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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작성자 trudy
  • 작성일 2010-08-11
  • 조회수 390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또 시작이다. 그의 나직한 노랫소리가 조용한 교실을 울렸다. “선생님, 쟤 또 노래 불러요.” 그 말에 선생님이 교편을 교탁 위에 올려두고 걸어 나온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선생님이 곁에 다가가자 그는 노래를 그쳤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다. 선생님은 그를 보고 상냥하게 웃는다. “성철아, 노래는 나중에 부르자. 다른 아이들 공부하는 데 방해되잖니.”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각사각, 연필소리만이 조용한 교실을 울린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다. 때로는 혼자 실없이 웃기도 하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무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를 힐끗 쳐다본 선생님은 종이 치자 나가버린다.

그의 얼굴에는 여드름 자국이 가득 나 있었다. 아이들은 그의 얼굴이 달 표면 같다며 웃곤 했다. 그는 그 때마다 농담임을 알았던 것인지 혹은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보고 웃었기 때문인지 따라 웃곤 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누런 이가 드러났다. 이상하게도 그 더러운 이를 볼 때면 목에 꼬질꼬질한 때도 함께 보여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에게서 냄새가 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소위 말하는 ‘남자냄새’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멀리했던 것은 사실 냄새라기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우개 좀 빌려줄래?

그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나도 모르게 양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 던져주자, 그가 “고마워.” 하며 웃는다. 입 냄새가 확 풍겨오는 것 같다. 나는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기 위해 의자를 옮겼다. 그가 고개를 홱 돌려 이쪽을 본다. 순간 뜨끔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든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일반인에게도 위축되기는 싫은데, 장애인에게 그럴 수야 없다. 나는 열심히 칠판을 보고 필기를 했다.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받아 적으면서도 그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매 수업시간마다 이런 긴장상태에 있어야 하는 건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공부 열심히 하네.” 그가 건넨 말조차 짜증스럽게 들렸다. 남이야 공부를 하던 잠을 자던 자기가 무슨 상관이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열심히 펜을 놀렸다. 왜 하필 이런 녀석과 짝이 된 걸까. 그가 고개를 다시 돌리는 것 같았다.

5월의 햇살은 따뜻하다. 커튼 사이로 푸지는 햇빛에 눈이 서서히 감겨온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배도 부르다. 분명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과서의 활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 사이 졸았던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졸거나 자고 있었다. 선생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런 분위기라면 엎드려서 자도 지적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따뜻해서 눈이 저절로 감긴다.

-일어나. 응? 일어나.

꿈결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어떤 사내아이의 어눌한 목소리였다. 한창 단잠에 빠져있는 터라 그런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는 무시하고 잘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의 오른쪽 어깨를 덥석 잡았다. 투박한 손이 내 어깨를 흔들었고, 나는 짜증을 내며 일어나려다 문득 깨달았다. 내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를. 하지만 내가 어찌할지를 결정하기 전에 나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공부해야지.

앞자리 아이가 이쪽을 돌아보더니 제 짝에게 귀엣말로 무어라 소곤거렸다. 키득키득, 그들이 이쪽을 곁눈질하며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세졌다 약해졌다 하는 그의 악력에 소름이 돋았다.

-수업시간에 자면 안 돼.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저는 수업시간에 노래나 부르는 주제에.

-와, 우리 성철이가 민정이 깨워주는 거니? 성철이가 제일 낫다. 자기 짝이라고 챙겨주고. 너희도 좀 배워 봐라. 너흰 짝이 자면 같이 자냐?

선생님이 말했다. 아이들이 거의 다 졸고 있는 조용한 교실이라 그의 목소리가 선생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전부 이쪽을 돌아보았다. 킥킥, 웃음소리가 들렸다. 행여 그와 친하다고 생각할까 봐 조마조마하다. 그는 여전히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였다. ‘손 치워.’ 내 말에 그는 여전히 웃으며 책상 위로 손을 내렸다. 왼손으로는 다시 노트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연필을 잡은 채 그는 여러 가지를 그린다. 어쩜, 조금은 잘 그린 그림일까. 이런 녀석이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의 실력이 나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던 그에게 칭찬을 하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아이가 무언가를 잘하면 ‘우와, 너 잘 한다.’ 라며 예의상으로 칭찬을 해주고 또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장애인, 특히 이성에게는 그렇지 않다. ‘칭찬’을 하며 ‘호감’을 나타내면 곧바로 주변에서 ‘관심 있다’ 혹은 ‘좋아한다’라는 소문이 나는 것이다. 오해받을 행동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한 경우라면 예외겠지만, 나는 상냥하다 기보단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남자아이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한 번 꼬투리를 잡히면 앞으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쭉 놀림 받을 게 뻔했다.

차려, 경례. 감사합니다. 수업 마침종이 쳤다. 인사를 하자마자 병들 닭 마냥 졸던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왁자지껄 떠든다.

-어이구, 이것들 봐. 수업 끝나자마자 살아나네.

핀잔을 주면서도 이미 우리의 모습에 이골이 난 듯 선생님은 그냥 웃으며 교실을 나섰다. 하긴, 졸업생들이라고 우리와 달랐을 리는 없으니까.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아이들이 내 쪽으로 슬슬 몰려들기 시작한다. 아니, 내게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로 오는 것이다.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 딱하다는 생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주변이 시끄러워진다는 것에 더 짜증이 났다. 하지만 굳이 그들을 말릴 생각도 없다. 놀림감이 될 게 뻔하고 또 ‘노는 애들’에게 덤비는 것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성철이. 쌤한테 칭찬 받으니까 기분 좋아? 즐겁냐고 이 새끼야.

무어라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실장이 그의 책상에 발을 올린다. 타악, 소리와 함께 책상 위로 올라간 실내화에서 흙이 떨어진다. 담임선생님이 알면 기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실장은 담임에게 실수로라도 이런 모습을 보일만큼 멍청하지 않다. 어른들이 보는 우리의 모습과 또래가 보는 우리의 모습은 확실히 다르다. 그것은 물론 관점의 차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른들과 또래 앞에서 다른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우리 나이였을 때가 있었으면서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가끔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 성철이, 목에 때 시커먼 거 봐봐. 야, 가위바위보 하자.

하고 실장은 제 패거리들에게 소리친다.

-지는 사람이 성철이 목 만져보기.

그 말에 아이들이 우우 하고 야유를 보낸다. ‘미친놈’ ‘너 혼자 해라’ ‘난 하기 싫어’ 자기 말에 동조하는 아이들이 없자 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야, 자기만 안 걸리면 되는 거잖아. 사내새끼들이 용기가 그렇게 없냐?

그 말에 남자아이들이 술렁거렸다. 가끔 느끼는 건데, 사내아이들의 허세란 참 웃긴다. 특히 이 나이 때의 남자아이들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육두문자를 붙여야만 제가 멋있어 보인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가끔 철이 일찍 든 아이들은 그들을 보며 ‘한 2년만 있으면 자기네들 스스로가 쪽팔려서 밤에 잠도 못 잘걸.’하고 말하곤 한다. 아무튼 철없는 사내 녀석들은 실장의 말에 주먹을 허공으로 높이 든다. 변성기에 들어선 남자아이들의 굵직한 ‘가위바위보’ 소리가 교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목소리가 터져 나오듯 담배냄새도 확 풍겨온다.

몇 번의 가위바위보 끝에 마지막으로 패배한 것은 정광용이라는 녀석이었다. 울상을 짓는 그에게 아이들은 환호성을 보냈다. ‘자, 남자의 용기를 보여줘. 지금 이거 못하면 넌 사나이도 아니다’ 실장이 그를 부추겼다. 그는 실장 쪽을 몇 번 돌아보다가 마침내 성철의 목에 손을 가져간다. ‘야, 그대로 목 졸라서 죽여’ 농담도 참 무시무시하게 한다. 저렇게 해야만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광용이 그의 목을 잡는가 싶더니 5초도 되지 않아 어깨를 부르르 떨며 손을 떼어낸다. 그리곤 비명처럼 욕설을 내뱉는 것이다. ‘와, 나 남자 못하겠다.’ 그 말에 아이들이 와 하고 웃어댄다. 성철은 무엇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다. 피곤하다.

종이 치고 아이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들이 나를 보고 웃으며 자기네들끼리 무어라 소곤거렸다. 기분이 나쁘다. 선생님이 들어오고, 실장은 모범적인 자세로 구령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나는 그쪽을 쳐다보았다. 실장은 정말로 모범생인 것처럼 보였다.

주홍빛 찬란한 석양이 뉘엿뉘엿 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보충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면 4시 50분이었고, 10분정도 부지런히 걷다보면 갈림길에 당도할 수 있었다. 갈림길의 중간에 서면 왼쪽에는 낡은 빌라가, 오른쪽에는 주택의 녹색 양철대문과 낙서뿐인 벽돌담이 있었다. 주택 오른쪽 샛길 너머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지만, 항상 불이 꺼져 있고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보니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항상 이 골목을 지날 때면 기묘한 적요감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생생했던 자동차 경적소리가 아득히 멀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타고 솔솔

그리고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무슨 배달을 한다던가? 아무튼 자전거 뒤에 노란 바구니를 싣고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바구니 안에 무슨 물건이 담겨있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침에 신문배달이라도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안녕!

그가 노래를 멈추곤 손을 흔들며 내 앞을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따라서 손을 흔들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그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소문이 나기라도 하면 앞으로의 중학교 생활은 끝이다.

그의 우렁찬 노랫소리를 들으며 가고 있는데, 문득 바닥의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녹색의 종이.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만 원짜리 지폐였다. 그가 떨어뜨린 건가? 나는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성철아! 야! 박성철!

솔직히 고함을 지르며 그가 대답하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면 이 돈은 내가 꿀꺽하는 건데,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박성철!

자전거를 타고 있어서인지 그는 쌩쌩 달리고 있었다.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가 잠깐 멈춰 섰다. 나는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드디어 이쪽을 돌아봤다.

그 순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 그를 부르려 했지만 그가 끝내 돌아보지 않아 주인 없는 돈을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지게 되는, 그런 시나리오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를 부르며 마구 달려왔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돈을 가지면서도 죄책감을 최대한 덜기 위해서였다. 그가 내게 ‘무슨 일이야?’하고 물어왔다.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기껏 달려왔는데 거짓말을 하고 돌아간다면 죄책감이 배로 늘어날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렇다 할 핑계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지폐를 내밀었다.

-이거, 네 거 아냐?

그 말에 그가 제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오른쪽, 왼쪽, 뒷주머니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 거야.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는 그에게 돈을 돌려주었다. 그는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투박한 손을 잡고 흔들며, 그래도 이런 녀석들은 거짓말을 할 일이 없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야, 이것 봐.

-응?

집에서 뒹굴고 있자니 언니가 또 나를 불러낸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을 보니 또 ‘재밌는 거 보여줄게’라며 희한한 동영상을 보여줄 생각인가보다. 언니가 보여주는 것들 중에는 가끔 정말 재미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왜 이게 재미있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호응을 해주지 않으면 또 짜증낼 것이 분명하니, 그냥 참고 봐주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동영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모니터에는 글자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거 봐. ‘생후 2~3개월 된 유아가 눈을 맞추지 않으면 선천성 소아자폐증으로 의심할 수 있다’ 이거.

이게 뭐 어쨌다고? 나는 멀뚱멀뚱 언니를 쳐다보았다. 언니는 덤덤한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야, 생각해봐. 내 애가 3개월쯤 됐는데 나랑 눈을 안 마주치면 얼마나 무섭겠어. 응? 혹시 내 애가 이상한 장애 같은 거 아닐까 하고 잠도 못잘 거 아냐.

-언닌 아직 시집도 안 갔으면서 걱정도 팔자다.

나는 한마디 내뱉어주곤 다시 방에 쏙 들어가 버렸다. 문 밖으로 언니의 투덜거림이 들려오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성철이가 민정이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선생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수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젊은 선생님이었다. 특수교육을 맡고 있는 그 선생님은 쭈뼛쭈뼛 서있는 나의 어깨를 다독였다.

-네가 이것저것 잘 챙겨주고 배려해준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그런 적이 있던가? 딱히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가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교무실 선생님들에게서 칭찬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상점이 어쩌고 봉사상이 어쩌고. 수행평가 가산점 이야기까지 나왔다. 한 일도 없는데 그런 칭찬들을 듣는 것이 민망하면서도 가산점 같은 이야기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선생님이 말했다.

-지금 성철이 짝이라며? 계속 짝 하는 거야?

-아뇨, 한 달에 한 번씩 바꿔요.

그럼, 하고 선생님이 뜸을 들였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계속 옆에 앉으면서 돌봐줄 수 있니?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려놓을게.

역시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졸업할 때까지만 그의 옆자리에 앉으면 봉사상에 상점에 가산점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인데다, 무엇보다도 거절할 핑계거리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선생님의 환한 미소가 눈앞에 선했다.

그렇게 나는 그와 또 짝이 되었다. 그가 내게 악수를 청하는 횟수도 잦아졌다. 왜 이 녀석은 악수에 이렇게 환장을 하는 거지? 하면서도 딱히 거부할만한 핑계거리가 없어 나는 그의 손을 잡곤 했다. 아이들은 내가 이 녀석을 돌봐주고 여러 가지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를 챙겨줄 때마다 아이들에게 억지로 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싫은 티를 낸 탓도 클 것이다. 그쯤 되면 내가 저를 싫어한다는 것도 알련만, 그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고 악수를 청하였다. 수업시간에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면 항상 그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수업시간에 노래를 불렀다. 동구 밖 과수원길……. 그의 노래는 선생님들의 저지로 인해 몇 구절 만에 끝나곤 했다. 선생님들은 매 수업시간마다 지치지도 않는지 ‘성철아, 노래는 나중에 부르자’라며 그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어른이란 짜증을 억누를 수 있는 존재인 건가, 싶을 정도로 선생님들의 인내심은 대단했다. 오히려 짜증을 내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평소에는 수업을 잘 듣지도 않는 아이들이 그가 노래를 불러서 수업 흐름을 끊어놓는다며 불평하는 것이었다.

졸업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우리 반 아이들은 교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기말고사도 끝난 다음이라 선생님들도 수업을 하는 대신 영화를 틀어주곤 했다. 여주인공이 클로즈업되었고, 노는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예쁘다.’ 앞자리 아이들이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짜증이 나 고개를 홱 돌려보았다. 그가 나를 보고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네가 더 예뻐.

그 순간 몸이 굳었다. 이 녀석, 설마 나를…….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기 싫어. 나는 그와 떨어지기 위해 의자를 왼쪽으로 조금 옮겼다. 그의 목에 꼬질꼬질한 때가 보기 싫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졸업식이었다. 가족들과 후배들이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후배들 한 명 한 명, 그리고 다른 학교로 가는 친구들과 인사를 했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안심이 되었다.

교실에 돌아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꽃다발이 놓인 책상, 마지막이 될 칠판. 옆자리에는 그도 있었다. 누구에게서 받은 건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고 웃었다. 누런 이가 드러나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혐오스럽다.

-있잖아.

그가 입을 열었다. 순간 시끄러운 교실의 공기가 멎은 것만 같았다.

-나, 너 좋아하는데…….

그리고 앞자리 아이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야, 민정아. 방금 성철이가 말한 거야? 그들이 내게 물어왔다. 그리곤 내 대답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야, 성철이가 민정이한테 고백했다!

그 말에 아이들이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몇몇은 구경거리가 생긴 듯 책상 위에까지 올라가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고 몇몇은 다른 반에게 알리러 가는 모양이었다. 또 몇몇은 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고 몇몇은 둘이 잘 어울린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무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어떤 반응을 하던 나는 그들의 구경거리였다. 그들은 나를 보고 조롱하고 안쓰러워하며 자신들을 채우고 있을 것이었다. 벌써 노는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 ‘뽀뽀해, 뽀뽀해’ 외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나한테 왜 자꾸 지랄이야! 제발 좀 꺼져! 너 같은 새끼 질색이야!

내가 그렇게 외친 것은 이미 다른 반 아이들마저 몰려들고 난 후였다. 아이들이 나와 그 주변을 빙 둘러싸곤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종례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잊은 채 교실을 뛰쳐나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등 뒤로 느껴졌다. 아마 아이들은 나를 먹이삼아 이야기판을 벌릴 것이다. 아마 한 일주일 정도는 계속 내 이야기가 오갈 것이었다.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얼마나 아파하던 상관없이 그들은 나를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킬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하필 나지? 허고 많은 아이들 중에서 왜? 왈칵 눈물이 났다. 억울했다. 소매에 눈물자국이 선명하게 번졌다.

그 날 이후 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얼마 뒤에 결혼을 했다. 이제 갓 3개월이 된 내 아이는 이루 말할 것 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오전 11시 39분. 아이는 헝겊인형을 가지고 있었다. 헝겊으로 된 인형은 아기의 정서발달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딱딱하지 않으니 물어뜯어도 안심이었다. 하지만 너무 빨아대서인지 인형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인형을 붙잡았다.

-아가, 응? 다른 거 가지고 놀자.

아이는 인형을 꽉 잡고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코앞에다 얼굴을 들이댔다. 하지만 아이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인형을 어찌나 꼭 잡았던지 살살 빼앗는 것이 힘들 지경이었다.

동구 밖 과수원길……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나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던가? 나는 좀 더 필사적으로 아이의 얼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는 내게 관심조차 없었다.

설마…….

아이를 잡았던 두 손에 힘이 풀렸다. 왜? 왜 하필이면…….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아이는 여전히 내 눈을 보지 않았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tr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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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오늘 춥대요.” 여자는 사내의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는다. 사내는 여자가 건네는 바바리코트와 목도리를 받아든다. 사내가 코트를 입자 여자는 손수 그의 목에 목도리를 감아준다. 여자의 미소도 손길도 너무 다정하다. 사내는 여자가 희고 가는 손으로 자신을 죽이는 상상을 한다. 이 목도리로 사내의 목을 졸라버리는 것이다. “다녀오세요, 여보.” 여자는 발뒤꿈치를 들어 사내의 뺨에 입을 맞춘다. 까치발을 한 여자는 사내의 품에 안기듯 기댄다. 사내의 배에 둥근 것이 와 닿는다. 그는 여자의 배를 한 번 쓸어내린다. 그리고 여자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뱃속에 있을 아기를 생각한다. 여자가 매어준 목도리처럼 그의 목을 조르고 있을 그 탯줄도. 사내는 아랫입술을 꼭 깨문다. “다녀올게” 그의 목소리가 잠겨있는 것을, 여자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바람이 차다. 얼굴을 향해 세차게 내리치는 바람이, 얼마 전 부장이 그의 얼굴에 집어던진 서류뭉치 같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사내는 그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내는 몸을 움츠린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단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몸이 떨린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찜질방이나 PC방에 가볼까 생각하지만 이내 돈 낭비라는 것을 깨닫는다. 퇴직금은 입금되었을까. 은행에 가볼까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입금되지 않았을까 두렵다.  춥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낸다. 신종 플루가 어쩌고 하면서 회사에서 나누어준 것이다. 마스크를 낀 그의 모습이 한 옷가게의 쇼윈도에 비춰진다. 문득 범죄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조하듯 웃는다. 마스크와 목도리로 얼굴을 가린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움푹 파인 그의 눈두덩이 세상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으로는 차마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다시 길을 걸으려는데 한 아가씨가 사내를 보고 멈칫했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치한으로 오해했다가 코트 아래 양복바지가 보여 안심한 것이겠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진다. 왜 양복을 보고 안심하는 것일까. 양복 입은 남자도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데. 그의 발걸음은 자꾸만 낯선 곳으로 향한다.  ‘내일부터 그만 나와도 돼.’ 그렇게 말하는 부장에게 끝까지 굽실거린 것이 후회된다. 어차피 그만두는 것, 부장에게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나왔으면 속이 시원했을 텐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거나 ‘야 이 씨발새끼야’ 한 마디라도 했으면 이렇게 착잡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문득 눈앞에 보인 풍경이 너무도 낯설어 사내는 걸음을 멈춘다.  이런 곳이 있었던가. 사내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왔는지를 생각한다. 그는 세 갈래의 골목길에 서 있었다. 그의 왼쪽에는 낡은 빌라가, 오른쪽에는 주택의 녹색 양철대문과 낙서뿐인 벽돌담이 있었다. 주택 오른쪽 샛길 너머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지만, 불이

  • trudy
  • 2010-04-02
당신의 파편

 당신이 선물한 컵이 깨졌다. 컵에 새겨진 자양화가 바닥에 떨어져 조각나버렸다. 너무 아까워서 나도 모르게 깨진 꽃을 손에 꼭 잡았다. 피가 났다. 당신에게 보여주면 당신은 내게 뭐라고 할까? 저리 치워, 더러워. 그렇게 말할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어쩌면 괜찮으냐며 내 손을 잡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리조각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좀 더 다치면 당신은 나를 보아줄지도 몰라. 그런 잡히지 않는 희망에 의존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붉다.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도 한때는 이렇게 붉게 타올랐겠지. 지금은? 아직 붉을까? 아직 이렇게 뜨거울까? 나는 팔꿈치로 흐르려는 피를 왼쪽 손으로 닦았다.  당신은 안방에 있었다. 내 손에 잡힌 문고리가 피로 빨갛게 얼룩졌다. 당신은 목 늘어난 러닝셔츠를 입고 배를 벅벅 긁는다. 다른 여자들 앞에서의 당신은 항상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몸에 잘 맞는 깔끔한 슈트를 입고 있다. 코도 후비지 않고 떡 진 머리를 벅벅 긁지도 않는다. 술에 취해도 밖에서는 얌전하다.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고 막말을 하지도 않는다.  문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불만이라는 듯 목소리가 곱지 않다. 한쪽 손에 과자를 한 움큼 잡고 우물거린다. 나는 그런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나 피나. 그렇게 말하곤 당신의 얼굴을 살핀다. 반색을 하며 내게 달려와 주기를, 내 손을 어루만지며 많이 아파? 하고 물어봐 주기를 바란다. 당신의 입이 움찔거린다. 좋아, 이제 됐다. 곧 몸을 일으켜 내게 달려올 것이다. 놀란 눈을 하고선 괜찮아? 하고 먼저 물을 것이다. 그럼 나는 당신에게 안겨 훌쩍이고, 당신은 나의 어깨를 다독일 것이다. 내가 너무 무심했지? 미안해. 당신의 말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괜찮다고 웃을까, 말없이 눈물을 닦을까. 오랜만에 건네진 당신의 따뜻한 말에 어떻게 감동해야 좋을까. 그리곤 당신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힘없이 스러지는 내 희망만큼이나 무참하게 일그러지는 입술을.  저리 치워! 당신의 안색이 변했다. 다친 나에게 당신은 또 윽박질렀다. 나를 다치게 한 유리조각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에게 고함쳤다. 꺼져, 병신 같은 년. 아픈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아픈데, 피가 나는데, 이렇게 뚝뚝 흐를 만큼 피가 나는데, 그만큼 아픈데. 당신은 나를 끌어안지도 걱정하지도 않는다. 당신은 나를 병신으로 만든다. 나는 병신이다. 당신의 말대로 나는 병신이 된다.  애새끼도 곱게 못 낳는 년이, 씨발. 하고 당신은 중얼거리며 돌아눕는다. 그 말에 나는 배를 만져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아이, 가 이제는 없다. 당신의 발길질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리고 당신은 내 뺨을 때렸다. 그 때도 당신은 내게 병신 같은 년이라고 했다. 당신은 나를 수시로 병신으로 만들었다.  내가 깨어버린 컵

  • trudy
  • 2009-12-07
Corpse Robot

Corpse Robot    이 손톱으로 너를 갈기갈기 찢었던 그 날.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어. 목까지 와닿는 소름끼치는 쾌락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지. 너무 즐거웠어. 눈물이 날 만큼 말이야.     생각해보면, 너는 나를 걸어 다니는 샌드백 정도로 여긴 걸지도 몰라. 나를 하고 한 달 정도 지나 상가에서 나와 같은 종류의 CR을 80%나 할인하여 팔았었지? 그 때 넌 나를 주먹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어.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망가지지 않았지만 너무 아팠어. Corpse Robot. 즉 시체 로봇. 우리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미국의 한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졌어. 그가 부모의 시체를 파내서 심장과 척추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관들을 갈아 끼워 ‘작동’시키자, 세계의 여론이 곧바로 찬반으로 나뉘어 격렬한 대립이 시작되었지. 우리 CR들은 생전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해. 죽을 때에 뇌도 같이 죽어버리니까. 내가 기억하는 것도 죽을 때의 느낌뿐이야. 그리고 인간들이 내 시스템에 몇 가지를 입력해 놓아서, 지금의 나로선 어떤 기억이 입력된 것이며 어떤 기억이 실제 하던 것인지를 구분하기 힘들어. CR개발 초기에는 세뇌도 어색했고 피부도 썩어 들어가곤 했으며 또 틈만 나면 작동이 정지되었다지? 그것이 바로 CR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어. CR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생명윤리와 함께 그 이야기를 꼭 언급하곤 했지. 있지, 내가 죽을 때의 느낌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아니? 그건 그것이 가장 괴로운 기억이기 때문이야.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 지상이 아득하게 보일 무렵. 뛰어내리고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어. 길고도 짧은 낙하의 시간 후. 땅에 몸뚱이를 처박으며 느끼는, 손끝까지 전해지는 격렬한 아픔. 그것은 정말로 한 순간이면서도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이었어. 고독감. 슬픔. 아픔. 다시 경험하라고 한다면 아마 도망쳐 버릴 거야. 그래서일 거야. 내가 너를 죽인 것은. 네가 그 날 나에게 ‘쓸모없는 새끼. 다시 무덤 속에나 들어가 버려!’라고 했으니까. 무섭고 싫어서 울고 있자 너는 쇼하지 말라느니 폐기처분 할 거라느니 하는 말을 하며 나의 두려움을 한층이나 극대화시켰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앞에는 네가 있었어. 갈기갈기 찢어진 너의 살점. 나의 손과 손톱에 묻은 너의 피. 그 냄새에 취하여 엉엉 울었어.     조금 후면 나는 폐기된단다. 무리도 아냐. 나는 내 주인인 너를 죽였으니까. 아아, 저기서 상가 직원 몇 명이 다가오는구나. 나는 그들이 나를 컴퓨터에 연결하는 모습을 지켜봤어. 아아, 저 버튼을 누르면 나는 이제 정지 돼. 죽어버리는 거야. 그런 건 싫어. 싫어. 너무도 싫어서 손톱을 세웠어.     CR넘버 4. MM000136의 폭주로 인해 세상은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그것은 프로그램을 정지하기 직전에 마취가 풀려 손톱으로 상가직원들

  • trudy
  • 2008-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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