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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읍하듯 호흡하기

  • 작성자 연민
  • 작성일 2010-05-26
  • 조회수 137

좋아해.

난 너 안 좋아해.

싫은 거야?

어쩌면.

왜?

몰라. 그냥 그렇네.

 

단순한 고백과 거절이었다. 지나치게 덤덤한 거절의 말은 그렇기에 쉽게 뱉어졌고 또한 단호했다. 그 단호함이란 마치 벽돌과 같아서 바닥으로 팽개쳐짐과 동시에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상한 것은 부서진 것은 단호함이요, 벽돌일진대 어찌하여 그 조각은 유리와 같이 날카로워 내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인지? 그에 나는 할퀴어진 가슴을 부여잡고 모르는 체 태연함을 덧씌운 웃음을 그려내었다. 상처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 그래, 나는 너의 한 치의 자비도 없는 단호함과 무심함에 상처받았다. 별것 아니리라 생각했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고 그 상처는 날이 갈수록 곪고 썩어가 이내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우습게도 나는 깊숙이 새겨진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내 나름의 치료였을지도 모른다. 용기를 내어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내 눈에는 너의 잔상이 비쳐 조금 나아지려던 상처를 투둑, 뜯어내었으니. 나는 한 달이 가도록 집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한 달이 되던 날, 나는 집을 나섰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내 가슴에 상처는 아직도 낫지 못하고 진물이 흘렀지만 나는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 푸르스름한 아름다움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주섬주섬 채비를 하고 현관문을 엶과 동시에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따금 찾아와 현관 앞에 서 있던 너의 모습을 떠올리고, 바라보았다. 베이지색 칠이 벗겨져 가는 벽과 그 위로 보이던 연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네가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눈가에 고인 눈물을 짜내고 손등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일어나 비틀거린다 싶은 걸음을, 처음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조심조심 걸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았다. 정면을 바라보며 걷는 아기와 내가 다른 점, 세상을 마주하기 어렵다는 것.

기차역까지 가는 동안 내내 고개를 숙인 채였다. 앞을 보지 못해 다른 이들과 부딪힐 때마다 나는 이미 숙인 고개를 더 숙이며 꾸벅꾸벅 사과했고, 그 사람들은 무심하게 나와 부딪힌 어깨를 툭툭 털고 지나갔다. 몇 번의 부딪힘과 사과, 무심함의 반복 끝에 기차역에 도착해 나는 바다로 가는 편도선 표를 한 장 끊었다. 기차에 타고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커다란 굴곡이 없이 지내온 너와 나였기에, 그냥 아는 사이라면서 친구 이하로 남아 간간이 얼굴만 마주치는 사이였기에 함께 바다를 보러 기차를 탄 적 없는 것은 슬프게도 다행이었다.

바다는 서늘하게 짠 기운을 풍기며 나를 반겼다. 파도 소리가 귀를 때렸고, 사람들이 드물었기에 나는 넋 놓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둥글다는 것을 발견한 이가 누구였더라. 그이는 결국 시샘으로 죽었던가.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아무리 봐도 일직선으로만 보이는 수평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는 왜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걸까. 잠시 아문 듯했던 상처가 다시 터졌다. 나는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그냥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너에게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무리였던 걸까. 터진 상처에서 진물이 흐른다. 나는 왜 사랑받지 못한 걸까.

나는 천천히 바다로 걸어갔다. 파도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고, 찬 기운과 짠 냄새도 강하게 느껴졌다. 솨, 밀려오는 파도가 발 끄트머리를 적셨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바닷물은 발목, 종아리를 거쳐 이내 허리까지 나를 집어삼켰다. 물에 젖어 다리에 달라붙는 바지가 거추장스러웠지만 나는 계속 걸어나갔다. 물은 이제 가슴까지 차올랐다. 완전히 잠긴 것도 아닌데 수압이 배를 눌러 호흡이 조금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입으로 숨을 쉬며 나는 계속 걸었다. 파도가 밀려와 짠물을 한 움큼 들이마셨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바닷물은 턱 끝에서 일렁이고 있었지만, 파도로 말미암아 나는 이따금 짠물을 들이켰다. 바다는 싸늘했다. 아무래도 날씨 탓인 듯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겨울은 겨울이니까. 바람이 불어오면 물에 젖은 얼굴이 얼음을 잔뜩 갖다댄 것처럼 차가워졌다. 햇빛에 마르면 소금기에 따갑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그 자리에 발끝으로 서서 얼굴이 마르기 무섭게 다시 담갔다. 몇 분을 그렇게 있었을까, 바다는 이제 싸늘하기는커녕 포근했다. 물 밖에 있는 머리보다 물속에 잠겨 있는 몸이 훨씬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는 싸늘한 첫인상과는 전혀 다르게, 이제는 따스하고 포근했다. 부드러운 기분에 마치 두꺼운 이불을 얼굴만 쏙 빼놓고 뒤집어쓰는 기분이었다. 숨을 들이마시기 버겁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는 다시 조심스레 한 걸음을 뗐다. 오래 걷지 않아도 조금만 더 걷는다면 금세 바다는 나를 전부 삼켜버릴 것이다. 일곱 발자국이면 될까? 아니면 셋? 그래, 네가 좋아하던 다섯으로 하자. 문득 치솟은 생각에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마지막까지도 너를 놓지 못하는구나.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눈물이 바닷물로 젖은 얼굴에 번지고 나는 수압에 숨이 막혔다. 벌린 입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어 와도 나는 그 자리에서 목놓아 큰소리로 울었다. 흐어어엉─ 어엉─ 나는 울며 다시 한 걸음을 옮겼고 젖은 옷소매로 눈을 문질러 닦았다. 눈이 따가워서 또 눈물이 났다. 내가 우는 건 눈이 따가워서야, 어린애 같은 핑계로 나는 또 울음소리를 내었다. 서늘한 바람이 휘잉 불어왔다. 추워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따스해지기 위해 바닷물에 머리를 푹 담그며 다시 한 걸음 옮겼다. 이제 바다는 발끝으로 서고도 코끝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힘에 겨워 나는 서둘러 나머지 두 걸음을 떼었다. 머리까지 물속에 푹 잠겼다. 눈이 따가워 뜨지 못했지만 나는 눈앞이 푸른 것을 알았다. 검푸른 바다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숨이 막혀와 나는 손을 내저었다. 손끝이 물 밖으로 나간 것을 알았지만 그뿐이었다. 몸이 무거워 물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나는 연거푸 짠 바닷물을 들이키며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드세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나를 맞이했다. 무겁고 축축한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자 환한 형광등 불빛이 비쳤다. 눈이 부셔 간신히 뜬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나를 맞이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일단 내가 깨어나자 한 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는지 망설임 없이 가버렸다. 멀어지는 발기척에 나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아무래도 나는 살아난 모양이었다. 딱히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죽게 된다면 굳이 살려고 발버둥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발악했다.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물 위로 힘겹게 떠오른 내 손끝을 누군가 보고 신고한 모양이라며 나는 인상을 썼다. 살아남은 것은 조금 다행으로 여겨졌지만, 잔뜩 먹은 바닷물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고, 환한 불빛도 눈에 거슬렸다. 나는 추태는 그만 부리고 집에나 돌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눕혀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담요가 덮어져 있었지만 차가운 물속에 오랫동안 들어가 있었던지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일어나 비틀비틀 걸음을 떼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현기증이 이는 바람에 가까운 벽을 짚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아까의 그 목소리로 추정되는 구조대원이 따뜻한 녹차를 건네며 말했다.

 

혼자 가실 수 있겠어요?

 

나는 녹차를 두 손으로 받아들고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대원은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조심해서 돌아가시라며 문밖까지 배웅해주었다. 그에 조금 감사함을 느끼며 나는 바닷물에 젖었다가 마른 덕에 찝찝한 옷을 그대로 입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정신이 몽롱했다. 멍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뺨을 찰싹 때렸다. 얼얼한 기운이 뺨에 퍼지면서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나서 기차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죽지 못해 아쉽지도 않았고 살아남아 크게 기쁘지도 않았다. 고백 이후에 나는 슬픔과 허무가 아니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참을 걷고 나서 기차역이 얼핏 보이자 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돈을 빼놓고 물에 들어간 것이 아니니 돈도 젖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조심조심 젖어든 지폐를 꺼내보았다. 다행히 찢어진 부분은 없는 것 같아서 돌아가는 표를 끊으며 그 젖은 돈을 내밀었다. 내가 내민 돈에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잠시 짓다가 곧 상냥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표를 내밀었다.

기차에 오르기 전에 건물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바다를 보았다. 나는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고 떠들며 너에게 고백하기 이전의 날들을 되풀이할 것이다. 너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네며 친구 이하의,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낼 것이다. 청승은 오늘 하루만으로 충분했으므로. 하지만, 슬픈 것은 이조차도 한낱 꿈처럼 느껴진다는 것. 아까까지의 일들이 전부 꿈처럼만 느껴져서 나는 뺨을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꿈은 아니구나 생각하며 나는 기차에 올랐다.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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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천둥소리가 요란해 잠에서 깼다. 어둠이 익숙하지 않은 눈을 거푸 깜박이며 나는 안경을 찾아 썼다. 그 사이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울렸다. 야광으로 된 시곗바늘이 세시 반을 가리켰다. 잠든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지개를 켠다. 요란한 천둥소리에 잠은 달아나버렸다. 나는 창문을 열어 거리를 내다본다. 어슴푸레히 가라앉은 안개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실은 천둥소리만큼이나 빗소리도 요란했다. 창문을 닫으니 빗소리가 한층 조용하게 들렸다. 방 안이 습하다 못해 온 몸이 끈적거렸다. 잠들기 전에 열대야로 뒤척이던 것이 생각났다. 샤워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래봤자 더운 건 소용이 없을 듯 하여 그만두었다. 이불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벗어 머리맡에 내려놓고 눈을 깜박였다. 모자이크 처리한 듯 어두운 방 안에 흰 벽지로 발라진 천장이 뿌옇게 보였다. 빗소리는 여전히 드세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밖에 뛰쳐나가 비를 맞고 싶다던 너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에 맞장구치던 내 모습도 생각났다. 사실 나는 젖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 말은 거짓이었다. 지금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다가 번개가 번쩍이는 모습에 눈을 빠르게 깜박인다. 비를 맞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머리카락이 젖어 얼굴에 찰싹 달라붙으면 보기 흉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비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밖에 나가서 비를 맞아보고는 싶었다. 번개를 맞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번개를 맞을 확률과 로또에 당첨될 확률을 비교했던 표를 봤던 적이 있다. 어느 쪽의 확률이 더 희박했던가는 지금은 가물가물하여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다시 너와 만나 어제 비 많이 왔더라, 또 비 맞으러 나갔었니? 하고 말을 걸 수 있는 확률보다는 크다고 생각했다. 비를 맞으러 나갔다가 너무 아파서 금방 들어와 버렸다는 너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하다가, 비를 맞으러 나가볼까 생각하다가, 너무 아파서 울어버릴까봐, 빗방울에 멍이 들어버릴까봐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안경을 주워 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신호등은 꺼진 지 오래였고 가로등은 주홍으로 빛났으며 차도의 신호등도 노란불을 깜박거렸다(분명 주황색인데 왜 노란불일까). 간간히 차들이 도로를 달렸다. 옅게 내려앉은 안개 사이로 차들의 안개등과 헤드라이트가 함께 빛났다. 비는 조금 잦아들은 듯 했다. 천둥과 번개도 더 이상 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하려 창문을 닫고 이불 위에 누웠다. 새벽 공기를 쐬서인지 아까만큼 덥고 습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불을 덮었다. 안경을 다시 벗어 머리맡에 내려놓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나는 너를 떠올렸다.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가 비를 맞았을지도 모르는 너를 떠올렸다. 빗방울이 너를 너무 아프게 때려서 울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너를 떠올린다.

  • 연민
  • 2011-09-20
지갑

날은 후덥지근했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에어컨이 찬바람을 내뿜던 마트의 내부와는 달리 바깥은 이러다간 녹아버리겠다 싶을 정도로 무더웠다. 훅 끼쳐오는 아스팔트 도로의 열기와 고무 냄새와, 안팎의 온도 차에 나는 머리가 어찔해진다. 갑작스런 현기증에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마트 주차장의 한복판에 멈추어 선다. 얼굴에 더운 바람이 불어와 신경을 거슬렸다. 네 손가락을 끊어버릴 듯이 짓누르는 대형 마트의, 불투명한 비닐봉투의 무게와 후끈한 태양의 열기와,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고무 냄새. 빵빵거리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같은 소음들-. 그것들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로 한꺼번에 휘몰아쳐와 내 감각을 지배했고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불쑥 짜증이 치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비닐 봉투를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통조림 캔들이 서로 부딪혀 쨍- 하고 깨지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황망히 서 있었다.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할 태양의 언저리를 보며 짜증을 내다가 문득 내가 내려놓은 비닐 봉투의 안에 든, 머리만 큰 자식들을 주기 위해 산 한 더미의 아이스크림들이 다 녹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무거운 비닐봉투를 양 손에 들고 이 쨍쨍한 햇볕 아래를 터덜터덜 걸어갈 것을 떠올리자니 스스로가 너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없는 돈에 택시를 타고 가기도, 뒤뚱거리며 양 손에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비닐 봉투를 들고 걸어가기에도 집은 너무 멀었다. 지금의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의 빛줄기를 가리기 위해 손으로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바닥 하나 만큼의 그늘은 내 더위를 가시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피난처를 발견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비닐봉투를 다시 양 손에 하나씩 들고 뒤뚱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발견한 피난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난처였기에, 은행은 때 아닌 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은행은 내가 본 그 어떤 때보다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게임 효과음 같은 ATM의 기계음과 차례가 된 손님을 찾는 창구 직원의 목소리와 큰 소리로 통화 중인 사람, 어머니를 따라왔을 초등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아이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와글와글 뒤섞여 들렸다. 나는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앉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심보로 시간이나 죽이기 위해 은행에 들어온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불평하던 것을 멈추고 잠시 앉아 쉴 자리를 찾아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은행 안은 이미 사람들로 포화 상태였고 조금이라도 앉을 수 있을 만한 자리는 커다란 엉덩이들이 빈틈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이 비집고 들어앉아 있었으므로 나는 앉을 자리를 물색하던 것을 멈추고 온 김에 돈이나 찾아가기 위해 구석 자리에 내가 들고 온 짐을 내려놓고 번호표를 뽑으러 갔다. 우습게도 은행 안의 사람들 수에 비해 대기자 수는 이제 두 자리 수가 될까 말까한 정도였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적어서

  • 연민
  • 201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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