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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이야기

  • 작성자 인남사
  • 작성일 2010-10-08
  • 조회수 411

 

운동회 이야기

(혹은 요정과 관련된 가벼운 일화)

 

 

운동회라는 행사가 나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의례적인 일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은, 초등학교 삼 학년 때였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밝히자면, 나는 달리기를 잘하지 못합니다. 몸에 장애가 있거나 달리는 자세에 특별히 이상이 있거나 하지는 않아도, 남들과 함께 달리다 보면 똑같이 출발했어도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의 뒤꽁무니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와 있습니다. 모두와 함께 달리든 혼자 달리든 달릴 때마다 매번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저만치 앞에 있는 나머지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하면, 달리기 같은 유산소 운동에 견디게끔 단련되지 않은 몸에 금방 무리가 와서 결국은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그저 달리기를 못할 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운동회를 나와 거리 있는 행사로 만들어버린 원인이 되었느냐 하면, 내게 잘 달리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극히 간단한 이유이고, 나아가 당연하다고 느껴질 만한 것입니다.

내가 운동회와 거리가 멀어지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싫어하게 된 그 기점, 그러니까 삼 학년 운동회 날 당시에, 나는 학교에 입학하고 운동회라는 행사를 겪어 본 이래 처음으로 달리기 경주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릴레이 주자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뽑혔고, 릴레이 경주에서 마지막으로 바통을 들고 뛰는 선수는 운동장을 세 바퀴 돈 뒤 결승점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당시 나의 치명적인 약점의 존재에 대해 눈치를 채지 못했고, 게다가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질풍노도의 삼 학년 시절을 보내고 있는 한낱 어린애에 불과했던 그때의 나는, 우리 팀이 오십 점 차로 이기고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습니다.

지금은 선수들과 응원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평소에는 정말 넓고 황량하게만 보이던 운동장도 그때만큼은 어처구니없이 좁아 보였습니다. 눈을 감고 달리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센 뒤 눈을 뜨면 결승점이 눈앞에서 나를 반겨줄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마침 앞 주자가 상대 팀과 거리를 크게 벌려 놓고 있었기에, 나는 머릿속에 그리던 광경, 압도적인 차이로 다른 선수들을 따돌리고 멋지게 골인해 모두에게서 동경의 박수갈채를 받아내는 것을 실현해 보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준비 운동으로 몸을 풀며 벼르고 벼르던 순간, 마침내 앞 주자에게서 바통을 건네받은 나는 눈을 감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다고, 바람을 밟으며 날고 있다고 상상하며 머릿속에 그려진 트랙 위를 달렸습니다. 그리고 관중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달아오르는 분위기와 내가 상상한 광경에 한껏 도취한 나머지, 가슴을 쫙 펴고 양팔을 좌우로 벌리는 승자의 자세까지 취해 보였습니다. 나는 내가 제일 먼저 결승선을 끊는 멋진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하여 눈을 떴습니다. 나의 몸이 결승선을 통과하고, 관중 사이에 섞여 나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던 엄마 아빠가 뛰쳐나와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을 품에 껴안아주는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러나 결승선을 통과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판을 접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상상 속의 멋진 풍경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현실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승자는 이미 오래전에, 나보다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사실을, 현실은 결코 내 생각대로 되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백 점과 백오십 점이 각각 걸린 경기들 사이의 가벼운 경기, 점수고 뭐고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경기였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열 살배기 어린애에 불과했던 나는, 내가 경기에서 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나를 데리러 온 엄마 앞에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빠에게 처음으로 볼기짝을 얻어맞은 일 이후로 그렇게 서글픈 울음을 울어본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어찌어찌하여 우리 팀이 이기기는 했지만 내가 그 달리기 경주에서 꼴등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그것 때문에 나는 겨울방학이 될 때까지 나 자신에 대한 크나큰 실망감과 수치심, 슬픔에 빠져 의미 없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건은 깊은 후유증까지 남겨, 그때 이후부터 나는 운동회를 무척이나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운동회라는 악습이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랐고, 운동회 날이 다가오면 온종일, 일주일 동안, 한 달도 모자라 일 년 내내 비나 실컷 퍼부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까지 했었습니다.

운동회의 존재를 지워 버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맹세할 정도로 운동회를 싫어했던 나를 송두리째 바꿔 놓은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삼 년 후, 초등학교 육 학년 때였습니다. 이 사건은 내가 만난 한 요정 이야기와도 이어져 있기 때문에, 운동회 일을 온전히 얘기해 나가기 위해 우선,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돌려 그 시점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운동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정된 것은, 반년 동안의 만남이 시작된 그해 초봄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개학도 하지 않은 때라 아직 날이 짧았고, 하늘이 비구름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 뭐가 떨어져 있는지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전거 열쇠를 찾지 못하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여서, 내 친구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우리가 그날 들렀던 모든 장소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옆에서 열쇠 찾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는 있었지만, 발도장은 한 번도 찍지 않은 낯선 장소까지 친구 뒤를 따라다니면서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자니 귀찮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말 지쳐서 머릿속으로는 집으로 돌아가 일찍 잘 생각 이외의 다른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도 어두우니 오늘은 그만 찾고, 정 안 되면 우리 집에서 재워줄 테니까 다시 한 번 너희 부모님에게 잘못을 빌고 용서받으면 안 되겠느냐는, 애원에 가까운 나의 말에도 친구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열쇠를 찾겠다고 끝까지 떼를 쓰면서 다음 장소, 또 그 다음 장소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찾고를 되풀이했습니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열쇠 찾는 일은 막대한 규모의 탐색 작업 뒤 적당한 시점에서 열쇠를 마침내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렇게 평범한 결말을 맞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열쇠를 찾아내어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평범한 결말 쪽을 놔두고 전혀 다른 결말을 맞았다는 사실에 후회는 없습니다. 나는 그런 평범한 결말은 겪어 보지 못했지만, 그랬다면 특별한 경험을 할 기회는 영영 없어졌을 테니까요.

그 이상한 결말의 시작은 친구가 마침내 백기를 들어 보임으로써 성립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전혀 다른 일에 신경이 팔려 있어서 제대로 듣질 못했지만, 그때 친구는 아마 이런 비슷한 말을 했을 것 같네요. 이제 그만하고 갈까?

나는 단순히 열쇠를 찾아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달라도 아주 다른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산이 그것을 쥔 내 손 안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나 자신은 내리는 비를 맞아 홀딱 젖게 되었으면서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저는 그 이상한 일 앞에서 정신이 완전히 팔려 버렸습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렸을까요, 보다 못 한 친구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건드렸습니다. 그는 잡초가 잔뜩 자란 수풀 속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는 내 얼굴을 귀머거리 보듯 쳐다보고는 나와 시선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일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게 뭐야?

고양이? 몸에 털 한 가닥도 나지 않은 맨몸의 고양이가 모로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니, 보통 고양이와 길이가 엇비슷하게 짧은 털들이 동물의 맨살과 비슷하게 보이는 분홍색이었을 뿐, 털이 전부 뽑혀 보기 흉한 알몸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크기도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둑고양이, 도둑고양이 새끼, 딱 그 정도였기에, 처음 봤을 때 저는 그것이 영락없는 고양이인 줄로만 알았답니다.

고양이? 이게? 친구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고양이랑은 다른 동물인걸?

다시 보니 그렇게도 보였습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연분홍색 털, 야생의 고양이와는 차이가 있는 체형, 가늘고 긴데 끝은 뭉툭한 꼬리 등,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분명히히 있었습니다. 그 밖의 다른 정보들을 종합해서 이 동물은 고양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동물은 이것이다, 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둘 가운데에는 없었습니다. 고양이가 아니라면, 어디 우리 안에서 도망쳐 나온 토끼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풀숲 안에 버리고 간 강아지의 시체일까요? 그건 아무도 몰랐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생물, 뭐가 됐든 그런 것에는 함부로 손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히 알고 있음에도, 내가 말없이 잡초 사이에 누워 있던 그 동물을 안아 올린 까닭도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친구는 내 품에 안긴 작은 동물을, 하늘을 두껍게 뒤덮은 구름 속에서 헤매던 UFO가 실수로 떨어트린 실험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려다보았습니다. 겉으로는 죽은 듯 보였던 이 동물은, 놀랍게도 아직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몸 안에서 돌고 있는 따뜻한 온기도 느껴졌습니다. 이 동물에게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이게 무엇이건 간에, 나는 이 동물을 우리 집에 데려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도 몰랐습니다. 그냥 이 동물에게 쉬면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조용하고 안전한 장소가 필요할 것이라 짐작했을 뿐이었습니다.

친구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걸 징그럽다는 듯이 바라보면서도, 동물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따라왔습니다. 꼭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자기도 그 동물이 걱정 되었다던가 했겠지요. 나와 속도를 맞춰 걸으며 내가 품에 안고 있는 동물 쪽을 힐끔힐끔 쳐다본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동물은 집까지 걸어오는 내내, 비에 젖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잠을 자는 듯이 조그맣게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앞까지 와서야 동물을 발견한 자리에 우산을 두고 왔다는 것이 기억났습니다. 가지러 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내 품에 안은 이것의 몸을 녹이는 것이 먼저였으니까요. 친구는 허락도 없이 길거리에 버려진 동물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우리 부모님에게 혼날 것 같아 그냥 버려두고 가자고 했지만, 나의 예상대로 집 안에 어른은 없었습니다. 그때는 엄마와 아빠 모두 회사 일을 나가셔서 밤늦게 들어오시고는 했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집에 못 갈 것 같다는 연락을 미리 받은 상태였습니다.

우선 동물의 몸을 녹이기 위한 적당한 수단을 찾아야 했습니다. 어렵지 않게 욕실을 떠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풀밭 속에 누워 있을 때 한바탕 뒹군 것인지 동물의 젖은 몸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어서, 그것을 씻어냄과 동시에 몸을 녹이기에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그 안에서 천천히 씻기는 게 적당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을 테니 잠시만 동물을 안고 있어 달라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조금 미심쩍다는 얼굴로 내 품 안의 동물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욕조에 물 받는 것은 친구가 하고, 나는 욕조 안에 물이 어느 정도 찰 때까지 동물을 안고 있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욕실에 가 있는 사이, 나는 동물을 가볍게 흔들어 깨워 보았습니다. 일단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였습니다. 이미 죽었으면 이런 일을 해 줄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대신 이 동물을 아파트 화단에라도 묻어 주어야겠지요. 그런데 살았다고 하기도 어렵고 죽었다고 하기도 조금 그런 것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분명히해 보였지만, 몸을 흔들어도 힘없이 목을 덜렁거리기만 할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동물은 처음 봤을 때 생각한 것처럼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시체를 묻는 수고는 둘째 치고, 죽음은 슬프잖아요.

친구가 욕실을 나오면서 물이 다 찼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동물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서, 행여나 잘못해서 떨어트릴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 위에 올려놓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몸 일부분이 물 속으로 들어갔을 때, 아니 닿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것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내 손 위에서 몸을 뒤트는 바람에, 나는 손 위에 들고 있던 그 동물을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뜨거운 물이 우리 쪽으로 튀기면서 작은 무언가가 퐁당, 하고 빠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당황해서 물이 찬 욕조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수면에서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 물 밑에 있는 것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허겁지겁 손을 넣어 물 속을 헤집어 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분명히 여기 빠진 게 맞을 텐데, 고개를 욕조 안으로 집어넣고 시야가 하얀 김으로 가려지더라도 물 속에 빠진 동물을 찾아낼 생각으로 물 아래를 노려보았습니다. 김이 조금씩 옅어질 때 가끔 그림자가 비치는 게 다였지만, 나는 동물을 욕조 안에서 꺼낼 셈으로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림자가 보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다시 그림자가 얼핏 보였고, 어림짐작으로 손을 뻗었더니 잡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물 밖으로 끌어 올렸는데,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분홍색 새끼 고양이가 아니라 하늘색 가죽의 새끼 악어였습니다.

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넋 놓고 내 손에 들린 또 다른 동물을 보고 있는데, 악어가 나를 향해 갑자기 물을 뿜었습니다. 어디에다 물탱크라도 숨겨두고 있는 건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물세례를 받으면서도 나는 손에서 그 동물을 놓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흠뻑 젖어 가면서 돌아본 친구는 나보다 더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악어는 내 얼굴에 대고 물을 뿜는 것을 멈췄습니다. 내가 악어를 돌아보자, 악어는 크고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이해하려고 애쓰며, 나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습니다.

악어를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갑자기 탄성을 질렀습니다. 나는 갑자기 지른 소리에 깜짝 놀라 친구 쪽을 바라보았다가, 친구가 악어 쪽을 향해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악어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한 번 더 떨어트릴 뻔했습니다.

악어의 몸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화장실 천장에 붙은 백열전구에서 내리쬐는 빛이 아닌, 악어의 몸에서 직접 나오는 빛이 보였습니다. 악어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손가락들 사이에서부터 빛이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빛이 악어를 감쌌습니다. 나는 강한 빛에 대한 반사적 행동으로 눈을 꼭 감았고, 친구는 감당할 수 없는 빛을 내뿜는 악어로부터 고개를 돌려 버렸습니다. 곧 화장실 천장의 백열전구는 악어 앞에서 쓸데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요, 나는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습니다. 그리고 나의 눈은 의지에 상관없이, 어떤 놀라운 것을 봤을 때처럼 휘둥그레졌습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하늘색 악어는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분홍색 새끼 고양이가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악어를 찾았습니다. 김이 가득 찬 욕실 안에서 하늘색 악어가 숨을 만한 장소는 딱히 없는 것 같았고, 그런 곳에 숨어 있는 악어의 모습은 일부분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친구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이빨을 딱딱 부딪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떨리는 손에서 검지를 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나더러 보라고 그러는 것 같기에, 나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손가락 끝에서는 분홍색 새끼 고양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거. 친구가 말했습니다. 저게. 변신했어. 친구의 말에 이 동물은 맞장구라도 치는 듯이 뮤우, 하고 작은 소리로 울었습니다.

친구의 말을 믿는 것밖에, 별 도리가 없는 듯했습니다.

 

 

 

*

이 동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생명이 그렇게 위태로운 것처럼도 보이지 않았기에,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고 할까요. 아파트 화단에 묻는다는 암울한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이 동물은 배가 충분히 부른 것처럼도 보이지는 않아서, 우리는 무엇을 먹이로 주면 좋을까를 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먹을 걸 잘못 먹어서 탈이 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이 동물 경우에는 털 색이 분홍색을 띠고 있는 점을 제외하면 겉으로 보아도 평범한 새끼 고양이와 다를 것이 없었고, 고양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기나 뼈다귀 같은 것들을 소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서, 일단은 우유를 먹여 보기로 했습니다. 분홍색 새끼 고양이는 데운 우유를 앞에 놓고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다가 그걸 보고 있는 우리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먹어. 친구가 말하자 이 동물은 또 뮤우, 하고 대답하듯 울고는 우유가 담긴 그릇에 바짝 다가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우유를 열심히 핥아 먹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곧 죽을 것처럼 누워 있던 녀석이 금방 깨어나서 저렇게 생생한 모습을 보니 대충 큰 사건들은 일단락 지어진 것 같아 저절로 한숨이 나오더군요.

그날 밤은 친구도 우리 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도 자전거 열쇠를 찾지 못했던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걸 주저하는 눈치였습니다. 나로서는 또 친구를 언제까지고 우리 집에서 재워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냈고, 친구는 그네 집에서 호되게 야단을 맞은 모양입니다. 부모님께 연락도 안 하고 친구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고요.

그 동물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그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뮤우, 뮤우 하고 우니까 뮤입니다. 처음에는 생김새가 고양이와 비슷하니 나비라고 부르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지만, 아무래도 정체도 모르는 동물을 무턱대고 고양이라고 부르는 건 뭔가 마땅치 않은 듯싶어서 일반적으로 붙이는 이름, 울음소리를 본뜬 이름을 붙였습니다. 뮤도 자기 이름이 싫다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전혀 관심이 있지 않았든가요.

 

 

 

*

동물이 아니라 요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봄방학이 끝난 후 첫 번째 주말, 뮤에게 줄 우유가 바닥났다는 걸 밤늦게야 알고, 문을 닫은 슈퍼마켓 대신 한밤중에도 문을 여는 편의점에 들러서였습니다.

자정 가까이 되었을까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몇몇 가게를 제외하면 전부 문을 닫은 뒤라 간판 불은 모두 꺼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길을 밝히는 것은 일정한 간격으로 길 양옆에 늘어선 가로등뿐이었습니다. 가로등 불빛과 대로변의 어둠 사이에서 나는 편의점 간판을 찾아 시내까지 내려왔고,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편의점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계산대 앞에 서 있던 형은 눈짓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나는 우유들이 진열된 곳으로 갔습니다. 크기는 비슷비슷, 고만고만하지만 각자 색이 다 다른 우유갑들이 줄을 지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머릿속으로 내 지갑 안에 들어 있는 돈이 얼마인지 헤아려 보았습니다. 이백 밀리리터들이 우유는 싼 것이면 세 개까지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나는 우유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느 것이 좋을까 가만히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뭔가 내 뒤통수를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는 찌르는 게 아니지만 뒤통수에 가벼운 것이 날아와 박히는 느낌이랄까요. 나는 곁눈질하는 척하며 등 뒤로 살짝 돌아보았습니다. 정면으로 돌아보았다가 눈이 마주쳐서 그 상태로 바라보던 쪽도 나도 왠지 모르게 창피해져서 서로 시선을 피하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정작 뒤를 돌아보니,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은 계산대의 형뿐이었고, 그마저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럴 때는 마주 보았다는 말은 쓰이지 못하는군요. 나는 형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형은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형의 시선은 내가 아닌, 전혀 다른 것을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얼핏 봐서 형의 시선은 내 얼굴보다 더 높은 곳을 보고 있었기에, 내가 형의 시선을 따라가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습니다. 내 머리 위에 뭐가 있다는 걸까요.

그럴 만한 것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올렸습니다. 편의점 건물 안 천장에 매달려 잇는 형광등 불빛을 배경 삼아 눈에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돌아갈 일이 없던 톱니바퀴가 철컥 소리를 내며 맞물려 돌아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 장면을 봤을 때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유를 사러 집을 나올 때, 뮤 혼자 집에 두고 나오자니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아서 가방 안에 넣어서라도 어떻게든 데리고 나왔는데, 어깨에 걸치는 작은 가방이라 뮤가 답답함을 느꼈나 봅니다. 그래서 결국은 보란 듯이 가방 속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었고요. 사실 뮤가 나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보통 고양이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진짜 고양이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나는 뮤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을 처음 본 사람처럼 넋 놓고 구경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뮤에게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내 뒤의 형에게도 신경 써야 했습니다. 어쩌면 좋지? 잡아서 도로 숨겨야 할까? 뮤가 있는 데까지 손이 닿을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이미 뮤를 숨기기에는 늦은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형은 뮤의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뒤니까요. 어쩔 줄 모르고 형을 바라보고 있는데, 형은 내가 걱정하는 것처럼 휴대전화를 꺼내서 경찰서에 전화하거나 바깥으로 뛰쳐나가 사람을 불러 모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 자신도 어째서 이 형이 그러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형은 턱이 빠져 계산대 위에 떨어질 것처럼 놀라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마치 엄마가 짐 정리를 하면서 가끔 발견하는 옛날 사진첩을 뒤적일 때 짓는 것에 가까운 표정으로 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형은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오랜만이구나. 그리고 형의 시선은, 다시금 내 얼굴 있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멍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말할 거예요? 형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습니다. 아니. 지금 여기 있었던 일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그 아이랑은 언제 만났니? 이 주일 전에요. 풀밭에서 주웠어요. 그래. 너는 착한 아이인가 보구나. 뮤가 형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듯이 울면서 형에게 날아갔습니다. 보름 가까이 뮤의 보호자 역할을 해온 탓에 반사적으로 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뮤는 자기 얼굴을 형의 볼에 비비댔습니다. 둘이 아는 사이일까요?

이 아이는, 요정이란다. 형이 말했습니다. 말을 꾸며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올해만 지나면 나도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는 몸으로, 나 자신은 요정 같은 것을 믿거나 할 때는 이제 지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너는 그렇게 심술궂게는 보이지 않는구나. 뮤가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진짜 이름도 뮤였다는 것에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형은 뮤와 만난 적이 있나요? 뮤와 만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요정과 함께 지낸 적은 있다. 형은 뮤를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고, 뮤는 그 위에서 다시 날아와 내가 메고 있는 가방 안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어째서인지 반쯤 열려 있는 가방 밖으로 얼굴만 살짝 내놓은 뮤를 보고 형은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세계는, 이곳 외에도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들로 이루어져 있단다. 그 세계가 모여 다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지. 맨 처음에는 단 하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된 거란다. 몇 개의 세계들은 서로 아주 가까이 붙어 있지만, 사람들은 그걸 몰라. 모두 눈앞에 보이는 세계에서 살아가기 바쁘거든. 그래서 때때로는, 여기 곳곳에도 다른 세계에서 온 요정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그래서 요정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는 사람을 찾아 여기까지 여행해 오는 거란다. 요정들은 사람의 사랑을 필요로 하거든. 뮤도 그런 요정 중의 하나야. 너는 뮤와 만났으니, 뮤에게 네가 가진 사랑을 주어야 한다. 그래줄 수 있겠니?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뮤 이야기도, 여기 바깥에 다른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말이 저에게는 너무 이상한 이야기였습니다.

돌아서서 우유를 고르려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무슨 우유를 고르려고 했었는지 전부 까먹어 버린 것을 알고는, 나는 다시 몸을 돌려 형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형도 나를 보고 있었으니 마주 보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내가 물었습니다. 형이 만난 요정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 질문을 덜컥 한 후에, 나는 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한 건 아닐까 싶어 목을 움츠리고 형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걸 보았거든요. 하지만 형은 다시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습니다. 헤어졌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돌아서서 우유를 노려보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요? 그래야만 하는 일이 있었거든. 사이가 좋지 않았나요? 한두 번 질문을 하자 물어볼 것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싸웠나요? 형은 나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해주었습니다. 아니,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어. 그럼요? 누가 형과 형의 요정을 억지로 떼어 놓으려고 했나요? 아니, 우리가 헤어지자고 정한 거야. 그래서 헤어졌어. 그 요정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나도 모른단다. 알고 싶지만, 모르는 것이 우리 둘에게 더 좋아. 그래서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몰라. 꼭, 헤어져야 했나요? 그래, 그랬단다. 나는 우유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전부 쏟아내 버린 줄만 알았던 질문들 사이에서 새로운 질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나는 뭔가를 자꾸 물어보는 것이 형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처럼 느껴져서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말없이 계산대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 계산대 위에 우유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나의 마지막 질문 하나가 한숨처럼 내 입속을 비집고 빠져나왔습니다.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요?

나도 형도 생각지 못한 질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형이 되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은 이제 내 통제를 벗어나 속으로 담아두려고 했던 것들을 멋대로 지껄이고 있었습니다. 동화나 만화 같은 델 보면 요정이 나와서 소원을 들어주잖아요. 뮤도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요? 형은 우유갑 옆면에 인쇄된 바코드를 찍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그렇고말고.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이루어 준단다. 값을 치르고 편의점을 나오면서, 나는 내가 형에게 했던 마지막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뮤에게 빌 소원 같은 것이 나에게는 있었던 걸까요?

 

 

 

*

잡초가 잔뜩 자란 풀밭 안에서 우연히 만난 요정 뮤와 함께한 나날은 그럭저럭 지나갔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때까지 뮤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편의점에서 만난 형을 제외하면 나와 뮤를 발견했을 당시에 같이 있었던 친구뿐이었습니다. 그만큼 비밀을 잘 지켜 온 셈입니다. 하지만 그 비밀이 세상에 알려질 뻔한 적이 있었다면, 그 위기가 닥쳐온 것은 같은 해 가을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운동회가 열린 날이었죠.

여름방학 기간이 끝나고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운동회는 우울과 불안함이라는 감정의 그림자를 나에게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다가오는 재앙 같은 하루하루에 저항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서슴지 않고 했지만, 재작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운동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경기가 끝나고, 성가신 일들도 이것으로 이제 모두 끝이겠구나 하고 마음을 놓고 있을 때였습니다. 달리기 사건의 기억과 함께 삼 학년 운동회 때 운동회라는 행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눈곱만큼의 관심도 전부 마음속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나는, 운동회의 형세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기네 팀원을 응원하는 주위 구경꾼들의 반응에 의해 우리 팀이 지고 있다는 사실은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될 대로 돼라지, 수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개미떼처럼 우우 달려들어서 벌이는 난리 통 따위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라 경기 결과에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콩주머니를 끈질기게 던져댄 끝에 선생님 두 분이 나와 각자 맡은 팀의 박 껍데기에 붙인 테이프를 열쇠로 끊어 박을 터뜨리는 것으로, 당사자만 신이 나는 조잡한 박 터뜨리기 경기가 이제 막 끝났습니다. 반응을 보니 이번에도 우리 팀이 진 것 같았습니다. 사실 박을 먼저 터뜨린 건 우리 쪽이었지만요. 사 학년 후배들이 경기에 임하는 태도를 봐서 그에 따라 점수를 주는 모양입니다. 판정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들긴 했습니다만, 그 이외에는 시답잖은 것들뿐이라 나는 진절머리가 나서 먼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출전하는 경기는 오전에 한 번 있었던 공굴리기가 끝이었고, 할 일 다 끝난 선수가 집으로 간다는데 신경 쓸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맨몸으로 온 터라 가방이고 뭐고 챙길 것도 없이 주위가 시끌시끌할 때 살짝 빠져나가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이미 학교 정문을 유유히 나서고 있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서, 몸을 씻고 저녁을 간단히 먹은 뒤에 일찍 잘 것이었습니다. 아, 뮤를 잊었군요.

여름방학 때 한 번 큰 사건이 있었던 뒤로 뮤는 나와 꼭 붙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어떻게든 숨어다니면서요. 이번에 뮤는 학교 뒤편에 있는, 체육 시간에 필요한 운동기구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요즘 들어서는 거의 쓰지 않게 된 낡은 창고 안에서 곤히 자고 있겠지요. 골목길을 빠져나와 집으로 곧장 가기 전에, 나는 뮤를 데리러 잠깐 창고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녹이 잔뜩 슬어서 삐걱대는 소리까지 나는 창고 문을 열었습니다. 창고 안에서 잔뜩 묵은 먼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으로 퍼져 나왔습니다. 나는 창고 안쪽에다 대고 뮤를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큰 목소리로 두세 번은 더 불러 봤고요. 그래도 뮤가 나오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나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뮤가 숨어 있을 만한 장소는 전부 뒤져보았습니다. 먼지가 잔뜩 쌓인 낡은 매트 위를 더듬어보고, 바람 빠진 공들이 담겨 있는 바구니를 통째로 뒤집어 보기도 하고, 쓰레기만 가득 차 있는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고 휘휘 저어 보기도 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쥐구멍까지 전부 뒤져보고 나서야 뮤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한 층 더 실감이 나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창고를 뛰쳐나왔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뮤를 찾아야 할지 생각도 못하고 한참이나 안절부절못해서 창고 앞을 서성이고 있다가, 겨우 뮤를 불러볼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목소리는 맥없이 퍼져 나가다가 학교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그 반대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아이들의 소란에 묻혔습니다. 나는 학교 주위를 빙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뮤를 불렀습니다. 어디에서도 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을 새우면서까지 동네 전체를 뒤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럴 각오까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해 가면서 학교 정문을 지나는데,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내 팔목을 잡아끄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을 보니 상대 팀의 응원단 중 한 명이었습니다. 언뜻 봐서 내 또래인 것 같았습니다. 이 아이가 무슨 일로 나를 이렇게 잡아끌고 가는지는 몰라도, 뮤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고 해서 이 아이의 손을 뿌리칠 다른 핑곗거리를 생각해내지 못한 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애는 운동회의 마지막 경기인 이어달리기 경주에 참가할 학생들 앞에 나를 세웠습니다. 선수들이 전부 지쳐 있는 것을 보니 이미 경주가 시작되고 나서 한참이 지난 것 같았습니다. 이 아이는 나에게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점심시간에 우리 편과 상대편 선수 사이에서 시비가 붙었나 봅니다. 학교 뒤쪽 낡은 창고 있는 데서 두 명이 대판 싸웠는데, 한 명이 얼굴에 상처를 입어서 병원에 갔다고 합니다. 때문에 상대 팀에서 선수 하나가 빠졌는데, 지금 보니 그 선수가 이번 이어달리기 대회에서 마지막 주자를 맡은 선수였더라는 것입니다. 이 선수 대신 마땅히 뛸 사람도 없고 한데, 그렇다고 마지막 주자가 나오지 않으면 운동회 전체에서 판정패 처리가 되니 대신 나가서 좀 뛰어달라는 얘기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거절해 버리고 뮤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져도 상관없다고까지 하면서 끝까지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아이는 모르는 듯했지만, 얼굴에 난 상처를 꿰매러 병원으로 간 선수는 내 친구였습니다. 이것으로 나는 친구의 의무까지 어깨에 짊어지게 된 셈이었습니다. 내게는 이 상황을 피해 갈 다른 방법이 없었고, 친구의 몫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라도 나는 거의 삼 년 만에 운동장 흙바닥 위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앞 주자가 자기 몫에서 남은 반 바퀴를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출발선 앞에 서서, 내가 달리게 될 운동장을 교수대 위에 선 사형수만큼이나 절망적인 기분으로 둘러보았습니다. 평소에는 정말 좁고 초라하게만 보이던, 지금은 선수들과 응원단 사람들이 가득 메워 버린 그 협소한 공간마저도 그때만큼은 어처구니없이 넓어 보였습니다. 한 시간을 쉬지 않고 죽어라 뛰어도 세 바퀴는 고사하고 눈앞에 보이는 결승점 끝까지도 못 갈 것 같았습니다. 우리 팀이 간발의 차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상대 팀의 자리에 선 나는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얘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장 안의 모든 사람이 내게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기가 잔뜩 죽어 준비운동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던 나는 갑자기 건네진 바통을 받고도 바로 달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멍청하게 서 있다가, 사람들의 함성을 들은 뒤에야 주춤거리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불안정한 출발로 우리 팀 선수와의 거리는 상당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먼저 가 버리는 우리 팀 선수를 어떻게든 따라잡으려고 내 나름대로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듯, 가랑이를 찢을 각오로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하지만 뛰어보았자 뱁새는 뱁새였는지, 나는 황새의 뒤꽁무니조차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삼 년 전 그날로 되돌아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관중을 실망하게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멋모르고 남의 일에 나선 내가 망가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관중이 나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그냥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다리는 아직도 트랙 위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뮤를 찾아야 했습니다. 갑자기 뮤 이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계속 달려서, 뮤가 있을 곳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뮤는 길을 헤매다가 나에게 돌아오는 길을 영영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뮤의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은, 뮤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뮤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눈을 뜨면 헛것이 보였습니다. 뮤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발을 계속 움직이면서 뮤에게 손을 뻗었습니다. 뻗은 손은 뮤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뮤의 뒷모습은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안 돼. 가지 마. 나는 뮤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뮤가 이쪽을 돌아보았습니다.

발 아래에 아무것도 밟히지 않았습니다. 넘어졌구나,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발은 여전히 땅을 박차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내 다리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은 내가 밟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내 몸 전체가 잘못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땅을 밟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허공을 밟고 있었습니다. 내 몸이 바람을 가르며, 바람을 디디며 날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주자가 바통을 건네받고 세 바퀴 중 반 바퀴 지점을 통과했을 때였습니다. 내 몸은 멈출 줄 모르고 조금씩 위로 떠오르며, 발이 허공을 밟는 대로 속도를 붙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 앞에서 트랙을 돌고 있는 우리 편 주자를 제친 후에도 발은 멈추지 않고 허공을 달렸고, 나는 얼이 빠진 모습으로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머리 위 높이까지 멈추지 않고 올라갔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관중, 그리고 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허공을 달리는 내 모습을 본 우리 편 주자는 입을 쩍 벌린 채 나만 바라보고 있다가 발을 헛디뎌 자리에 엎어졌습니다. 그런 뒤에도 다시 몸을 일으켜 달릴 생각은 않고 내가 공중에 붕 뜬 채 두 번째 바퀴까지 모두 도는 모습만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계주 코스의 마지막 바퀴에 들어섰습니다. 나의 몸이 다시금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 발 아래 있던 땅이 다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공중에 떠오를 때처럼 천천히, 아주 느긋이 땅 위에 발을 디뎠습니다. 결승선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빨라진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고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크게 비틀거렸습니다. 눈을 한 번 깜박하고 감았다 뜨니 결승선이 눈앞이었고, 발을 헛디디면서 방향을 튼 나는 결승선의 하얀 리본이 아닌, 트랙 가장자리에서 리본을 잡고 있던 여자애에게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지도 못하고, 여자애와 그대로 부딪혀 땅에 엎어졌습니다. 털썩 하고 흙바닥 위에 두 개의 몸뚱이가 포개지면서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고, 나와 그 여자애는 한 명은 위에서, 한 명은 아래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아니, 여자애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여자애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옷에서 튀어나온 다른 얼굴 하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뮤의 얼굴이었습니다. 뮤는 나를 보고 거수경례를 붙이듯 뮤, 하고 짧게 울고는 내 체육복 속으로 머리를 도로 쏙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나는 얼른 내가 입고 있는 체육복 웃옷을 들추었습니다. 하지만 뮤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것도 모자라, 내가 체육복 안에 껴입고 있던 속옷까지 전부 벗어서 거꾸로 들고 탈탈 털었습니다. 그러나 옷에서는 흙먼지만 잔뜩 피어나올 뿐, 뮤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여자애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여자애는 어느새 내 가랑이 밑에서 빠져나와 나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진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여자아이의 양 볼이 발갛게 물들어갔습니다.

환호성이 들렸습니다.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크고 힘찬 환호성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조금 전의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모든 관중이, 우리 팀 상대 팀 상관없이 모두 달려나와 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놀랄 만한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가운데, 나는 정신이 없는 상태로 관중의 손에 의해 그들의 머리 위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헹가래를 쳐 주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하늘 위로 떠올랐습니다. 붉은 기운이 도는 높은 가을하늘 너머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

하늘을 나는 운동화를 가진 소년이라는 다소 거추장스러운 별명을 내게 남기고 그 해의 운동회는 끝이 났습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운동회가 열리고 성황리에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달리기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운동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저의 감정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운동회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새하얀 체육복을 입고 선선한 가을 날씨에도 땀으로 흠뻑 젖어 가며 기쁨으로 움직이는 아이들의 웃는 얼굴뿐입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죠. 내 감정이 이렇게 변한 것을 보면, 운동회가 아주 싫었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내게 소원을 빌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면, 뮤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다음 운동회 때 뮤를 다시 볼 수 있겠지요. 그 때면 나는 마지막 이어달리기에서 또 우승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마침 시기이고 하니.

 

 

일부 소재를 외부에서 가져왔습니다만, 괜찮은지요.

인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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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남사
  • 201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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