.”

“네?”

“성진이는 어떻게든 제가 지켜드릴 게요. 할머니 댁이 엄청 멀지만 않다면 매일 퇴근길에 들릴게요.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듣는 여자의 정확한 발음이었다. 여자가 다시 울기 전에 표 값까지 이야기를 끝내야했기에 젊은 여자는 서둘렀다.

“아마 베트남까지 가는데 비행기 값만 70만 원 정도들 거예요.”

“저 돈 하나도 없습니다……”

“내일 일찍 나오세요. 저랑 같이 일 찾으러 가요.”

“네?”

오늘 하루 여자의 얼굴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없는 순간이 없다.

“같이 일해요. 흔쾌히 받아주는 곳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같이 일하는 거니까, 금방 일자리도 찾고 돈도 벌 거예요. 같이 찢기로 했잖아요, 이 어둠.”

더하기. 눈물도 없는 순간이 없다.

내일 아침 여섯 시 오십 분까지 여자의 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둘은 헤어졌다.

여자가 여자네 집골목이 나오는 코너를 막 돌았을 때, 여자의 발에 채인 건 문 밖으로 튀어나온 부러진 상다리와 흙 묻은 시금치였다. 여자는 문득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는 계속적으로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집 안에 들어갔다간 날아오는 컵에 코가 내려앉을 지도 모른다고, 베트남 말로 생각했다.

보람 슈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자던, 남의 집 평상에서 누워 자던 어떻게든 자리를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여자는 뒤돌았다. 이 때 뒤에서 검은 손이 여자의 머리를 낚아챘다. 여자가 뒤돌아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사실 누군지 바로 알아챘지만―뺨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남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여자에게 집어던졌다.

“찢어 죽일 년아! 내가 오늘 너 정말로 찢어 죽인다!”

유리와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 이따금씩 삐져나오는 여자의 낑낑이는 고함 소리에 사람들이 한 둘 모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이장님이 달려오셨다.

“아이고, 영철이 자네 왜 이러는가.”

사과밭 주인이 나서서 말리자 속속들이 끼어드는 사람들로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

“속씨나, 영철이는 어떻게든 우리가 잡아 놓을 것이니까 오늘은 사과밭 네에 가있어.”

여자는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사과밭 아주머니 품에 안겼다. 여자는 가기 전에 잠시 챙길 것이 있다며 집에 들어갔다. 성진이네 책상 서랍에서 고무줄로 돌돌 말린 코팅지를 한 장 꺼내왔다. 갱지 연습장도 한 권 꺼냈다. 사과밭 네에 도착한 여자는 사과밭 아주머니에게 꽃을 하나 구해 달라 말했다. 사과밭 아주머니는 잠시 나갔다 오시더니 달맞이꽃을 한 송이 꺾어오셨다.

“달맞이꽃들이 집 앞에 잔뜩 피어 있길래 하나 꺾어 왔어. 오늘은 달을 제대로 맞았을 틴디, 노오란 게 이쁘지?”

여자를 볼 때마다 영어를 쓰는 사과밭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품에 안긴 순간부터 계속 떨고 있던 여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하지만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큰 떨림이 가기까지 사과밭 아주머니는 여자 곁을 지켰다.

여자는 남은 떨림을 떨쳐내려 눈을 감고 그녀 나라 말을 몇 번 읊조렸다. 여자는 연습장 사이에 달맞이꽃을 끼우곤 꾹 눌렀다. 연습장에 달맞이꽃 물이 배였다. 여러 번 그를 눌리고는 미리 비닐을 뗀 코팅지 위에 올렸다. 남은 코팅지로 달맞이꽃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가위로 예쁘게 잘랐다. 평형을 맞추기 위해 자른 코팅지의 양이 처음 모양을 잡을 때보다 많이 쌓였다. 달맞이꽃 물이 든 연습장을 북 찢어서 달맞이꽃을 누를 때보다 더 세게 글을 썼다. 물든 부분의 잉크 번짐에 아쉬워하다가 이내 가로로 두 번 접었다. 혹시나 누가 들춰볼까 주머니 속에 넣고 허리 고무줄을 배꼽 위까지 올렸다.

여자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여자는 힘없는 고개를 몇 번 두리번거리다 화장실 옆 창고에 들어갔다. 창고 안에선 한동안 물건 뒤집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창고를 나와 페인트칠이 드문드문 벗겨진 하늘색 철문을 지났다.

다음 날 젊은 여자는 10분 정도 일찍 여자의 집골목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자는 일곱 시 삼십분이 되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 늦게 들어가서 늦잠을 자나 부터 혹시 남편에게 많이 맞아서 걸을 수조차 없는 상태인가 하는 걱정까지 수많은 생각들이 새벽의 골목을 채웠다. 삼십이 분을 갓 넘겼을 때 동네 아저씨들이 흙먼지를 일며 달려왔다.

“참말이야? 참말 속씨나가 죽었어?”

“자살이라던데. 정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여자는 바로 일어나 아저씨들 무리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인지, 어디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달릴 수 있게 숨을 아끼는 것이 젊은 여자가 믿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 큰 갈대가 빽빽하게 서있는 곳이었다. 앞부분은 사람들의 발에 짓눌려있어 여자의 모습이 단번에 잡혔다. 여자는 바닥에 누워있었다. 사람들은 여자가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말했다.

“같이 찢어 죽이기로 약속 했으면서……”

사람들이 젊은 여자에 주목했다. 젊은 여자는 개의치 않고 딱딱하게 굳은 여자의 팔을 잡았다. 일어나라고, 눈 떠보라고 여자를 흔들자 여자 주머니 속의 편지와 책갈피가 떨어졌다. 책갈피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아가씨에게’ 라고 적혀있었다. 젊은 여자는 또 거기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과연 속씨나는 달맞이꽃의 꽃말이 자기 자신을 뜻하는 밤의 요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기다림의 꽃말만 알아서 어느 날 갑자기 손에 들려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이 두려웠을까.

편지에도 아가씨에게 라고 적혀있었다. 편지지 겉에 주름진 자국들이 보였다. 여자의 눈물이 마른 자국이었다. 편지에는 꽉 찬 달 그림과 함께 ‘성진이를 잘 부탁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한 획에 서너 개의 잉크 웅덩이가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은 눈물로 번져 읽기 힘든 수준이었다. 어젯밤 여자가 편지를 꽉 쥐고 얼마나 울었을지 상상이 되었다. 젊은 여자는 여자를 끌어안고 한 시간 동안 대성통곡을 하다 끝내 쓰러졌다.

그 날 밤엔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진 달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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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으로 느끼면서 보았습니다. 와... 이 말밖에 안 나오네요. 특히 마지막 대목에선 머리끝이 쭈뼛 서더군요..ㅎㅎ 이 글 속의 사회문제가 바로 저희 집과 제 주변에서도 있었던 일이기에, 더욱 푹 빠져서 봤어요 작가님 멋있어요! 별 다섯개 찍고 갑니다^^

    • 2011-07-21 22:14: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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