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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의 무의미

  • 작성자 白魂
  • 작성일 2010-02-12
  • 조회수 489

 "싫어, 다가오지마. 내 잘못 아니잖아. 제발……미안……정말 미안해……."

 어둡고 축축하고 차가웠다. 사방의 벽들이 자신을 가로막아 가두고 있었다. 그 공간들은 점점 더 좁아지면서 성현을 숨막히게 했다. 그때 무엇인가 그 좁은 공간에 들어왔다. 성현의 엄마였다. 그녀는 문을 닫고 슬픈 표정으로 성현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잡지 못했다.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 성현은 그녀 때문에 공간이 좁아지고 숨막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공간은 더욱더 좁아들고 공기도 희박해져갔다. 이 공간에서 공기는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고 가슴은 빠르게 올라왔다 내려갔다. 이러다가 죽을 것만 같았다. 성현은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어둡고 차가운 벽에 손을 대며 마침내 그녀를 찾은 성현은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땀에 젖은 손을 그녀의 목에 댔다. 그녀는 뭐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공간은 점점 더 좁아오고 공기는 더욱더 탁해져갔다. 그녀는 성현에게 손을 뻗쳤고 성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성현은 그녀의 목을 졸라버렸다.

 "그만해!"

 성현은 꿈을 뒤로하고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엄마의 목을 졸랐다. 한참동안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자신과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그녀였고 이것은 한낱 꿈일뿐이었다. 성현은 더 이상 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일어났다. 얼굴을 씻은 뒤 정장을 입고 커피와 빵을 먹으며 오늘의 일정들을 확인했다. 한성병원의 외과의사인 성현은 한성병원을 물려받을 사람으로 촉망받았다. 이런 성현에게 과거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 그런 사람 있었던 적도 없었듯이 지금의 성현에게 꿈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윽고 병원 입구에 도착한 성현은 의사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동료의사인 연준에게 찾아갔다.

 "연준아, 안정제 좀 주라."

 연준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성현은 머리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안정제 몇 알을 꺼낸 연준은 물이 담긴 컵과 함께 내밀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요즘따라 안색도 안 좋고 저번주부터 수면제나 안정제같은 약도 계속 받아가잖아. 몸에 안 좋아."

 "나도 알지, 몸에 안좋은 건 아는데 요즘 자꾸 악몽을 꿔서 말이야. 되게 기분 나쁜 꿈이거든."

 "그래? 무슨 꿈인데? 혹시 사람 죽이는 거 같은 꿈들이야?"

 연준의 꿰뚫어보듯한 말에 놀란 성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연준이 말을 이었다.

 "원래 외과의사들, 수술하다 환자가 죽으면 그런 압박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넌 환자가 수술중에 사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잖아. 요즘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고.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아, 아니야. 그런거 아니고……그냥 생각할게 너무 많아서 그런가봐. 고마워, 그럼 가볼게."

 성현은 연준의 의심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대답하곤 자신의 진찰실로 왔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던 성현은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김간호사였다.

 "오늘 일정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후 6시에는 환자 상담있구요, 오후 8시에는 세미나 있습니다. 그리고 병원장님께서 진의사님이 오시는 대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어서 올라가시는 게 좋으실 것 같은데요."

 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김간호사를 나가게 했다. 아침부터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병원장의 부름은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는 거였다. 성현은 매무새를 정돈하고 자신의 손을 한번 살펴보았다. 사람을 여럿 살린 유명한 외과의사의 하얗고 깨끗한 손. 지금의 자신은 이 모습이며 과거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성현은 고개를 흔들고 문을 나섰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성현 혼자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이윽고 성현 혼자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그 공간에는 적막함이 감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성현아……성현아.'

 성현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성현아……엄마는 곧 사라질거야……네가 원했던 것처럼……죽어줄거야.'

 그 날의 일을 말하는 듯한 엄마의 목소리의 성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떨리고 공기는 차가웠다.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니야, 아닐꺼야……말도 안돼. 무슨 엄마……아니 그 여자 목소리가 들리겠어. 진성현, 정신 똑바로 차려. 너 답지 않잖아."

 성현은 혼자서 중얼거렸으나 이미 밀려온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꿈 속의 공간처럼 이 엘리베이터도 차갑고 축축하게만 변해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도 점점 더 좁혀들어왔다. 숨이 가빠지고 몸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왜 이러는 거야. 왜 또 날 괴롭히는 건데. 성현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로운 목소리에 그럴 수가 없었다.

 '진성현……너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말도 안돼……다 너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성현은 주체할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해내려고 했다. 하지만 좁혀오는 공간속에서 그녀를 생각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불안했다. 손가락이 떨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을 땐 이미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은 뒤 오래였다. 5, 6, 7…… 12층까지 가는 시간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이 공포속에서 헤어나올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비겁해.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징그러워……너 같은 사람 정말 징그러워.'

 성현은 단호하게 끝나는 소리를 들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 그 목소리는 모든 것을 같이 해왔던 가족이자 자신의 쌍둥이 누나 아현이였다. 아현의 목소리임을 생각해내자 성현은 더더욱 불안감에 떨었다. 엘리베이터의 불은 꺼지고 층을 가리키는 숫자는 올라가지 않았다. 아현의 교활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성현은 잃어가는 정신을 붙잡고 엘리베이터의 비상버튼을 향해 움직였다. 어둠속에서 버튼을 누르기란 쉽지 않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아현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멎어갈 때 드디어 비상버튼을 찾은 성현은 아찔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틈 속으로 가득 들어오는 하얀 빛들과 따스함. 성현은 눈이 부신 이 분위기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정리가 안됐다.

  "……괜찮으세요? 진의사님, 진성현 의사님? 눈 떠보세요."

 성현은 누군가 자꾸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아까의 충격이 사라지지 않아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눈을 떴다가 다시 또 악몽이 시작될지 모른다. 잊고 싶었던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힐 지 모른다.

 "성현아, 진성현. 일어나봐."

 연준의 목소리였다. 성현은 옛날의 성현의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바로 눈을 뜨었다.

 "정신이 드셨네요, 괜찮으세요?"

 눈을 뜬 성현은 강한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연준과 간호사들이 주위에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왜……왜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거지? 어서 병원장님에게……."

 "기억이 안 나는구만……이제 간호사들은 나가서 다른 환자를 돌봐. 성현이는 내가 잠시 맡을게."

 연준은 간호사들을 나가게 한 뒤 성현을 보았다. 성현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저지당했다.

 "생각 안나는 거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너 엘리베이터 안에서 쓰러져있었어,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이야. 다행히 네가 비상버튼을 누르고 쓰러졌는지 빨리 구할수 있었지. 엘리베이터는 사용량이 늘어서 잠깐 멈춘거라고 하더라구. 너도 참……."

 성현은 연준의 말을 듣고는 그 목소리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성현은 한숨을 쉬며 안도했지만 너무나 생생했던 그 모습들이 잊혀지지 않았다. 연준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정신을 잃은거야? 너 조금전까지만해도 식은땀도 많이 났고 심장 박동수와 혈압까지 엄청 올라갔어. 공기가 부족할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너 진짜 어디 아픈거 아니야?"

 "……그, 그래? 아픈건 아닌데 아무래도 요즘에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서 그런가봐. 하하하하……."

 성현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연준에게는 더욱더 의심과 걱정만 불러오는 행동이었다. 연준이 이어 무언가 말하려듯 입을 열자 성현이 재빨리 막았다.

 "나 진짜 괜찮아. 봐봐, 땀도 이제 안나고 박동수, 혈압 다 정상이잖아. 그러니까 빨리 가봐. 아프지도 않은 엄살 환자 보는 거 보다 진짜 아픈 환자들 수십명 진료하는 게 훨씬 낫다구."

 "하하하, 역시 진성현이다. 어떻게 이와중에도 환자들 생각하냐? 알았어, 갈테니까 좀 쉬고있어. 어디 이상하면 말하고."

 성현이 다급하게 내뱉었던 말을 환자를 아끼는 마음으로 들은 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 지었다. 곧이어 연준이 나가는 것을 보며 성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일을 다시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진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태로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성현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성현의 핸드폰에는 모르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혹시나 했는데……너 맞구나, 진성현."

 자신의 귀가 잘못들은 것이 아니라면 이 목소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한 여자……옛날의 성현이 가장 아끼던 사람.

 "말 못하는 거 보니까 내가 기억 안나는 거 같네. 벌써 잊어버린거야? 이거 실망인데……."

 성현의 머리속이 핑핑 돌았다. 다시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상기시키는 여자……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은 모두 거짓이라는데 뭐지?

 "자, 잘못 걸으신 것 같네요. 끄……끊겠습니다."

 "잠깐, 그러지마. 진성현, 내가 네 이름 석자 똑바로 말했잖아. 한성병원 외과의사 진성현. 그런데도 못 알아듣는다면……아, 너와 나의 엄마를 죽인 진성현이라고 말해야지 알아듣는거야? 알았어. 앞으로 그렇게 말해줄게. 그런데 나는 어떻게 설명할까……난 너와 모든 것이 같던 진아현이라고 하면 이제 다 정리 되겠지? 사랑하는 내 쌍둥이 동생 진성현. 잘 지내고 있었어?"

 성현은 자신의 쌍둥이 누나라는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물론 예상하고 있었지만 성현이 지금까지 느껴왔던 현실과 너무 달랐다. 6년전 자신의 분신같은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눈 앞에 나타나면서 외과의사 진성현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의 유명한 진성현 안에 옛날의 나약한 진성현을 찾으려는 듯이.

 "진성현, 잘 지내고 있었냐구. 오랜만에 누나가 묻잖아. 대답 안 할꺼야?"

 "자, 잠깐만요……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성현은 아현이 믿지 않을 걸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다. 무엇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성현은 아현이 자신의 턱 밑까지 뚫고 들어온 것 같았다. 병원침대에서 꾸물거릴 시간은 더 이상 없었다. 빨리 이 곳에서 나가야 한다. 아직 자신의 집은 모를 것이다.

 "죄송하다? 진작에 했어야 하는 말인데……너도 참 이렇게 늦어서야 누나가 화 안나겠어? 어쨌든 모든 이야기는 이따가 하도록 하자."

 이따가? 다시 또 만난다는 건가? 어디서? 성현은 전화기를 붙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새 다리는 땅에 붙어있었다.

 "너의 집을 알아냈거든. 내가 사라진 사이 몰래 집 바꾸면 모를거라고 생각했나봐? 성현아, 누나 또 실망한다. 사과도 늦고 집 바꿨다는 것도 안 알려주고. 너도 알잖아. 우리는 특별한 쌍둥이라서 멀리 있어도 서로의 마음 잘 알수 있는거 말이야. 아, 넌 옛날의 네가 아니니까 그 능력을 잃어버렸겠구나."

 아현이 옛날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성현의 머리는 더욱더 복잡해져왔다. 아현은 한바탕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넌 지금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맞지? 누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괜히 덤빌려고 하지 말아. 알았지? 그러니까 우리 착한 동생, 이상한 곳으로 새지 말고 지금 바로 집으로 가서 기다려. 누나 맛있는 거 사가지고 금방 갈게. 하하하하, 끊어."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성현은 끊어지길 바라던 전화의 여운이 길게 남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성현은 집으로 온다는 아현의 말이 거짓일거라고도 생각했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때의 아현은 무슨 일을 하든 허탕치는 법이라곤 없었고 모든 지 확실하게 정해진 다음에 실행하는 타입이였다. 자신의 집을 알아내지도 못하고 성현을 겁주려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6년전 연락이 끊겼는데도 불구하고 한성병원의 의사라는 것까지 알아낸 것을 보면 아현은 확실하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성현은 결국 불안한 마음에 일어섰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개인 병실의 문을 열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김간호사가 앞에 서 있었다.

 "아, 진의사님. 원래 이틀 후 수술하시는 환자분께서 오늘로 일정 변경하셨습니다. 마침 병원에 환자가 적고 의사님도 여기 계셔서 허락 없이 옮겼습니다만 일……."

 "잠깐만, 미안해 김간호사. 나 지금 집으로 가야되거든? 그 수술 다른 의사한테 넘겨줘.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드리고. 알았지?"

 "아, 아니 진의사님 왜 갑……."

 "지금 긴 말 할때가 아니야. 아, 그리고 연준이한테 뒷정리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그럼……."

 성현은 재빠르게 말을 마친 뒤 당황스러운 얼굴의 간호사를 뒤로하고 뛰기 시작했다. 의사가운도 입은 채 뛰고있는 성현을 마주치는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여유로워보이고 자신감이 가득찼던 성현이 이렇게 다급하고 두려워보이기는 처음일테니까.

 "성현아, 진성현! 어디 가는 거야? 진성현!"

 그때였다. 성현의 뒤에서 연준이 불렀다. 성현은 익숙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늦췄으나 다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달려온 연준이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성현아, 지금 어디 가는거야? 불렀는데 대답도 안하고. 아 그러고보니 몸은 괜찮아? 쉬라고 했는데 왜 나……."

 "연준아, 나 지금 집에 가봐야 돼. 김간호사한테 이야기 다 해두었으니까 가서 뒷정리 좀 부탁해."

 성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당황한 연준을 뒤로 뛰려고 했지만 연준은 그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성현은 뒤를 돌았다.

 "연준아, 지금 우리집에 쌍둥이 누나가 올거야. 그건……아무튼 나한텐 위급한 상황이야. 놔줘."

 "누나라니? 진성현 너……혼자라고 했잖아."

 "그럴만한게 있어. 내가 돌아와서 말해줄게. 빨리 놔."

 성현은 팔목을 돌려 연준의 손에서 빼낸다음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연준은 성현을 불렀으나 뒤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뭔가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김의사님, 진의사님 왜 저러시는 거예요? 아까도 쓰러져 계시고……."

 "맞아요, 요즘에 진의사님 이상하시던데. 약도 엄청 드시고 불안해보이셨어요."

 성현이 비상구로 사라지자 모여있던 간호사들이 조르르 연준에게 다가왔다. 연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였다.

 "하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집에 일이 있다고 하네요. 자, 어서 가서 일들합니다!"

 간호사들이 싱겁다는 표정으로 사라지자 연준은 성현이 사라진 곳을 한번더 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진료실로 향했다.

 차를 몰아 어느새 집 앞까지 달려온 성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아직 아현은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문자가 왔다.

 [네가 좋아하는 초밥이랑 삼각김밥 엄청 샀어. 3-40분 뒤면 도착하니까 집 정리 잘해놔^^ 비빌번호는 아니까 걱정말구.]

 아현이였다. 성현은 핸드폰을 닫으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왜 그렇게 아현에게 두려움을 가진걸까. 성현이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고개를 흔들며 눈을 뜬 성현은 아현을 자신의 가족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저 쌍둥이 누나가 자신의 집을 놀러오는 것뿐이라고. 성현은 계속 되뇌었지만 더더욱 두려움만 커졌다. 곧 성현은 그 두려움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 두려움은 자신에게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성현은 아현의 엄청난 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의 엄마를 죽어버리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 후 부터 모든 것은 뒤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뒤바뀐 채로 잘 견뎠지만 이젠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으려고 하고 있다. 아현 때문에.

 성현은 차에서 빠져나와 재빨리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곤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스위치를 누른 성현은 환한 방에서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몇 분째 서랍 속이나 책장 같은 곳을 뒤져보았지만 성현이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한숨을 쉬던 성현은 고개를 들어 책장 위에 있는 종이 상자를 꺼내보았다. 그곳에 바로 자신이 찾던 5년 전의 일기장이 있었다. 성현은 주위를 한번 돌아본 뒤 일기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 10월 29일

 아현누나가 나보고 잠시 이리로 오라고 했다. 엄마가 잠든 틈을 타 슬쩍 다가가자 누나는 품에서 삼각김밥을 하나 꺼냈다. 아빠는 돈을 가지고 나가기만 하고 엄마는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만 보고 있기 때문에 하루 삼시 세끼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바하는 누나가 먹을 걸 싸와 나에게 건네곤 했는데, 누나가 가져오는 건 다 맛있지만 삼각김밥은 특히 맛있었다. 난 허겁지겁 먹다가 문득 누나 생각이 들어 고개를 올렸다. 누나는 많이 먹고 왔다며 싱긋 웃었다. 나에게 이런 쌍둥이 누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 이윽고 김밥을 다 먹자 누나는 지금 돈을 많이 모았다고 기뻐하며 말했다. 조금만 더 모으면 더 맛있는거 사줄수있을거라고 미리 생각해놓으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힘들어보이는 누나를 보며 슬프고 미안했다. 난 지금까지 누나에게 기대기만 했다. 아무리 누나라지만 나이도 같고 난 남자인데 도대체 무엇을 한걸까.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에게 나서는 것도 누나고 나의 생활과 공부를 책임지는 것도 누나다. 참 한숨이 나온다. 아현누나, 정말 고마워.

 11월 2일

 도박. 이 단어에 어른들은 왜 그렇게 빠지는 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사람같지도 않은 아빠가 우리집을 무너뜨렸는데 이번에는 엄마다. 저번에 아현누나랑 엄마랑 나랑 약속했는데……아빠, 아니 그남자를 제외하고 도박같은 건 꿈도 꾸지 말자고. 그런데 이게 뭐야. 그 약속은 어디로 간거야. 이러다가 누나마저 가버리면 난 더이상 견딜수가 없을 것 같다. 엄마는 자신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단지 구경만 했다고 하지만……사실이 아니라도 믿고 싶다. 다시끔 불행히 시작되게 할 수 없다. 나와 누나가 어떻게 여기까지 버텨왔는데 말도 안되. 엄마, 엄마로서의 다른 행동들 안 바랄테니까 제발 그만해줘.

 11월 5일

 정말 말도 안돼. 아빠가 이제 우리에게 없단다. 아근데ㅋㅋㅋㅋㅋ그거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나온다. 진짜 이건 말도 안돼는 거야. 모두가 날 속이고 있는 거 밖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집이 다 무너져가도 꿋꿋하게 돈 날리던 아빠가 어떻게 차에 치였다고 한번에 죽어? 정말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다. 아빠를 쳤다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말했다. 술에 취한 아빠가 도로의 방향과 역주행하며 갑자기 나타나서 멈출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나ㅋㅋㅋ우리 아빠, 아니 그 남자 그렇게 쉽게 죽는 사람 아니라니까 계속 거짓말한다. 게다가 누나와 엄마, 경찰들까지. 난 그 남자는 어딘가에서 돈을 더 쉽게 얻기 위해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한다. 참 잘 사라진 것 같다. ]

 성현은 일기장에 적혀있는 자신의 미친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어렸다고 하지만 이렇게 심한 스트레스를 정신적 이상으로 나타낼줄 몰랐다. 어떻게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돈 때문에 '사라졌다'고 믿었을까. 현실적인 자신과 너무 달랐다. 혼란스러워진 성현은 그 날의 일기를 계속 훑어보다가 일기의 끄트머리에서 물방울 자국을 발견했다. 순간 성현의 머리는 멈추어버렸다. 말라버린 물방울 자국은 19살의 성현은 25살의 성현과 같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누구보다 숨기를 좋아하고 두려워 하는 인간. 진성현.

 성현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일기를 읽었다. 이렇게 약한 나는 없었어.

[ 11월 10일

 아빠가 행방불명된지 5일째다. 그런데 경찰들은 꿈쩍도 않고 가짜 관을 불태워버렸다. 누나가 계속 인정하라고 하지만 뭐랄까, 가족중에서 가장 아끼고 서로의 생각까지 알 수 있는 아현누나도 믿고 싶지 않다. 아니 누나가 날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모든 짐을 이고 가는 것 같다. 엄마는 어쩌다가 알게 된거고 말이다. 어차피 집에 있지도 않고 술 취한 얼굴밖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아빠가 뭐하러 필요하겠어. 엄마는 어젯밤에 먹을 것 입을 것을 잔뜩 사가지고 왔다. 누나가 돈이 어디서 났냐고 하자 엄마는 게임에서 이겼다고 한다. 정말 우리집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그냥 같이 사라지지 도대체 왜 남은걸까.

 11월 12일

 지금 우리집은 폭풍이 쓸고 지나간 것 같다. 방금전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집을 뒤엎었다. 엄마가 드디어 일을 저지른 것이다. 누나의 말로는 속임수를 써서 이기려고 하다 들켜 걸은 돈의 몇 배의 빚을 지게 됐다고 했다. 진짜 기가막혔다. 분노와 짜증이 치솟았다. 난 엄마에게 소리질렀다. 나가라고, 우리들을 봐주기만 해도 감사할 판에 도박하는 엄마 따위 필요없다고. 아니 어차피 처음부터 부모라는 건 없었으니까 그냥 나가버리라고 말했다. 나가서 차에 치이든 아빠라는 남자처럼 우리를 속이든 죽임을 당하든 당신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라고까지 했다. 누나는 날 말릴려고 했지만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가 없었다. 나랑 누나가 지푸라기 하나, 먼지 한톨에 희망을 거는 것도 모를까? 어렸을 때부터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내일은 웃을 수 있겠지 이렇게 조그맣게 희망을 가졌는데 다 망가져버렸다. 남은 건 쓸모없는 엄마와 불쌍한 누나, 그리고 세상의 차가움이다. 지금 엄마는 방에 들어가서 미친듯이 울다가 웃다가 미친 사람처럼 반복하고 있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엄마, 진짜 부탁인데 확 나가서 사라져버리면 안될까? 아니, 깨끗하게 그냥 우리를 도와주고 싶다면 죽어버리면 안될까?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줘. 배신감 때문에 미치겠으니까 제발.

 11월 13일

 누가 내 일기를 읽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서랍 속에 있던 일기장이 책상에 나와있던 것이다. 만약에 누군가 정말로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엄마일까? 걱정되긴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다. 만약에 진짜 엄마가 본 것이라면 오히려 엄마가 더 부끄러운것이다. 난 모든 사실에 내 생각을 썼을뿐이니까. 그러니까 전해주고 싶다. 제발 좀 책임지라고. 어차피 남은 건 죽음인데 그 앞에서 발버둥이라도 쳐보라고.

 11월 17일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엄마가 사라진것이다. 진짜 내 말대로 이루어진 것일까? 얼마전에 누군가가 내 일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 역시나 엄마였을까……혼란스러웠다. 엄마가 정말 내 일기를 보고 집을 나간것일까? 그렇다면 곧 죽을 거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온 몸이 차가워졌다. 지금 누나는 경찰에 신고한 뒤 혹시나 동네에서 도박을 하고 있을까 사람들을 찾아갔다. 난 엄마를 보았다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몇달전부터 끊긴 전화는 차갑기만 했다. 슬금슬금 두려움이 찾아오고 있다. 정말로 나 때문인건가? 아니,아닐거다. 설마 내 일기를 봤다는 이유로 죽을까? 물론 강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아무튼 내 잘못이 아니다. 왜 이렇게 온 몸이 차갑고 손가락이 떨려올까? 꼭 엄마가 아직도 방에서 자고 있는 것 같다. 설마 이것도 아빠때처럼 거짓말인가? ]

 성현은 이 일기를 끝으로 읽고 닫아버렸다.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점부터는 일기장을 읽지 않아도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성현은 눈을 감고 누나가 돌아온 후의 일을 생각했다.

[ "누나……사, 사람들이 모른데? 엄마가 어디 계시는 지?"

 성현은 조심스레 말을 걸었지만 누나는 붉은 눈을 비비고만 있었다. 성현은 한번더 간절하게 누나를 불렀다. 그러자 누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보다 너……너 일기에 그런 내용 왜 적은 거야?"

 처음 성현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자신의 일기내용을 언급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왜……왜 그렇게 적은 거냐고……도대체……왜? 왜 그랬어? 왜!"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지른 누나를 보며 성현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아현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성현은 당황하기만 했다. 성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너때문이야……왜 그런 내용을 일기장에 쓰는 건데! 엄마가 본다는 거 몰랐어? 아니 본다는 예상도 못했어? 다 너때문이야. 엄마가 죽으면 다 네 탓이란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건데? 찾아와, 당장 엄마 찾아와!"

 누나는 분을 참지 못하며 성현에게 한번더 소리쳤다. 그렇다, 일기장의 내용을 본건 엄마 한사람이 아니라 누나와 엄마 두 사람이었다. 성현은 그 사실을 깨닫고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그럼 누나가 내 일기 본 거였어?"

 "그래, 엄마가 항상 너 잠들면 방으로 들어오셔서 읽어보셨어. 네가 도대체 무슨 내용을 썼는지 엄마는 소리없이 우는 걸 반복했단 말이야. 네가 항상 무능력하게만 생각했던 엄마도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가슴이 아팠을거라구. 내가 그 모습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 그래, 넌 모르겠지.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게 뭐야?"

 "내가 지금 그거 묻는 거 아니잖아. 왜 읽었냐고."

 성현은 약한 모습의 엄마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 괜히 차가운 말투을 던졌다.

 "먼저 대답해줄게. 궁금했어. 아빠내용은 상상했지만 얼마나 심한 내용을 썼으면 엄마가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왜 남의 일기를 누나가 보는건데!"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누나에게 성현은 황당한 척 소리를 질렀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나가서 엄마를 찾아오겠다고, 정말 미안해서 미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에서는 계속 칼이 되는 말들만 나왔다. 누나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성현, 지금 그게 문제인거 같아? 빨리 엄마 찾아와. 일기가지고 화낼 시간에 엄마 좀 찾아보란 말이야! ……엄마 죽으면 경찰이 안 올거 같아? 네 일기라고 안 읽을 것 같냐고.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된 이상 의심받는 건 너야. 알기나 해? 알기나 하면서 화를 내는 거야? 제발 진성현, 네 마음대로 행동하지마."

 성현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움직이기도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싫었다. 가린 손을 내리면 모든 게 되돌아올것만 같았다. 누나가 악몽 꾸었냐고 웃으면서 빨리 나오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성현은 항상 그랬듯이 없어진 희망을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이틀 후 엄마는 아빠를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자 누나의 말대로 경찰이 찾아와 성현의 일기를 가져갔지만 약간의 의심만 한뒤 다시 돌려주었다. 그때의 누나는 애써 말하지 않았지만 온 몸으로 성현을 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성현은 정말로 자신의 일기 때문에 엄마가 그런 결정을 한 게 아닐까 두려워했다. 하루하루가 견딜수없이 힘들었고 귓가에선 자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몇 주일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성현은 학교의 도움덕분에 장학생으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성현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집에 돌아온 누나는 자신이 모든 돈을 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사라졌다. 그렇게 성현이 자신의 쌍둥이 누나와의 실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마치 6년전의 성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손가락이 떨려오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성현아……우리 성현이. 엄마한테 왜 그랬던 거야? 응? 대답해봐……성현아, 진성현…….'

 엘리베이터에서처럼 다시끔 환청이 들려왔다.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난 엄마를 죽이지 않았다. 또 일기에 그런 내용을 적었다고 해서 사람이 죽으려고 마음 먹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건 일기를 쓴 사람의 잘못이 아닌 행동을 한 사람의 잘못이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두려워해야 하는 건가. 멀쩡했던 나에게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누군가 나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다. 내 잘못이 아니다. 절대 내가 죽으라고 협박한게 아니다.

 '성현아……엄마가 네 뜻대로 해줬잖아……사라져줬잖아, 그러니까……이제 네가 엄마 부탁을 들어줘야지…….'

 '너때문이야……왜 그런 내용을 일기장에 쓰는 건데! 다 너때문이야. 엄마가 죽으면 다 너 탓이란 말이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성현은 손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내가 안 그랬어……그건 단순히 사고였어. 일기는……내 잘못이 아니야……제발, 제발 날 괴롭히지마."

 하염없이 같은 말만 중얼거리던 성현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찬 그의 눈에서 냉기가 흘렀다. 그렇다, 이건 자신의 잘못이다. 내가 일기를 썼고 그걸 보고 엄마가 자살충동을 느끼게 된것이다. 그러므로 누나의 말이 맞다. 모든 것이 다 나때문이다. 하지만 성현은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서 이 자리까지 올랐는데 과거의 행동으로 모든 걸 잃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누나의 입을 막아야 한다. 유일하게 서로의 생각을 알수있는 아현누나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누나는 어떤 것으로든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일기와 엄마를 이용하며 계속 성현을 괴롭힐 것이다. 즉 하나뿐인 쌍둥이 누나를 죽여야 한다. 성현은 생각의 결과가 그렇게 나오자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래도 될까? 하나뿐인 쌍둥이 누나를 내 손으로 죽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에게는 그 방법 뿐이다. 누나를 희생해서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의미는 충분한 것이다. 성현은 자신의 방의 불을 끄고는 재빨리 창문으로 밖을 확인했다. 누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꺼내든 성현은 문 앞에 숨어있었다. 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곧바로 찌를 생각이었다.

 드디어 얼마 쯤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의 문이 닫히고 성현의 집 앞으로 걸어오는 여자구두 소리가 귀를 찔렀다. 틀림없이 아현누나였다. 삐삑삐삐삑. 드디어 현관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성현은 누군지 확인할 겨를도 주지 않고 재빨리 배 쪽으로 힘껏 칼을 찔렀다.

 푹. 칼이 몸을 관통했다.

 적어도 성현은 날카로운 소리를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다시 뽑아든 칼에는 피가 묻어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성현을 아현이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칼은 그녀가 들고 있던 곰인형의 배를 갈라놓았다. 아현은 차가운 말투로 당황한 성현에게 말했다.

 "말했잖아, 난 네 생각을 알수있다고. ……정말 왜 이렇게 한심한 짓만 하는 거야?"

 아현은 들고온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성현이 떨어뜨린 칼을 주웠다. 그리곤 방에 불을 켜 한번더 성현을 바라보았다. 성현은 혼란스러웠다. 급하디 급한 계획은 역시나 무산되고 말았다. 게다가 아현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엄마에게 자살충동을 느끼게 하고 누나에겐 살인을 저지르려 했다. 온 정신이 혼미했지만 두려운 것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 자신 스스로도 한심했다. 왜 이럴까? 진성현이 왜 이러지? 성현은 아현을 다시 보았다. 시간이 흐르고 아현과 성현의 세월도 흘렀지만 아현은 성현과 많이 닮아있었다. 그것도 괴로울정도로 많이.

 "진성현, 빨리와. 같이 먹자고 사온건데 너 혼자 멍하니 있을거야? 아, 그릇이랑 물컵 어딨어?"

 아현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성현에게 말했다. 성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의 태도인 아현에게 놀랐지만 무거운 발을 움직여 식탁에 앉았다. 아현은 마음속에 남아있는 온기를 싹싹 긁어모아 표정에 드러냈다. 그리고는 밝게 식사 전 인사를 했다. 그때까지도 성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말로 자신의 누나가 그저 집들이를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일까? 적이 아닌 가족으로?

 "연어초밥 진짜 맛있지 않아? 아, 넌 삼각빔밥 더 좋아했지. 하하하하……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던거야? 자, 먹어."

 멀뚱히 허공만 바라보는 성현에게 아현이 삼각김밥을 건넸다. 성현은 의사가 되고나서 아무리 시간에 쫓기더라도 절대 삼각김밥은 먹지 않았다. 자꾸만 잊고 싶은 기억이 되살아나서 였다. 아무튼 오랜만에 느껴보는 까칠까칠힌 김밥이 새삼 반가웠다. 아현은 맛있게 한 입 베어문 성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둘 다 한동안은 먹기만 하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식사가 다 끝나고 아현이 머그잔에 커피를 타왔다. 하나를 성현 앞에, 하나를 자신 앞에 놓은 아현은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말을 꺼냈다.

 "쌍둥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성현은 아현의 물음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거나 좋아. 그러니까……우리 둘의 대해서 말해보라는 거지. 지금까지 쌍둥이로 살아오면서 느낀 거 없었어?"

 아현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묻자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현은 왜 이 질문으로 물은걸까.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말할게. 어렸을 때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래서 네가 날 죽이려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네가 지금까지 피해 온 음식이 있고 왜 피했는지도 알 수 있지. 그런데……넌 엄마가 죽은 후로 그 능력을 잃어버렸어. 나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거지.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본적 있어?"

 성현은 아현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행동과 엄마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아현과 6년만에 첫 대화였다.

 "그건……단지 텔레파시 같은 거야. 쌍둥이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과 통하는 사람과는 연결된다는 거지."

 "그래, 넌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뿐이니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런데 텔레파시로 상대방의 행동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우연일 뿐이야. 친하거나 함께 살아온 가족들이 잠시잠깐 자신과 공통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우리들이 느끼는 건 텔래파시와 분명히 달라. 지금은 정확한 증거도 없지만 나중에 너도 알게 될거야."

 성현은 커피를 마시며 눈을 내리깔은 아현을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날 지금 굉장히 불편해하고있어. 아니, 내가 나타나서 두려운건가?"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진성현, 넌 지금 네 일기 때문에 엄마가 죽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도 않고 있고. 또 거기에다 내가 나타나서 모든 걸 밝힐까봐 두려워 하고 있잖아. 두려움의 끝까지 간 넌 내가 사라지면 널 귀찮게 하는 게 없어져버릴까봐 날 죽이려고 했던거 아냐? 물론 이해는 가지만 난 굉장히 실망했어. 내가 널 죽일거라는 생각은 못해본거야?"

 내가 널 죽일거라는 생각은 못해본거야? 내가 널 죽일거라는…… 아현의 말이 성현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또 다시 어지러웠다.

 "그럼……날 찾은 이유는……날 죽이려고 한거란 말이지?"

 "아니, 그건 아니야. 내가 널 죽이면 너하고 같은 사람이 되는 거잖아. 아무리 쌍둥이라도 그런 것까지 닮고 싶진 않아."

 아현은 그 말을 내뱉으면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또 꼬여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날 죽이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날 죽이고 나서 뒷처리는 생각안해본거야? 경찰들이 널 찾아와서 수사하고……아빠를 경멸했으며 엄마를 자살충동으로 몰게 만들고 밝혀질까 두려워 누나를 죽임. 뭐 이런 게 네 프로필에 남으면 모든 걸 버려야 되잖아. 너도 참 한심하다……지금 너에게 필요한건 의사로서 굴러들어온 명성과 권력, 부가 아니야. 모든 걸 반성하면서 네가 기댈 곳이 필요한거지. 아니야?"

 아현은 겉잡을 수 없이 냉정해졌다. 성현은 그런 아현에 맞서기 위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에게 기댈 곳은 필요하지 않아. 무, 물론……가족들이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까지 아무 도움 없이도 잘 살아왔어. 그리고……권력이나 부, 명성 같은 건 굴러들어온게 아니야. 나 스스로, 나 혼자서 모든 걸 헤쳐나가 완성된거라고. 내, 내가 누나를 죽이려고 했던 건……충동적인 실수였어. 누나가 온다는 거 자체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해해줘."

 "와 진성현, 끝까지 굽히질 못하네?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게 살수라니, 너 사람 살리는 의사치고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게다가 미안해도 아니고 이해해달라. 하하하, 하긴……대부분의 살인은 다들 실수라고 하지만. ……그런데 진성현, 넌 아냐.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온통 다 거짓이야.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고 외동아들인 진성현. 이게 바로 너라고 생각하나본데 그건 네가 지어낸 거야. 넌 한성병원의 촉망받는 외과의사가 아닌 살인미수범 중에 하나라구."

 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잔인한 말을 마쳤다. 성현은 또 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벌써 몇번째 실수를 하는 걸까. 머리가 답답했다. 무거운 머리를 들어 변명을 하려는 성현을 아현이 막아섰다.

 "아……진짜 아직까지 변명할 맘이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그렇게 네 잘못을 모르는 척 해야겠어? 그래……너 자체부터 걸림돌이 되는데 내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진성현, 내가 죽어줄게. 이렇게까지 널 찾아서 두렵게 만드는 내가 사라져주면 되겠지?"

 "누나……그게 무슨……."

 "네가 원하는 거잖아. 내가 없어지면, 더 정확히 가족이 다 사라져버리면 널 막는 건 없다고 생각하잖아. 아니야? 나 스스로 죽으면 네가 살인이라는 진실을 쓰지 않아도 될거고 예전과 같이 계속 거짓말만 하면 되는데?"

 아현의 진지한 물음에 성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걸까. 피하고 싶었던 과거가 계속해서 밀려들어오자 머리속이 핑핑 돌았다. 아현은 자신과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쌍둥이란 이름 아래 있었다. 성현은 그 이름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성현은 말려야 했다.

 "누나, 미안해……제발 그러지마. 제발, 제발 날 괴롭게 하지마."

 "성현아, 다이아몬드가 왜 그렇게 비싼지 알아? 세상에 몇개 없어서 그래. 그런데 우리는 서로 같고 싶지 않아도 같을 수 밖에 없어. 만약에 다이아몬드가 우리처럼 같아져서 세상에 존재하는 갯수가 늘어난다고 생각해봐. 그건 더이상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그저 수많은 보석들 중 하나지. 사람도 마찬가지야. 한 명 한 명 다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가치가 높은거야. 그런데 우린 아니잖아? 너무 같아서, 교활한 것까지 닮아서 가치가 없어. 진성현, 진아현. 이렇게 불리는 게 아니라 쌍둥이. 이렇게 한 존재로 불리운단 말이지. 넌 이게 얼마나 비참한 건지 알지? 그래서 날 없애려고 하는 거잖아. 진아현을 없애면 진성현의 가치가 높아져가니까."

 "누나……아니야, 잘못 알고 있는거라구."

 "한번 만 더 말할게. 같은 것이 여러개 존재해봤자 가치만 떨어질뿐이야. 그래서 두려움 많은 진성현이 아닌 유명한 외과의사 진성현을 위해 사라져줄거야. 이제 알아들었지? 아……사실은 이 말 하려고 찾아온건데 너무 오래있었다. 이것도 마지막인데 한번 얼굴 보고 싶어서 들렸어. 나 이제 그만 가볼게. 잘 있어."

 아현은 뜻을 파악할 수 없는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성현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아현을 붙잡았다.

 "사라진다는 건……곧 주, 죽는 다는 거야?"

 아현은 성현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도대체 왜 마지막 말을 그렇게 한 걸까. 성현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게 두려운가봐? 그런데 그럴지도 몰라. 아예 삭제되어버리는 게 깨끗하잖아."

 이윽고 불이 꺼지면서 커다란 집에 성현 혼자 남게 되었다. 아현이 왔었다는 것은 남아있는 음식만이 믿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성현은 헷갈렸다. 아현이 자신의 집에 찾아온것일까? 지금까지 머리속에 맴돌던 환상이 아닐까? 다시 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식탁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몸을 움직이려던 성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이래, 진성현. 방해물이 알아서 앞길을 막지 않는다고 하잖아. 그럼 완전 기뻐해야하는 거 아니야? 왜 두려워하는거지? 또 네가 쌍둥이 누나를 죽인 거 같아? 그럼, 그건 당연한거야. 넌 누나가 없어지길 바라고 있었잖아. 엄마도 모자라서 네 쌍둥이 누나까지. 다 네가 바라던 거잖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난 원하지 않았어……난 그저……."

 성현은 자신의 머리속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만약에 아현이 사라지겠다는, 곧 죽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한거라면 또 얼마나 가짜 진성현을 내세워야할까. 벌써부터 머리속이 아파왔다. 성현은 춥고 떨리는 몸을 붙잡고 아현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진성현, 진아현. 꼭 닮은 쌍둥이. 누나를 믿고 동생을 이끌며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진 쌍둥이. 그러므로 둘은 하나였고 혼자는 이분의 일이였다. 진성현이든 진아현이든 혼자로서는 하나가 완성되지 않는다. 즉 불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둘은 하나 혼자는 이분의 일, 둘은 하나 혼자는 이분의 일, 둘은 하나 혼자는 이분의 일, 둘은 하나……성현은 얼빠진 얼굴로 같은 말만 계속 되뇌었다.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올랐지만 두려움이 막아섰다. 그런데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오는 걸까? 왜? 남들은 먼지만큼의 고통도 없이 편히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하는 걸까?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갈까? 거짓성현이 없어도? 성현은 아픈 머리를 감싸며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아현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사라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내가 죽어버린다면 하나도 아프지 않을까? 그렇다, 난 이런 아픈 생각 따위 하지 않고 모든 걸 아현에게 넘겨버릴 수 있다. 아현이 남기고 간 문제 때문에 내가 힘든 게 아니라 도리어 아현을 괴롭게 만들수있다는 것이다. 성현은 자기 자신을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제서야 이 방법이 생각난 걸까? 진작에 사라졌으면 난 이렇게 거짓몸을 가지며 살아올정도로 고통스럽지 않았을텐데. 성현은 서서히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몸과 마음은 무거웠지만 희열에 가득찼다. 벌써부터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하……진짜 난 바보같아. 그래, 누나가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하하하하하. 난 천재야!"

 성현은 밝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어두운 부엌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빛과 불은 사라진 지 오래여서 차갑고 캄캄했지만 지금의 성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 뭐 그리 문제가 되겠냐는 것이다. 부엌의 서랍장을 열었다. 칼이 여러개 꽃혀있었다. 성현은 그 중에서 아현을 죽이기 위해 사용하려던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잠시 바라보더니 식탁에 있는 음식들을 모두 엎어버렸다. 바닥은 난장판이 되었고 성현은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진아현! 들리겠나 모르겠지만 내가 죽은 건 다 네 탓이야! 넌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불완전해질거고 괴로울거라고! 날 바보라고 생각했겠지만 네 꾀의 당하는 네가 더 바보야. 내가 죽는 다는 생각은 안 해본건가? 멍청이……죽을때까지 고통스러우라고! 하하하하하……으억."

 성현은 칼의 날카로운 방향을 자신쪽으로 한 채 푹 눌렀다. 인형을 찌를 때와는 느낌이 상당히 틀렸다. 정신이 점점 아련해져만 갔다. 사람은 죽기 전에 엔도르핀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병에 걸렸어도 죽기 전엔 행복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것이다. 성현은 바로 지금 그 상태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괴로웠을지 몰라도, 그래서 세상의 끊을 놓아버렸어도 이미 자신은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성현은 붉은 액체가 자신을 적시는 것을 보며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둘은 하나 혼자는 이분의 일. 모든 것이 거짓뿐인 불완전한 존재.

-

 "어제 저녁 6시 46분. **동에 사는 진모씨가 자살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진모씨는 한성병원의 유명한 외과의사로 자살할 가능성이 낮아 타살의혹도 따랐지만 경찰의 조사로 자살과 가깝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진모씨의 동료의사는 최근 진모씨가 지난주부터 안정제와 수면제등을 복용했고 악몽을 자주 꾸었으며 사건이 일어난 날에는 평소와 다르게 혼란스러운 행동을 많이 하는 등의 이상을 보였다고 진술했습니다. 경찰은 진모씨가 가족이 없고 친척과 연락이 되지 않는 점을……"

 텔레비전에서는 그녀와 똑같이 생긴 남자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사진이 나오고 그 남자가 살았던 건물, 근무하던 병원등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 그녀는 저런 사람 때문에 뉴스의 분량이 적어진다는 게 아까울뿐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그 보도가 끝나기도 전에 리모컨의 전원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텔레비전이 꺼지자 하얀 집안은 온통 조용해지고 그녀는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낸 뒤 컵에 따라 마신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피식 웃었다.

 "……이제 하나니까 가치는 높아지겠네."

白魂
白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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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와 로봇 그리고 M

   철커덕 철커덕.  아침 6시. 인터B 공장의 불이 들어오면서 공장의 기본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로봇 노동력들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가로 12줄, 세로 10줄을 맞추어서 섰다. 곧 그들 앞에 파란 홀로그램이 띠워지고 회장 B가 나왔다.  “새 아침이 밝았다. 6시가 넘었기 때문에 바로 기계를 가동시켰는데 혹시 불만 있나?”  회장 B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회장 B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역시 로봇들이군. 자 그럼 로봇 삼계명을 외치고 시작하도록 하겠다. 하나!”  회장 B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정신이 번쩍 뜨인 로봇 노동력들은 입을 열었다.  “나는 로봇이고 발명자의 위대하신 손 밑에서 태어났다.”  “둘!”  “나는 로봇이고 발명자를 위해 평생 일 해야 할 임무가 있다.”  “목소리를 좀 더 키워라. 셋!”  “나는 발명자의, 발명자에 의한, 발명자를 위한 로봇임을 잊지 않는다.”  로봇 노동력들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행동을 했으며 같은 모양으로 입을 닫아 말을 끝냈다. 회장 B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됐다. 오늘 아침은 이렇게 끝내도록 하지. 이상!”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로봇 노동력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  적당한 체격에 군데군데 하얀 머리를 가지고 있는 회장 B는 한숨을 쉬며 비서1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그래, 어제 몰래 우리 회사에 들어온 아이가 있다 했지. 그 아이, 주입은 잘 되고 있나?”  회장 B의 말에 비서1은 주춤거렸다.  “아, 그게……사실은 잘 되고 있지 않습니다. 6살 이상은 받지 않는 게 주입 원칙이지만 그 아이는 벌써 8살입니다. 강제적 개념주입기계인 멀티Q를 실행하려고 할 때마다 재빨리 알아차리고 도망가기 일쑤예요. 게다가 반항도 심하구요.”  비서1의 말에 회장 B는 갑자기 화가 났다. 현재 인터B 공장은 세계적으로 알려진다면 엄청난 문제가 일어날 일들을 실행하고 있다. 그래서 비밀 체제로 바뀌게 되고 직원들은 해고가 되어도 영구적으로 남아있어야 하며 더 이상의 인력도 뽑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비밀을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회사에 한 8살 아이가 무단으로 들어왔다. 만약 그 아이가 이 회사를 탈출해 모든 비밀을 말하고 다닌다면. 그 뒤는 벼랑 끝이었다. 무조건 생각을 주입시켜야만 했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그 아이는 기계 모습이나 회사 구조는 물론이고 로봇 노동력까지 목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반항

  • 白魂
  • 2010-09-02
날개

 "인간은 정말 날 수 없는 걸까?" 난 날개를 보았다. "그니까 죽을때까지 땅에 쳐박혀서 살아야 되냐구" 난 대답했다. "아니." 걱정이 스며들던 날개의 표정이 한순간에 환해졌다.  "역시 M! 넌 다른 사람들과 달라! 다 안된다고 했는데... 그래, 난 날아볼거야." 내가 만약 그때 날 수 없다고, 땅에 쳐박혀 영영 살아야 한다고 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날개는 정말 날아가버렸다. 아니 싸늘하게 죽어버렸다. ***  -2009년 5월 13일  "날개, 나와서 수행평가 한 번 발표해볼까?" 날개를 유독 좋아하는 국어선생님은 어김없이 오늘도 날개를 불러 나오게 했다. 날개는 주저하지 않고 나가 하얀 종이를 펴들었다.  [사람의 시조가 유인물이라는 건 그냥 사실에 불과하잖아?  내 생각에 사람의 시조는 새였을거야. 하지만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땅에서 쉬다가 바람 때문에 자신들이 날 수 있다는 걸 까먹은거지.  그래서 강하고 거친 바람대신 땅에서 쉬는 편안함만 추구했어. 그러다보니 어느새 불필요한 날개가 사라져버리게 된거야.  참 어리석은 행동이였다고 생각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봐. 뒤늦게 날고 싶다고 꿈을 꾸고 있는 우리들 말이야.  아마 모두가 늦었다고 생각할거야.  하지만 이제는 그 꿈 이룰때가 되지 않았나?]  날개는 조용히 발표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국어선생님은 그런 날개가 흐뭇한듯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야, 윤날개 맨날 발표하지 않냐? 별로 잘 한거 같지도 않은데……쟤네 엄마왔었냐?" "원래 저 봉봉이가 윤날개만 좋아하잖아. 공부 잘하는 애들 얼마나 아끼는 데- 너 몰랐어?" 봉봉이란 국어선생님의 이름을 딴 별명이었다. 소곤소곤 떠들어대는 아이들곁에 앉아있던 M은 한숨을 쉬며 날개를 보았다. 날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M은 슬슬 답답해져왔다. "이제 지겹다. 쟨 언제까지 저렇게 공부만 할거냐? 저러니까 왕따되서 친구도 없잖아." "친구가 없으니까 공부라도 해야될거 아니야. 진짜 재수없는거지. 아 근데 혹시 몰라? 이번 시험엔 M이 일등할지?" "더러워." M은 여자아이들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오르자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은 듣지 못한 듯 팝콘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 거기, 조용히 안해? 너희는 수행평가 얼마나 맞았다고 이렇게 떠드는 거야. 꼭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수업시간에 떠들어요." "야야, 또 봉봉이 생쇼한다. 할 말 없으면 맨날 공부타령이나 해대면서 뭐라는 거야. 아 띠겁네." M은 뒤를 돌아봤다. 투덜거리며 짜증을 내던 선영이 M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응? 왜 M?"

  • 白魂
  • 2010-07-12
빠져들다

 7시 50분. 아직도 지하철은 달리고 있었다. 8시가 가까워져올수록 정현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직 몇 정거장이나 더 남아있는데 8시를 넘기면 기자국의 팀장인 현창수가 얼마나 화를 낼까. 정현은 모든 걸 놓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기댔다. 기자라는 직업,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할까?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잘할수있고 하고싶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올바르게 전달하면서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기자국에 들어갔지만 상사의 짜증은 하루하루 힘들게만 만들었다. 발벗고 취재거리를 따와도 팀장이 안된다고 하면 곧바로 다른 주제를 찾아야한다. 기댈곳도 없고 하루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흘렀는지도 몰랐다. 정현은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마음먹었다. 정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7분이나……진심으로 죄송합니다." 8시 7분. 정현은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동료기자들은 고개를 돌려 정현을 쳐다보다가 곧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예상했듯이 팀장인 이선우의 얼굴은 화가 잔뜩 나있었다. 정현은 슬금슬금 그의 자리로 다가갔다. 이미 푹 숙여버린 고개는 더 이상 올라오지 못했다. "지금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7분이나 지각을 해? 기자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새벽까지 취채하다가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현이 당황한 얼굴로 사과했지만 팀장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던 팀장은 날카로운 눈을 뜨고 정현에게 말했다. "정현씨, 맡고 있던 취재거리 성준씨한테 넘겨." "네? 그게 무슨 말씀……." "정현씨가 하던거 그만하고 사이비종교에 대해서 취재해오라는 거야. 사이비종교가 뭔지는 알지?" 팀장에 갑작스런 결정에 정현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돼, 새벽까지 그 기사 때문에 쉬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그만두라니. "어차피 제대로 못할거잖아. 일 그르치기전에 다른 기자한테 넘기라는 거야. 자, 더 할말없으면 그만 가봐." 정현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지만 모니터만 바라보는 팀장에게서 돌아섰다. 한숨을 쉬며 털썩 자리에 앉은 정현을 동료기자인 미래가 쳐다보았다. "또 팀장이 뭐라고 했구나? 맞지?" 미래가 안쓰러운 얼굴로 커피를 건네자 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모금 마셨다. 금방 뽑은 것 같은 따뜻한 커피였다. "오늘 새벽까지 하던 취재 그만하래. 아예 쓰지말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조사했던 거 다 다른 기자에게 넘기래." 정현은 고개를 숙였다. 한숨이 삐져나왔다. 미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럼 넌? 넌 무슨 기사 맡으라고 막 바꾸는 거야?" "사이비종교……아, 진짜 또 잘못쓰면 엄청날텐데. 게다가

  • 白魂
  • 201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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