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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영화가 아니잖아요.

  • 작성자 질리지않아
  • 작성일 2011-02-10
  • 조회수 418

-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

“얼마 후 죽는다니까?”

“알아!”

“그래도 한다고?”

“한다니까?”

준현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답한다. 그러나 그 모습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 아주 평범하게 살다가 고등학교 들어서 급작스럽게 간암이라는 판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암이라는 놈이 간에 너무 전이된 상태이기에 앞으로 내일의 생사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왜 해! 왜 하느냐고 이 자식아! 네 몸 걱정해서 병원에 누워 있어도 시원치 않은 판에 왜 하느냐고! 왜!”

나는 화가 버럭 났다. 아프면서도 아픈 척하지 않는 준현의 얼굴이 평소에 조금만 아파도 투정부리는 나의 일상에 주먹질을 해대는 것 같았다.

“죽기 전에 뭐 하나 남기고 싶어서 그런다! 이 자식아! 내가 병원에 누워 있음 누가 간호해 주니? 내가 보호자라도 있니?”

그랬다. 준현의 아버지도 준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고 간암 말기로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준현이가 7살 때 흔적 없이 사라지셨다. 준현은 할머니 밑에서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며칠 전 돌아가셨다. 이제 그는 보호자가 없다. 이게 지금 그의 상황이다.

“야! 그래도·········.”

눈물이 없는 내가 자연스레 눈물을 흘려버렸다. 김준현, 이놈은 참 이상한 놈이다. 그놈은 자기가 죽는다는 데도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학교에 나오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장래희망을 위해 노력하겠단다. 정말 미친놈이다.

“그래도 뭐! 내가 하겠다는데! 인생은 영화처럼 기적이 일어나는 거야!”

그랬다. 김준현, 이놈은 이런 놈이다.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꿈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놈, 나와 함께 영화계에 입문해 작가계의 쌍벽을 만들어 보자는 놈, 인생은 영화라고 믿는 놈, 그놈이 김준현이다.

“내가 네 소고집을 무슨 수로 꺾니! 내가 뭘 도우면 되는데!”

“써주면 돼. 시나리오를········. 그리고 그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어주면 돼.”

“미친놈!”

“너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아니다! 너밖에 할 사람이 없어서!”

준현이가 하얀 메모 한 장을 내게 건네준다. 하얀 종이 위에는 ‘심장이 없는 아이’라는 단어가 써져있다.

“이게 제목이야. 이제부터 진짜 공동 작업이 시작되는 거지.”

그가 슬쩍 미소를 띤다. 잔인한 모습이다.

그의 집은 참 초라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남겨 놓은 유일한 유산인 그의 집은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 거실이 있고 방이 있고 화장실이 있다. 나는 지금 그의 방에 있다. 그리고 그가 준비해 올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

“자! 진설님! 수제 소시지 대령이오!”

준현이 방의 문을 열며 음식 냄새를 풀풀 날린다. 손수 콩으로 소시지 모양을 만들고 팬에 구워 맛을 낸 준현만이 할 수 있는 음식이다. 난 음식을 받자마자 무식하게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그 맛이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환상의 맛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 맛이야! 이 맛은 왜 변하질 않니?”

나는 감탄한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할 시간이 없다. 그는 한 시간 후에 아르바이트를 가야 하고 나는 한 시간 후에 학원을 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빨리빨리 해보자!”

아르바이트가 생명인 준현이 재촉한다. 이렇게 보면 그는 절대 환자일 리 없다.

“그래! 이게 제목이란 거지?”

“응! 어때? 심장이 없는 아이!”

“괜찮은데? 세부 내용은 정했어?”

“아니!”

“너 참 깔끔하다!”

“너도나도 제목부터 떠오르는 병에 걸렸잖니!”

그랬다. 나도 그도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쓸 때면 제목부터 떠오르는 고질병이 있었다. 그 병은 우리 둘을 이어주는 고리가 되어 주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반에서 교내 문예 대회에 출전했다. 그러나 나는 우수상을 탔고 그는 최우수상을 탔다. 약간 저돌적인 성격이 있는 나는 그 수상에 화를 못 참고 최우수상에 작품을 쓴 사람을 만났다. 그가 준현이었다. 우린 만나서 함께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습관도 알게 되었고, 고질병도 알게 된 것이다.

“일단 약간 더 꾸며 보자면 어릴 때부터 심장이 약한 아이가 있는 거야! 그 아이가 엄마한테 심장을 이식받는 거지!”

“그리고?”

“그리고·······. 아! 머리에 쥐는 나는데 생각은 안 나!”

우리는 어느새 소시지를 먹는 것에만 온 집중을 쏟고 있다. 역시 시간관념 없는 우리의 공통 된 약점은 우리는 고칠 질 못 했다.

“야!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냐?”

준현이 놀란다. 그저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린 항상 뭉치면 글보단 다른 일에 관심을 쏟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아르바이트 가야 해!”

준현이 오랫동안 보아온 코트를 입는다. 나도 그를 따라 짐을 챙긴다.

“으유! 나는 학원에서 기막히게 생각해 볼 테니까! 너는 아르바이트 가서 코피 나게 생각해 봐!”

우린 헤어진다. 주말에 잠정적으로 만나자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준현의 아르바이트는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학원이 끝나고 준현의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갔다. 꽤 멀지만, 왠지 그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는 그의 아르바이트 현장에 덜컥 들어갔다. 그는 놀란다. 아주 깜짝 놀란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나와 달리 감정이 풍부했다. 아주 작은 것에 웃고, 아주 작은 것에 슬퍼하고, 아주 작은 것에 놀라워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고 금세 잊어버리는 게 준현이었다.

“어떻게 왔냐? 이 늦은 시간에?”

“뭐가 늦은 시간이냐? 그냥 네 궁금해서 왔다!”

“아! 맞다! 나 스토리 다 생각났어! 심장이 없는 아이·········.”

“그래? 그럼 들어볼까?”

준현이 나에게 조금씩 다가온다. 그런데 매우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낯빛이며 걸음걸이며 전체적 이미지가 매우 안 좋아 보인다.

“너 상태가 매우 메롱 인 것 같은데?”

“어········.”

준현이 갑자기 쓰러진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놈 때문에 요즈음에 눈물이 많아진다.

“엄마! 준현이가 죽는다. 당장 수술을 안 하면 죽는대!”

꺼이꺼이 심장이 운다. 울음이 멈추질 않는다. 다음날이 되었는데도 나는 학교 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 그만 울어! 준현이를 도와줄 사람이 없잖아!”

“그럼 그냥 죽게도? 그냥 이렇게 보내라고?”

“아들! 그럼 학교에 기부를 부탁해보는 건 어떨까?”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준현이를 살릴 수 있다. 나의 노력이라면 준현이를 살릴 수 있다. 나는 바로 학교로 달려갔다. 물론 집에 잠깐 들러 몸을 정갈히 하고 교복도 입고 학교로 갔다. 하지만, 난 수업을 듣지 않았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기부를 받기 위해 돌아다녔다. 원래 이런 짓을 하고 돌아다니면 벌점을 받고 출석을 안 했다고 선생님들에게 욕을 먹겠지만, 평소 이미지를 잘 만들어온 나는 최소한 욕은 먹지 않았다. 기부금도 약간씩 쌓여갔다. 선생님들의 쌈짓돈이나 준현의 사정을 아는 아이들의 돈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돈으로는 한 끼 저녁 식사도 못 할 돈이었다.

나의 기부 시위는 멈추질 않았다. 야자가 끝나고 9시가 되었는데도 멈추질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난 독했다. 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자리에서 계속 돈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어 선생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는 함박웃음을 지고 가시더니 잠시 후에 옷을 챙겨 입고 오셨다. 그리고 나의 손을 잡았다.

“가자! 내가 돈 내마!”

순간 난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을 독수리처럼 공격하시는 국어 선생님이 천사처럼 보였다. 아니, 그는 천사다. 그는 나를 차에 태우시더니 바로 병원으로 가셨다.

병원에 도착하니 엄마와 몇몇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순간 머릿속에 작가적 직감이 생기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입으로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수술이 시작됐다. 나는 학교에 간다. 그리고 평소처럼 산다. 그냥 소식만 듣는다. 엄마로부터 혹은 친구의 엄마들로부터 이야기만 듣는다. 그러다가 한 달 후에 준현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잽싸게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는 그동안 살이 기하급수적으로 빠진 준현이 침대에 누워 있다.

“왔니?”

“네가 김준현 맞아?”

그를 못 알아볼 뻔했다. 눈이며 코며 입술이며 얼굴이며 주름이며 몸이며 다 달라졌기 때문이다.

“맞다! 앉아라.”

한 달 동안 서로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우리 사이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흐른다.

“너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며? 네 덕분에 수술도 받았다.”

“그게 나 덕분이냐? 선생님들이랑 학부모님들 덕분이지!”

준현이 내 눈을 못 마주친다. 마음속에 미안함을 한가득 품고 있는 것이다.

“아! 맞다! 심장이 없는 아이!”

“심장이 없는 아이? 그럼 날 오라고 한 이유가·······.”

“우리 시나리오를 끝마쳐야지!”

“미친놈!”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미친놈이다.

“어쨌든 지금부터 잘 받아 적어. 펜 들고!”

난 그의 말을 따라 메모지와 펜을 들었다. 도대체 지금 이게 병실에서 무슨 짓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우리는 참 기가 차는 놈들이다.

“일단 전에도 말했듯이 어릴 때부터 심장이 약한 남자아이가 있어. 그리고 심장을 물려줄 엄마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지.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걸 본 심장이 약한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지지. 엄마는 위급한 아이에게 심장을 주고 세상을 떠나게 돼. 그런데 아버지는 자기 아내가 사라지자 아들을 때리기 시작한 거야. 어머니의 심장을 가진 아들은 더 이상의 화를 못 이기고 아버지를 살인하고 말지. 어때?”

“뭐야? 그게 끝이야?”

“이걸 토대로 잘 섞어서 단편영화로라도 만들어줘.”

“싫어. 난 못해. 네가 다 낳으면 그때는 생각해줄게.”

“네가 싫으면 어쩌니? 그럼 10년 후에라도 작가 되겠다는 놈 찾아서 만들어줘.”

그는 이 말만 하고 피곤한 듯 눈을 감는다. 약기운이 온몸에 퍼진 듯하다. 난 그가 잠들자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그에게 묻지 못했던 질문을 한다. 그의 수술 경과, 회복 수준, 심리 상태 등을 검사한다. 다행히 전반적으로 좋은 듯하다.

기말고사가 왔다. 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동안 준현이 때문에 못했던 공부를 몰아서 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부족하다. 밤을 새우면서까지 펜을 든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시험이 끝났고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부모님으로부터 준현이의 소식을 들었다. 난 처음에 부모님이 준현이 얘기를 꺼내기에 준현이가 완쾌되어 병원을 나왔다는 소식을 전하실 줄 알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준현이가 오늘 아침에 세상을 떠났대.”

난 오늘이 만우절인 줄 알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에게 장난을 거는 줄 알고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았다.

“장례식은 학부모회에서 치러주기로··········.”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꾹 닫아버렸다. 준현이가 그렇게 믿었건만 인생은 영화가 아니었다. 인생이 영화였다면 기적이 일어났어야 했다.

장례식에 참가했다. 준현이가 해맑게 웃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나는 울지도 못하고 사진만 뚫어지라 보았다. 왠지 그러면 준현이가 저 관을 열고 살아 돌아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하려고 괜찮은 척했니? 이렇게 갑자기 떠나려고?’

난 이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준현이에게 하소연을 한다. 진짜 준현이가 앞에 있는 느낌이다.

‘나쁜 놈! 미친놈! 심장이 없는 아이가 너였냐? 그게 너였으면 진작 말을 하지! 입이 있으면 열어야 할 거 아냐!’

하소연은 끝나지 않는다. 아니, 끝낼 수 없다. 이 손님이 없는 장례식장을 채울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홀로 슬퍼하는 것을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나에게 엄마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내 왼손을 잡아준다.

“아들아. 인생은 영화일 거야. 다만, 준현이 영화는 단편 영화인 거지. 준현이는 자신의 단편영화 안에서 온 힘을 다해서 연출했어. 그런데 너무 열심히 연출해서 필름이 없어진 거지. 난 아들이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아들이 만들어 가는 인생 장편 영화를 보고 싶은데?”

엄마가 나에게 속삭여주었다. 그 속삭임이 나의 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 2011년 [심장이 없는 아이]는 [엄마의 심장]으로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단편 영화로 제작 될 예정이다. -

질리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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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라거스

사월이면 네가 온다고 했는데. 이삭 끝이 단단해지고 가장 향긋한 봉오리 향내가 날 때. 분명히 약속했는데. 네가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닌데. 약속대로라면 세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손톱을 자꾸 뜯게 돼. 냉장고를 열고 멍하니 아스파라거스만 바라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딱딱하게 서 있는 초록색 기둥을.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보관해두라 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돼. 사월 안에 오지 않을 거면. 살짝 데친 후에 랩에 둘둘 싸서 냉동보관 하라고 했으면 좋잖아. 진작 그랬으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데. 네가 오면 오랜만이야 하고 냉동고에서 랩에 싼 아스파라거스를 꺼냈을 텐데. 조리하기 어려운 식재료야. 아스라파거스는. 내가 필러로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벗기려 할 때마다 너는 내 손을 멈추게 했잖아. 그렇게 다루는 거 아니라고. 끝과 봉우리가 가장 맛있는 거니까 아래쪽 반 정도만 필러로 껍질을 벗기고 밑동에서 일 센티미터는 잘라내고 껍질을 벗기는 거라고. 사실 이 말이 이해가 안 돼. 나는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몽땅 벗겨 그 속을 알고 싶은데. 조리시간에 따라 씹히는 느낌도 다르고 맛도 다른 게 아스파라거스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의 부재가 느껴질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했어. 너는 나를 잠시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에 올려둔 거라고. 네가 씹히는 게 하나도 없는 무른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싶은 거라고.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했어.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바로, 나는 아스파라거스를 데치고, 랩에 싸서 냉동고에 넣어야 했어. “잠시 시간을 갖자. 4월 안에 돌아올게.” 다시는 녹지 않게, 최악에 온도로 꽁꽁 얼렸어야 했어. 꺼내면 다시 녹을 수 있으니까, 냉동고는 못 열게 자물쇠로 잠가 놓았어야 했어. 근데 나는 바보같이 네 말을 믿어버린 거야. 돌아올 거라는 네 말. 물을 담은 플라스틱 통에 넣어둔 아스파라거스가 흔들려. 냉장고 안에 바람이 부나? 눈이 시큰거려. 냉기를 너무 쇘나?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정성스레 하루에 한 번 물을 갈아줬는데. 네 봉우리가 단단해지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가만히 앉아 이것만 보는데도. 째깍째깍 너무 잘 가. 조금만 있으면 5월이네. 그럼 너는 약속을 안 지킨 거고. 너를 나를 진짜 배신한 거네. 5월이면 나도 아스파라거스를 버릴래. 아스파라거스는 4월이 가장 맛있으니까. 너 없이 필러를 사용하는 것도, 오일을 두르고 팬에 올리는 것도, 자신 없으니까. 하루에 한 번 물 갈아주기 싫으니까. 싱싱하게 기다리기 싫으니까. 나도 잔인하게 시들어 버린 후에 새롭게 피어나고 싶으니까. 생장점 순 끝이 벌어지지 않은 것이 좋다고, 네가 한 번 경고했던 내용이 이제야 생각나네. 플라스틱 통을 꺼내 초록색 기둥을 살펴보니 생장점 순이 벌어져 있어. 아, 그래서 네가 나를 떠난 거네. 아·······. 너를 사랑하는 동안 생

  • 질리지않아
  • 2012-09-28
내일

아파트를 나가면 바로 보이는. 분리수거함 앞에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겨울에 보면 눈이 쌓여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케 하는. 쓰레기봉투들. 하얗게 잘 포장된. 꼭 크리스마스 날 산타할아버지가 건네줄 선물처럼. 하지만 가까이 가면 눈을 돌리게 되고 코를 틀어막게 되는. 그런 것들이 심장 한구석에 피라미드처럼 쌓이면 나는 설거지를 하게 된다. 그래, 분명히 그러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수도꼭지를 위로 올리고 물이 나오면 아버지가 때를 밀기 전에 탕에 들어가 몸을 불리는 것처럼 접시들을 대야에 담아놓으면 되는 것이다. 몇 분 후에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접시를 하나 들어 그것의 원형도 찾아볼 수 없게 거품만 잔뜩 묻히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수도꼭지를 위로 올려 그것의 원형을 찾도록 빡빡 거품을 씻겨주면 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목욕하는 것처럼 똑같이. “쨍그랑!” 하지만 오늘은 매일 밤 오는 쓰레기청소부가 분리수거함 앞을 그냥 지나쳤는지. 혹은 그것들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착각해선지. 마음 한구석 속 쓰레기가 그대로다. 검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거품이 가득 찬 밥공기 안에 거품이 붉게 터진다. 누군가를 향한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이틀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심장 속에서 붉게 터져 오른다. 아프다. 심하게. 4. 항상 나의 성적에 붙는 숫자. “한성아. 너 성적 좀 올려야 하지 않겠니?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전교 4등·········.높은 등수이긴 하지만············.” “알아요. 선생님·········.” “이번이 마지막 시험인 거 알지?” “예.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가 봐.” 선생님의 부름에 끌려가듯이 간 교무실에서 나왔을 땐 놀이공원에 고장 나서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는 기분을 느낀다. 조명은 무슨 일인지 다 소등되어 있다. 유일하게 빛나는 곳은 내가 남아서 공부할 교실이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다. 간신히 한 손으로 창가에 기대서 걷는다. 터벌터벌. 걸음은 내가 옮기는 것이 아니다. 옮겨지는 것이다. “이봐! 유씨! 무슨 일이야?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아?” 창명이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얹는다. 나보다 등수 높은 자식········. 혼곤한 정신이 맑게 트인다. “어····&m

  • 질리지않아
  • 2011-12-31
설원 속 자동차 한 대

하얀 무덤. 모두가 그곳을 그렇게 불렀다. 아니,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그곳에 들어가겠다고 유난을 떨며 도전을 해도 결과는 ‘실종’이란 두 글자만 남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 유난을 떨며 도전을 하겠다는 사람이 어느 순간 되어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황금! 그 설원 속 어느 동굴에는 황금이 있다는 지질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장이 언론과 TV에 처음 전파됐을 때 그곳을 향한 도전의식을 품지 않은 국민은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일단 이 같은 국민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에 정부가 사전답사를 하고 여행허가를 내릴지 혹은 금지할지 정하겠다는 거였다. 당연히 몇몇은 반대했다. 여행을 가는 것은 국민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사람, 정부가 황금을 노린다고 질책하는 반대파들이 목소리를 크게 냈다. 하지만 찬성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찬성파는 위험지역을 가기 전 정부가 확인하는 건 필수라고 목소리를 크게 냈다. 결국 정부는 소규모의 탐험 조직을 그곳에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실종’이었다. 그 이후 정부는 몇 차례 더 그곳에 군인이나 이름이 알려진 탐험대를 보냈지만 결말은 항상 같았다. 그 이후 그곳은 속세에 의해 ‘하얀 무덤’이라 칭해졌다. 엄청나게 의외이지만 정부는 그곳을 여행 안전 지역으로 분류하고 여행을 허락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정부의 여행 허락은 일반 사람의 마음속에 ‘황금주의’의 불꽃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실종’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일어났다. ‘유난을 떨며 도전하겠다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었다. 한 달에 실종자가 10명 안이면 적은 것이었다. 나도 어느 순간 ‘유난을 떨며 도전하겠다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나오는 실종자 중의 한 명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회색빛으로 멍든 하늘, 지겹지도 않은지 끊임없이 내리는 눈, 그리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덮인 땅과 극한의 추위. 그 모든 게 그곳에 있다. ‘무덤’이라 할 만하다. 난 지금 이런 고통을 삼 일째 버티고 있다. 삼 일 전, 나는 자동차 지붕 위에 얹혀져 있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단지, 난 사흘 전 황금을 찾다 길을 잃었고 추위의 고통을 버티다 못해 쓰러진 것뿐이었다. 그런데 일어난 장소는 자동차 지붕 위였다. 물론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설원 위에 이 자동차는 왜 정차된 것일까. 나는 왜 쓰러져있었던 장소에서 눈을 안 뜨고 이런 자동차 지붕 위에 얹혀 있게 된 걸까. 내 짐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질문들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살아남는 것! 물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황금이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곳은 황금을 탐낼 곳이 되지 못한다. 속세가 '무덤'이라 칭한 이유가 있었다. 사흘 동안은 그럭저럭 살

  • 질리지않아
  • 201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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