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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택시

  • 작성자 속눈썹
  • 작성일 2010-02-09
  • 조회수 377

이별택시

  

“청담사거리요.”

아마도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 될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를 들어서는 남자라고 하기도 뭣한, 이제 막 대학생이 됐을 법한 어린 나이의 손님이다. 한참동안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정리하더니 곧 시트에 편하게 기대어 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새벽이라 고요하기만 한 분위기가 조금 뭣해서, 내게만 들릴 정도로 줄여놓았던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이름 모를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굳게 닫혀있던 뒷좌석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저씨. 가는 데 얼마나 걸려요?”
“이십 분 정도 걸릴 겁니다.”
“돈은 얼마나 나와요?”
“오륙천 원 정도 나오겠네요.”
“그렇게 많이 나와요? 택시비 올랐어요?”
“예, 오른 지 꽤 됐지요. 택시 오랜만에 타시나 봅니다.”
“네, 조금…….”

한동안 택시비 인상 문제로 전국이 떠들썩했었는데, 그걸 모르는 걸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일에 큰 관심이 없는 학생인가보다. 나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내가 하는 일이다 보니 이름 모를 아나운서가 떠들어대는 뭔지 모를 소식과 사건들 중에서도 ‘택시’, ‘대중교통’ 뭐 이런 말이 들려오면 그 소식만큼은 귀를 기울여 듣게 된다. 아마 저 학생도 나처럼 자기 일 아니면 큰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인가보다. 나처럼 집에 TV도, 컴퓨터도 없이 그저 집하고만 사는, 그런 학생.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하던 손님이 있었다. 그 손님은 지금의 어린 손님과는 다르게 나이가 지긋한 손님이었는데, 택시를 거의 6년 만에 처음 타 본다고 했다. 그래서 모르는 게 많다며 이것저것 참 많은 것을 내게 물었더란다. 뭣 때문에 그렇게 오랜만에 택시를 탔냐고 물으니 그냥 탈 기회가 없었다고, 그렇게 멋쩍게 웃기만 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택시 기사와 많은 말을 섞고 싶지 않아하는데 그는 신기하게도 차가 출발하고 나서부터 도착할 때까지 쉴 새 없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나도 그가 귀찮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푸근해서 운전보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둔 채 목적지까지 달렸던 것 같다. 그의 목소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같았다. 그래, 그랬다. 언제 들어도 부담스럽지 않고 그저 편안한 그런 목소리였다. 꼭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그때 나눴던 대화가 그다지 깊고 의미 있는 내용의 대화는 아니었는데도, 어린 아이처럼 종알종알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내 앞에서 늘어놓던 그 늙은 손님의 이야기가,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릴 때, 정신 잃은 취객을 태우고 행선지 없이 달릴 때, 손님이 없어 한적한 시간에 잠시 담배를 태울 때, 그런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어린 손님은 일전의 그 손님과는 다르게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풍기는 뉘앙스나 말투에서 베어 나오는 현재의 기분 상태가 그와 매우 흡사했다. 늙은 손님은 세종로로 가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며 새벽이라 인적이 끊긴 그 도심 한 복판으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했다.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슬쩍 물어봤는데 그는 그것만은 말해주질 않았다. 경복궁, 광화문, 뭐 아니면 청와대. 그런 것들을 보러 가냐 물어도 답이 없었다. 단지 그가 대답 대신 엷은 미소를 띠었을 것이라고, 그때는 그렇게 짐작했다.

미묘한 타이밍에 신호등 불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정지선 앞에 차를 세우고 괜히 어린 손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백미러로 그를 잠시 보았다. 편안히 시트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다. 하얀색 야구 모자를 쓰고 손엔 이어폰이 감긴 MP3 같은 것을 든 채 하염없이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디찬 새벽바람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그의 주변 공기를 모조리 지배해버리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에 어린 손님이 나를 불렀다. 몰래 보고 있던 것을 들켰을까봐 괜히 떨려서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대답했다.

“요새 유행하는 노래가 뭐에요?”
“예?”
“요새 유행하는 노래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
“하하, 전 그런 거 잘 모릅니다. 그런 거야 어린 학생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뭐, 사람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그런 거 없어요?”
“택시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드물지요. 불러도 거의 술 취한 사람들이 부릅니다.”
“아……. 하긴 그렇겠네요. 그럼 그 술 취한 사람들은 뭐 불러요?”
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대답했다.
“저는 노래엔 문외한이라 제목은 다들 잘 모릅니다.”

늙은 손님도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때도 나는 노래엔 문외한이라 잘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늙은 손님은 내게 다짜고짜 ‘상록수’라는 노래를 아냐며 한 소절 불러주었다. 노래엔 문외한이라는 걸 거듭 강조하며 모른다고 말했더니 그럼 당신이 한 번 불러주고 싶다며, 노래를 들어줄 수 있겠냐고 했다.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럼 그러라고 했더니 그는 느긋한 목소리로 그 노래를 내게 불러주는 것이었다. 가사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무언가 편안하고 푸르른 노래였던 것 같다. 노래를 마친 그는 이 노래가 내게 가장 큰 힘을 주었던 노래, 내 꿈을 이루게 해준 노래라며 나중에 시간이 나면 꼭 한 번 들어보라 말했다. 당신보다 훨씬 잘 부르는 뛰어난 가수가 불렀으니 꼭 들어보라고.
노래엔 문외한이라는 내 대답에 풀이 죽은 어린 손님은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다시 나를 불렀다.

“아저씨.”
“예.”
“제가 내일 떠날 건데요, 떠나도 괜찮을까요?”
“네?”
“떠날 거예요. 떠나야 할 것 같아서요.”

신기할 정도로 그 늙은 손님을 닮은 어린 손님의 모습을 백미러로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거울로 눈이 마주쳤는데,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듯 보이는 눈빛으로 운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좌석 차창에 비친 그의 앉은 자세 역시 그 눈빛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음, 어디로 가십니까?”
“그냥, 좀 멀리요.”
“혼자 가십니까?”
“네. 혼자 가야 돼요.”
“손님.”

그냥,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늙은 손님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고. 그때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이 새벽 도로를 달리고 싶다고.

“네?”
“몇 달 전에 손님이랑 똑같은 질문을 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정말요?”
“예, 그 손님은 할아버지셨는데, 혹시 아는 분이십니까?”
“저는 한국에 아는 사람 많이 없어요.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은.. 잘 몰라요.”
“외국에서 오셨나 봐요?”
“네, 몇 년 전에요.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떠나셨어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안 떠난다는 말은 안 했으니, 떠나셨을 겁니다.”
“어디로 가신대요?”
“그분도 좀 멀리 가신다고 하시던데요. 저기, 손님.”
“네?”
“적적하시면, 가는 동안 그 할아버지 얘기 좀 해드릴까요?”

어린 손님은 잠시 생각 비슷한 걸 하다가 이야기를 해달라고, 듣고 싶다고 했다. 어린 손님에게, 자신을 닮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니 도움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무언가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그 쓸쓸한 마음에 활활 타오르는 난로가 되어주진 못하더라도 꽁꽁 언 손을 녹일 수 있는 촛불 하나와 같은 그런 힘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이랑 비슷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 한 분이 타셨는데, 세종로로 가자고 하셨지요. 이 늦은 시각에 세종로로 가도 아무런 볼 것도 없는데 왜 거기로 가냐고 여쭙고 싶었지만 그냥 말았습니다. 원래 다들 택시 기사가 이것저것 물으면 싫어들 하시니까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제가 묻기도 전에 거기서 꼭 볼게 하나 있다고 하시더만요.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그건 답을 안 해주시데요. 그러면서 다짜고짜 저한테 물었습니다. 요새 사는 건 어떻냐고. 뭐 항상 그렇지요, 그랬더니 이 년 조금 전하고 지금하고 비교하면 언제가 낫냐고 물으시기에 그래도 이 년 전이 조금 덜 힘들었던 것 같다 했더니 굉장히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았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걸 겉으로 티내고 싶진 않아하셨는데, 저 같은 사람은 뒷좌석에 앉은 손님 목소리만 들어도 그 손님이 어떤 기분인지 대충 알지요.

그 다음에 할아버지는 손님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노래가 뭐냐고. 그래서 그때도 나는 노래엔 문외한이라서 잘 모른다, 그랬더니 그럼 자기가 노래 한 번 불러줘도 괜찮겠냐고 하시는 겁니다. 솔직히 좀 그랬지요. 갑자기 노래를 불러주신다고 하니까. 그런데 그걸 또 거절할 수는 없어서 그럼 그러시라고 했더니, 상록수라는 노래를 들려주셨지요. 그러면서 이 노래가 당신한텐 제일 소중한 노래라며 꼭 한 번 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들어보진 못했지만요. 그래도 참 좋은 노래였습니다. 노래엔 정말 문외한이라 남들 다 좋다는 노래를 들어도 좋은지 모르는데 그 노래는 좋더만요.

 

그 다음엔 뭐라 그랬더라, 아, 지금 대통령은 사람들에게 평판이 어떤지 물어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잘은 몰라도 택시에서 나라님 탓하는 사람 여럿 보았다고 했더니, 그때도 조금 좋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고, 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시지요. 자기도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슬플 때가 없었다면서 조금 힘들어도 더 믿고 더 응원해 달라 그러셨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물으시는 겁니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냐고. 뭐 저야, 알 길이 없지요. 목소리는 워낙에 호탕하고 푸근하셔서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했다만 그 새벽에 뒷좌석에 앉은 손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고, 그분 얼굴을 본다고 해도 저야 텔레비전, 인터넷 그런 것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그분이 유명한 분이시라고 해도 잘 모를 수밖에요.

 

모른다고 있는 그대로 대답했더니 서운해 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행이라며 또 웃으셨습니다. 저보고 재밌는 사람이라면서요. 그렇게 소소한 얘기 하면서, 목적지가 가까워졌습니다. 저 앞에 종로가 보이니까 할아버지가 갑자기 또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고 지쳐도 잘 살라고, 나라님이 아무리 원망스럽고 미워도 너무 미워만 말고 잘 보듬어주라고. 그리고는, 요즘에 택시 강도 많다는데 그런 나쁜 마음먹지 말고 손님들 가고 싶은 곳으로 친절하게, 편안하게 잘 모셔다달라고 당부하시는 겁니다.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도 마음이 참 편하다면서, 그러셨습니다. 그러고선 내리기 직전에 손님이랑 같은 말을 했어요. 내일 떠날 건데, 떠나도 괜찮을까요. 하시면서. 어디로 가냐고 했더니 그분도 또 좀 멀리 가신답디다. 그래서 제가 떠나야 하면 떠나야지요, 그랬더니 내가 떠나면 슬퍼할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도 떠나도 괜찮습니까, 하시는 겁니다. 영영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만 아니면, 떠나야만 한다면 떠나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면 떠나면 안 되는 거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도 꼭 떠나야 한다면 그것도 또 안 될 건 없다고 그랬더니 그럼 조금만 더 생각을 해 봐야겠다고, 떠나더라도 집에 들른 후에 떠나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고맙다고, 아무쪼록 일 열심히 하라며 말씀하시더니 세종로에 미처 닿기도 전에 세워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세워달라기에 세워드렸지요. 바쁘게 내리시면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그냥 주고 가십디다. 거스름돈 받아 가시라고 그렇게 불러도 뒤도 안 돌아보시고 세종로 쪽으로 걸어가시는 것 보고 그냥 차를 돌렸습니다.

 

마지막엔 그렇게 급하게 떠나셨어도, 가는 내내 참 여유롭고 편안하신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답지 않게 말도 정정하게 잘 하시고 그 말투에 기품도 있고, 그래도 어딘가 구수하고 좋았지요. 그래서 가끔 생각이 납니다. 그분 말씀이. 사람들 친절하게 잘 태워다달라는 그 말이 여기저기서 떠오릅니다. 나도 모르게 그분 말씀을 새겨들었던 모양입니다, 허허. 몇 달 전인데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에게 늙은 손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몇 번이고 신호등을 지나치고 다리를 건너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그러면 그 어

린 손님도 살짝 살짝 웃으며 착한 목소리로 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들려주었다. 크게 웃거나 맞장구를 쳐주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살짝 미소를 띠거나 짧은 대답을 하는 것이 등 뒤로나마 느껴졌다.

“청담동에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사거리에요.”
“아저씨.”
“왜요, 손님도 여기서 미리 내려드릴까요?”
“아, 아뇨. 그냥..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예, 그럼요.”
“저기.. 저도, 제가 떠나면 많은 사람들이 슬퍼할 텐데, 그래도 떠나도 괜찮을까요?”
“글쎄요. 그런데 그분도 아마 떠나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들 이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분이랑 가깝게 지내시던 분들은 물론 슬퍼하셨겠지만 언젠가 분명 만날 수 있으니까요. 정 떠나야하신다면,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으신 거면 제가 그걸 어떻게 말릴 수 있겠습니까. 말리면 안 가실 겁니까?”
“사실은.”

어린 손님은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실은 떠나고 싶지는 않은데, 그래도 떠나야할 것 같아서요. 떠나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왜요, 다들 떠나라고들 합니까?”
“그런 사람들도 있고, 떠나지 말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지금은 떠나라고 하는 사람들 말이 마음에 더 걸려요.”
“마음 편하신 대로 하는 게 제일 좋지 않겠습니까. 세상 살면서 내 마음 편하면 그게 장땡이지요. 그래도 남을 사람들이 마음에 걸리면 조금 날짜를 미루거나, 아니면 떠나서도 자주 만나겠다는 약속이라도 하고 떠나세요. 그러면 그게 또 힘이 될 겝니다. 그냥 마음가는대로, 내키는 대로 하십쇼.”

내 말이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대답이 없던 그는 바로 앞에 청담사거리가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내게 돈을 꺼내 내밀었다. 만 원짜리 한 장.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그럼 아저씨, 저도 누군지 모르시겠네요?”
“네, 미안합니다. 학생도 유명한 사람입니까?”
“아뇨, 그냥, 그냥요. 모르신다니 다행이에요.”

나는 그를 신호등 앞에서 세워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3800원을 거슬러주었다. 그것을 두 손으로 곱게 받아든 어린 손님은 그제야 차문을 열고 내렸다.

“감사합니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내게 가장 큰 힘이 되는 말이다. 손님들이 내리면서 건네는 감사하다는 말. 내 택시에서 보낸 이십여 분의 시간이 그에게도 힘이 되어야 할 텐데.
예의가 바른 어린 손님은 터덜터덜 걸어 보도 위로 올라간 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차를 유턴한 후 청담동을 떠났다.
어린 손님은 아마 집으로 향하는 길이 아닐 것이다. 그 늙은 손님처럼, 떠나기 전에 보고 싶은 무언가가 꼭 있을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후엔 택시에 타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길을 갈 것이다. 어린 손님과 늙은 손님은 그 갈 길을 가는 것을 ‘떠난다’고 표현했다. 두 사람 모두 이곳에 남기고 가는 것이 많은 모양이다. 그래도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차마 물을 수 없었지만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자신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떠나는 것일 거라고, 그렇게만 짐작했다.

오늘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찾아와도, 그 다음날 아침이 찾아와도,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 어린 손님의 이야기가,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릴 때, 정신 잃은 취객을 태우고 행선지 없이 달릴 때, 손님이 없어 한적한 시간에 잠시 담배를 태울 때, 그런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곤 할 것이다. 꼭 예전의 그 늙은 손님의 이야기처럼.


나는 라디오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새벽 2시를 알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가 꼭 한낮의 밝은 햇살에 들떠 아무리 햇볕이 뜨거워도 그저 따뜻하다며 웃는 천진한 소녀의 목소리 같아, 지금이 꼭 오후 2시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어린 손님이 열어놓고 간 뒷좌석의 창문을 닫고, 나는 다시 달렸다. 어린 손님이 남기고 간 차가운 새벽 공기가 아직도 차 안에 남아있다. 몇 분 후면 사라질 이 새벽의 흔적이 아주 가끔은 그리워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서울의 공허한 새벽 도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이별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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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0-18
벚꽃비

벚꽃비  “엄마 나갔다 올게.”“나간다고?”“응.”“진짜?”오늘? 오늘? 엄마가 오늘 나간다고?“진짜지, 그럼.”“정말?”“그렇다니까? 왜 그래?”말도 안 돼. “어딜?”“바람 좀 쐬러. 비와서 집이 눅눅해.”“밖은 더 그럴 텐데? 엄마 비 냄새 싫어하잖아. 그리고 비 또 올지도 모르는데 웬 바람이야.”“괜찮아, 오늘은.”“근데 그 옷은 뭐야?”“뭐가?”“뭐, 선보러 가?”“바람 쐬러 갈 때는 멋 부리지 말란 법 있니.” 그래도 그렇지. 분홍 투피스가 뭐야. “갔다 올게.”“어디 가는데? 응?”“그냥 요 앞에 나가. 바람 쐬러 간다니까.”“…….”“집 잘 보고 있어. 비오면 창문 닫고.”옷과 맞지 않는 까만 우산을 든 엄마는 그렇게 나가버렸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정장까지 차려 입고서 바람을 쐴 건 또 뭐람.난 집밖이 보이는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엄마가 보이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고 힘겨워하는 엄마가 보인다. “엄마!”내 큰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린 엄마는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대답을 하며 날 올려다본다.“진짜 바람 쐬러 가?!”“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갔다 올게, 빨리 들어가!”엄마는 먼저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간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엄마를 미행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냥 창문을 닫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오늘은 4월 12일. 그저께부터 여의도에서 벚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 엄마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나가버리지 않았다면 엄마와 함께 벚꽃 구경을 가고 싶었다. 비가 내려서 오늘은 조금 한적할 테니까. 물론, 엄마가 나가지 않을 게 뻔해서 나 혼자 갖고 있던 생각이지만.중학교 때부터 6년 동안 벚꽃 구경은 내겐 사치였다. 버스를 조금만 타고 가면 연분홍빛 벚꽃으로 물든 여의도를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은 여유를 부리기엔 너무 바쁜 기간이었다. 그 맘 때엔 언제나 새로운 학년의 첫 시험, 첫 중간고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게 있었다. 공부는 안 해도 시험 기간이니까 집에 붙어있기는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라고 해야 할까.그래서 스무 살이 되면 가장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벚꽃 구경이었다. 가장 마음 편하게 거닐고 싶은 거리 역시 여의도의 그 거리였다. 가로수 길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이 봄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항상 굴뚝같았다.봄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내가 엄마 뱃속에서 맞았을 첫봄이 항상 궁금했다. 엄마는 가끔 날 임신하셨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장 힘들고도 행복했던 시간이 그때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 약 두 달 전. 엄마의 볼록한 배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엄마를 안아주는 아빠와 함께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꽃비를 바라보았던 때 부를 대로 부른 남산만한 배는 엄마의 걸음조차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금방이라도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만 같은 가벼운 마음과 그에 비례하는 웃음은 꼭 그 하루가 10개월의 전부를 채울 정도로 엄마를 행복하게 했다고, 엄마는 항상

  • 속눈썹
  • 200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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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가족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집안에서 혼자 이 글을 읽고 있자니 마치 몽유병에 걸린 사람인냥 집을 뛰쳐나와 어스름한 거리를 헤매는 기분이에요. 정처없이 헤매는 것이 외롭다기 보단 누군가와 낭만을 함께 즐기고 있는 듯한... 우리의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 글인 것 같아요. 밑에 마이너님의 말대로 마치 특정한 누군가를 염두하고 쓴 것 같은데, 이 따스한 감성이 담긴 글을 두고 감히 추측하기가 조심스럽네요. 속눈썹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2010-02-14 01:13:5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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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늙은 사람은 마치 고 노무현 대통령님 같네요...본인이라고 생각해도 상관 없을정도로. 심야택시라는 분위기가 잘 살아있는 듯 하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2010-02-09 03:12:5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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