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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 작성자 인남사
  • 작성일 2010-06-30
  • 조회수 516

 

 

 

 

 

 

 

 

 

그 위대한 새는 다른 위대한 새의 등에 타고 하늘을 날아 자신이 태어난 둥지로 영광을 가져올 것이다.


 


 


 

하늘은 맑다. 최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날씨다. 바람이 약하게 불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람이 거세고 날씨가 궂다 해도 새들은 기필코 자신의 둥지로, 모두의 둥지로 영광을 가져오리라.

연장자는 때를 보고, 이륙 준비를 하는 모든 새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수를 세기 시작한다. 모두가 바라 마지않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 땅에 생존과 번영을 가져올 자연의 선물을 거두어들일 때가.

제각기 다른 크기와 다른 모양의 새들이 하늘을 향해 정렬하여 연장자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맨 앞줄 중앙에 있는 하얀 새 역시 이웃한 이들과 다름없이 잔뜩 긴장한 상태다. 그는 이 애타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다. 다른 새들 역시 그러하듯, 그도 언제든지 날아올라 자신의 등에 탄 작은 새가 하늘 밖으로 나가도록 해줄 수 있다. 그럼에도 일정한 의식처럼 비행의 절차를 치르는 것은, 모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너희는 이 땅 위의 동족들과 자손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위대한 자들이다.

연장자는 그도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격앙된 마지막 한 마디를 힘껏 외친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렬해 있던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창공의 맑은 청색은 순식간에 색색의 보석들이 날아와 박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빛으로 반짝인다. 하늘로 날아오른 새들의 윤기 나는 깃털에 햇빛이 반짝인다. 오래 전부터 그들을 보살펴 왔던 태초의 빛을 받아 점멸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세상에 드러내며, 새들은 높이 올라간다.

그 무리들 중에는 하얀 새도 끼어 있다. 등에 줄곧 자신의 단짝인 검은 새를 태우고, 여유만만한 그는 다른 새들과 경주까지 해 가면서 임계점을 향해 전진한다. 날개에 속력이 붙으며 공기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마찰음이 하얀 새와 그의 등 위에 매달려 있는 검은 새를 집어삼킬 기세로 덮친다. 예상대로다. 다른 이들에게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속도로 치솟고 있지만 여전히 일은 순조롭다.

하얀 새는 경계가 눈앞까지 다가왔음을 몸으로 느낀다. 주위를 죄이는 압력이 느슨해지고 그를 아래로 잡아당겨 땅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하려 몸을 붙잡던 힘도 슬며시 손을 놓는다. 이제는 검은 새가 날개를 펼칠 때가 왔다. 주위의 다른 새들도 등 위에서 활동할 준비를 개시한다. 하얀 새와 같은 큰 새들이 하늘의 경계선까지 검은 새와 같은 작은 새들을 데려다 주면, 작은 새들은 그곳에서부터 하늘 바깥을 향해 보름간의 긴 여행을 시작한다.

경계. 큰 새들의 등 위에 올라타 때를 기다리고 있던 작은 새들이 그들의 날개를 편다. 성질 급한 새부터 차례로 하나씩, 큰 새들의 등을 떠나 하늘 밖으로 나간다. 하얀 새에 올라타 있던 검은 새도 무리를 따라 경계 위로 나아간다. 이제 하얀 새의 일은 끝났다. 남은 것은 지상으로 돌아가, 보름 후 작은 새들이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마지막 새까지 경계를 넘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큰 새들은 위로 올라가던 항로를 바꿔 다시 아래로 하강한다. 각자 작은 새들을 등에 짊어지고 이 높은 곳까지 오느라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즐겁다.

지상으로 내려오자, 올라갔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이 비행을 시작하기 직전 큰 소리로 수를 세었던 연장자 작은 새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큰 새에게 한껏 부풀어 오른 기대감과 약간의 염려를 담아, 그들은 잘 갔느냐고 묻는다. 대장 격인 하얀 새는 연장자에게 늘 긍정적인 대답을 해 줄 수 있어 기쁘다고 생각하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잘 갔노라고 대답한다. 연장자는 크게 안도한다. 매번 그러는 일이지만, 모두가 무사히 하늘 밖으로 나갈 수 있어서 다행임을 느낀다. 하늘 밖에서도 모두가 무사해서 귀환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보름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올 작은 새들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의 결과가 가져올 모든 이득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지상에 남은 큰 새들은 작은 새들이 돌아올 때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며 대부분의 나날을 조용히 지낸다. 하얀 새도 첫 비행을 나갈 때부터 그래 왔듯 자신의 둥지에 들어가 생활하며 작은 새들, 그 중에서도 특히 검은 새의 귀환을 기다린다.

몇 번의 비행이 있기 이전에, 하얀 새는 검은 새에게 하늘 밖으로 나가는 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위로 위로 올라가 하늘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 무섭지는 않은지. 자신이 살며 익숙해진 고향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두렵고, 슬프고, 힘들지는 않은지. 두 번의 보름이라는 간격을 두고 매번 하늘 밖으로 나가는 검은 새는 큰 새들이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 의외의 대답을 내어놓았다. 대지를 떠나 하늘 밖으로 나가는 일에 대해 전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자신들 작은 새의 숙명이고, 그 숙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작은 새 자신들이라고.

검은 새는 자신들의 일에 진심으로 임하는 듯했다. 전혀 힘들거나 불편하지 않다고, 오히려 감사한다고도 했었다. 큰 새는 자신의 동료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큰 새들은 자신들의 일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작은 새들의 일에 대해서도 한 번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록 그들은 즐겁다고 말해도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작은 새들에게 약간의 경외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하늘 밖에도 이별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을 때였다.


 


 


 

보름이 지났다. 달은 하얀 새가 검은 새를 하늘 밖으로 데리고 갔을 때와는 그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다. 어느 누구도 때를 정하지 않았지만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큰 새들은 이륙이 있었던 장소에 한결같이 모여 있다. 하늘 밖으로 나갔던 작은 새들도 본능적으로 고향을 찾아 이곳으로 내려올 터다. 연장자는 한때 하늘 밖의 세계를 목격한, 여전히 밝은 눈으로 맑은 하늘을 꼼꼼히 살핀다. 아직 아무것도 눈에 띄는 게 없지만, 작은 새들이 곧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예상하던 대로, 색색의 점들이 돌연 하늘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연장자는 기다리고 있던 큰 새들에게 작은 새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와 동시에 큰 새들의 눈에도 창공에서 춤추듯 내려오는 작은 새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새들의 모습, 하늘 밖의 은혜를 받아 온 몸이 지혜의 빛에 감싸여 있다. 새들은 기쁨에 겨워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하늘 밖의 은혜에 감사하는 축제가 벌어진다.

그 가운데서 하얀 새는 자기 동료의 모습을 찾는다. 환희의 축제 속에서 검은 새의 모습이 언뜻언뜻 섞여 비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리로 고개를 돌려 초점을 맞추면, 검은 새는 그곳에 없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찾고 찾는 상봉의 장에서 하얀 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울이면, 검은 새의 목소리는 곧 묻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하얀 새는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한다.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고 하얀 새는 그의 동료를 수없이 많은 새들의 수라장에서 찾아 헤맨다. 그러던 중에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이륙 때 하얀 새와 검은 새 옆에 있던 큰 새와 작은 새다. 그들은 하얀 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 채고 조금의 걱정을 담아 하얀 새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묻는다. 그와 동시에 하얀 새는 정말로 어떤 문제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게 된다. 검은 새가 비행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작은 새들이 돌아온 직후, 혹은 이틀이 지난 밤이었다. 작은 새 중 하나가 예정과는 달리 제시간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밤에 하얀 새는 검은 새에게 하늘 밖에서 보이는 것들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검은 새는 잠시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자신들의 일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 꺼림칙한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검은 새가 처음 낸 말은, 하늘 밖으로 나갔다 온 작은 새는 하늘 밖에 있었을 때의 기억을 전부 잃어버렸다는 의외의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하늘 밖에서 얻은 은혜를 어떻게 가져오느냐는 하얀 새의 질문에는, 그 방법이야말로 진정한 하늘 밖의 지혜일 것이라고 농담을 하며 웃어넘겼다. 그럴 듯한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하늘 밖 세상에 대해 상상하던 하얀 새에게 검은 새가 덧붙였다. 그가 하늘 밖에서 기억하는 것은 커다랗고 밝은 별 뿐이라고.

돌아오지 못할 것 같던 새는 그믐날 늦게 땅에 도착했다.

하얀 새는 처음 겪은 사고에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지거나 침울해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감정은 완전히 사그라들고 이 사건에 대해 생각해볼 틈이 생겼다. 하얀 새는 검은 새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하늘 밖에서 어떤 불상사로 인해 생명을 잃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늘 밖을 여행하는 그들 새가 처음 있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영원의 시간 동안 있어온 비행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 지금에서야, 그것도 자신에게 발생했다고 하는 건 웃기는 얘기였다.

하지만 어떤 불상사가 생명 외의 다른 것을 빼앗아가 버려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을 수는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기억일지도 몰랐다. 하늘 밖의 지혜로 인해 기억과 함께 돌아올 방법을 잊어버린 채로 하늘 바깥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밖에 없었다. 분명 작은 새들이 기억을 잃어버리기 직전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이미지, 커다랗고 밝은 별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 새의 동료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하늘 밖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하얀 새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하얀 새에게 주어진 이번 임무는, 하늘 밖에서 떠돌고 있는 검은 새를 찾아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다. 우물쭈물하다가 아주 가 버려서 만나지 못하게 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달은 이지러진다.


 


 


 

하늘은 맑다. 최적이라 해도 좋을 만한 날씨다. 바람이 약하게 불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번 비행에서 하얀 새는 혼자다. 그가 늘 있던 맨 앞줄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멀리서 수를 세는 소리가 들려온다. 메아리를 들으며 하얀 새는 전신의 근육을 바짝 긴장시킨다. 이번에는 다른 누구도 동행하지 않는, 혼자만의 비행이다.

오랫동안 노려본 하늘이 하얗게 변색된다. 메아리가 마지막 숫자를 외친다.

날개를 막 펼쳤다 싶더니 땅이 저 아래 있다. 하얀 새는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향해 잡아먹을 기세로 돌진한다. 가까이 다가가는 자 모두에게서 기억을 앗아가는 커다란 별을 마주하듯. 태양도 강렬한 빛으로 하얀 새의 돌진에 응수한다. 그러나 아직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좀체 가까워지지 않는다. 하늘 밖도, 검은 새도 아직 멀리 있다.

전속력으로 날아서 어느 새 경계에 다다른다. 오늘 이륙한 무리들의 작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임무를 마친 큰 새는 돌아갈 채비를 할 것이다. 고개를 돌릴 여유가 있다면 하늘을 수놓는 큰 새와 작은 새들의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의 하얀 새에게는 그럴 틈이 없다. 하얀 새는 지금껏 올라와 본 지점을 지나 계속해서 올라간다. 바람은 하얀 새 곁을 스쳐지나가며 더 이상 나아가면 앞으로 일어날 일은 너를 죽일 수도 있다고 경고하듯 으르렁거린다. 하얀 새는 들려오는 환청을 애써 무시한다. 동료를 지상으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이겨낼 태세다. 별의 망각에서 동료를 구해낼 수만 있다면―

하얀 새는 갑자기 호흡이 곤란해짐을 느낀다. 오랫동안 지켜온 규칙을 하얀 새가 깬 것에 대해 꾸짖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속도를 더 높인다. 머리 위에서 너 같은 건 땅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비웃는 태양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 밖의, 기억을 잃고 하늘 바깥의 넓은 공간을 헤메이며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검은 새 이외의 것들은 아득해지는 시야와 함께 사그라든다. 위로.

위로.

그러나 다음 순간, 하얀 새는 정신을 완전히 잃는다. 날갯짓을 중단한 하얀 새의 몸이 투명한 대기 가운데에서 솟아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위로 향했던 몸뚱이가 한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하얀 새는 나무가 우거진 숲 위로 낙하한다. 하얀 새의 무거운 몸을 받은 연약한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부러진다. 굵은 가지에 얻어맞고 잔가지에 긁히면서 무수한 상처를 입는다. 하얀 새는 머리를 땅에 부딪힌다. 가물가물한 눈 앞에 비행을 마치고 내려온 큰 새들의 모습이 돌연 환영처럼 나타난다. 환영들의 무리에 앞장선 것은 연장자 작은 새의 모습이다.


 


 


 

하얀 새는 자신의 부러진 날개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낮, 아니면 며칠 전인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자신의 몸에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혔던 나뭇가지 중 하나를 꺾어 버팀목으로 대 놓았다. 날개가 완전히 낫고 전처럼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물론 다음 번 비행 때에도 쉬고 있어야 한다.

하얀 새는 다친 날개를 펄럭여 보았다. 부러진 뼈가 신경을 건드리면서 찌르는 통증을 유발시킨다. 다음번만이 아니라 그 다음번 비행에서조차 다시 날 수 있을지의 여부가 불분명하다.

이대로는 검은 새를 구하러 갈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헤어져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얀 새는 하늘 아래서, 검은 새는 하늘 밖에서 서로를 찾아 떠돌며.

하얀 새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그가 있던 독방으로 다른 새 하나가 들어왔다. 그새 식사시간이 되었는지, 짚으로 짠 바구니 안에 먹을 것들을 한가득 담아 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해 보니, 지난 번 언젠가 동료를 잃을 뻔한 적이 있었던 큰 새였다. 화려한 깃털 색에 개성 있는 생김새는 그 새만의 별난 특징이어서 하얀 새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새는 들고 온 바구니를 하얀 새 앞에 내려놓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 덕분에 어색한 침묵이 자리를 잡고, 다른 이들처럼 침묵이 길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 하얀 새가 먼저 자신을 생각해서 먹을 것을 대신 가져와준 일에 대해 감사를 건네는 것으로 말문을 던졌다. 상대는 하얀 새의 감사에 의례적인 인사말로 답했다. 이런 평범한 대화만으로 침묵을 깨기에는 부족했는지, 독방은 곧 다시 정적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제는 하얀 새에게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상대방이 가져온 음식 바구니에는 손도 안 댄 채, 서로 어긋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음식 바구니와 하얀 새 앞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안절부절못하던 다른 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벌써 두 번의 보름하고도 며칠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검은 새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얀 새와 마주보고 있는 깃털이 화려한 새는 하얀 새보다 먼저 비행에 나선 선배도 아니다. 처음 비행을 시작했을 때가 하얀 새와 비슷한 시기이거나 아니면 더 늦게 나선 후배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새는 하얀 새가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일을 겪었으므로 하얀 새는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깃털이 화려한 새는 본인 앞에서 그 일에 대해 말하기가 껄끄러웠는지, 어조도 조금 균열이 있고 목소리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얀 새는 깃털이 화려한 새가 말하려는 바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깃털이 화려한 새는 말하기를 주저하는 어조로 자신의 동료가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을 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일부러 말을 돌리느라고 쓸데없이 붙인 헛소리와 군더더기를 제외하면 대충, 자신도 작은 새가 도착하지 않았을 때는 동료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외롭고 두려웠으며, 돌아오기 직전에는 기다리는 것을 거의 포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다. 그러니 하얀 새도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린다면 검은 새도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상대방은 이쯤에서 할 말이 바닥났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하얀 새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하얀 새는 말없이 다른 곳만 응시할 뿐이었다. 깃털이 화려한 새는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섬주섬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잊은 것이 있어 하얀 새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기운이 빠진 것 같은 그에게 연민을 느끼며 깃털이 화려한 새는 이번 비행이 예정보다 앞당겨졌음을 알렸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얀 새는 깃털이 화려한 새가 있다가 간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가 말하려는 바는 잘 알고 있지만, 검은 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하늘은 흐리다. 흐리다 못해 검다. 불어오는 불규칙한 바람은 폭풍우 내음을 품고 있다. 그러나 여기 선 새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

비바람을 상대로 두고 모두 비장한 얼굴이다. 연장자 역시 굳은 얼굴로 마지막 수를 센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모든 새들은 이를 악물고 날아올라 거친 공기의 흐름을 뚫고 하늘 밖으로 나아간다. 어두운 하늘에 새 무리의 영상이 나타났다가 곧 멀어진다. 연장자는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가 몸을 돌려서 그 장소를 빠져나온다.

하얀 새가 묵고 있는 독방에서는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얀 새는 방 밖으로 나와 어두운 하늘 아래 섰다. 비행을 하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날씨다. 곧 폭풍우가 들이닥칠 것처럼 대기가 수분을 머금고 무거워져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얀 새 옆에, 연장자 작은 새가 어느새 다가와 하얀 새와 같은 곳을 보고 있다. 하얀 새는 연장자에게 눈길을 한 번 준다. 연장자에게는 하얀 새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작은 새는 하늘을 응시한다.

하얀 새는 자리를 뜬다. 그러나 그가 독방 처마가 드리운 그림자의 범위를 벗어났을 때, 등 뒤에서 연장자의 잠긴 목소리가 들린다.

「기다려라.」

하얀 새는 발걸음을 멈춘다.

「네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이 네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는 것도, 그것으로 인해 네가 느끼는 마음의 고통만큼 강한 네 의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막지 않으려 한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결심을 바꾸고 네 동료인 검은 새 없이 여생을 살 것인지, 하늘 밖의 새를 쫓아 밖으로 날아갈 것인지는 네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그것은 네 자유고, 나는 그것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에게는, 이 한 가지를 알아야 할 의무도 있다.

네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은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와 함께 남아있기를 택하면, 네 동료인 검은 새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검은 새를 찾아 떠나기를 택하면, 네가 속해 있는 단체인 우리들 무리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두 쪽 다 너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할 터다. 너는 신중히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너에게 마지막 충고를 하는 이유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너에게는 후회가 남을 것이다. 그 강도가 약하든 강하든, 그 후회를 받아들이는 것은 네 몫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 너의 뒤를 밟으며 너를 괴롭힐 것이다. 나는 한순간의 성급한 결정으로 인해 네가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너에게 지워질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여기서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하얀 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부러진 날개에 대 놓은 버팀목을 내려다본다. 양 끝을 갈아서 뭉툭하게 만들어놓은 나뭇가지를 질긴 풀로 엮어 놓은 모습이다. 하얀 새는 다치지 않은 날개를 풀의 매듭을 풀기 시작한다. 서로를 묶어 두기 위해 지은 단단한 매듭이 가볍고 단순한 일련의 동작에 의해 해체된다. 이윽고 매듭은 완전히 풀어져, 지극히 평범한 풀잎 두 장과 나뭇가지 하나가 땅에 떨어진다. 하얀 새는 풀잎과 나뭇가지를 그 자리에 놔두고 처마 밑을 나와 새들의 비행이 있었던 넓은 들판으로 간다.

연장자 작은 새는 하얀 새가 떠난 뒷자리에 남겨진 것들을 주워 올린다. 보듬은 풀잎 위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빗방울이 얼굴을 세차게 때린다. 부러진 날개가 금방이라도 찢겨나갈 듯 아프다. 하얀 새는 그 고통을 연료 삼아 속도를 낸다. 성난 바람이 하얀 새를 궤도 밖으로 거칠게 내몬다. 비행을 앞당기게 한 폭풍이지만,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온 것을 맨몸으로 직접 맞서보니 생각보다 대단하다.

비바람과의 사투 끝에 하얀 새는 눈 앞에 보이는 하늘을 두텁게 덮은 먹구름 위로 빠져나온다. 작열하는 태양이 보이고, 발 아래 깔린 구름에 하얀 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태풍이 바람을 흩어 놓아서 태풍 속만큼이나 대기가 불안정하다. 날개를 다쳤어도 엄청난 속도로 위로 치솟고 있는 중이라 눈 깜짝할 새에 경계를 넘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예의 호흡곤란이 덮쳐온다.

숨통 안에 공기를 담아놓는 것이 무척 힘이 부친다. 숨통이 꽉 짓눌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크게 부풀어올라 곧 터져버릴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부러진 날개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하얀 새를 검은 새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모든 방법으로 훼방을 놓는다. 눈 앞의 환한 빛과 전신에서 일어나는 통증으로 머릿속이 새하얗다. 그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은, 검은 새를 데리고 돌아오겠다는 다짐뿐. 고통이 심해지고 빛이 강해질수록, 자신이 가슴속에 새겨 넣은 다짐은 형체를 갖고 다가온다.

하얀 새는 태양을 향해 날고 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커다랗고 밝은 빛을 향해.


 


 


 

빛이 집어삼킨 시야가 반짝거린다. 몸도 마음도 부러진 날개도 모두 빛나고 있다. 귀를 스치는 칼바람의 굉음이 더 이상은 들리지 않는다. 떨어져나갈 것 같은 날개의 통증도 깨끗이 사라져 있다.

하얀 새는 사방이 하얀 가운데서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모른다. 공중에 떠 있는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지, 이곳도 저곳도 아닌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찰나의 순간, 혹은 영원의 시간 동안 하얀 새는 자신보다 더 새하얀 공간 속을 배회하고 있다. 어느 곳도 아니고 어느 때도 아닌, 모든 것이 모호한 빛 속에서 하얀 새는 이제는 어렴풋해진 자신의 기억을 천천히 되새긴다. 그의 기억 속에 검은 새의 존재가 나타난 순간, 희미한 것뿐이었던 세계가 별안간 명확해진다.

별이다.

검게 탈색된 넓은 하늘 전체에, 수만 개의 별들이 창백한 점으로 흩어져 있다.

별뿐만이 아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창백한 별들 이외에, 선명한 원색의 물체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날개를 치고 있다.

하늘 밖으로 나온 수많은 작은 새들이 같은 곳을, 그들만이 아는 목적지를 향해 날갯짓하는 광경 앞에서 하얀 새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는 이 거대한 감정이 작고 여린 그의 가슴 속을 파고들어와 마비시켜 버리기 전에 몸 밖으로 표출해보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몸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하얀 새는 저마다 각각의 생명을 가진 작은 새들의 대규모 이동을 끝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하얀 새가 떠 있는 자리에서는 모든 새들의 생김새가 잘 보인다. 개중에는 깃털이 화려한 새의 동료도 있다. 바람도 소리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얀 새가 제자리에 멈춰서 그들은 지켜보는 동안 작은 새들의 무리는 하얀 새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작은 새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이번에는 그 밖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운행하는 구조물들의 모습. 그림자가 진, 몇 배나 커 보이는 달의 모습과 하얀 새가 떠나온 파란 빛의 대지.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구들 뒤에는 태양이 있다. 커다랗고 밝은 별. 하얀 새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별의 빛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하늘 아래서 느끼던 것과는 다른 빛이 시각을 잠식해간다. 가물가물해지는 어둠과 빛이 서로 어우러져 어지럽게 춤추는 그곳에서 하얀 새는 어떤 물체 하나를 발견한다.

그림자다. 빛에서 태어나 하얀 새를 향해 날갯짓하며 반기는 검은 새의 모습이다. 그것이 검은 새의 형태를 하고 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림자는 더 이상 검은 새가 아니게 된다. 시간이 영원히 멈추고 소멸해가는 하얀 새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지상에게서 빠져나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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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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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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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남사
  • 201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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