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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작성자 속눈썹
  • 작성일 2009-10-18
  • 조회수 337

“또 왔어?”
“…….”
“이번엔 뭐래.”
“신경 쓰지 마.이러다 말 거야.”

애써 웃어 보이는 지수를 뒤로하고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변함없이 날 반갑게 맞아주는 스태프들의 눈빛이 괜히 달라 보인다. 다들 내가 그랬다고, 내 죄라고 외치는 것만 같아.

“정연 씨, 기사 봤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도대체 무슨 기사.

“무슨..기사요?”
“이번 영화, 삼백만 명 돌파했대요. 한국 영화 요즘 불황이라 삼백만 명 넘기 쉽지 않은데, 역시 강정연이라면서 호평이에요.”
“아…….잘 됐네요.”
“안 기뻐요?”
“기뻐요. 기쁘죠, 당연히.”
“하나도 안 기뻐 보이는데?”
“기뻐요.”

이번엔 내가 애써 웃었다. 나보다 더 기뻐하며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모습을 봐도 기쁘기는커녕 그 이야기가 아님에 안심하기 바빴다. 언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정연 씨 메이크업 끝나는 대로 촬영 시작할게요! 서둘러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타일리스트들이 메이크업 도구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큰 거울을 마주보고 앉아 머리를 묶었다. 그래, 일만 하자, 일만.

“언니, 전화 오는데?”
“누군데?”
“이름이 없어요.”

한창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받을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는 중에도 울리는 벨소리에 할 수 없이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편지 받았어?”

전화기를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너 누구야.”
“사람은 사람대로 죽여 놓고, 잘도 살더라?”
“누구냐고!”
“재영이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내가 죽인 거 아니야.”
“너도 곧 죽게 될 거야.”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비웃음소리와 함께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전화기를 내던져버렸다.

“언니! 왜 그래요?!”
“…….”

이대로라면, 죽어버릴 것만 같아…….나 좀 살려줘. 제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너무 멀리 와버렸다. 너무 많이 시달렸다.
두 번째다. 이렇게 사람들의 말에 치이고 상처받는 것은.

3년 전 내게 가장 소중했던 친구가 극심한 우울증으로 세상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때 그 친구의 죽음과 관련해서 쏟아졌던 유언비어들은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멍이 되어 남아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 또 다시 나의 소중한 별이 졌다. 김재영. 내가 그렇게 아끼고 아끼던 소중한 후배. 비교적 이른 결혼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던 재영이는 행복을 빨리 얻은 만큼 빨리 놓치고 말았다. 연예인으로서의 삶을 모두 이해하지 못해 결국엔 힘들어서 안 되겠다며 인연을 놓아버린 아내와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던 재영이는 곁에서 지켜보기조차 힘들 만큼 고통스러워했지만 용케 타락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다시 일어서려 노력했다. 가끔 드라마도 찍었고, 이혼 후에도 많은 영화 섭외가 있었다. 그만큼 연기에 뛰어난 인재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다. 나 역시 그를 후배로서 많이 아껴주었고 항상은 아니더라도 가끔 술도 함께 마시고 힘든 일을 함께 나누는 꽤나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말도 안 되는 루머가 재영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재영이에게 다른 여자가 있어서 헤어졌다는 둥, 그 여자에겐 이미 아이도 있다는 둥. 솔직히 말하면 어느 연예인이든 이혼 후엔 한 번쯤 듣는 말들이다. 그러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재영이에게 그런 유언비어들은 심장을 찢어놓는 비수였고 가슴을 후벼 파는 표창이었다. 아내를 사랑해서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재영이에게 그러한 모독은 정말이지 살인과도 같았다고, 떠나기 직전 재영이가 말했다.

그렇게 여리던 재영이는 결국 그와 관련된 루머에 숨이 막혀 세상과의 끈을 놓고 말았다. 사랑이 전부였던 사람에게 사랑이 사라진 후, 그 끝은 비참했다. 정말 마음 굳게 먹으면 견딜 수도 있을 법한 일에 아파하고 또 아파하다가 결국엔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건 모두 내가 재영이가 아니라서 할 수 있었던 속없는 생각에 불과했다. 내가 그 당사자가 되니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고, 언제라도 이 삶을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재영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루머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재영이의 다른 여자가 나라는 소문이었다. 평소에 재영이와 친하게 지내던 내게 그런 오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당해보니 정말 너무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재영이의 내연녀가 나라는 이야기로 끝이면 좋으련만 우리 사이에 돈이 오갔고, 그를 감당하지 못해 재영이가 이혼을 하고 목숨까지 끊었다는 이야기, 내가 재영이에게 미쳐 재영이의 아내를 돈으로 처단하려고 해 결국 재영이가 먼저 세상을 떴다는 유치하고 잔혹한 이야기까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 후로 나는 바로 인터넷을 끊었다. 예전처럼 다시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고, 그 상처로 인해 재영이처럼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나를 사랑해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고, 또 내게도 해서는 안 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꼭 오는 편지. 어떤 방법으로든 내 손에 쥐어지는 이 편지 때문에 난 정말 살 수가 없을 것만 같다.

재영이의 글씨를 하나 하나 합성해 널 죽여 버리겠다, 너 같은 건 살아있어선 안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낸 적도 있다.

범인을 찾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지금 내겐 그럴 힘도, 그럴 여유도 없다. 그저 모든 것이 다 힘들고 아프다. 두 달 째 계속되는 루머와 편지, 그리고 오늘 처음 걸려온 전화. 이 모든 것이 내 피를 말린다. 살고 싶지 않게 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괜찮아보일지 몰라도 이 생각만 하면 정말 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힘들 때 곁에 있어주겠다던 팬들이 있어서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인터넷을 끊고 나니 그들의 사랑을 느끼는 것조차 드문 일이 된다. 애인도, 남편도, 아이도 없는 내게 이 가혹한 세상은 너무 힘들기만 하다. 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어딘가에서 나는 결백하다고,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잘못이 있다면 재영이를 알고 지낸 것 외엔 아무 것도 없다고 소리치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줄까. 이 지겨운 편지도,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말들도 내게서 그림자를 거둘까. 대박 난 영화고 뭐고, 모든 걸 다 팽개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처음엔 견딜 수 있었지만 이번엔 나조차도 내가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2주 후, 마침내 80일이 채워졌다. 전화를 건 후에도 끊임없이 편지는 내게 전해져왔고, 오늘이 80번째 편지가 도착한 날이다. 악마의 글씨. 악마의 말. 그 모든 게 내겐 지옥이다.

“언니, 읽지 말아요. 왜 맨날 읽으면서 그렇게 힘들어 해.”

그러게, 참 바보 같지. 하지만 희망을 놓아버릴 수가 없다. 이제 그만 하겠다고,미안하다고 적어 놓진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기대감에 편지를 열어볼 때도 있어. 그런 내용이 아니라면 한 줄만 읽고 관둘 거라고 다짐하며 편지를 열어보기도 해. 그러나 내 마음과 다르게 내 눈은 편지에 쓰인 글자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읽고 있고, 생각과는 다르게 그 모든 내용이 가슴에 또렷이 새겨진다. 너는 살인자, 너는 살아있어서는 안될 죽일 년…….

언젠가는 세상이 나를 알아줄 거라고 기대해 보지만 언제나 기대뿐이다.
세상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런데 왜 영화는 잘되나 몰라.”
“이번에 걔가 맡은 역할이 그래.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보다 더 무섭고 독한 계집애. 세상에서 제일 꼴 뵈기 싫은 악역으로 나오다가 결국엔 누구보다도 먼저 최후를 맞이한다…….사람들이 원하는 시나리오 그대로잖아.”

힘들어하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비아냥거리는 선배들의 말이 다 들린다.

이젠 정말 믿을 사람이 없다.

 

 

 

* * *

 

 

 

“잘 쉬어.”
“응, 조심해서 가.”

꽤 많은 날이 지나고, 나는 간단한 화보 촬영을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매니저 오빠의 차가 빠른 속도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다. 잘 가, 영진 오빠.

오늘은 우편함에 편지가 와 있다. 이걸로 백 번째 편지인가. 나는 습관처럼 편지를 손에 쥐고 구겨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13층이 아닌 23층을 눌렀다. 야경이 그립다.

23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최대한 구두 소리를 줄여가며 계단을 걸어 옥상으로 올라갔다. 언제나 그렇듯 그 흔한 티셔츠 한 장 걸려 있지 않은 조용한 옥상은 하늘 아래 오로지 나만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난간 근처로 걸어가 눈부시게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봤다. 별. 별을 닮았다. 하얗고, 화려하고, 예쁘구나.

나도 별이었다. 아직 지지 않은 그 별은 벌써부터 세상에게 버림을 받고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참 반짝반짝 예뻤는데, 이젠 그 빛조차도 더럽다고 손가락질 당한다.

큰 세상이 두려워 잠시 나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살려고 했던 내게, 나만의 세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가을 편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달라던 그 노래를 즐겨 부르던 내가 그녀의 그대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날카롭고 시린 가을 편지를 꼬박 세 달 동안이나 받아오다가 겨울을 맞는다. 고맙게도, 세상 사람들의 모든 말들을 내게 전해주었던 편지. 한 사람의 생각, 한 사람의 오해인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대번에 알려준 그 편지.

누가 쓴 건지, 어떤 방법으로 내게 전해지는 건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원망도 증오도 이젠 다 부질없다.

내 손에 쥐어져있는 편지를 바라보았다. 보낸 이가 적혀져있지 않은 새하얀 봉투.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편지가 내게 도착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겐 이게 끝이다.

편지를 찢었다. 갈기갈기 찢긴 하얀 종이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며 저 화려한 세상 속으로 내려간다.
다시는 보기 싫은 그 춤사위를 보며 나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언제나 1번. 아빠 없이 나 키우느라 고생한 사랑하는 우리 엄마.

오늘따라 신호가 더디다.

 

“여보세요?”

엄마다. 엄마 목소리.

“엄마.”
“응, 어디야. 오늘 늦네?”
“어…….좀 늦을 것 같아.”
“언제 올 거야?”
“…….”
“언제 올 거냐니까?”
“엄마.”
“응?”
“……보고 싶어요.”
“뭐라고?”
“보고 싶다고…….”
“네가 웬일이야? 그런 말을 엄마한테 다 하고?”
“……엄마.”
“…….”
“사랑해.”
“…….”
“그리고 미안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을 하는 건, 정말 이기적인 마음을 품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아.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미안한다고 말하고 나니 내 멋대로 모든 걸 다 끝내도 되겠다는 생각에 안심이 돼.

나 꼭 다시 행복해질게.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게.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이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살면서 가장 추웠던 가을. 겨울이 오는 건 이제 두렵다. 더 혹독한 추위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차디찬 밤바람이 불어오는 옥상. 나는 구두를 벗었다. 발이 시렸지만 그보다 더 시린 마음이 나를 더 춥게 했다. 이젠 이 추위도 끝이다.

나는 별들이 가득한 세상으로 발을 내딛었다. 몇 개인지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별들 속에서, 나도 별로 기억 돼야지. 누구보다도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밝은 별로.

사랑하는 우리 가족, 사랑하는 친구,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재영아. 나는 별이 될게. 이 세상에서의 빛을 거두고,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아득한 빛이 될게.

나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었다.

비로소 행복해졌다.

 

 

 

* * *

 

 

“웬 편지?”
“강정연한테 쓴 거.”
“아, 맞다. 팬이랬지?”
“응. 나 편지 처음 보내봐. 집 주소 겨우 알아내서 보내는 건데, 볼까? 좀 스토커 같지 않나? 일부러 봉투에 이름도 안 썼는데…….”
“보겠지, 뭐. 이번에 강정연 영화 좋더라.”
“근데 그것 때문에 좀 힘든가봐.”
“왜?”
“루머 들었지? 그 루머랑 너무 딱 맞는 역할을 맡아서, 더 시달리는 것 같아.”
“아, 그 김재영이랑…….”
“응. 요새 근황 알기가 힘들어서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보고 힘냈으면 좋겠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속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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