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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들다

  • 작성자 白魂
  • 작성일 2010-05-07
  • 조회수 712

 7시 50분. 아직도 지하철은 달리고 있었다. 8시가 가까워져올수록 정현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직 몇 정거장이나 더 남아있는데 8시를 넘기면 기자국의 팀장인 현창수가 얼마나 화를 낼까. 정현은 모든 걸 놓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기댔다. 기자라는 직업,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할까?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잘할수있고 하고싶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올바르게 전달하면서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기자국에 들어갔지만 상사의 짜증은 하루하루 힘들게만 만들었다. 발벗고 취재거리를 따와도 팀장이 안된다고 하면 곧바로 다른 주제를 찾아야한다. 기댈곳도 없고 하루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흘렀는지도 몰랐다. 정현은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마음먹었다. 정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7분이나……진심으로 죄송합니다."
 8시 7분. 정현은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동료기자들은 고개를 돌려 정현을 쳐다보다가 곧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예상했듯이 팀장인 이선우의 얼굴은 화가 잔뜩 나있었다. 정현은 슬금슬금 그의 자리로 다가갔다. 이미 푹 숙여버린 고개는 더 이상 올라오지 못했다.
 "지금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7분이나 지각을 해? 기자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새벽까지 취채하다가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현이 당황한 얼굴로 사과했지만 팀장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던 팀장은 날카로운 눈을 뜨고 정현에게 말했다.
 "정현씨, 맡고 있던 취재거리 성준씨한테 넘겨."
 "네? 그게 무슨 말씀……."
 "정현씨가 하던거 그만하고 사이비종교에 대해서 취재해오라는 거야. 사이비종교가 뭔지는 알지?"
 팀장에 갑작스런 결정에 정현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돼, 새벽까지 그 기사 때문에 쉬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그만두라니.
 "어차피 제대로 못할거잖아. 일 그르치기전에 다른 기자한테 넘기라는 거야. 자, 더 할말없으면 그만 가봐."
 정현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지만 모니터만 바라보는 팀장에게서 돌아섰다. 한숨을 쉬며 털썩 자리에 앉은 정현을 동료기자인 미래가 쳐다보았다.
 "또 팀장이 뭐라고 했구나? 맞지?"
 미래가 안쓰러운 얼굴로 커피를 건네자 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모금 마셨다. 금방 뽑은 것 같은 따뜻한 커피였다.
 "오늘 새벽까지 하던 취재 그만하래. 아예 쓰지말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조사했던 거 다 다른 기자에게 넘기래."
 정현은 고개를 숙였다. 한숨이 삐져나왔다. 미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럼 넌? 넌 무슨 기사 맡으라고 막 바꾸는 거야?"
 "사이비종교……아, 진짜 또 잘못쓰면 엄청날텐데. 게다가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어."
 미래는 정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미래가 기억하기에 정현은 이 일을 시작한후로 한번도 편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항상 기죽어있었고 미안함과 자책감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정현이 기댈곳도 없고 혼자서 너무나 힘들어한다는 걸 알지만 도와주지 못한다는 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정현은 그런 미래의 마음을 알았는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나 다시 또 나갸봐야겠다. 커피 고마워, 잘 마실게."
 자리에서 일어선 정현은 다시 또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섰다. 출입문을 나서서 복도를 걷자 갑자기 서글퍼져왔다. 꿈만 앞세웠지만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을 망치기만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서일까? 정현은 그간에 설움이 눈물로 흘러나올까봐 재빨리 건물을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정현은 한숨을 쉬며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향했다. 실패, 실패. 정현은 자신의 뒤에 이런 낱말이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정현은 자책감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 자신을 보고 있었다. 동정을 가득 담은 눈과 자신을 피하고 있는 눈들이 정현의 주위를 에워싸는 것 같았다. 정현은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 뭐야? 앞 똑바로 보고 다녀."
 정현과 부딪친 10대 소녀는 기분나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정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정현이 사과를 하던 말던 10대 소녀는 화장기 가득담은 얼굴로 다시 걸어갔다. 정현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얼빠진 채로 있었다.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거야. 자신보다 10살은 어린 여자아이한테. 죄송하다, 미안하다. 이 말 밖에 못해? 맨날 사과, 사과, 사과……지겹지도 않아?'
 정현은 자신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한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정현은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던 계속 뛰기만 했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아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자신의 집으로 가야했다. 여기저기서 부딪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지만 정현은 멈출 수가 없었다.

 "네, 네……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네, 죄송합니다. 내일은 꼭 나가겠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정현은 팀장과의 전화를 끊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피곤했다. 머리속이 꽉 차서 아무것도 빼낼수가 없었다. 남들에게는 없는 무거운 공기가 자신을 향해 몰려와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분쯤 있었을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정현은 오랜만에 울리는 집의 초인종 소리에 멀뚱이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정현은 종종걸음으로 문 앞까지 달려가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세요?"
 뭔가 감이 왔다. 정현이 필요한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전하러 왔는데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정현의 얼마 없는 직감이 맞다면 분명히 사이비 종교였다. 즉 자신을 도와줄 천사가 문 밖에 서 있는 것이다.
 "……네, 들어오세요."
 "아, 감사합니다. 근원자님께서 당신에게 축복을 내려주실겁니다."
 열린 문에서 인자한 미소를 띈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정현은 재빨리 방석을 놓은다음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유, 마실 것까지……감사합니다, 빛모으십시오."
 어이없는 말을 내뱉은 아주머니를 향해 정현이 당황한 눈빛을 드러내자 아주머니는 다시 싱긋 웃었다. 그리곤 자신의 반대편으로 손길을 내밀었다.
 "물은 안 끓여도 되니까 이리로 와서 잠시 앉아보십시오. 혹시……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몸이든 마음이든……."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성분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정현은 긴장한 채로 다가가 앉아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줄 알았습니다. 문 밖에서부터 어둠이 몰려오더군요. 그래서 말씀 좀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좀만 빨랐으면 근원자님이 곧바로 빛을 선사하셨을텐데……."
 아주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정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잠시뒤 입을 열었다.
 "기댈곳이 없으시군요. 현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계속 자신만 잘못되는거 같아서 희망이 없으시죠. 제 말이 맞나요?"
 정현의 눈에서 놀란 빛이 뚜렷했다. 아주머니는 정현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그, 그러니까……전 평범한 회사원인데……취직하기전만해도 잘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일도 제대로 처리 못하고 하는 족족 상사에게 욕이나 먹고……한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물론 지금도 힘들지만……아무튼 벗어나고 싶은 느낌이 강했어요. 말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진 않고……."
 실패하고 힘들고……정현은 사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이야기 하다 보니 모두 현실의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묵묵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나 제 뜻이 맞았군요. 저도 사실 그랬습니다. 하지만 근원자님을 만나뵌후로는……정말로 다른 세상 같았습니다. 혹시 근원자님을 만나보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근……원자님이요? 아, 뭐……만나서 좋아진다면야 당연히……."
 정현은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인 것을 들키지만 않으면 현장취재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근원자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을 구원해주실겁니다. 장소는 이곳이니 내일 꼭 찾아오십시오."
 마지막으로 아주머니는 정현에게 명함 한 장을 꼭 쥐어주고는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정현은 잠시 얼떨결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고개를 젓고 명함을 바라보았다. '광명교'라는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었다. 정현은 그 이름을 한번 손가락으로 훑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절대 실패하지 않을거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사는 꼭 완성해야지.'

 "미래야, 찾았어! 찾았어!"
 회사에 오자마자 자신에게 소리치는 정현을 보며 미래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이비종교 말이야, 어제 우리집에 찾아왔길래 문 열어주고 이야기 조금 했더니 찾아오라고 명함까지 줬더라구."
 "진짜? 잘됐네! ……그런데 난 살짝 걱정된다. 괜찮겠어?"
 미래가 걱정스러운 투로 묻자 정현은 오랜만에 미소 지으며 어깨를 툭 쳤다.
 "미래야, 원래 사이비종교는 믿을만한 종교가 아니야. 하하하……아무튼 나 너무 기분 좋다. 어떻게 찾아야할지 걱정도 좀 됐는데 완전 다행이야."
 "물론 그렇지만……내말은 꼬임에 넘어가면 돈도 엄청 내야되고 후에 나올려면 사람들 행패가 장난아니라던데. 괜찮겠냐는 거지."
 미래는 오랜만에 보는 정현의 미소를 보며 자신도 조금 웃었지만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괜찮아, 설마 무슨 일 있겠어? 그냥 가서 조금 믿는 척만 하면 되겠지 뭐, 걱정하지마. 나 취재 가볼게. 열심히 해."
 빠르게 말하곤 녹음기를 챙기는 정현을 보며 미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취재 다녀오겠습니다!"
 정현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문 밖을 나섰다. 동료기자들과 팀장은 그런 그녀를 희한하게 쳐다보았지만 곧 아무일 없던듯이 다시 일만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정현이 도착한 곳은 보통 상가 정도되는 크기의 건물이었다. 정현은 '광명교'와의 만남이 시작되기전 몇가지 사항을 기억해냈다.
 '첫째, 절대 이 종교에 빠지면 안된다. 둘째, 자신이 기자라는 것을 들키면 안된다.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은 끝난것이다.'
 정현은 굳게 마음을 다지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한칸한칸 밟았다. 또렷하게 들려오는 자신의 구두 소리가 왠지 떨리는 것 같았다. 계단을 다 내려온 정현은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저……안녕하세요. 여기가 혹시……."
 문을 연 정현은 깜짝 놀랐다. 굉장히 어두웠기 때문이다. 조금의 빛은 허용조차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정현은 어둠이 뿜어나오는 이곳을 한발자국씩 다가가긴 했지만 도무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종교라면 시끌벅적 할거라고 예상했는데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잘못찾아온듯 했다. 정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정현의 입을 손으로 막고 출입문을 닫아버렸다. 정현은 갑작스러운 사람의 손길에 놀라 당황했다.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소리를 치지 않는게 더 안전할지 몰랐다.
 "자, 됐습니다. 교주님. 이제 그만 손전등을 키시죠."
 어제 정현의 집에 찾아왔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현은 아는 목소리가 들리자 입에서 손을 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신도님. 곧 입을 여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침착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정현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광명교'의 건물에 잘 찾아왔고 이곳에 들어온 이상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곧 그녀의 말대로 정현의 입을 막던 우악스런 손은 사라지고 조그마한 손전등이 아주머니의 얼굴을 비췄다. 전과 같이 따스하게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현은 더듬더듬 물었다.
 "아, 아니 이게……왜 이러시는 건가요?"
 당황스러워하는 정현을 보며 아주머니는 미안한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었다.
 "다른 미개한 인간들이 이곳을 찾아 망가뜨리려고 하기 때문이예요. 하지만 저희는 이런 환경이라도 근원자님의 빛을 전할 뜻이 되어있습니다. 아무튼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빛을 찾아주시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빛모으십시오."
 아주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정현은 어쩔줄 몰랐으나 엄숙한 분위기에 자신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럼 우리 신도님의 이름은 무엇이십니까?"
 "네? 아……윤정현입니다……."
 하얀색 긴 천위에 빨간색으로 테두리가 굵게 되어있는 옷을 입은 교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빛을 모으시기 원하십니까?"
 정현은 작은 빛을 의지하며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자신을 보며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정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고 눈을 크게 뜨십시오. 절대 흥분해서는 안됩니다."
 정현은 살짝 불안했지만 손전등의 빛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데 현실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을지 생각하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가라앉혔다. 조금 나른해진 것 같았다. 피곤해진 머리를 애써 붙잡은 정현은 하나둘씩 늘어나는 손들이 자신의 몸을 잡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입을 막았던 손처럼 굳게 정현을 눌렀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려고 이러는 것 같은데 정현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점점 더 졸려왔다. 무거운 눈커풀은 내려오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손전등의 작은 빛이 꼭 자신을 재우려는 것 같았다. 팔이 축 늘어졌다. 힘을 주려고 했지만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강한 빛이 정현의 눈을 파고들었다.
 "아악!"
 정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그 빛을 가리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을 누르는 힘과 빛은 더욱 강해져갔다. 눈, 얼굴, 몸……빛은 서서히 정현을 지배해갔다. 빠져나가는 혼을 붙잡고 싶었지만 이미 나가버린 혼은 잡을래야 잡을수가 없었다. 결국 정현은 정신을 잃었다.

 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 그녀의 머릿속에선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지만 자신을 따뜻하게 감싼 빛이 너무 좋았다.
 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빛에 빠지면 안된다고, 빠지면 헤어나올수가 없게되버린다고.
 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 하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그 빛은 그녀를 완전히 먹어버렸다. 빛과 일체화가 되버린 기분, 너무나도 편안했다.
 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이제 어둠은 끝이 났다……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그녀에겐 빛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또한 집착이라는 단어도.

 "아……눈 부셔……."
 정현은 햇살이 창문에 가득차자 눈을 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온 몸이 무겁고 늘어졌지만 억지로 일으켜 세울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어젠 광명교의 모임장소에 다녀왔다. 정말로 기분 좋았고 행복한 곳이었다. 정현은 물론 기자라는 신분을 기억해야 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머리속엔 '가자'라는 단어보단 '광명교'라는 단어가 더 깊이 새겨진 것 같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현은 애써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사이비 종교인 광명교를 몰래 취채해야만 하며 절대 빠져들면 안된다고 계속 되뇌었다. 한번의 강한 빛, 그것이 바로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빛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신을 광명교로 이끌어준 끈인걸까? 기댈 곳 없던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 자신을 믿어준다는 그 마음 하나?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종교로 이끌려는 수많은 수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왜 자꾸 생각이 나는 걸까? 아무리 빈말이라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광명교를 내쳐버릴 수는 없었다. 정현은 미래도 물론 자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친구이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분명 미래가 보기에도 자신은 형편없는 기자일 것이다. 자신이 불쌍하기 때문에, 곧 잘라질 나무이기 때문에, 자신을 조금이니마 챙겨주는 건지도 몰랐다. 정현은 그렇게 생각하자 천천히 속에서 눈물이 꿀렁꿀렁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해보니 7시 4분이었다.

 "죄송……합니다."
 정현은 발을 내려놓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 8시가 되려면 10분도 넘게 남았는데. 팀장은 그런 정현을 힐끔 보고는 바로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민망했지만 회사내에서 정현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무도 인사해주지 않았고 아무도 안 늦었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다. 한숨을 쉬며 자신의 자리로 걸어간 정현은 미래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미래도 날 떠나가는구나. 난 언제나 버림받는 거구나.'
 정현은 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를 톡톡 쳤다. 커피 두잔을 손에 들고 있는 미래였다.
 "왔구나! 어때? 취채는 잘 했어?"
 미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옆 자리에 앉았다.
 "오늘따라 왠지 커피를 두잔을 뽑아야 할 것 같았는데, 너 때문이었나? 자 마셔."
 미래는 정현의 책상에 종이컵을 올려놓았다. 갓 뽑았는지 갈색 액체에서 모락모락 김이 뿜어져나왔다. 정현은 그런 미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됐어, 안 마셔."
 책상에 엎드린 정현을 보며 미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운 없어보이네. 몸 어디 안 좋아? 약 사다줄까? 아님 취채 잘 안됐어?"
 미래가 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정현은 짜증이 치솟았다. 자신의 친구가 아닌 처덕처덕 동정과 가식으로 발라버린 김미래 인 것 같아서.
 "그만해. 나 지금 너랑 말할 기분이 아니야."
 정현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더 걱정스러운 듯 어깨의 손을 올렸다.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동정이라도 베풀어주겠다 이건가?
 "정현아, 어디 안 좋으면 말해봐. 너 요즘따라 더 힘들어보여. 취재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내가 좀 도와줄까?"
 "됐어, 됐다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건데? 귀찮게 좀 굴지마. 찡찡대는 어린애같아."
 잠시동안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몇몇 시선이 정현에게로 향했지만 곧 사라졌다.
 "……정현아, 너 무슨일 있지? 사이비 종교때문이야? 거기서 또 이상한 말 들어서 이러는 거야? 윤정현, 넌 단지 취재를 하러 가는 거야. 그 사람들이 잘못을 고발하는거라고. 그런데 그 종교에 빠질 생각이라면 제발 그러지마."
 미래는 정현의 어깨에서 손을 치우고 잠시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 정현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넌 사이비종교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게 보는 것 같은데 너나 그러지마.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어. 내가 무슨 종교를 선택하든 믿든 그건 내 뜻이란 말이야.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넌 날 항상 동정해. 친구니까 도와준다고 함께 있어주겠다고 하지만 그건 날 밟고 일어서려는 가식으로 밖에 안 보여. 정말 짜증나."
 "어이 거기, 싸울려면 나가서 싸우지? 시끄럽게 뭐하는 짓이야?"
 팀장은 그 둘이 눈엣가시 같은 지 눈살을 지푸리며 손짓을 했다. 고개를 숙인 미래는 정현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정현아,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정현은 먼저 나가버린 미래를 쳐다보다가 귀찮은 듯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보살펴주던 미래에게 왜 그런 모진 말이 나왔는지 몰랐지만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미래의 말처럼 어느새 자신의 머릿속에 '광명교'가 가득 차버린것 같아서 두렵기도 했다. 정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나약한 생각을 하면 안된다. 미래는 지금 자신에게 본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차갑고 가식덩어리인 김미래를.
 "너 취재하러 가서 무슨 일 있었어? 뭐 걸리는 일이라도 있었으면 나한테 말해봐."
 마치 엄마처럼 훈계를 하는 듯한 목소리의 미래를 정현은 아니꼬운듯 올려다보았다.
 "왜? 네가 나 대신에 기사라도 써주게?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어차피 나 좀 있으면 잘릴거라고 생각하잖아, 넌 날 밟고 일어서려고 지금까지 나한테 잘해주는 거였잖아. 후회라도 돼? 아님 동정이라도 하는 거야? 아까 말했지만 기분 나빠. 그만해."
 칼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정현을 미래는 한동안 멍하게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변해버린걸까. 미래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 게 아니잖아. 너 지금 나 엄청 실망주고 있는 거 알아?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릴줄은 몰랐어. 옛날부터 네가 그렇게 변덕스러운 사람이였다면 별 신경안썼겠지만 아니었잖아. 넌 항상 힘든 일 있어도 날 이해해주고 고개 끄덕여주는 그런 애였잖아. 하루 사이에 갑자기 왜 그래?"
 "나도 네가 나한테 그럴 줄은 몰랐어."
 정현은 한마디를 툭 던지고 창문밖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미래는 답답하고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네 말대로 하루라지만 광명교에 다녀온 후에 난 굉장히 많이 변한 것 같아. 하지만 난 좋은 쪽으로 변했어. ……그 곳을 다녀온 후에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바뀌어버린 것 같아. 불필요한 것들은 깨끗하게 삭제되어버리고 광명교라는 새로운 희망이 가득 찬 것 같다는 거야. 그리고 김미래라는 사람, 즉 넌 불필요해서 버려진 것들중에 하나인가봐. 그러니까 그런 가식 보기 싫다는 거야. 날 애써 잘해주려고 하지마. 너도 날 무시하는 다른 동료들과 다를거라고는 생각 안 해. 다른 사람들보다 네가 더 나쁘다는 생각도 들어. 그러니까 지금부턴 필요이상의 대접은 해주지마. 너한테는 받기도 해주기도 싫으니까."
 정현은 많은 말을 쏟아내곤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때마다 정현의 구두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옛날의 비루했던 윤정현이 차갑고 냉정한 말들을 쏟아붓는 윤정현이 되어버린 게 스스로도 놀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광명교라는 큰 빛이 자신이 머리속으로 들어오려면 불필요한 것들은 빨리 빨리 포기하고 삭제해버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믿어준 친구를 버려버린 자신이 다음에는 과연 무엇을 버릴지 걱정됐지만.

 "빛 모으십시오."
 정현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앉아있었다. 교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현의 자리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정현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정현이 자리에 앉자 교주가 말했다. 방에는 신도쪽을 향한 큰 전등이 교주 뒤에 놓여있어 마치 교주의 뒤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정현은 사람들의 기대하는 표정을 보며 자신도 조금씩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신도분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보십시오. 어젯밤 저에게 드디어 근원자님이 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으며 어떤 사람들의 얼굴은 웃음이 가득 들어차서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정현은 말로만 듣던 근원자가 교주에게 어떤 말을 전해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어느새 자신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후 정현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웃으며 근원자의 등장을 환영했다. 교주는 손짓을 해 모두를 다시 자리에 앉힌다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근원자님께서는 우리들중 가운데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며, 자신의 존재를 믿지않고 광명교의 뜻에 따라 빛을 찾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알려주려했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환호성에서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정현은 순간 근원자의 말이 자신을 뜻하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현은 조금이지만 완벽하게 기자라는 타이틀을 버리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반란으로 광명교에 빠져들고싶어했다. 또 광명교의 모든 일들을 몰래 알아내어 기사로 내야했으니 교주가 말하는 그 나쁜 사람은 바로 자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근원자는 어떤 사람이길래 자신을 바로 알아본걸까? 정현은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과 후회가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꿈꿔왔고 또 이룬 기자라는 꿈이, 지금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직업이었다.
 "전 지금 이런 못쓸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합니다. 오랜만에 내려오신 근원자님께서 이렇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하셨으니 말입니다. 근원자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애쓰시고 계신데 이렇게 배신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그 자가 누군지 밝혀진다면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정현은 당황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어디서 감히 근원자님을……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근원자님을 속이려고한다면 그 순간 바로 우리한테 매장 당하는거지 뭐, 하하하하. 근원자님을 보호하는 건 우리의 임무 아니야?"
 "하하하하, 당연하지. 어떤 미친 인간이 근원자님을 배반하려 들어? 뭐? 바깥세상 인간들에게 우리 근원자님의 이야기를 해? 또 무슨 이상한 종교집단으로 내보낼거 아니야. 그러니까 교주님 말처럼 무조건 대가를 치러야지.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면 나라도 나서서 두 다리를 부러뜨려버릴거야."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정현의 귓속에는 칼 처럼 날아와 박혔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 가만히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그런 정현을 잠시 지켜보던 옆자리의 할머니는 조용조용 말을 건넸다.
 "처자, 저번에 있었던 일 알아요?"
 정현은 갑작스런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주가 저런 말을 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예요. 옛날에도 근원자님께서 저런 말을 우리에게 전하셨지요. 음……그때 새로 들어온 신도가 한 명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자가 범인이라고 몰았어요. 뭐, 그 선택이 틀린 건 아니었죠. 그 사람 직업이 언론쪽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으니까……처자도 알다시피 우리들은 언론계의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사이비니 뭐니 온갖 안 좋은 말 다 같다붙이니까 그렇지 뭐. 아무튼 어떻게 그 사람이 어떻게 됐더라? ……아 그래, 사라져버렸어요."
 할머니가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말에 정현은 더더욱 놀랐다. 마음속에서 바다가 덮치는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 파도를 즐겨야했다. 정현은 그 할머니의 깊은 눈을 힐끗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까 들었죠? 다리 부러뜨려버릴거라고. 우리 광명교의 신도들은 한다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근원자님을 의심한 자가 누군지 밝혀진다면 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거예요. 물론 그 자도 무슨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뿌리가 너무나 커버려서 다른 나무들을 방해한다면 당연히 잘라내야합니다. 그게 세상의 이치고 또 당연한거죠. 그러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처자도 행동을 잘 하는 게 좋을거예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현의 차가운 손에 자신의 손을 잠시 얹었다가 일어섰다. 정현은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부터 행동까지 온통 정현을 혼란스럽게만 만들었다. 그 후로 이야기가 계속 되었지만 정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단어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광명교.

 어젯밤을 꼬박 새웠다. 정현은 피곤하고 무거운 몸을 힘들게 일으켜 눈을 비볐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엄습하는 악몽 때문에 정현은 쉽사리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매일 이렇게 아침을 맞이하게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정현은 막막한 생각으로 다리를 내려 일어서려는 순간 책상에 있던 녹음기를 발견했다. 자신이 기자가 되었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샀던 녹음기. 당연한 듯 몇 군데는 껍질이 벗겨지고 까칠까칠 해졌다. 이 녹음기는 정현의 기자 생활을 알려주는 유일한 물건이었고 또 그래서 정현이 많이 아꼈다. 하지만 지금 정현에게는 그저 낡아버린 벽돌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투박하고 못생기고 시대에 뒤떨어져서 꼭 자기 자신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현은 녹음기를 손에 쥐고 녹음되어 있던 파일 하나를 재생시켰다. 내용은 광명교에서의 일이였다.
 [신도분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보십시오. 어젯밤 저에게 드디어 근원자님이 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치직...우와와와와...치직...치지직.. 하지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습니다...탁...근원자님께서는 우리들중 가운데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며...타탁...자신의 존재를 믿지않고 광명교의 뜻에 따라 빛을 찾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치지직...게다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알려주려했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입니다...치지직 치직 치치직...말도 안돼! 어떻게 그럴 수...치직...감히 근원자님을..치직...타닥...두 다리를..타타닥...부러뜨려버릴거야...치직...]
 내용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녹음기도 계속 재생되고있었지만 정현의 시선은 멍하니 방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 시선은 자신의 다리로 향했다.
 '우리 광명교의 신도들은 한다면 진실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근원자님을 의심한 자가 누군지 밝혀진다면 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거예요. 그게 세상의 이치고 또 당연한거죠. 그러니까 처자도 행동을 잘 하는 게 좋을거예요.'
 할머니의 말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정현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떨림이 전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남이 광명교를 무시할때마다 자신은 더욱더 광명교를 감쌌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자신은 광명교라는 호수에 허리까지 잠긴 상태였고 되돌아가기에는 의지도, 믿음도, 도움도 부족했다. 자신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짜증나게만 보이기 시작했다. 오직 광명교의 신도들과 교주를 제외하곤. 정현은 조심스레 녹음기의 삭제버튼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만약 지금 자신이 이것을 삭제해버린다면? 기자로서의 완전한 의지는 먼지만큼도 없어질터였다. 그저 광명교에 모든 걸 맡긴채로 자신의 꿈인 기자라는 이름도 버린채로 기댈 곳을 바라며 지내게 될 것이다. 팀장의 잔소리, 미래에게 느끼는 배신감, 동료 기자들의 무심한 눈초리……정현은 살며시 눈을 감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도대체 지금 몇 시야? 윤정현씨, 여기에 당신 일 대신해줄 기자들 엄청 많아. 알고도 이렇게 당당하게 늦을 수 있어? 기자로서 한 게 뭐가 있다고…… 늦는 것도 어느 정도면 몰라. 이젠 아예 그냥 습관이 되버렸지? 나 참, 정말 답답해서."
 정현이 문을 열자마자 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현의 귀를 찔렀다. 매일 아침 똑같은 반복, 날씨는 항상 다른데 왜 정현만 그대로 인거지? 사람들의 표정은 항상 다른데 정현만 그대로 인거지? 왜? 왜 정현만 모두 그대로지?
 정현은 팀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미래는 흘낏 시선을 던지고는 곧바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역시……김미래는 나에게 가식으로 뒤덮인 모습만 보여준거야. 내가 속은거라구.'
 날카로운 눈초리를 잠시 접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검은 세상으로 확 빠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자신을 숨겨줄만한 곳이 있다면.
 "정현씨, 윤정현씨. 잠깐만 나 좀 보지?"
 팀장은 정현이 자리에 앉은 이후로 몇 번이고 계속 불렀다. 정현은 다시끔 얼굴로 온갖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또각또각, 요란하게 구두소리를 내며 팀장 앞에 선 정현은 귀찮은 듯 머리를 매만졌다. 팀장은 그런 정현의 모습을 보며 더 화가 난 듯 미간이 좁아들었다.
 "정현씨 지금 내 말이 말같지 않아? 나 팀장이야. 당신은 그저 기자라고.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눈초리에, 그런 습관에, 그런 발걸음에. 뭐 나한테 화라도 낼거야? 난 정현씨 잘라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야. 도대체 그 태도는 뭐야? 맘에 안들어."
 "맘에 안들면 팀장님이 변하시면 되잖아요."
 팀장은 옛날과 달리 말대꾸를 하며 아니꼬운 눈꼬리를 치겨올리는 정현을 보며 살짝 당황한 듯 머뭇거렸지만 곧바로 소리쳤다.
 "팀장 앞에서 어디서 말대꾸야? 정현씨 지금까지 있던 모습 어디갔어? 일 처리는 못해도 고개 숙이면서 사과해서 봐줄려고 했더니. 뭐? 내가 변하라구?"
 "일 처리는 못해도 빌빌 고개 숙이면서 사과하는 척 했던 거겠죠. 팀장님 같은 사람들은 옛날의 나밖에 생각하지 못하잖아요. 그저 당신들 밑에서 빌빌 기어다니면서 꼬박꼬박 고개숙여주길 바라잖아요. 내 말 틀렸어요? 아 진짜 할 짓도 엄청 없으신가봐요. 아침부터 바쁜 기자 불러서 이런 같잖은 혼이나 내고. 내가 어린아이예요? 팀장님이 어른이고? 아니잖아요. 팀장님도 기자예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러시는 거예요? 진짜 제가 훨씬 답답해요."
 정현은 미래에게 그랬듯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팀장은 그 말들을 피하지 못하고 날카롭게 베어서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동료기자들과 미래는 숨죽이며 정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몇 동료기자들이 정현을 두고 속닥거렸다.
 "쟨 갑자기 왜 저런데?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더니 저러는 거야?"
 "그니까……팀장도 잘한 건 아니지만 윤정현, 나대는 건 좀 아니다. 그렇지 않아?"
 "그럼, 걔가 뭐가 잘났다고 팀장한테 말대꾸야? 잘릴려고 안간힘 쓰는 걸로밖에 안보여."
 "어차피 곧 있으면 잘릴텐데. 우리랑 뭔 상관이야? 우린 빨리 기사나 쓰자. 빨리 쓰고 쇼핑이나 가야지."
 미래는 동료기자들이 정현을 두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어이없다고 느꼈다. 결국 미래는 한숨을 쉬며 살며시 일어니 정현의 옆으로 다가갔다.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한다면 그 도움을 줄 사람은 바로 자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정현은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다시 팀장에게 말했다.
 "뒤에서 기자들이 내 욕하는 거 들리죠? 이게 바로 나예요. 몇 년동안 꿈꿔왔던, 세상의 바른 소리를 전하려고 했던 이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난 이렇게 추락해버렸다구요. 그리고 당신이 취재해오라던 그 사이비 종교 말이죠. 전혀 더럽고 추잡하지 않아요. 당신보다도 더 깨끗할걸요? 물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 보다 더 아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렇게까지 말했으니까 알겠지만 난 사이비 종교의 나쁜 점을 취재할 생각이 없어요. 이런 개같은 취재 그만 할 거니까 날 대신한 '착한' 사람을 찾도록 하세요. 아셨어요?"
 정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팀장을 향해 한번 손가락을 돌리고는 피식 웃었다. 팀장은 정현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이었다.
 "아, 아니. 저, 정현씨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개 같다니? 지금 내가 해준 결정에 불만있다는 거야? 그리고 사이비 종교가 왜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여러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이 기사 그만 쓰고 싶다구요. 능력있는 기자들 많다면서 그런 특종감 기사를 왜 날 시켜요? 빨리 대신할 사람 찾아주세요. 어차피 취재한거 다 없애버려서 넘겨줄 일도 없을테니까."
 팀장은 결국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책상 위에 있던 커피가 흔들리면서 종이뭉치들은 갈색으로 물들었다. 모든 기자들의 눈들이 팀장과 정현을 향하고 있었지만 팀장은 아무렇지 않은 듯 정현을 향해 손가락을 쳐들었다.
 "네가 팀장이야! 어디서 팀장 앞에서 이래라 저래라야? 좀 봐줬다 싶으니깐 이젠 내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하는 거야?"
 정현의 표정이 더 차가워질수록 팀장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보다못한 미래는 나서서 팀장을 말렸다.
 "팀장님, 그만하세요. 다른 기자들 보고 있는 거 안보이세요?"
 "보고 있든 말든 상관없어! 그깟 사이비 종교 하나 취재해오라니까 그것도 못해서 안달이야? 도대체 어떤 심보로 기자라는 직업을 한거야? 하여튼 능력 없는 인간들은 죽어야 돼. 밥이나 축내면서 오염된 공기 폴폴 내품는게 바로 너같은 사람 아니야?"
 "팀장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아무리 상사라지만……그만하세요."
 "기다려봐, 미래씨 같으면 이런 못되먹은 사람에게 할 말이 이것밖에 없겠어? 나 원참……왜 갑자기 안한다고 그러는 거야? 뭐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라도 한거야? 그렇구만? 정말 어이가 없어서……어디 빠질데가 없어서 사이비에 빠져?"
 "시끄러워."
 정현이 조용히 대답했다. 정현에게 팀장이 말하는 단어들은 모두 따갑게 부딪쳐 순간 엄청난 분노가 그녀에게서 빠져나가려는 것을 느꼈다.
 "요즘 외근도 잦고 글 쓰는 시간을 본 적이 없다더니, 왜 거기서 엄청 잘해줘? 한국 최고의 기자라도 만들어 준대? 그럴 시간에 기사 글자라도 하나 더 써. 특종 하나라도 더 만들어내란 말이야. 알았어? 사람 귀찮게 만들지 말고 죄송하다고 한 다음에 바로 물러가서 기사 써. 그러면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고 기사 쓰게 해줄테니까."
 "시끄럽다고."
 정현이 한번더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팀장은 못들은 듯 그 큰 머리를 계속 정현에게로 들이밀었다. 정현은 그런 팀장을 보며 순간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이었다. 듣기만 했던 근원자가 바로 지금 정현의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곤 정현에게 속삭였다.
 '지금 우리들중 가운데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존재를 믿지않고 광명교의 뜻에 따라 빛을 찾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알려주려고 하고 있어. 어서 그 싹을 끊어버려라. 바로 당신의 앞에 있는 그 싹을.'
 근원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부드러웠다. 정현은 그의 모든 말이 머리속에 새겨지는 걸 느끼며 팀장에게 말했다.
 "꼴깝떨지마. 더러워."
 순간 정적이 흐르면서 팀장은 자신이 방금 들은 그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미래는 냉소가 흐르는 정현을 보며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저렇게 변해버린걸까. 정말로 사이비 종교에게서 떨어져 나오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 필요했기에, 혹은 무엇을 버리려했기에 그곳에 발을 담궈버린걸까.
 "못들었어? 당신 더럽다고, 깨끗하지 못하고 불결해서 같이 있는 시간 내내 미칠 것 같아. 게다가 그런 몸으로 빛을 찾기는 커녕 꼴깝까지 떠니. 정말 진상이야. 보기 싫으니까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야. 내 손으로, 내 손가락 하나하나로 당신 숨통을 끊어놓고 싶어서, 그걸 참느라고 미칠 것 같다고!"
 진저리를 떨던 정현은 뒤를 돌아 모른 척 기사를 쓰고 있는 기자들에게 소리쳤다.
 "어이, 진실성을 팔아서 돈을 먹은 더러운 기자들아! 너희들도 곧 후회하게 될거야. 내가 왜 빛을 찾지 않고 진실성마저 팔아먹었지 하면서 말이야.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나야! 근원자님을 따라 빛을 찾은 나 말이야! ……왜? 웃겨? 믿기지 않아? 역시 몹쓸 인간들이란……너희가 생각하기엔 지금 이 상황도 특종거리 아니야? 기자국 안에서 이상한 종교에 빠진 기자가 팀장보고 소리치니까 말이야. 이 정도면 세상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너희들한테 꽤나 돈을 가져다 줄 것 같은데. 물론 기자국에서 팀장 보다 더 높은 인간한테 혼나겠지만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깟 돈이 대수야? 그렇지? 빨리 써. 쓰라고!"
 정현은 이해할 수 없는 밝은 표정으로 한 기자에게 걸어가 노트북을 내밀었다. 하지만 기자는 그런 정현이 두려운 듯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순간 정현은 냉정한 얼굴로 탈바꿈해 그 기자를 노려보다가 결국 노트북을 내던졌다. 노트북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공간안에 퍼졌다.
 "왜 안써? 왜 안 쓰냐구! 두려워? 내가 무서워? ……아아아아아악!"
 정현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는 혼자 주저앉았다. 순간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미래는 당황함을 꿀꺽 삼키고 정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정현은 그것을 느낀듯 고개를 획 쳐들어 미래를 보았다. 그리곤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 둘에게로 쏠렸다.
 "이제 멈추자."
 미래가 말했다. 그리고 정현은 몇 초동안 미래와 눈을 마주쳤다. 정현이 바라보는 미래의 눈 속에는 알 수 없는 힘이 담겨져 있었고 정현은 자신을 조용히 잡아당기는 그 힘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고개를 돌리곤 자신의 책상에 있는 가방을 든 정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 진짜 가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갑자기 무섭게 왜 저런데?"
 "윤정현 진짜 귀신 같은 거에 씌인거 아니야? 왜 사이비 종교에서는 그런 거 할 수도 있잖아."
 "기자국 국장 앞에선 아무 말도 못할게 왜 여기와서 난리야? 그렇게 불만이면 그만두던가-"
 "그러니까- 그런데 진짜 이거 은근 특종감 아니야? 한번 써볼까?"
 "너는 무슨……잘릴 일 있니? 난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아서. 너나 쓰렴."
 정현이 나가자마자 아무렇지 않은 척 한마디씩 늘어놓는 기자들을 보며 미래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정현의 말대로 특종을 향해 돈만을 쫓는 게 바로 기자일지도 몰랐다. 고개를 떨궜던 미래는 천천히 팀장 앞으로 걸어갔다. 팀장은 아니꼬운 눈빛으로 미래를 올려보았다.
 "팀장님, 죄송하지만 정현이 좀 쉬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원래 안 저러던 아인데 요즘 취재 때문에 힘든가봐요. 그러니까……."
 "됐어, 아까 뭐 듣고 또 헛소리야? 저런 사람들은 한번 진을 쫙 빼줘야해."
 팀장은 미래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끊고는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미래는 가볍게 책상을 한번 쳤다.
 "하지만 팀장님. 방금 정현이 보셨잖아요. 저런 상태에서 아무리 기사를 쓰게 한다고 해도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실거예요. 또 정현인 쓰지도 않을거구요. 그러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셔서 정현이 병원 좀 다녀오게 해주세요. 그 사이에 제가 기사 조금이라도 써놓을테니까……."
 "시끄러워! 지금까지 해온 게 뭐가 있다고 쉬긴 쉬어? 얼마나 할 일이 넘쳐나는 지 몰라? 다른 신문과 기사에 비해 우리 기사들의 완성력과 흥행력이 얼마나 떨어지는 줄 모르냐고! 도대체 뭐 알고 이런 말이 나오는 지 참……게다가 버려야 할 기자에게 완전 특종감인 기삿거리 찾아준게 어디야? 요즘 젊은 이들은 윗어른이 시키면 감사하게 알고 바로 해야지 오히려 화를 내니……그나저나 김미래씨는 취재 안가? 지금 이렇게 놀 시간이 있어?"
 미래는 팀장의 무성의한 답변에 고개를 숙이며 뒤 돌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귀를 뚫고 들어오는 소음들은 미래의 마음을 찌르는 것 같았다.

 문을 열었다. 다시끔 사람들의 환호성이 귀에 들어왔다. 정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으로 휩싸였다. 근원자가 속삭였다.
 '너는 그 싹을 끊어버리는 데 실패했다. 그 자는 분명히 빛을 찾는 우리를 방해하는 자였다. 왜 자르지 못한거지?'
 정현은 차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띠뜻하지만 따가운 빛이 정현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자신의 밑을 내려다 본 정현은 사람들이 자신의 발밑에 모두 엎드려있는 것을 깨달았다. 정현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 가득 차오르자 점점 더 빛의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포근한 침대처럼 빛은 정현을 계속 계속 끌어안아주었다. 정현은 자신을 지나치는 수많은 빛 속에서 미래의 얼굴을 본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근원자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넌 나를 따르는 수많은 구원자 중 하나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인, 결코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틀린건가?'
 '아닙니다. 전 당신을 따르는 구원자이며 당신은 저의 근원자이십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인, 결코 변하지 않을 사실입니다.'
 정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근원자이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빛도 함께 커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웠지만 즐거웠고 눈부셨지만 행복했다. 근원자가 웃음을 멈추고 한마디 했다.
 '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겠느냐?'
 정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까지 모든 것이라고 믿어왔던 껍데기가 아닐까. 윤정현이라는 한 인간, 김미래라는 한 인간. 없애버리고픈 팀장이라는 한 인간, 허구한 날 고개 숙이는 사과, 동료 기자들의 비웃음, 돈 하나 잡으려고 특종기사에 목 매는 우리들, 지금까지 꿈꿔왔던 깨끗한 기자라는 직업……아무것도 아니였다. 근원자와 마주보고 대화하는 이 순간, 그것들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했다.
 마침내 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일찍 기자국, 자신의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있는 미래는 복잡해서 미칠 것 같았다. 8시를 훌쩍 넘은 시간이지만 정현의 모습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팀장의 불같은 화를 온 몸으로 느낀 미래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정현이 복잡하게 써둔 메모지들과 여러개의 수첩들이 빼곡하게 놓여져 있었다. 지금 미래는 정현이 걱정되서 미칠 것 같는데 다른 기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잡담을 나누며 기사를 쓰고 있었다. 정현은 항상 미래에게 말했었다. 지금까지 꿈꿔왔던 기자라는 직업, 깨끗한 사실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게 힘들긴 하지만 기쁘다고. 하지만 그런 기자라는 직업은 정현을 벼랑으로 떨어뜨려버렸다. 진실만을 전하려면 돈을 버려야 하고 거짓만을 전하려면 모든 것들이 따라오는 그런 바닷속에서 정현은 헤어나오지 못했다. 어쩌면, 미래는 조금이나마 그런 선택을 해버린 정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이구 짜증나! 지금 몇 시야? 눈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팀장의 갑작스런 호통에 놀란 미래는 바로 출입문을 보았다. 그곳에는 짙은 화장과 헝클어진 머리를 한 정현이 서있었다. 미래는 정현의 모든 것이 하루사이에 바뀌어질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정현의 눈빛은 더욱더 싸늘해져 있었다, 정말로 팀장을 죽여버릴듯이.
 "뭐야? 그 눈빛은? 왜? 또 헛소리하려고 그러는 거야? 답답해서 미치겠네! 야! 너 동간 신문사 어떻게 된 줄 알아? 지금 특종기사 하나 내뿜어서 날개 돋친듯이 팔려나가고 있다고! 그 사이에 우리 기사는 뭐가 된 줄 알아? 다 너 같은 쓰레기가 되버렸어!"
 팀장은 얼굴까지 빨개지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정현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구두소리를 내며 팀장 앞으로 걸어갔다. 미래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동료 기자들도 이전의 모습과 달리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너 사과 안해? 빨리 고개 숙이라고! 얼굴은 폼으로 있냐? 이젠 사과 할 줄도 모른다 이거야?"
 팀장이 열을 올리며 말하자 정현은 양손으로 팀장의 목을 잡아쥐었다. 예상치 못한 정현의 행동에 팀장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이게 뭐하는 짓이야? ……저. 정현씨. 손 노. 놓고 얘기 합시다. 응? 손 노, 놓고 얘기 하자구."
 "왜? 내가 당신 죽일 것 같아?"
 검은색의 빛나는 눈으로 팀장을 노려보던 정현은 픽 웃었다. 그리곤 팀장의 이름표를 보았다. 팀장은 두려운 듯 자신도 따라 고개를 내렸다.
 "편집부 팀장 이.선.우. 이게 네 이름이야?"
 팀장은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 모습은 매우 비굴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우라……너한테 과분한 이름이네? 어제도 말했겠지만 당신한테 어울리는 이름은 쓰.레.기. 일텐데."
 정현은 두려움에 질려있는 팀장을 보고는 한번더 픽 웃었다. 그리고는 거칠게 손을 놓고는 곽티슈의 휴지를 뽑아 자신의 손을 닦았다. 그리곤 뒤를 돌아 동료였던 기자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미래를 보면서는 잠시 주춤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정현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당신들은 영영 빛을 찾지 못할거야.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어둠속에만 갇혀서 당신들이 벌인 일의 댓가를 치르게 될 거라구. 거짓을 고했으면 진실만을 말할때까지 여러번 찌를 거고 남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았으면 진심으로 후회할 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거야. 왜인 줄 알아? 근원자님께서 당신들을 저주하고 있거든. 영원히 고통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든 정현은 팀장의 자리에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래의 곁을 지나가면서 정현은 조그맣게 속삭였다.
 "미안해."
 정현은 그 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구두소리와 진한 향수 향기, 두려움은 깨끗하게 사라져버렸지만 사람들은 잠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미래의 머리속에선 자꾸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리곤 미래도 대답했다. 미인하다고, 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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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전에 쓰던거라서 어떻게든 빨리 끝낼려고

막 휘갈겨썼더니 이건 뭐 글 속에 시간개념이 없군요:)

여튼 오랜만이네요 글틴!

白魂
白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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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와 로봇 그리고 M

   철커덕 철커덕.  아침 6시. 인터B 공장의 불이 들어오면서 공장의 기본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로봇 노동력들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가로 12줄, 세로 10줄을 맞추어서 섰다. 곧 그들 앞에 파란 홀로그램이 띠워지고 회장 B가 나왔다.  “새 아침이 밝았다. 6시가 넘었기 때문에 바로 기계를 가동시켰는데 혹시 불만 있나?”  회장 B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회장 B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역시 로봇들이군. 자 그럼 로봇 삼계명을 외치고 시작하도록 하겠다. 하나!”  회장 B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정신이 번쩍 뜨인 로봇 노동력들은 입을 열었다.  “나는 로봇이고 발명자의 위대하신 손 밑에서 태어났다.”  “둘!”  “나는 로봇이고 발명자를 위해 평생 일 해야 할 임무가 있다.”  “목소리를 좀 더 키워라. 셋!”  “나는 발명자의, 발명자에 의한, 발명자를 위한 로봇임을 잊지 않는다.”  로봇 노동력들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행동을 했으며 같은 모양으로 입을 닫아 말을 끝냈다. 회장 B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됐다. 오늘 아침은 이렇게 끝내도록 하지. 이상!”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로봇 노동력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  적당한 체격에 군데군데 하얀 머리를 가지고 있는 회장 B는 한숨을 쉬며 비서1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그래, 어제 몰래 우리 회사에 들어온 아이가 있다 했지. 그 아이, 주입은 잘 되고 있나?”  회장 B의 말에 비서1은 주춤거렸다.  “아, 그게……사실은 잘 되고 있지 않습니다. 6살 이상은 받지 않는 게 주입 원칙이지만 그 아이는 벌써 8살입니다. 강제적 개념주입기계인 멀티Q를 실행하려고 할 때마다 재빨리 알아차리고 도망가기 일쑤예요. 게다가 반항도 심하구요.”  비서1의 말에 회장 B는 갑자기 화가 났다. 현재 인터B 공장은 세계적으로 알려진다면 엄청난 문제가 일어날 일들을 실행하고 있다. 그래서 비밀 체제로 바뀌게 되고 직원들은 해고가 되어도 영구적으로 남아있어야 하며 더 이상의 인력도 뽑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비밀을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회사에 한 8살 아이가 무단으로 들어왔다. 만약 그 아이가 이 회사를 탈출해 모든 비밀을 말하고 다닌다면. 그 뒤는 벼랑 끝이었다. 무조건 생각을 주입시켜야만 했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그 아이는 기계 모습이나 회사 구조는 물론이고 로봇 노동력까지 목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반항

  • 白魂
  • 2010-09-02
날개

 "인간은 정말 날 수 없는 걸까?" 난 날개를 보았다. "그니까 죽을때까지 땅에 쳐박혀서 살아야 되냐구" 난 대답했다. "아니." 걱정이 스며들던 날개의 표정이 한순간에 환해졌다.  "역시 M! 넌 다른 사람들과 달라! 다 안된다고 했는데... 그래, 난 날아볼거야." 내가 만약 그때 날 수 없다고, 땅에 쳐박혀 영영 살아야 한다고 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날개는 정말 날아가버렸다. 아니 싸늘하게 죽어버렸다. ***  -2009년 5월 13일  "날개, 나와서 수행평가 한 번 발표해볼까?" 날개를 유독 좋아하는 국어선생님은 어김없이 오늘도 날개를 불러 나오게 했다. 날개는 주저하지 않고 나가 하얀 종이를 펴들었다.  [사람의 시조가 유인물이라는 건 그냥 사실에 불과하잖아?  내 생각에 사람의 시조는 새였을거야. 하지만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땅에서 쉬다가 바람 때문에 자신들이 날 수 있다는 걸 까먹은거지.  그래서 강하고 거친 바람대신 땅에서 쉬는 편안함만 추구했어. 그러다보니 어느새 불필요한 날개가 사라져버리게 된거야.  참 어리석은 행동이였다고 생각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봐. 뒤늦게 날고 싶다고 꿈을 꾸고 있는 우리들 말이야.  아마 모두가 늦었다고 생각할거야.  하지만 이제는 그 꿈 이룰때가 되지 않았나?]  날개는 조용히 발표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국어선생님은 그런 날개가 흐뭇한듯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야, 윤날개 맨날 발표하지 않냐? 별로 잘 한거 같지도 않은데……쟤네 엄마왔었냐?" "원래 저 봉봉이가 윤날개만 좋아하잖아. 공부 잘하는 애들 얼마나 아끼는 데- 너 몰랐어?" 봉봉이란 국어선생님의 이름을 딴 별명이었다. 소곤소곤 떠들어대는 아이들곁에 앉아있던 M은 한숨을 쉬며 날개를 보았다. 날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M은 슬슬 답답해져왔다. "이제 지겹다. 쟨 언제까지 저렇게 공부만 할거냐? 저러니까 왕따되서 친구도 없잖아." "친구가 없으니까 공부라도 해야될거 아니야. 진짜 재수없는거지. 아 근데 혹시 몰라? 이번 시험엔 M이 일등할지?" "더러워." M은 여자아이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오르자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듣지 못한 듯 팝콘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 거기, 조용히 안해? 너희는 수행평가 얼마나 맞았다고 이렇게 떠드는 거야. 꼭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수업시간에 떠들어요." "야야, 또 봉봉이 생쇼한다. 할 말 없으면 맨날 공부타령이나 해대면서 뭐라는 거야. 아 띠겁네." M은 뒤를 돌아봤다. 투덜거리며 짜증을 내던 선영이 M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응? 왜 M?"

  • 白魂
  • 2010-07-12
같은 것의 무의미

 "싫어, 다가오지마. 내 잘못 아니잖아. 제발……미안……정말 미안해……."  어둡고 축축하고 차가웠다. 사방의 벽들이 자신을 가로막아 가두고 있었다. 그 공간들은 점점 더 좁아지면서 성현을 숨막히게 했다. 그때 무엇인가 그 좁은 공간에 들어왔다. 성현의 엄마였다. 그녀는 문을 닫고 슬픈 표정으로 성현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잡지 못했다.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성현은 그녀 때문에 공간이 좁아지고 숨막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공간은 더욱더 좁아들고 공기도 희박해져갔다. 이 공간에서 공기는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고 가슴은 빠르게 올라왔다 내려갔다. 이러다가 죽을 것만 같았다. 성현은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어둡고 차가운 벽에 손을 대며 마침내 그녀를 찾은 성현은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땀에 젖은 손을 그녀의 목에 댔다. 그녀는 뭐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공간은 점점 더 좁아오고 공기는 더욱더 탁해져갔다. 그녀는 성현에게 손을 뻗쳤고 성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성현은 그녀의 목을 졸라버렸다.  "그만해!"  성현은 꿈을 뒤로하고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엄마의 목을 졸랐다. 한참동안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자신과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그녀였고 이것은 한낱 꿈일뿐이었다. 성현은 더 이상 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일어났다. 얼굴을 씻은 뒤 정장을 입고 커피와 빵을 먹으며 오늘의 일정들을 확인했다. 한성병원의 외과의사인 성현은 한성병원을 물려받을 사람으로 촉망받았다. 이런 성현에게 과거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 그런 사람 있었던 적도 없었듯이 지금의 성현에게 꿈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윽고 병원 입구에 도착한 성현은 의사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동료의사인 연준에게 찾아갔다.  "연준아, 안정제 좀 주라."  연준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성현은 머리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안정제 몇 알을 꺼낸 연준은 물이 담긴 컵과 함께 내밀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요즘따라 안색도 안 좋고 저번주부터 수면제나 안정제같은 약도 계속 받아가잖아. 몸에 안 좋아."  "나도 알지, 몸에 안좋은 건 아는데 요즘 자꾸 악몽을 꿔서 말이야. 되게 기분 나쁜 꿈이거든."  "그래? 무슨 꿈인데? 혹시 사람 죽이는 거 같은 꿈들이야?"  연준의 꿰뚫어보듯한 말에 놀란 성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연준이 말을 이었다.  "원래 외과의사들, 수술하다 환자가 죽으면 그런 압박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넌 환자가 수술중에 사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잖아. 요즘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고.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아, 아니야. 그런거 아니

  • 白魂
  • 201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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