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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비

  • 작성자 속눈썹
  • 작성일 2009-06-21
  • 조회수 393

벚꽃비

 

 


“엄마 나갔다 올게.”
“나간다고?”
“응.”
“진짜?”
오늘? 오늘? 엄마가 오늘 나간다고?
“진짜지, 그럼.”
“정말?”
“그렇다니까? 왜 그래?”


말도 안 돼.


“어딜?”
“바람 좀 쐬러. 비와서 집이 눅눅해.”
“밖은 더 그럴 텐데? 엄마 비 냄새 싫어하잖아. 그리고 비 또 올지도 모르는데 웬 바람이야.”
“괜찮아, 오늘은.”
“근데 그 옷은 뭐야?”
“뭐가?”
“뭐, 선보러 가?”
“바람 쐬러 갈 때는 멋 부리지 말란 법 있니.”
그래도 그렇지. 분홍 투피스가 뭐야.
“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응?”
“그냥 요 앞에 나가. 바람 쐬러 간다니까.”
“…….”
“집 잘 보고 있어. 비오면 창문 닫고.”


옷과 맞지 않는 까만 우산을 든 엄마는 그렇게 나가버렸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정장까지 차려 입고서 바람을 쐴 건 또 뭐람.


난 집밖이 보이는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엄마가 보이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고 힘겨워하는 엄마가 보인다.


“엄마!”


내 큰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린 엄마는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대답을 하며 날 올려다본다.


“진짜 바람 쐬러 가?!”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갔다 올게, 빨리 들어가!”


엄마는 먼저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간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엄마를 미행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냥 창문을 닫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오늘은 4월 12일. 그저께부터 여의도에서 벚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 엄마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나가버리지 않았다면 엄마와 함께 벚꽃 구경을 가고 싶었다. 비가 내려서 오늘은 조금 한적할 테니까. 물론, 엄마가 나가지 않을 게 뻔해서 나 혼자 갖고 있던 생각이지만.


중학교 때부터 6년 동안 벚꽃 구경은 내겐 사치였다. 버스를 조금만 타고 가면 연분홍빛 벚꽃으로 물든 여의도를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은 여유를 부리기엔 너무 바쁜 기간이었다. 그 맘 때엔 언제나 새로운 학년의 첫 시험, 첫 중간고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게 있었다. 공부는 안 해도 시험 기간이니까 집에 붙어있기는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스무 살이 되면 가장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벚꽃 구경이었다. 가장 마음 편하게 거닐고 싶은 거리 역시 여의도의 그 거리였다. 가로수 길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이 봄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항상 굴뚝같았다.


봄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내가 엄마 뱃속에서 맞았을 첫봄이 항상 궁금했다. 엄마는 가끔 날 임신하셨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장 힘들고도 행복했던 시간이 그때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 약 두 달 전. 엄마의 볼록한 배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엄마를 안아주는 아빠와 함께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꽃비를 바라보았던 때 부를 대로 부른 남산만한 배는 엄마의 걸음조차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금방이라도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만 같은 가벼운 마음과 그에 비례하는 웃음은 꼭 그 하루가 10개월의 전부를 채울 정도로 엄마를 행복하게 했다고, 엄마는 항상 말했다.

 
‘그때는 네 아빠가 있었으니까.’
언제나 이야기의 끝에 이 말을 붙여 나를 슬프게 했지만.


아빠는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를 떠났다고 한다. 그림을 그렸던 아빠는 가난한 엄마 대신 돈이 많은 애인을 만나 집을 나갔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가장 사랑한다던 엄마도, 나도 버리고 떠났다. 엄마와 결혼할 때는 지금보다 더 능력 있고 유명한 화가가 되어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맹세했지만 그 맹세는 지켜지지 않을 부질없는 것이었다. 아빠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가난한 엄마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빠가 떠난 건 그해 가을. 내 돌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내 기억엔 아빠가 없다. 말도 못하는 어린 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 많이 울고 웃었겠지만 내 기억은 거의 네 살 때부터 시작이었다. 네 살 이전의 시간들은 내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희미하다. 아니, 아예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 내게 엄마는 아빠의 사진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아빠가 떠난 그 후로 결혼사진이며, 연애할 때 사진이며 모두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린 그 간의 추억들이, 분노와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엄마에겐 그것만이 자신을 위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빠를 지우는 것이, 엄마에겐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내게 남아있는 건 아빠가 그린 어린 내 모습뿐이다. 베개를 베고 곤히 잠들어있는 나를 그려 엄마에게 선물한 후 그 다음 날 훌쩍 떠나버렸다고 했다. ‘미안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적힌 편지 한 장을 달랑 남기고서.


아빠의 사진은 다 태워 없애버렸으면서 왜 이 그림은 버리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니까.”라고.


‘나’라서 엄마가 버리지 못한 그 그림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내 방 벽에 액자가 되어 걸려 있다. 얇은 종이가 닳아져서 찢어지면 안 된다며 엄마가 손수 액자에 넣어주셨다. 아빠를 그렇게도 미워했으면서 아빠가 남기고 간 그림을 그렇게 소중히 하는 엄마를 보며, 엄마가 이미 아빠를 용서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 앞에선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내 앞에서 만이었다. 내가 아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그렇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결국엔 이야기를 꺼내 눈물로 끝을 맺었다. 이야기 내내 나쁜 놈, 못난 놈이라는 역정이 끊이지 않았지만 자꾸만 눈물을 훔치고 시큰해진 코를 매만지는 엄마였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뿐이지만, 아빠의 생일이 되면 아빠 생각에 밤을 눈물로 지새운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달력에도, 엄마의 휴대폰에도, 그 어디에도 표시되어있지 않은 사람의 생일이건만 엄마는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날 밤마다 난 굳게 잠긴 안방 문을 차마 열지 못해 문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매년 4월 12일은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날’이다.

 

 

 

 

* * *

 

 

 

Rrrrrrrr-


“……엄마.”
- 잤어?
“응. 졸려서.”
- 나올래?
“응? 어디로?”
- 여기 여의도야. 벚꽃놀이 하는 데.
“우와, 거긴 왜?”
- 그냥, 오다보니 여기까지 왔네. 벚꽃 너무 예쁘다. 나와서 한 번 봐.
“알았어~ 나 안 그래도 벚꽃 보고 싶었어.”
- 그래, 나올 때 전화해.


기분 좋게 폴더를 닫았다. 엄마 생각을 하며 소파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잠이 들어버렸다가 요란한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엄마의 목소리가 좋게 들린다. 정말, 엄마는 괜찮아진 모양이다.


예쁜 벚꽃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카메라를 챙겼다. 사놓고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비닐우산과 조그만 가방을 들고 예쁜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샌들을 신은 발에 시원한 빗물이 느껴진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첨벙 첨벙 물을 튀기다가 순간 혼자 이러고 있는 게 너무 민망해 서둘러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위를 봤다. 비가 내리다가 그친 하늘엔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다. 언제 또 회색 옷으로 갈아입고 비를 퍼부을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비가 좀 내려도 괜찮을 것 같다. 비와 함께 거리에 내리는 꽃잎은 더욱 더 아름다울 테니까. 아, 드디어 벚꽃이다.

 

 

 

 

* * *

 

 

 


“엄마!”


저 멀리 벤치에 앉아 날 기다리는 엄마가 보인다. 나는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어린 시절 이후로 엄마를 보며 이렇게 반갑게 달려가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뛰어오는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라던데.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엄마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다.


“빨리 왔네?”
“응, 버스가 빨리 왔어.”


나는 얼른 달려가 엄마 옆에 앉았다. 뛰어 오느라 약간의 땀이 맺힌 내 이마를 본 엄마는 손수건으로 내 땀을 닦아준 후 그 손수건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엄마가 없으면 평생 손수건도 안 들고 다니는 센스 없는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


“근데 엄마 정말 바람만 쐰 거야?”
“바람도 쐬고, 누구도 좀 만나고.”
“누구?”
“있어. 되게 오랜만에 만난 사람.”
“오랜만에 만난 사람? 학교 동창?”
“동창보다 더 오랜만에 보는 사람.”
“누군데?”
“있어요, 그런 사람.”
“뭐야, 알려줘!”
“엄마 첫사랑. 됐지? 땀이나 더 닦아. 콧잔등에.”


뭐야, 거짓말.


엄마에게 대답을 듣는 걸 포기하고 맺힌 땀을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정말 최고다. 아까부터 꽃을 바라보며 걸어오긴 했지만, 볼 때마다 예쁘고 새롭다. 비가 내려 약간 물기를 머금은 작은 꽃잎은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 달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되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끝없이 펼쳐진 가로수는 이른 새하얀 눈꽃들로 가득 찼다. 노오란 개나리가 별이 되어 빛나고, 손에 쥐면 아스라질 것만 같은 투명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묻어있다. 


“벚꽃 예쁘지?”
“응. 너무 예뻐. 근데 웬 벚꽃?”

“그냥. 너랑 한 번도 여기 못 와본 것 같아서. 서울 살면서 여의도 벚꽃 하나 안 보러 온 게 이상하다.”
“내가 만날 시험기간이랍시고 바쁜 척 해서 그래.”


나는 엄마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물기가 가득한 나무 밑엔 꽃잎이 수북이 쌓였다. 아직 많이 밟히지 않아서 제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는 꽃잎이 참 예쁘다. 내가 몇 년 동안 그린 만큼 아름답구나.


“좀 걷자.”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왼손엔 우산을 들고 오른손으론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벚꽃길을 걷고 있다. 내 왼손에 우산이 아닌 아빠의 손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비가 왔는데도 아직 안 졌네.”
“그러게.”
“바람 좀 불었음 좋겠다. 꽃잎 흩날리는 거 보고 싶어.”


바람이 불어서 흰 꽃잎이 흩날리면 정말 영화 같을 텐데. 정말 여긴 하나라도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 엄마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걸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정말 모든 곳이 다 아름답다. 꽃이라는 화장품 하나만으로 곱게 치장을 한 가로수 길은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어디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도 그것이 곧 그림이 된다.


“가온아.”


사진을 찍는 날 조용히 바라보던 엄마가 날 불렀다.


“응?”
“그림...그릴래?”
“그림?”
“저기. 초상화 그려주는 사람 있다.”


엄마의 손끝을 따라가자 홀로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릴 사람을 기다리는 화가가 있었다. 이런 곳에도 저런 화가가 있었던가.


“그릴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그려준 그 초상화 이후로 단 한 번도 초상화를 그려본 적이 없다. 엄마가 항상 비싸다며 내 발걸음을 돌리게 했기에. 하지만 꼭 비싸서만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엄마는 내 초상화만은 아빠가 그려주길 원한 것 같다.


“그림 비싸다고 싫어했잖아.”
“그냥, 벚꽃 보러 온 기념으로.”


엄마는 나보다 빠른 걸음으로 그 화가에게 다가갔다. 엄마는..정말 괜찮아진 모양이다.


“지금 그림 돼요?”
“……네, 그럼요.”
“얘 좀 한 장 그려주세요.”

“엄마는?”
“엄마는 가만히 오래 못 앉아있어. 너만 그려.”


엄마는 내 우산을 들어주며 날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선 화가에게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딸, 예쁘게 그려주세요.


“조금만 옆으로 틀어줄래요?”
“아, 네.”


어정쩡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화가 아저씨는 정말 화가 같았다. 요즘 화가들은 잘 쓰지 않는 갈색 베레모를 쓰고 얇은 조끼에 셔츠를 입고 있다. 우리 엄마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이 화가는 크게 웃고 있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푸근하다.


“웃는 얼굴로 그려드릴게요.”
“네.”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간다.


“이제 그릴게요.”


이젤을 정리하고 새로운 종이를 준비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그는 연필을 들었다. 연필을 들고서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스케치를 하기 시작한다. 손 모양으로 봐서는 무엇을 그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참 바쁘게 움직인다. 한참동안이나 내 얼굴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림을 바라보기도 하며 지우개로 계속 지우고 연필로 계속 그리고.


“예쁘세요.”
“……네?”
“참 예쁘세요.”
“아……감사합니다.”


나는 엄마를 올려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엄마도 날 보며 웃었다. 그와 동시에 엄마의 눈이 반짝였다. 지루함에 또 하품을 해버렸겠지.


다시 화가 아저씨에게로 시선을 옮겼을 때 아저씨의 시선도 엄마를 향해 있단 걸 알았다. 원래 눈빛이 저런 건지, 엄마를 보는 눈빛이 매우 애틋하다. 꽤 오랫동안 엄마를 보다가 그 애틋한 눈으로 나를 본 그는 다시 그림 그리는 데에 몰두한다.


그는 다시 연필로 각도를 재고 내 얼굴을 하나하나 살핀다. 나를 그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일은 재밌는 일이다. 그의 눈동자엔 나의 모습이 비쳐있고, 그 손에 쥔 연필도 오로지 나만을 표현한다. 민망하리만큼 내 얼굴을 자주 쳐다보며 그 눈에 담기는 것을 그대로 종이에 옮겨내는 사람. 사각사각- 하며 들려오는 연필 소리와 참 자세히도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을 느끼고 있노라면, 처음에 가졌던 민망함은 사라지고 그저 설레고 떨리는 마음만 갖게 된다.


나는 그 미묘한 떨림이 좋게 느껴져 나를 그리고 있는 이 화가에게서도 뭔가 좋은 느낌을 전해 받았다.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도 행복한 듯, 행복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좋은 그림을 그려주겠노라고 마치 약속이라도 하는 것처럼 엄마와 눈을 맞추는 모습은 모든 사람의 상상 속에 있던 화가의 그것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오랫동안 이어지던 침묵이 깨졌다.


“엄마를 많이 닮으셨네요.”
“어릴 때부터 엄마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아빠가 서운해 하지 않으세요?”


살짝 웃고 있던 내 입 꼬리가 내려갔다. 나는 억지로 다시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우리 딸이 날 많이 안 닮아서 속상해요.”
“…….”
“곁에 많이 있어주지 못해서 안 그래도 속상한데, 나랑 닮지도 않아서 다른 사람은 내 딸이란 것도 잘 몰라요.”
“가온아, 엄마 잠깐 화장실 좀.”


엄마는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뒤돌아 뛰었다. 왜 저러지. 화장실이 많이 급한가. 그런 엄마를 보는 화가 아저씨의 눈빛은 엄마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내 눈빛과는 사뭇 다르다.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처연하면서도 뭔가 슬퍼 보여.
나는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가 싫어 먼저 말을 꺼냈다.


“떨어져 지내시나 봐요.”
“……아, 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어요.”


엄마의 뒷모습을 쫓던 눈이 그제야 나를 향한다. 뒤늦게 대답을 하는 그에게 딸과 떨어져 지내는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내가 아빠의 이야기를 그에게 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그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의 딸이 조금 가엾다고 느꼈지만 그것 역시 말하지 않았다.


“내 딸 또래인 것 같아요.”
“저요?”
“네. 스무 살 쯤 되었죠?”
“우와, 저 딱 스무 살이에요. 어떻게 아세요?”

“딱 그 나이 같아요.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보면, 나이를 파악하는 게 더 쉬워지더라고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말투로 조용히 말하던 화가 아저씨는 다시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아저씨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그림을 바라보고, 그러다가 가끔 엄마가 비운 자리를 한 번 쳐다보고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문지르는 행동을 반복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코끝이 간지러워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를 두 번 연달아 하고 기침을 하니, 화가 아저씨가 연필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내 행동만 지켜보고 있다.


“감기 걸렸어요?”
“아뇨, 그냥 코가 간지러워서…….”
“아..앞으로도 감기 걸리지 말아요. 봄 감기 독해요.”


아까부터 따뜻하게 웃던 그가 정말로 따뜻한 사람인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우리 아빠도, 이렇게 따뜻한 사람일까. 저렇게 따뜻한 눈을 하고서 세상을 종이 위에 옮길까. 문득 이 아저씨의 딸은 아빠를 참 좋아할 거란 생각을 했다. 집에 잘 들어가지 못해 항상 아빠가 그리워 아빠를 원망도 많이 할 테지만, 아빠가 집에 들어가는 날에는 가장 먼저 문 앞으로 달려 나와 아빠를 맞이할 것 같다. 아빠의 큰 화판을 들어주고, 아빠의 베레모를 받아 옷걸이에 예쁘게 걸어주고.

다정하고 따뜻한 자신의 아빠를 많이 사랑하겠지. 그리고 이 화가는 자신의 딸을 사랑할 것이다. 가끔 그의 딸을 그려주며,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상냥한 눈으로 딸을 기분 좋게 해주며 그렇게 소중하게 딸을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우리 아빠가 이 화가를 닮아있었으면 좋겠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아낄 자상한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이 화가처럼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길 소망한다.

 

 

 

 

* * *

 

 

 

 

엄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묻고 싶었지만 돌아온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에게 웃어주는 화가 아저씨 때문에 엄마에게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다. 엄마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웃는다. 고운 분홍색 옷을 입고서, 그만큼이나 고운 웃음을 보여주었다. 거의 처음이다. 아빠의 생일날 저렇게 고운 옷을 입고 마음 편하게 웃는 엄마의 모습은.


“화장실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너무 예뻐서 구경 하느라 한참 걸렸어요.”


내가 아닌 화가 아저씨에게 이유를 설명한다. 아저씨도 엄마의 말을 듣고선 아까처럼 또 웃었다.


“그림 다 돼가요?”
“네. 조금만 있으면 됩니다~”


아저씨는 친근한 말투로 말했다. 정말 좋은 아저씨 같다.
하늘은 여전히 맑지만 내가 이 의자에 앉아 있은 지는  오래 된 것 같다. 나를 바라보는 화가를 나 역시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 때문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아빠를 생각하며 앉아 있으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름이 뭐에요?”
“아, 가온이요, 정가온.”
“이름도 예쁘네요. 엄마가 지어주셨어요?”
“……아뇨, 아빠가요.”


[네 이름도 실은 아빠가 지어줬어. 예술 하는 사람이라 감상적이지.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이래.]


아빠가 내게 남겨주고 간 것이 하나 더 있었구나. ‘정’이라는 성과, ‘가온’이라는 이름.


그림을 다 그렸는지, 그는 그림 끝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손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이내 그림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웃는다.


“다 됐어요?”
“네, 여기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림을 내게 건넨다. 그것을 받아들려는 찰나, 그림 위로 물방울 하나가 톡- 하고 떨어졌다. 깜짝 놀라 하늘을 쳐다보니 태양이 눈부시기만 하다. 그런데 나도, 그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물방울을 한 번씩 맞았다. 꽃잎에 아슬아슬 걸려 있던 물방울일까.


“비가 또 오나 봐요.”


나는 그의 손에 들린 그림을 받아 들었다. 순간 물방울을 한 번 더 맞았다. 빗방울인 것 같다.


“어때요?”


엄마도 내 옆으로 다가와 그림을 살펴본다.


“우와아…….”
“너무 예쁘다.”


이 그림 속에서 웃고 있는 건 분명 내가 맞는데, 그림 속 나는 나보다 훨씬 예쁘다. 살짝 입 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나의 눈엔 별이 박힌 것 같다. 내 눈이 이렇게 초롱초롱 빛났던가.


“마음에 들어요?”
“네. 너무, 너무 예뻐요..”


투둑-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빗방울이 그림 위에 점을 찍었다. 먹구름 대신 석양이 피어날 준비를 하는 하늘에서 어울리지 않는 빗방울이 떨어진다. 여우빈가.


“엄마, 우산.”
“비 많이 안 오는데?”
“그림 젖잖아.”


나는 우산을 펴 들었다. 그리고 그림을 내 안으로 더 끌어 당겨 계속 바라보았다.


“얼마에요?”


엄마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지갑을 찾는다.


“그냥 가져가세요.”
“네?”
“오늘 마지막 그림이에요. 비가 와서 저도 곧 가봐야 하거든요.”
“아니…그래도…….”
“괜찮아요. 오랜만에 제 딸을 그리는 기분으로 그렸어요. 딸한테는 그림 그려줘도 돈 안 받잖아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선물 받아도 되는 걸까.


“정말 괜찮아요?”


“그럼요. 제 딸처럼 너무 예뻐서 그냥 드리는 거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엄마와 나는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그림으로 옮겼다. 색이 없는 그림이지만, 내 진갈색 눈동자, 약간 두툼한 선홍색 입술, 내 피부, 내 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내 뒤로 그려진 눈부시게 빛나는 연분홍빛 벚꽃.


그의 그림에서 색깔이 보인다. 어떻게 연필 하나로 이 많은 색을 표현했을까. 그저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린 것뿐인데. 정성을 다해, 마음을 다해 그리면 흑백의 그림도 무지개보다 더 다양한 색을 표현할 수 있는 걸까.


“그럼, 더 구경하다 가세요.”


내가 넋을 놓고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는 어느새 짐을 모두 챙겼다. 이젤과 화판을 양손에 든 그는 밝게 웃었다.


“벌써 가시게요?”
“하하, 가야죠. 비가 더 올 것 같아요.”


여우비라 금세 그칠 텐데……. 왜 떠나는 것이 아쉬울까.


어느새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다시 한 번 나와 엄마를 보고 웃었다. 나도, 엄마도 그처럼 웃어주었다. 미소로 인사를 마치고 화가는 뒤를 돌아 걸었다. 나는 급하게 아저씨를 불렀다.


“저기!”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봤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아저씨는 또 다시 밝게 웃은 후 다시 뒤를 돌아 멀어져갔다. 나는 작아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그림을 봤다. 그림에 ‘情’이라고 쓰여 있다. 정. 따뜻한 정. 흔히들 화가의 사인을 적어주는데, 이게 사인일까.


“‘정’이래. 내 성이 정이라서 써 준 걸까?”
“……그렇겠지? 저 아저씨 성이 정이면 이 한자를 안 썼겠지. 이건 성으로 쓰는 한자가 아니니까.”
“그런가. 아..그림이 너무 예쁘다.”
“응. 너무 잘 그렸다.”
“집에 갈 때 액자 사 가자.”
“그래.”
“엄마.”
“응?”
“고마워.”

 

괜찮아진 거, 오늘인데도 울지 않은 거, 내게 멋진 그림을 선물해준 거.


“그림이 너무 예뻐.”


그림을 기억에 새기고 있는 동안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엄마도 우산을 쓰고서 내 그림을 자꾸만, 자꾸만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봤을 때, 그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엄마, 잠깐만.”


나는 엄마에게 그림을 건넸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아름다운 꽃 길 너머로 유유히 멀어져가는 한 화가를, 돌아가는 필름에 감았다.


“..왜 찍어?”
“그냥. 찍고 싶어서.”


이내 보이지 않게 된 뒷모습을 이번엔 내 마음에 담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우산 너머로 비치는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내린다. 아주 세차게 내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함께 예쁜 색깔의 꽃잎이 비가 되어 내린다. 아……. 절경이다. 꽃비가, 하롱하롱 춤을 추며 내려오고 있다. 방금 내게 찬란한 아름다움을 선물해준 그 화가가 인사를 하듯 떨어지는 꽃잎들. 내게 손을 흔드는 듯하다. 안녕, 안녕.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이던 우산 위에 날아와 맺히는 꽃잎. 팔랑거리는 도화지 위에 물기 어린 꽃잎이 찾아와 앉았다. 빗물에 군데군데가 젖어버린 하얀 도화지, 그 작은 종이 위에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나.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벚꽃.


꽃들이 비가 되어 내릴 준비를 하며 상글상글 웃던 꽃들과 꽃보다도 하얀 마음을 가진 한 화가와 함께 한 그 시간. 그 시간이 지난 후, 화가가 자리를 뜬 이곳엔 엄마와 내가 남았다. 시원한 물줄기와 함께 반짝이는 꽃잎이 뱅싯거리며 내 우산에 맺혔다. 투명한 우산 사이로 보이던 하늘에 비와 함께 내린 꽃잎이 하나둘 맺혀 하늘을 그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오늘 네 아빠 생일이야.”
“응, 알고 있어.”


언제나처럼 내게 아빠의 생일을 상기시켜준다. 그렇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엄마. 아빠는 이 벚꽃과 많이 닮은 것 같지. 평소엔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오늘만 되면 이렇게 엄마와 내게 찾아와 우리의 감정을 모두 흔들어 놓잖아.


그래도 오늘은 우리가 슬프게 흔들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맞아보는 꽃비가 우릴 행복하게 해줘서 정말 다행이야.


“아빠 보고 싶니?”


엄마가 처음으로 내게 묻는다. 아빠가, 네 아빠가 보고 싶냐고.


“언젠가 봤을 지도 몰라. 네 아빠. 길 걷다가, 버스 타다가..아님 꿈속에서라도.”
“엄마는 본 적 있어?”
“응.”
“언제?”
“최근에. 아주 최근에.”
“진짜?”
“응. 아직도 그림 그리면서 잘 살고 있어. 예전에 엄마가 좋아했던 모습 그대로. 조금 늙은 것 빼면 변한 게 하나도 없더라.”


엄마의 얼굴에 주름이 생긴 것처럼, 아빠도 그렇게 늙었겠구나. 언제나 서로의 기억 속에 가장 젊고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던 엄마 아빠가 만났을 때는 어땠을까.


“거봐. 아빠는 잘 살고 있다고 내가 그랬잖아.”
“근데 여전히 가난하더라.”
“왜?”
“그 여자랑 오래 전에 헤어졌대. 일 년도 못 사귀었대.”
“…….”
“근데 그거 듣는데 괜히 통쾌한 거 있지.”


나도 조금. 그래도 더 멋지고 유명한 화가가 되어 있다면 더 좋을 텐데.


“그래도.”
“응?”
“네 아빠가 혼자여도, 아빠를 다시 만나진 않을 거야.”
“…….”
“그냥 지나가다 한 번 보면서, 가끔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살자.”
아빠를 가끔 본다, 그리워한다…….
“아빠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
“…….”
“가온아.”
엄마는 아빠가 지어준 내 이름을 부르면서도 아빠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응?”
“너 방금 찍은 사진, 뽑으면 엄마 좀 한 장 줄래.”
“왜?”
“……그냥, 잘 나온 것 같아서.”


그래, 이 사진도 액자에 꽂아두면 예쁘겠지. 엄마의 방에 놓일 아기자기한 액자를 상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고운 빛깔로 물든 하늘 아래 꽃비를 맞으며 엄마와 함께 걸었다. 일부러 가지를 흔들지 않아도, 바람이 불지 않아도 꽃잎이 흩날려 절경을 이루었다. 왼손엔 우산을 들고, 오른손으론 엄마의 손을 잡았다. ‘왼손에 우산이 아닌 아빠의 손이 있었으면.’하고 바란다.


“엄마.”
“응?”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
“……네 아빠 생일이잖아.”
“오늘은 안 슬퍼?”
“응. 괜찮아.”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졌다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 20년간의 슬픔이 녹았는지는 모르지만 엄마가 괜찮아서 나도 괜찮았다.


“내년에 또 오자.”


나는 웃으며 동의했다. 내년에 이 아름다운 곳에 다시 한 번 찾아오기로.


그때도 엄마와 손을 잡고 걸으며 이 길 만큼이나 아름다운 추억을 다시 한 번 만들겠지. 그때도 난 내 한쪽 손이 허전한 것을 아쉬워할 테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하루를 채우는 것이 엄마의 눈물과 한숨이 아닌 미소와 행복이라면 텅 빈 내 한쪽 손에 그 하루가 쥐어질 것이다. 누군가가 잡아주지 않아도, 그만큼 따뜻한 감정이 이 봄을 채우겠지.


이십 년 전의 그 봄처럼 우리가 자유롭기를, 그에 비례하는 웃음이 함께하기를, 그땐, 아빠가 아닌 내가 엄마의 곁에 있어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해도 져 버리고 달도 뜨기 전, 황혼이 물드는 저녁에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벚꽃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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