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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작성자 Etoile
  • 작성일 2009-01-12
  • 조회수 149

 

 

1.

책상에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시간은 13분 정도 지났다. 13분 내내였다. 어지러울 정도로 눈을 감고서 이리저리 뻗어나가는, 문어의 다리들과도 흡사한 생각의 끈들을 허겁지겁 주워 모으고 있었던 것은. 자꾸만 잠이 많아지고 피곤해져, 밥보다도 잠이 절실해져, 고스란히 잠에 바치기로 한 금가루와도 같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런 점심시간 1시간 중 13분이 짜증만 배로 불려놓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멍하니 앉아 얼굴만 구기다 또 3분이 흘렀다. 피곤함과 잠기운에 쓰러질 만큼 힘든 상태인데도 왜인지 잠이 들지 않았다.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밀려왔다. 12시 20분. 벌써 20분이 가 버렸다. 주먹만 했던 두통은 짜증을 먹고 점점 커져 더 세게 머리를 짓눌러왔다. 제발, 하는 마음으로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저, 예슬 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튕기듯 몸이 올라갔다. 직장 동료였다. 항상 불안한 듯한 표정의 직장 동료, 이름이…….

“네, 현우 씨. 왜요?”

“저는 현우가 아니라 현호인데, 아니 그보다도…….”

“어머, 어머. 미안해요. 무슨 일이에요?”

“지금 점심시간 끝난 지 10분이 지났거든요. 너무 피곤해 보여서 웬만하면 안 깨우려고 했는데, 방금 팀장님이 지나가셔서…….”

뭐, 10분? 쫓기듯 손을 뻗어 아무 버튼이나 누른 핸드폰 액정에는 분명 눈을 씻고 봐도 ‘오후 01:11’ 이란 글자가 박혀 있었다.

“점심시간부터 계속 잤죠? 어제 잠 못 잤어요? 되게 오래 자는 거 같던데.”

잠이 든 지도 모르고 50분이나 잤나 보다. 믿기진 않지만 어쩐지 아까보단 두통도 별로 없고, 몸이 개운한 듯도 하다.

“아뇨, 그냥 요즘 좀 피곤하네요. 어쨌든 미안해요. 깨워줘서 고마워요.”

아니요, 하며 자리로 돌아가는 현우 씨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끝내지 않은 일이 있음이 기억 나 서둘러 모니터에 시선을 꽂은 채 마우스를 붙잡고 파일을 열었다. 몇 초 후 파일이 열리고 마우스 휠을 드르륵 드르륵 돌리던 나의 고개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3분의 2정도 써 놓았던 기획안이 끝은 물론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지어져 있었다. 술을 먹고 와서 했었나……, 기억이 흐렸다. 길게 생각지 않고 창을 닫았다. 열려있던 폴더에 못 보던 파일이 있었다. 파일을 여는 순간,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그래, 맞아. 그 기획안 내가 마무리 잘 지어 뒀었지. 그리고 이걸 하던 중이었어. 요즘 정말 건망증이 심해졌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런 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2.

나아진 듯하던 두통이 다시금 머리를 쪼아댔다. 일이 잘 풀려나가질 않았다. 몇 십 분째 같은 곳에서 머물러 있었다. 머리를 붙잡고 생각에 잠겼다. 이 두통은 아마 방금 전 슬그머니 다가와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설교를 늘어놓고 간 팀장에게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조예슬 씨, 요즘 일하는 태도가 많이 편해졌어요. 아까 보니까 잠도 늘어지게 자는 거 같던데, 우리 회사가 이제야 편해진 것 같네요. 이제 와서야. 그리고 또 뭐라고 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런 건 기억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었다. 가능하면 그 얼굴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한 시간이 넘도록 그 부분에서 넘어가질 않았다.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열려있던 창의 최소화 버튼을 누르고 인터넷 창을 하나 열었다. 메인 기사로 떠 있는 링크를 아무 거나 누르자 한눈에 보아도 쓸 데 없어 보이는 인터넷 기사의 페이지로 연결되었다. 톱 탤런트 아무개와 인기가수 아무개가 이혼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얘네가 결혼을 했었나? 어차피 이혼할 거 뭐 하러 결혼했대. 생각나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며 다른 페이지로, 또 다른 페이지로 넘어갔다. 눈과 손과 정신이 삼단으로 분리되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휘익휘익 날아갔다. 삼십 분 정도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눈으로 입력된 것이 뇌까지 가지 않고 다시 바깥으로 튕겨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미해진 인터넷 창을 닫고 다시 하던 일을 열었다. 멍하니 눈만 모니터를 응시하다 보니 눈꺼풀이 무거워져 왔다. 요즘 무슨 피곤한 일이 있었던가? 이렇게 힘이 없고 졸릴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문득 계절을 타는 건가, 싶어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억해내려 애쓰는 것조차 피곤했다.

“조예슬 씨. 이제 팀장까지, 아니지. 과장님까지 무시하는 겁니까?”

“예……?”

어안이 벙벙해 되묻는 나에게 팀장이 다시 한 번 물어왔다.

“아까 내가 과장님이 과장님 방으로 콜하셨다는 얘기 안했나요?”

“아…….”

아까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가 다름 아닌 저 이야기였던 것 같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맞는데, 꼭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젠장.

“당장 과장님한테 가 보세요.”

발걸음은 그야말로 천근만근이었다. 왼 발 천근, 오른 발 만근의 무게로 절뚝거리며 걷는 내 앞에 엘리베이터는 빛의 속도로 날아왔고, 어느 새 난 과장님 방 앞에 서 있었다. 기억하고 싶은 일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투성이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 열 배 정도로 느껴졌던 그 시간이 끝나고 과장님 방에서 나와 다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왜인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과장님은 팀장이 고자질을 했는지 내 업무태도에 대한 이야기만 줄기차게 해 댔고, 나는 딴 생각을 줄기차게 했을 뿐이었는데.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었던 듯도 하지만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의 내 자리로 돌아오자 곧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머리를 비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메우고서 회사를 빠져나왔다.

 

3.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퇴근길 지하철은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냄새는 언제나처럼 기분이 나빴다. 숨쉬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통이 심해져왔다. 지하철에서 떠밀리듯 내려 집까지 뛰다시피 걷는데 온갖 생각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피곤함, 잠, 팀장, 업무태도, 과장……. 뇌를 들어내서라도 머리를 비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집 앞 슈퍼마켓에 시선이 가 닿자, 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발을 내딛고, 음료수 냉장고의 문을 드륵, 열었다. 챙강, 챙강 하는 소리 후에 내 손에 소주 두 병이 들렸다. 또 다시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소주병들을 내려놓았다. 지갑 안에서 천 원짜리 지폐 세 장과 현금영수증 카드를 꺼내 계산대에 선, 슈퍼마켓 주인아저씨의 아들일 낯익은 남자에게 건넸다. 소주 두 병을 꺼낼 때부터, 혹은 내가 슈퍼마켓에 들어설 때부터 계속 나를 쳐다보던 낯익은 남자. 기분은 정말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말없이 내미는 거스름돈일 동전들과 현금영수증 카드를 건네받고 도망치듯 슈퍼마켓을 빠져나왔다.

집 안에 들어서자 편안한 어둠이 나를 반겼다. 불도 켜지 않고 사온 소주를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겉옷만을 벗어 소파에 걸쳐두고 냉장고로 다가가 벌컥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열린 냉장고에는―정말 뜻밖에도―소주가 하나, 둘, 셋……, 다섯 병이나 들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사다 놓았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어차피 기억은 나지 않을 것이었고 난 괜한 곳에 힘을 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특히 요즘 들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오늘만도……, 몇 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러 번, 뭔가가 다 기억이 안 났었다. 삐이- 삐이- 삐이-. 냉장고가 어서 문을 닫으라고 화를 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멍하니 걸어가 불을 켜고, 옷을 갈아입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 서자 푸석푸석한 표정에 눈이 퀭한 거울속의 내가 말했다. 쯧쯧, 넌 왜 사니? 사랑도 없고, 친구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살 이유도 없고. 이젠 기억까지 없잖아?…….

“내가 기억이 왜 없어? 이렇게 다 기억하고 있는데!”

순간 화가 나서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화를, 나 자신에게 끓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듯한 느낌에 손끝이 시려왔다. 조금 후에, 욕실의 한기가 새삼 몸에 닿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거울 속의 나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건조한 나의 모습만을 비쳐내고 있었다. 방금 화가 났던 것이 민망해지기까지 해, 혼자 있던 것이 다행이라고 느낀 나는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했다. 또 멍하니 섰다가 나가려는데, 내가 양치질을 했는지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 것도 같고, 안 한 것도 같고.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다시 서둘러 양치질을 하고 욕실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4.

침대에 눕자 하루가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온종일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을 감고서 잠이 들려는 찰나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까 사온 소주. 소주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 또 뭔가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불쾌해져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불현듯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생각났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보면서 눈물만 줄줄 흘려댔던 어느 영화에서 본 여주인공도 떠올랐다. 혹시 나도……, 하는 어이없는, 내가 생각해도 유치한 발상이 머리위로 곤두박질쳤다. 그 유치한 발상은 결국 나를 컴퓨터 앞에 앉혀 놓았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창을 열고 ‘알츠하이머 증상’ 이라는 글자들을 입력해 검색하는 짧은 순간에 수백 가지의 생각들이 떠오르고 또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정말 알츠하이머라면……. 순식간에 수많은 검색 결과들이 창을 가득 채웠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내 시선이 ‘증상’이라는 단어에 고정되었다. 무관심, 기억장애, 분노, 좌절, 우울증……. ‘알츠하이머 증상’의 검색 결과라기 보단 마치 ‘내 증상’의 검색 결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다지 특이한 증상들도 아니건만 나와 겹치는 것을 확인하자 불안감은 배로 늘어났다. 의료상담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제가 혹시 알츠하이머인가요?’하는 류의 질문들을 하나하나 클릭해서 보다보니 나 같은 사람이 꽤나 많은 것 같았다. 그 질문들에 달린 답변은 하나같이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가까운 신경정신과를 방문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로 끝나고 있었다. 난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가까운 신경정신과를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머릿속에서 톡하고 튀어나와 눈앞에 떨어진 소주에 대한 기억을 주워 헐레벌떡 거실로 나갔다. 언제 켜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TV만이 웅얼대는 그 앞에서 혼자 앉아 조금씩 소주병을 비워나갔다. 소주병이 점점 비워져갈수록 내 머리도 점점 비워져갔다.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한 게 오랜만이라는 게 떠오르자 나는 또 한 잔을 들이켰다. 곧 그 생각도 지워졌고,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5.

시끄럽게 귓전을 때리는 핸드폰 모닝콜 소리에 정신은 번쩍 들었지만 눈은 쉽게 떠지지 않았다. 머리를 부술 듯한 두통의 강도에 놀라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눈을 뜨자 발 앞에 놓인 텅 빈 소주 한 병과 뚜껑도 열지 않은 소주 한 병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힘주어 움직여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월차를 내고 신경정신과를 가 봐야 했다. 조금 이른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신경정신과를 간다고 말하면 월차를 내건 장기휴가를 내건 기쁜 얼굴로 내보내 줄 팀장이었기에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오늘이 가장 적합한 날일 것이었다. 현관으로 향하는데 치우지 않은 소주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빈 병을 쓰레기통에 넣고 열지 않은 병을 넣으려 냉장고를 열었다. 수많은 소주병들이 새 병을 반기고,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래, 늘 두병을 사 와서 한 병밖에 못 먹었었지. 어젯밤처럼. 그게 벌써 엿새째구나. 오늘은 안 사와야지.

사무실에 도착하니 출근시간에서 7분정도 지나있었다. 사무실 사람들의 나를 보는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참 내, 지각 좀 했기로서니 표정들이 저게 뭐야. 언제나처럼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두지 않고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 팀장에게로 갔다. 조금 크다싶은 목소리로 웃으며 알츠하이머 같아서 신경정신과에 가기 위해서라고 월차를 요구하자, 팀장은 어색한 웃음을 웃으며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진단서 좀 떼어 와서 나도 보여 달라는 팀장의 말에 똑같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회사 가까이에 있는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은 건물의 종합병원에는 신경정신과가 7층에 있었다. 별로 기다리지 않고 올라탄 엘리베이터는 과장님 방을 향해 날아가는 엘리베이터보다는 확실히 더 편했다. 매일 타던 엘리베이터보다 처음 타는 엘리베이터가 편하다는 것의 아이러니컬함이 오랜만에 나를 웃게 했다. 바닥에 누워있던, 누군가가 떨어뜨리고 내렸을 스포츠신문의 1면이 눈에 들어왔다. 톱 탤런트 아무개와 인기 가수 아무개의 갑작스런 이혼 소식이었다. 저런 기사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얘네가 결혼을 했었나? 그런 기사는 보통 내 시선까지 오래 붙잡진 못했다. 곧 엘리베이터는 신경정신과가 있는 7층에 나를 뱉어두고 또 몸을 옮겼다.

조예슬 님, 하는 부름에 님이라는 호칭은 언제 들어도 어색함을 느끼며 진찰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딘가 편안하게 생긴, 의사선생님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며 나를 맞았다. 어릴 때 느끼던 병원이라는 곳의 왠지 모를 압박감은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의사선생님의 편안한 얼굴 같은 것과는 별개로 그 압박감은 내가 왜 여기 왔던가 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생각보다 컸나 보다. 다행히도 병원에 온 이유는 곧 생각이 났다. 의사선생님의 무엇 때문에 찾아 왔냐는 풍의 상투적인 질문에 나는 나의 증상들과 알츠하이머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조심스레 풀어 놓았다. 혹시라도 알츠하이머인 것 같다는 대답이 나올까 봐 가슴을 졸이던 나는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일시적인 기억력 감퇴가 올 수 있어요, 하는 잔잔하게 미소 띤 목소리에 티나지 않게 긴 숨을 내쉰 나는 마음을 놓았다.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어느 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기분도 좋은데 집에 갈 때 소주나 두어 병 사 가야지.

“스트레스성인 것 같은데, MRI 한 번 찍어 보시겠어요?”

스트레스성인 것 같은데 왜 MRI를 찍으라고 하는 걸까, 하는 생산적이지 못한 의문이 또 고개를 들었고, 곧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0.

다음 날, 그녀는 기분이 좋아 받자마자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며 접어버린 진단서를 팀장에게 내밀고 자리에 가 앉았다. 팀장은 진단서의 내용에 딱히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를 불쌍한 듯 바라볼 뿐. 다시 진단서를 꾹꾹 접어 흰 봉투에 넣고,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팀장은 어제 들었던 과장의 말이 떠올랐다.

“조예슬 씨 말야, 오늘 회사 근처에 내 친구가 의사로 있는 신경정신과에 갔나 보더라고. 조예슬 씨가 요즘 거기 자주 가서 내 친구랑 아는 사이였잖아. 예상대로 알츠하이머로 진행됐다더군. 내 친구도 못 알아보고, 진행 속도가 빠른 모양이야. MRI도 찍고서 금방 잊어버렸다는데……. 불쌍하게 됐지, 젊은 나이에. 혹시 오늘 또 나왔었나? 어제 불러서 한 얘기가 오늘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한 얘기였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연신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Eto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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