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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루극
  • 작성일 2010-11-21
  • 조회수 455

 

1

 

 꿈의 연장인듯 하다. 나는 어디에서 언제 눈을 떴는지 모른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어둠 뿐이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다. 소리는 단번에 사라지지 않고 몇 번의 메아리를 남긴다. 동굴인가 싶다. 시력은 아무 소용이 없고, 청각과 후각이 전에 없이 선명하다. 빗물인듯 비릿한 냄새, 간간히 섞여드는 흙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언제 부터 걷고 있는지, 걷고 있기는 한 건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일부러 발을 질질 끈다. 맨발이다. 시멘트나 콘크리트 바닥인지 발바닥과의 마찰음이 들린다. 순간 자신이 죄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지하감옥이 아닐까. 누군가 날 감금하고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나마저도 자신이 얼마의 형을 받았는지 왜 갇힌지를 잊은 채, 잠들고 깨고를 반복하며 꿈 같은 현실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찰나였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멀리 희붐한 파란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현기증이 난다. 멈춰서서는 무릎을 조금씩 구부린다. 엉거주춤 쪼그려앉은 꼴이다. 검지로 바닥을 문지른다. 양 몇 마리를 그린다. 언뜻 보이는 바닥은 회색빛이다. 몇 미터 안 떨어진 곳에 사람 몸통만한 쇠기둥이 있다. 돌연 끼치는 어떤 욕구처럼 현실감각이 돌아온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팔을 위로 뻗고 기지개를 편다. 무릎을 가슴팍까지 들기도 하고, 양쪽 기둥 사이를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아직 주변을 분간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한 번도 어둠 속을 헤맨 적이 없다는 듯 괜한 허세를 부린다. 이곳은 집이다. 터널이다.  

 밤새 비가 온 탓에 천장의 균열 사이로 빗물이 떨어졌다. 곳곳에 웅덩이가 생겼을 것이다. 나는 바닥을 더듬어 얕은 웅덩이를 찾는다. 발을 담근다. 흙먼지가 수면에 찬찬히 떠오를 것이다. 물은 그 자체로 하나인지, 물결치며 분열하는 세포인지 아리송하다. 나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웅덩이의 속을 보려 한다. 새카만 발등은 기포를 머금을 것이다. 물방울은 어류의 알처럼 한곳에 달라붙어 저들끼리 뭉쳐 있다가 포식자의 공격을 받는듯 한순간에 흩어질 것이다. 기포들은 터져버릴 것이다. 웅덩이의 표면에는 시체처럼 혈기 없는 몰골과 푹 꺼진 눈두덩, 거의 뼈만 남은 가운데 아랫배만 불룩한 내 몸뚱어리가 물결 따라 흐르며 갈라질 것이다. 나는 두 눈을 가린다.

 

 

2

 

 비가 내렸다. 터널 안에서 바라본 입구는 진한 푸른빛을 머금은 채 바닥에서부터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빗소리가 창창히 귓전을 파고드는 가운데, 나는 쉼 없이 맴을 돌았다. 신의 천벌과 같이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통에 나는 불안했다. 아버지가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아버지가 주워온 낡은 시계의 시침은 십 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거 거의 지옥문인데요.'

 나는 낮에 찾아온 공무원이 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침에 아버지가 나가고 해가 어딘가로 숨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 없이 나간 아버지를 걱정하던 차에, 멀리서 탁 하고 자동차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우산을 쓴 장정 둘이 터널을 향해 걸어왔다. 흰 셔츠 차림의 남자들은 쏟아지는 비에 짜증이 난 듯 보였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버지가 아닌 사람이 터널에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터널의 한쪽 벽은 시멘트를 바르다 말아 야트막한 담처럼 생겨먹었다. 아버지는 그 너머의 흙을 퍼다가 사람 두어 명 들어갈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검은 비닐봉투에 멀쩡한 옷이며 가재도구를 모아 담 너머에 던져두었다. 나는 그곳을 떠올리고는 퍼뜩 담을 넘었다. 흙냄새가 났다.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거 거의 지옥문인데요, 우산을 접으며 터널에 들어선 남자가 동행에게 말했다. 나는 담 위로 슬쩍 얼굴 내밀어 남자들의 인상을 살폈다. 지옥문 운운한 사내는 30대 초중반처럼 보였고, 동행은 그 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다.

 "저거 시계 아니냐?"

 나이 든 남자가 터널 초입 기둥에 걸린 시계를 보며 물었다. 나는 무슨 죄나 지은 듯이 숨소리도 죽였다. 

 "글쎄요, 당장 며칠 새 누가 지낸 흔적은 없는 거 같은데."

 젊은 남자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그에게 대답했다. 나이 든 남자가 양복바지 뒷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냈다. 젊은 남자가 휴대폰 불빛으로 서류를 비췄다. 

 "78년도 가을 공사 시작, 79년도 봄 터널 앞 도로 건설 취소, 터널도 함께 취소……. 근데 이거 굳이 허물 필요가 있나? 위에서 까라니까 깐다만, 보니까 교통량도 거의 없던데."

 "그게, 도로변이랑 이 산 앞에 들판으로 해서 대규모 꽃밭을 조성한답니다. 그러자면 이 터널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낮에도 을씨년스럽고."

 "그래? 내 생각에는 요번 시장 바뀐 탓이다."

 나이 든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거리 뒤엎는 거랑 비슷한 겁니까?"

 젊은 남자도 그에 합세해, 두 사람은 한동안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당장 한 이 주 뒤로 일정 잡을까요?"

 상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구두코로 한쪽 벽을 툭툭 찼다. 젊은 남자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아 그리고 공사는 이번에도 우림 건설 쪽에다 수주할까요?"

 상관이 젊은 남자를 옆으로 슥 쳐다봤다.

"물을 걸 물어야지. 박 사장이 요새 뜸하긴 한데……. 아직 우리는 받을 게 많다는 걸 내비쳐야지."

 상관은 주변을 살피며 헛기침을 하더니 터널 밖을 나섰다. 젊은 남자가 작게 킬킬대며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그들이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는 담을 넘었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터널에는 출구가 없다. 그것은 70년대 말 도로교통 계획의 오류 중 하나였다. 시 외곽의 낮은 산을 통과하기로 돼 있던 이차선 도로의 건설이 취소됐고, 이미 건설 중이던 터널만이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고 그 무엇도 통과할 수 없는 통로. 언뜻 보면 둥지인 이곳이 나와 아버지의 보금자리다. 우리는 필요한 만큼만 말을 한다. 불필요한 말, 그러니까 허장성세나 아부, 혼잣말은 이곳에서는 굳건한 시멘트벽에 부딪쳤다가 힘없이 튕겨 나갈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죽어버린 말의 잔해를 견디지 못한다. 나는 말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나를 뒤덮어버리는 상상을 하곤 한다.

 천장을 받치는 나무 기둥과 몇 개의 철근이 수십 년을 버텨온 덕에 터널은 그 위태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기둥에 달력과 시계를 달았다. 2004년도 달력이 몇 년째 걸려 있다. 그는 매년 매월 매일, 아침마다 날짜에 체크를 한다. 모나미 볼펜으로 대여섯 번씩 체크 된 서른 개 남짓한 날짜들이 이제는 자기들을 놓아달라는 듯 위협적으로 박혀 있다. 그의 시간은 2004년에서 한걸음도 떼지 못한다.

 나는 비적비적 더 맴을 돌다가, 터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어림짐작으로 매트가 있는 곳을 찾아낸다. 나는 쓰러지듯 엎어져 기지개를 켠다. 쭉 늘였던 몸을 용수철처럼 말고서 시멘트벽에 코를 댄다. 시큰한 냄새가 난다.

 

 

 3

 

 아버지는 빛이 싫다 했다. 아침이면 터널 초입부터 차오르는 햇빛이며, 열차가 내뿜는 두 개의 라이트며, 처음 보는 예쁘장한 소녀가 꾀죄죄한 자신을 빤히 쳐다볼 때의 그 안광眼光이며……. 그는 언젠가부터 앞이 침침하다 했다. 빛을 피해 습관처럼 눈을 감다가도, 또 빛에 맞서려 습관처럼 눈을 가늘게 뜬다 했다. 똑바로 떠서는 볼 수 없는 것이 눈꺼풀을 조금씩 들며 눈동자에 힘을 주면 그 형체를 드러냈다. 원형 속에 작열하는 불의 몸부림을 그는 언제까지고 쳐다봤다. 그러다 자신이 빛을 이겼다 했지만 아침이면 풀이 죽곤 했다.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르고 전날보다 더 찬란한 빛으로 그를 내려다 봤다. 매일 절대 권력이 그를 찾아와 무엇을 요구했다. 그는 무엇을 내놓아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돈과 직위, 가족과 웃음.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그저 슬금슬금 피할 뿐이었다. 

 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미지근한 기온이었다. 크림색의 벽지는 액체가 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2004년, 14살이었다. 아버지는 터널에 살고 나는 엄마와 동생,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살았다. 나는 그가 위선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밤이면 어느 순간 문간에 서 있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실눈을 뜨면 그의 흰자가 천천히 구르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아. 그 나이 때 이런 변화가 당연히 낯선 거지. 차차 좋아질 거야."

 남자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모두 좋아질 거라고. 아침 밥상에서 그는 생선살을 발라 내 밥 위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한없이 선한 사람의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구역질이 나려 했다. 그가 출근하고 나면 엄마는 나를 가슴에 품었다. 나는 엄마에게 속삭였다.

 "아버지가 터널에 있어요."

 "요한아."

 "지난번 통화 때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난 갈 거예요."

 "아버지는……. 예수님 같은 희생을 했어. 네가 그곳에 가면, 넌, 평생을 빚쟁이로 숨어 살아야 해. 혼자 짐을 지기로 한 사람이다."

 "하지만 엄마가 다른 남자랑 새살림을 차릴 거라고 차마 상상이나 하셨을까?"

 엄마는 나를 밀치며 뺨을 때렸다. 방문이 열리고 여동생 은혜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배고파, 엄마."

 엄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딸에게 밥을 차려주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베개에 대고 끄억끄억 울음을 삼켰다.

 2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몸이 반쪽이었다. 중소기업 사장의 풍채는 온데간데없고 완벽한 노숙자의 그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미동 없이 자고 있었다. 그러다 쇳소리를 내며 팔을 앞으로 내저었다. 그의 눈동자는 누런색이었다.

 "누구냐. 누구냐, 아. 내가 여러 개로 갈라졌어. 여럿의 내가 서로 포박했다. 멀리 은혜가 보였는데, 근데 말을 할 수가 없었어……."

 아버지는 다시 뒤로 쓰러지더니 잠들었다. 나는 절규했다.

 무섭도록 현실 같은 꿈이다. 시침이 둔탁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인다. 멀리서 한기가 느껴지며 소름이 훅 끼쳐온다. 미궁의 반인반수처럼 홀로 우뚝 선 그림자가 입구에 버티고 있다. 그 위로 더 거세진 빗발이다. 천둥이 울리고 곧 번개가 친다. 노랗게 혹은 새하얗게 그림자를 비춘다. 그림자로 보였던 게 실은 어둠에 싸인 사람이다. 밖에서 비를 맞는 채인지 터널 안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

 나는 속삭이듯 묻는다. 형상은 청동상처럼 꿋꿋하다. 천둥번개가 한 번 더 친다. 순간 형상은 와르르 무너지듯 쓰러지고, 나는 앞으로 팔을 저으며 달려간다. 아버지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몸을 파르르 떨고 있다. 얼굴이 검은 피딱지투성이다. 왼쪽 눈두덩이 달걀만큼 부어 눈이 거의 한 일一자로 뭉개진 형상이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손 엄지를 꽉 부여잡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오른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 본다. 손톱이 통째로 빠져 붉은 생살이 드러난 엄지가 눈에 들어온다.  

 

 

 

4

 

 아직 새벽인 듯 하다. 나는 선잠도 못 들고 탁한 눈동자만 어둠에 띄우고 있다. 아버지는 죽은 듯 숨소리도 없이 잔다. 어쩌면 정말 잠깐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코 밑에 피딱지를 달거나 팔에 멍이 들어 온 적은 있었어도 오늘 같은 반송장은 처음이다. 처음 아버지가 맞고 들어온 날 나는 늙은 아버지의 등에 대고 끄억끄억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는 이상해지고 있었다. 터널을 찾기 전 마지막으로 한 통화해서 그는 자신의 행방을 알렸고, 나는 엄마에게 뺨을 맞은 날 그 길로 터널로 향했다. 대화를 하려 하면 그 중 반은 헛소리였다. 만나고 2시간 만에 알아들은 건 건설 현장에서 측량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옛 인맥으로 겨우 얻은 일자리였는데, 원룸에서 쌀밥 먹고 살 수입은 된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터널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두려워 하는 것 같았다. 엄마의 처신이나, 망해버린 사업이나, 빚쟁이가 된 자신의 처지 같은 것들. 그는 곧 뿌리를 내려버릴 것처럼 이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공간에 집착했다. 볕 좋은 날 들판에 나가 쪼그려 앉아서는 웃통을 까고 엎드렸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햇볕에 등을 말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바이러스를 없애는 일이라 했다. 오염은 터널이 아니라 밖,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공사 현장 동료들에게 공연히 욕을 하고 헛소리를 했다. 인부들은 윗선 모르게 그를 두들겨 팼다. 멀쩡하게 점잖다가도 욕을 하는 게 그들에게는 완전한 미친놈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동이 터옴과 동시에 비가 그친다.

 쪼그려 앉아 바닥을 두드리던 내 시야에 집게벌레 한 마리가 들어온다. 그것은 여섯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더듬이로 땅을 툭툭 친다. 나는 벌레의 꼬리를 좇으며, 버티고선 발의 방향을 조금씩 튼다. 벌레는 직진하다가 유턴하고, 그러다 팔자를 그리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어쩌면 저 벌레는 집게벌레 왕국의 왕이었을 것이다. 붉은 개미 국國에서 쳐들어오지만 않았어도, 왕국을 잃고 부인과 딸이 떠나가지만 않았어도……. 지금 꿈속 어딘가 어둠을 헤매며 여전히 그 아들의 끼니를 찾는 장님 같은 몸부림이.

 내가 찰나 존 사이 벌레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듯 어둠 속을 파고든다. 화들짝 놀라며 황망히 주위를 살피던 나는 집게벌레가 사라졌음에 헛웃으며 주저앉아 버린다. 

 아버지에게 삶은 빚이다. 생활이 풍족하고 가정이 화목했을 때는 그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독립을 결심하고 그 자금으로 주변에서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을 때, 그는 서서히 느꼈을 것이다. 평탄하게 살아온 듯 보였던 자신의 삶 어딘가에 엄청난 빚이 웅크리고 있었다. 곧 그게 달려들진 않을까 하는 불안한 예감. 시공사와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며칠 뒤, 실은 유령회사와 계약했다는 핵폭탄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버지는 몇 시간을 어이없이 웃기만 했다. 아버지 친구에게 들은 바로는 선금만 21억 원이었다.

  아버지가 엄마와 서류상 이혼하고 우리들을 호적에서 정리했을 때, 그는 그때까지도 우리와 전혀 단절된 느낌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서류상 작업이었고, 우리는 여전히 월세 방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또다시 빚쟁이들이 들이닥쳤고, 살림살이가 모두 박살났다. 아버지는 우리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그의 빚은 원금이 21억 원에 이자가 2억 원이 조금 넘었다. 범법자 주제에 너무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는 어디로든 숨겠다 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우리들 교회만은 꼭 보내라고, 최소한 성경 말씀이라도 읽어주라고 당부했다. 아버지는 내가 남들에게 신뢰받는 삶을 살기를 원했고, 은혜가 은혜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다. 적어도, 자신처럼은 살지 않기를 원했다.

 

 

 

5

 

 주일 아침이다. 주일은 '교회 가는 날'이다. 그것이 목적인 날이다.

 나는 담 너머에서 내 몸통만 한 검은 봉투를 꺼낸다. 그 속에서 하얀 폴로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소리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나는 아직 깊게 잠든 아버지를 본다. 시체 같다. 평온한 표정이, 꼭 사흘 뒤에 부활할 예수님의 모습 같다. 나는 그림자가 걷듯 터널을 빠져나간다.

 듬성듬성 잔디가 난 흙바닥을 지나 5분 정도를 걸으면 오래된 이차선 도로가 나오고,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지나는 정류장이 있다. 나는 낡은 벤치에 앉아 발끝을 까딱거린다. 도로는 한산하고, 구름 몇 개가 천천히 하늘을 헤엄친다. 허공에 박혀 있던 내 시선이 멀리 터널을 향한다. 검은 구멍과 그 위로 솟은 낮은 산이 보인다. 산은 아직 습기가 마르지 않은 창창한 초록빛을 뿜으며 둥글게 파인 제 상처를 감싸고 있다. 나는 전날 검은 우산을 쓰고 터널을 찾아온 남자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비가 그치고 나서의 터널을 봤다면, 지옥문이네 어쩌네 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요하이 또 은혜 보러 가는 갑제?" 

 버스에 오르자 기사가 아는 체한다. 이 구간을 다니는 기사는 세 명 내외라 다들 나와 일면식이 있다. 근처에 집 한 채 없어 거의 무시하고 지나치는 정류장인데, 꼭 일요일 이 시간이면 말끔한 차림에 얼굴은 꾀죄죄한 소년이 버스를 타는 것이다. 그들은 날 좋아하 한다. 나는 40분쯤 가면 나오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앞에 내린다. 기사들은 저들 나름대로 갖은 추리를 할 것이다. 치유되기 어려운 병에 걸려 산에서 요양을 하다 주말에만 내려온다거나, 동생을 기숙사에 맡겨 놓고 자신은 심마니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린다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아버지는 곧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조급해진다. 기사는 거울을 힐끔거리며 내 표정을 살핀다.

 "요한이 뭔 일 있나? 급해 뵈네."

 "은혜……."

 나는 그 말만 하고서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기사는 멋쩍은 듯 라디오에 흐르는 트로트를 따라 부른다.

 내가 보는 것은 창밖이 아니다.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다. 움푹 파인 광대뼈에 천길 물속 같은 그림자가 나 있다. 간혹 나는 이러한 몰골로 이 광대한 지상에서 어떤 자존감으로 살아가나 자문을 한다. 하지만 내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에 불과해, 그 긴 생각을 하나의 문장으로 뭉쳐내기는 정말 쉬우면서도 불가한 일이다.

 '난 왜 사는 것일까.'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어떤 말도 없이 침묵해야 할 순간을 안다. 일요일 아침 버스를 타는 이 시간은 항상 그렇다. 생각이 가득 차 넘치며 출렁이는 정육면체의 공간 속에서 나는 숨이 막힌 채 허우적댄다. 간혹 붙잡는 부표 같은 것은 사실 더 깊은 수렁의 입구다. 그러니까 엄마, 동생, 가족, 교회, 돈, 아버지, 미친 소리, 폭력, 비명, 빚, 희생 같은 단어들. 공간 속 가득한 물은 최상의 감옥이다. 구태여 구속하지 않으며 철저한 자기만의 심연에 빠트린다. 항상 옆에 있는 듯 이미 자신 안에 들어와 있으며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모든 곳에 존재한다. 물속에 갇힌 갑갑함을 나는 현실에서 느낀다.

 창밖으로 몇 개의 능선이 지나고 버스는 도시로 진입했다.

 "요한아, 다 왔다. 야야."

 나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잠든 듯 몽롱하다. 기사가 몇 번을 더 부르고서야 나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다. 기사는 혀를 찬다. 나는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버스를 내린다.

 예배실에 들어가기 전 나는 교회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만진다. 헝클어진 머리에 물을 발라 말끔하게 넘기고, 때가 낀 목을 여러 번 씻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리자, 나는 종종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선다. 지나치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나를 힐끔 쳐다본다.

 "요한이 어서 와라. 곧 시작할 거야."

 예배실의 나무로 된 입구 앞에서 주보를 나눠주는 한복 차림의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는 교회 목사의 어머니다. 나이 팔십에 교회 밥을 하고 김치를 손수 담근다.

 찬양이 한창이다. 팔을 벌리고 율동을 하며 예수를 찬미한다. 내가 청소년 반에 가지 않고 성인 반에 가는 이유는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지켜봐야 할 사람이다.

 "왔냐. 형 어제 또 다 꼴았다."

 나는 목사에게서 가장 먼 곳, 노숙자 자리에 앉는다. 예배 마다 스무 명 정도가 찾아와 예배를 보고 구제금을 타간다. 구제금은 천 원에서 천오백 원이다. 그들은 그 돈을 모아 술을 사거나 경마에 쏟아 붓는다.

 "은혜는?"

 내가 묻는다. 관심사는 그뿐이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건우 형이 고갯짓을 한다. 성가대 앞자리에 단정하게 땋은 머리의 뒤통수가 보인다. 건우 형은 내가 은혜를 좋아하는 줄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 말도 못 걸고 멀리서 쳐다만 보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는 보름 동안 모은 3만 원 가량을 경마에 썼다가 몽땅 날렸다. 그런 식이다. 그가 꿍쳐두는 것은 삼각 김밥과 라면 살 돈이 전부다. 형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다만 돈과 목숨의 존재를 안다. 그래서 남들이 기도할 때에 그는 눈을 감고 돈을 그린다. 천 원 지폐가 자신이 모아둔 지폐들 위에 내려앉으면 어디선가 땡, 하고 전자음이 울리고는 지폐 세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그리고는 지폐 위로 돈의 액수가 붉은 글씨로 탁탁 박힌다. 아멘, 눈을 뜨면 돈의 잔상이 그를 환락에 몰아넣는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좋아한다.

 은혜는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옆에 앉은 여자는 소녀의 손등을 누르고 있다. 중년의 여자는 선글라스를 쓴 채다. 엄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다. 딸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시선을 뒤쪽에 고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수한 듯 고급스럽게 한 화장이 오늘만 되면 엄청난 사치처럼 여겨질 것이다. 여자는 속으로 몇 번이고 다음 내뱉을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그리고 평소 보다 낮은 음성으로 딸에게 말할 것이다.

 "앞에 봐."

 그래도 은혜는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우리는 눈동자 너머 머리통 속 어떤 기관을 보듯이 서로 조금 더 먼 곳을 응시한다.

 목사가 예배를 시작한다.

 머리를 빗어 넘긴 목사가 침을 튀기며 내뱉은 말에는 희망이며 구원이며 행복과 같은 단어가 반복됐다. 옆자리 건우 형은 내게 너스레를 떨었다. 난 저런 거 안 믿어. 돈을 믿지. 천오백 원을 믿어. 그게 나를 구원할 거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예배 중에는 은혜가 나를 보지 않을 것을 안다. 엄마는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교회를 빠져나갈 것이다.  

 헌금을 걷는 동안 성가대가 찬양을 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찬송가 선율에 따라 흥얼거린다. 가사는 알면서도 발음하지 않는다. 사랑이나 희망 같은 단어를 함부로 내뱉을 수 없다. 나에게 단어는 그 의미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사랑은 소용돌이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이 휘몰아치고, 희망은 온 우주의 어둠에 단 하나 별빛만큼이나 작은 것에 대하여 노래한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을 한다. 말이 담는 무게를 무시한 채, 한순간 주목을 위해 몇 번이고 내뱉는다. 말의 흐름에 압사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은혜는 어머니의 손에 붙들려 예배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오늘은 결판을 낼 생각이다.

 교회 주차장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라이트를 깜박이며 서있다. 남편과 아들을 터널에 방치한 여자와 그녀의 딸은 차 뒷좌석에 올라탄다. 선한 인상의 남자는 차를 출발시킨다. 나는 양팔을 벌리고 그 앞을 가로막는다. 엄마의 눈이 커진다. 남자는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려 여자와 뭐라고 대화를 나눈다.

 "엄마! 엄마! 엄마!"

 나는 연거푸 소리친다. 여자는 남자에게 급하게 뭐라고 말한 뒤 고개를 숙인다. 은혜는 집게손가락으로 두 눈을 가리고 소리를 빽 지른다. 나는 그 광경이 동화의 한 장면 같다. 극적인 전개의 절정인 것이다.

 "엄마!"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면서 남자의 얼굴이 삐져나온다. 그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인양 대한다.

 "학생, 좀 비켜줄래?"

 내 시선은 줄곧 은혜의 어머니, 곧 자신의 어머니에 향해 있다. 남자는 거칠게 클락션을 울리다가, 이내 현장을 중심으로 둥글게 진을 치고 있는 교회 사람들의 존재를 알아챈다. 그들은 겨드랑이 사이에 성경을 낀 채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학생!"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주차장은 곧 차를 빼지 못한 사람들의 원성과 의혹의 속삭임으로 가득 차고, 그런 소음의 홍수가 나를 신경 쓰이게 한다. 말의 홍수, 너무 많은 것이 떠내려갔던 그 날의 기억이 마치 구타하듯 나를 덮친다. 희생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너무나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 고개 숙인 엄마의 검은 정수리와 오버랩 된다. 모든 것이 마치 꿈같다. 시야가 희미해진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목사의 어머니는 저고리 자락을 휘날리며 뛰어와 나를 붙잡는다. 의식을 잃으면서도 나는 손을 달달 떤다.

 

 

6

 

 김산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있다. 달달 떨리는 왼 손을 부여잡은 채 그는 옛 사람들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김 사장, 박 부장, 김 기자, 이 마담, 이 의원, 박 사장……. 그들의 얼굴이 자신 주위로 원을 그리며 돌다가 하나로 섞여 눈코입이 없는 밍숭한 얼굴로 그에게 달려든다. 그것이 미라처럼 앞으로 뻗은 손에는 지문과 손금이 없다. 그는 몸을 더 말고 점점 뒤로 몸을 빼다가 벽 너머 흙구덩이로 몸을 던진다. 

 흙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앞이 흐릿한 시각과 먹먹해진 청각, 힘없이 뭉개진 촉각을 대신해 후각과 미각은 놀랍도록 선명하다. 개나 고양이가 된 양 킁킁대며 속 채울 것을 찾는다.

 그는 터널에 들어오고 1년간을 스스로를 옥죄는 긴장감에 살았다. 비록 지금은 이런 삶은 살아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서 가족에게 떳떳이 돌아갈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멘트 바닥에 자면서도 옷매무새를 늘 정리했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거의 목욕을 하다시피 했다. 내면의 자세를 늘 신경 썼다. 하지만 끊임없이 날아드는 의구심은 있었다. 믿음과 희생을 얘기하기에 너무 이른 때는 아니었는가, 아내와 자식들에게 함께 도망하고 눈물 흘리자 말해야 하는 건 아니었는가, 경계를 너무 빨리 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를 찾아온 요한은 단 한 문장으로 엄마의 새 가정에 대해 말했다. 당장 돈이 급한 것이었을까? 외로움이 겨울바람처럼 날아들었나? 김산은 자괴감에 빠졌다. 며칠간 시멘트벽에 기대 곱씹고 또 곱씹었다. 요한이 계속 자신을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고. 그는 끔찍한 환영에 시달려야 했다. 현실은 흐릿해지면서 환각은 뚜렷해졌다. 함께 일하던,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뭉개진 얼굴로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눈, 코가 사라진 아내가 흰 이를 보이며 웃고 있었다. 

 일은 반사적으로 했다. 그러니까, 죽음과 광기의 두려움에 대한 반사작용이었다. 죽기 싫어 일을 했고 미치는 것이 두려워 일을 했다. 땡볕에 팔을 걷어가며 설계도를 살피고 인부들과 호탕하게 웃으며 막걸리를 마셨다. 그런 식이면 나름대로 싸워나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은 분명 거금을 빚진 사내였지만, 사회에, 그러니까 세상에 그는 하등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더 고차적으로 보려 했다. 그는 도피의 탈을 쓴 희생을 택했고, 짊어진 의무가 끔찍한 외로움으로 변해도 참아내려 했다. 하지만 미래에 무엇이 있나. 아내는 자식들과의 안정된 미래를 택했다. 물론 요한은 그것을 못 견디고 돌아오긴 했지만, 그것은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다. 어쩐지 자신이 주류와는 하등 상관없는 엑스트라들과, 그리고 정작 커다란 적의 한참 밑 졸개들과 피 터지는 싸움을 하며 대항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금씩 자신을 놓아갔다.

 김산은 눈을 깜박이며 눈두덩을 만져본다. 거의 감각이 없다. 이대로 눈이 머는 것인가 싶다. 그는 흙 속에 팔이며 다리를 쑤셔 넣으며 몸을 고정시킨다. 어떤 판단력이라 할 만한 기준이 그에게는 없다. 그의 몸은 지금 고무 같다. 분명 누군가에게 맞은 기억이 나는데, 아픈 감각이 없고 계속해서 팽창하는 느낌이다. 부유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그는 어린 아이가 된 듯 캬캬, 하고 웃는다. 벽 너머 분열한 여러 명의 김산과, 옛 지인들과, 아내는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은 영원히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다. 21억을 줄 수는 없다. 가정도 뺏길 수 없고, 집도 뺏길 수 없다. 터널은 그의 것이다.  

  

 

 7

 

무기력하다는 문장을 생각해본다. 지난 일요일 정신을 차리고 터널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나무처럼 흙더미에 뿌리를 내리고 정신이상자처럼 개거품을 물고 있었다. 다음 주 중에 터널이 헐릴 것이다.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 이제는 견딜 수 없이 두렵다. 하지만 어떤 타오르는 감정이 있다. 복수심인지 분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엄마를 향해 있다. 나는 우선 그녀를 만나야 겠다 생각한다.

 버스에 오르자 기사는 나를 반갑게 맞는다. 나는 만 원짜리가 수북한 검은 봉투를 들고 있다. 기사는 넉살 좋게 묻는다.

 "은혜 선물인가 부지?"

 "아녜요."

 기사는 멋쩍게 웃는다. 나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본다. 아버지는 일당을 받아서는 모조리 봉투에 채워넣었다. 강박적으로 만원 짜리를 모았다. 아버지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인지를 잊었다. 아무 의미 없는 돈이다.

  세상은 의문투성이다. 왜 꽉 차 있는 곳은 공허로 비며, 빈 곳은 오물로 들어차고, 사람은 그 속에서 죄수가 될 수밖에 없는가. 대답할 수 없다. 단어 하나가 갖는 의무가 너무 무겁고, 만약 그것이 오답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셈이다.

 나는 아파트 단지에서 내려 교회로 향한다. 헌금으로 만 원을 넣는다. 

 예배가 끝나고 여자와 그에 이끌린 딸은 재빨리 예배실을 빠져나간다. 나는 그 뒤를 쫓는 대신 바로 교회 밖으로 나가 주차장 입구에 몸을 숨긴다.

 익숙한 검은 승용차가 출구를 오르고, 나는 택시를 잡아 앞서가는 차를 쫓아 달라 한다.

 택시에서 내리자 하늘 높이 솟은 건물들에 숨이 막힌다. 멀리 '세 가족'이 걷고 있다. 엄마는 선글라스에 멀쩡한 차림으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자는 혼자 끊임없이 떠들고 있다. 그러다 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살핀다. 나는 작은 광장의 조형물 뒤로 몸을 숨긴다.

 "……겠단 거야?"

 남자의 음성이 커지자 내용이 들려온다. 나는 그들이 들어간 건물로 뛰어간다. 스크린 도어가 곧 닫힐 참이다. 손을 비집고 문을 다시 작동시킨 후 복도를 천천히 걷는다.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멈춘다. 나는 계단을 오른다.

 5층쯤에서 벌써 고함이 들려온다. 6층에 다다르자 익숙한 비명이 날아든다. 은혜다. 내 심장 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린다.

 나는 602호의 문을 미친 듯 두드린다.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린다. 물건이 깨지고 남자가 욕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열지 마! 하고 남자가 외친다. 곧 딸칵 하고 문이 열리며 눈물범벅의 은혜가 달려든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은혜를 품에 안는다. 어떻게 해야 할 지 혼란스럽다. 분명 남자는 위선자고, 폭력배와 다름 없다. 그러나 내 어미를 두들겨패는 사람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년 잡아!"

 이마가 깨져 피가 뚝뚝 흐르는 엄마의 눈에는 피멍이 들어 있다. 나는 무너지려는 다리를 부여잡고 현관문을 닫아버린다. 안에서 다시 비명이 들린다. 은혜가 발악한다.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

 "오빠!"

 엄마가 비명을 지른다. 나는 내가 울고 있음을 깨닫는다. 단지 본능적으로 제 어미의 안전이 걱정돼서 일까? 아니면 난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 것일까. 둘 다 아니다 싶다. 확실한 것은 없지만, 최소한, 지금은 저 남자가 너 나쁘다는 사실만이 진실이다. 나는 은혜에게 말한다. 셋 하면 같이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너는 그 사람을 깨물어.

 "하나, 둘, 셋!"

 문을 연 바로 앞에서 엄마가 남자에게 밟히고 있다. 은혜는 달려들어 남자의 허벅지를 깨물고, 나는 거실로 뛰어가 베란다 창에 기대어 있는 골프채를 집어 든다. 

 "이 년이!"

 남자가 은혜의 머리채를 잡는다. 내가 달려들어 아이언을 높이 치켜든다. 아주 잠깐 망설인다. 곧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아이언이 허공을 나른다. 남자가 정신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는다. 나는 신발들 위로 누워 파르르 떨고 있는 엄마를 내려 본다. 피투성이에 퉁퉁 부은 얼굴이 곧 터질 것만 같다. 나는 그녀의 발치에 봉투를 내려놓고 거실로 가 전화기를 집어 든다. 112에 신고한다.

 "폭력이 있었습니다. 아내의 돈을 뺏으려다가 정당방위로 골프채에 맞았습니다. 환자가 있으니 빨리 오세요."

 나는 현관을 나선다. 은혜가 나를 붙잡는다.

 "어디가 오빠."

 "집."

 나는 건물을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본다. 샛노란 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온전히 떠서는 볼 수 없는 것이 눈꺼풀을 조금씩 들며 눈동자에 힘을 주자 그 형체를 드러낸다. 원형 속에 작열하는 불의 몸부림을 나는 언제까지고 쳐다봤다. 

 

 

 

 

 

 

루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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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벌레     1 목사의 손가락이 천장을 가리킨다. 조악한 프레스코화가 인쇄된 벽지는 번쩍거리는 샹들리에를 붙들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다. 목사는 신과 인간의 손가락이 맞닿은 그 미묘한 지점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오직 신을 경배하기 위한 도구로 그리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신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노예 내지 개처럼 취급해야 마땅하다며, 목사의 침이 교단 아래로 쏟아진다. 수 십 개의 정수리들이 그를 향해 있다. 남자는 정수리로 허공을 두드린다. 반쯤 막힌 숨소리를 내며, 몇 분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가 다시 꾸벅꾸벅 정신을 놓는다. 이제 목사의 설교는 교회 내 이성 교제에 관한 것으로 이어진다. 교회 밖에서 정신 나간 놈(이때 한 무리의 여중생들이 쑥덕대는 소리가 끼어든다)을 만나느니,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인다. 이는 물론 기도하고 찬양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청소년 여러분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다, 여러분은 자유인이다! 바깥 사람들의 연애는 늘 추악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끝이 난다, 그것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강간과 다를 바 없다, 허나 교회 안에서는 이성 교제마저도 신을 만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어두운 욕구는 끼어들 틈이 없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라! 다만 신을 가장 사랑하라, 부모보다 신을 사랑하라, 당장 신을 위해서라면 다 버릴 수 있도록 하라, 그것이 자유다……… 목사가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동안 남자는 꿈을 꾼다. 졸면서 꾸는 꿈은 뒤가 구린 찝찝한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B급 영화를 닮았다. 그는 교회 같은 반 여자의 뒤를 쫓는다. 엉덩이가 튀어나온 교복 치마를 좇으며 그녀의 걸음을 따라간다. 그동안 길이 뒤틀리고, 나무의 위아래가 뒤집히고, 구름이 불타지만 그는 한 번도 시선을 놓지 않는다. 하트 모양을 닮은 엉덩이의 윤곽과 허벅지와 허벅지를 스치며 나아가는 동작이 그를 미치게 만든다. 분명 깨고 나면 괜히 부끄럽고 불편하겠지만, 꿈속의 그는 순간마다 더 탐욕스럽다. 짐승처럼 침을 흘린다. 길게 늘어진 침이 성경 위에 떨어지자 그는 몸부림치며 잠에서 깬다. 목사의 부리부리한 눈이 코앞에 와있다. 다짜고짜 마이크를 갖다 대며 오늘 저녁 친목회 식사 메뉴를 묻는다. 닭똥집. 닭똥집? 목사가 팔을 벌린다. 그래, 네가 신이다! 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뒤를 돌아보자 남학생들이 엄지를 올린다. 여학생들은 거꾸로 엄지를 내리며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꿈에 나왔던 여자는 긴 생머리를 드리우며 성경책을 넘기고 있다. 똥집 같은 그녀의 엉덩이가 문득 떠오른다. 교회 봉고차에 올라타자마자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아버지다. 인생에 승리만 있는 법은 아니다, 아들 파이팅^^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다. 옆에 앉은 후배가 킬킬대며 그의 옆구리를 찌른다.     2 ^^ 아버지는 그에게 이토록 완벽한 미소도, 그 비슷한 표정도 지어보

  • 루극
  • 201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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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 해주신데로 시점을 바꾸고 작은 부분 손을 봤습니다. 더 나아졌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빛     1  꿈을 꾸는 것 같다. 소년은 어디에서 언제 눈을 떴는지 모른 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어둠뿐이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다. 소리는 메아리를 남긴다. 소년은 이곳이 동굴인가 싶다. 시력은 아무 소용이 없고, 청각과 후각이 전에 없이 선명하다. 빗물처럼 비릿한 냄새, 간간히 섞여드는 흙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언제 부터 걷고 있는지, 걷고 있기는 한 건지 확신할 수 없다. 소년은 일부러 발을 질질 끈다. 맨발이다. 바닥의 재질이 콘크리트나 시멘트인 듯, 발바닥에 까칠까칠한 감촉이 전해진다. 순간 소년은 자신이 죄수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된 지하감옥이 아닐까. 누군가 자신을 감금하고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소년 자신마저 얼마의 형을 받았는지 왜 갇힌 지를 잊은 채, 잠들고 깨고를 반복하며 꿈같은 현실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찰나였다. 소년이 눈 깜빡하는 사이에 멀리 희붐한 파란빛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시야가 조금씩 트인다. 그는 현기증이 난다. 멈춰서서 무릎을 조금씩 구부린다. 엉거주춤 쪼그려 앉은 꼴이다. 그는 검지로 바닥을 문지른다. 언뜻 보이는 바닥은 회색빛이다. 양 몇 마리를 그린다. 큰 양 한 마리와 작은 양 세 마리를 그린다. 소년은 환상을 본다. 양은 저들끼리 움직이고 얘기하며 그만을 위한 연극을 선보인다.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해일처럼 덮쳐오는데도 양들은 흰 이를 보이며 하하 호호 웃는다. 현실과 같은 이질감에 그는 소름이 끼친다. 돌연 끼치는 어떤 욕구처럼 현실감각이 돌아온다. 그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하다.  소년은 몸을 일으켜 팔을 위로 뻗고 기지개를 편다. 무릎을 가슴팍까지 들기도 한다. 곧 해가 뜰 것이다. 이곳은 터널이다. 그가 서있는 양옆으로는 사람 몸통만한 쇠기둥이 몇 미터 간격으로 자리잡고 있다. 해가 산 중턱쯤에 오르면 터널 안에도 곧 빛이 들 것이다. 아직 주변을 분간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소년은 한 번도 어둠 속을 헤맨 적이 없다는 듯 괜한 허세를 부린다. 그는 기둥 사이를 지그재그로 지나기도 하고, 괜히 벽을 발로 차기도 한다. 자기 집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의례 하는 짓이다.  밤새 비가 온 탓에 천장의 균열 사이로 빗물이 떨어졌다. 소년은 바닥 곳곳에 웅덩이가 생겼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바닥을 더듬어 얕은 웅덩이를 찾는다. 발을 담근다. 흙먼지가 수면에 찬찬히 떠오른다. 물은 그 자체로 하나인지, 물결치며 분열하는 세포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잘 보이지 않는 웅덩이의 속을 보려 한다. 새카만 발등은 기포를 머금는다. 물방울은 어류의 알처럼 한곳에 달라붙어

  • 루극
  • 2010-12-24
유물

유물     2040년대를 기점으로, 미술을 비롯한 예술은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갔는데, 그것은 절대적인 무無였다. 이른바 ‘무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예술 사조가 됐고, 그 이전의 것은 모두 구식으로 치부됐다. 기존의 것을 허물거나 과거의 것을 새롭게 하는 게 40년 이전의 예술이었다면, 그 이후로는 오로지 한 주의를 따르는 게 예술이 됐다. 그래서 최근 옥션에서 730만 유로-USA 달러를 기록한 Stan Bell의 작품은 흰 캔버스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최근의 음악, 20유로-USA 달러에 살 수 있는 The Orange의 앨범을 들어봐도 4분 정도 길이의 곡에 소리라고는 아티스트의 헛기침 두 번, 손가락 관절 꺾는 소리 정도다. 비평가들은 79년의 예술이 너무 복잡하고 거추장스럽다고 말한다. 공허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예외와 배제를 생각하고 고민한다는 것이다. 모 비평가는 이렇게 선언하기도 했다.  김인식은 얼마 전 희귀자료를 입수했다. 그것은 50년도 지난 옛날에 당시 사람들이 찍어 인화했던 사진으로, 그보다도, 당시엔 인간 복제 및 인구 보존 기술(최대 50년의 수명이 주어지는 인간들은 죽으면 같은 유전자로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성이 성숙한 사회인이고, 곧바로 사회 일선에 투입된다. 그런 식으로 약30년 전부터는 세계 인구가 80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없었다는 것이 그에겐 충격이었지만, 아무튼 그는 지금 그것을 감상하려는 참이다. 화질은 최악이고,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종이의 질도 엉망이다. 초경량 비닐 소재의 포장을 뜯어, 사진을 꺼내든다.  지금의 돔형 도시들은 2063년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성립됐는데, 전까지는 빌딩들 사이로 투명 터널이 설치되어 그곳으로 통행했다. 물론, 목적지만 설정하면 알아서 운송해주는 자동화 시스템 ‘컨베이어 벨트’는 2049년에 이미 상용화됐다. 사람들은 과거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 오른 공산품들처럼 줄줄이 손잡이를 잡은 채 벨트에 실린다.  마지막 사진이다. 바퀴가 두 개 달린 구식 운송 수단에 올라탄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 동아시아 인종 같다. 김인식은 그게 언젠가 배웠던 ‘자전거’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유심히 관찰한다. 두 발을 휘저어 작동시키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쩐지 이 광경은 현대인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있는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그들은 모두 한 곳을 향하고 있으며, 얼굴에 표정이 별로 없다. 물론 사진에 포착되지 않은 속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김인식이 보기에, 이 광경은.

  • 루극
  • 201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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