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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술 (퇴고)

  • 작성자 J에대한
  • 작성일 2008-01-08
  • 조회수 852

지독한 술
 

 


 건너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공허한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나지막이 들려온다. 전화가 끊겼다. 침묵만이 무성한 주변. 찬바람이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창문엔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걸려있다. 고목 한그루. 나는 짙은 공허감 속에 빠져버린 것만 같다. 머리가 지끈 지끈거린다. 늘 예고 없이 찾아와 힘들게 하는 미열. 미열과 함께 어김없이 함께 찾아오는 두통까지. 내가 전화받는 틈을 타 은근슬쩍 찾아온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녀석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늘어나면서 진군해오고 있다. 머릿속에 벌레들이 뒤죽박죽 난동을 부릴 때쯤이면 습관적으로 책상 옆에 있는 두통 제를 하나 집어삼킨다. 약 10분에서 15분 정도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테지. 나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는다. 전화는 끊겼다. 그러나 올케의 목소리가 새록새록 다시 들려온다.
- 형님, 사실은…. 그이가 알코올 중독증세가 있어요.
자꾸만 올케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형님, 사실은…. 그이가 알코올 중독증세가 있어요. 지그시 감은 눈을 비집고 허탈한 눈물이 새어나와 뺨을 타고 흐른다. 순간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울컥해 목에 메인다. 나는 힘들게 숨을 죽여 삼켜버린다. 북받쳐오는 슬픔은 소슬한 1월의 밤바람과 함께 유년시절의 방문 앞에 서서 조용히 노크를 한다.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심지어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지 사 개월이 지났음에도 술을 마셨다고 했다. 물론 아이가 들어섰다는 걸 알고 난 후에는 용케 술을 당분간 끊었지만. 나는 다행히도 보통의 상식을 뒤집고 아무런 지장 없이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임신 중에 알코올을 섭취할 경우 아기에게 심각한 해가 간다는 보통의 상식을 뒤집은 채 말이다. 그 후 동생이 태어났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짊어지고 태어난 위험이 한층 낮은 수위였다는 것. 동생은 엄마의 위험한 취미가 잠잠해갈 시기에 용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우리 둘 다 바깥공기를 마신 뒤로, 엄마가 안정을 찾게 된 뒤로는 이야기가 같으니까. 엄마의 취미는 마침표가 없이 쉼표만이 존재하는 지독한 진행형이었다. 매일같이 마셨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나름대로 어린 나와 동생에게 자신의 취미를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눈이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특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베란다에 나가서 무언가를 마시는 검은 실루엣은 관찰 대상 1호였으니까.
 어느 날은 엄마가 술에 취해 자는 틈새를 이용해 베란다에 나가보았다. 까치발로 겨우 베란다 불을 켜고 엄마의 실루엣이 보이던 곳까지 걸어갔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검은 비닐봉지 사이로 진로 소주 여러 병이 가득 보였다. 푸른색 소주병에 두꺼비 모양이 그려진 빨간 뚜껑의 병, 진로. 그때는 잘 몰랐다. 그 수많은 병과 바닥에 누워 골골대는 엄마를 연방 바라볼 뿐.
 엄마는 며칠간을 내리 술만 먹다가 며칠간은 술병으로 끙끙 앓았다. 힘없이 침대에 누워서 있다가 화장실로 뛰어가 게워내기만 했다. 그러다 화장실에 갈 힘조차 남아있지 않으면 나보고 작은 바가지를 하나 가지고 오라고 했다. 작은 바가지는 곧 엄마의 헛구역질을 받아내었다.
 엄마가 한참을 앓고 나면 술을 먹지 않는 정상적인 생활이 찾아왔다. 다른 집 엄마들과 다름 없이 아침이면 학교에 입고 갈 옷을 두고 모녀간에 싸웠고, 머리를 땋아주었고, 나팔꽃 관찰일기 숙제도 같이 해주었다. 하지만, 며칠 뒤가 되면 다시 흐리멍덩한 생선 눈으로 소리를 지르며 때렸고, 마른 나뭇가지처럼 파르르 떨었고, 다시 머리를 땋아주었다. 위태로운 취미의 악순환이었다.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단다. 술로 성난 엄마가 잠들길 기다리면서 아빠가 늘 하던 말이었다. 나는 밤이 되면 빨간 눈을 번뜩이며 매를 들고 쫓아오는 엄마를 피해 집안을 도망 다녔다.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엄마의 가녀린 손에 잡힐 즘 싶으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아빠를 찾으러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나왔다. 추운 밖에서 내복차림으로 동동 떨고 있으면 아빠는 연방 눈물만 글썽이는 나를 잠바 폭에 감싸 안았다. 집이 바로 뒤에 있는 대도 불구하고 집 앞 계단에 앉아 아빠와 나는 엄마가 잠들길 기다렸다. 한참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가, 별을 세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아빠가 만들어내는 담배 연기 고리가 끊어질 때쯤이면 들어갈 수 있었다.
 엄마의 취미는 고리를 끊지 못했다. 결국, 엄마는 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하늘로 떠났다. 쓸쓸한 거실에 늘 켜져 있는 텔레비전이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리를 온종일 쉬지 않고 떠들어대던, 내가 열 살이 되던 1999년 1월의 어느 밤이었다.
 
- 형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고 계세요? 요즘은 뭐 하고 지내세요?
 오랜만에 올케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늘 싹싹하고 밝은 올케는 변함없었다.
- 후후, 그냥 별일 없이 지내지 뭐. 올케는 잘 지내? 애들은 잘 크고 있어?
 건너편에서 올케네 애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이들 목소리에 불과 몇 분전 거래처 전화로 말미암아 잔뜩 잡고 있던 미간의 주름을 놓는다.
- 뭐, 저도 그렇죠. 아, 형님. 이제 곧 어머님, 아버님 제사가 다가오네요.
 나는 달력을 바라본다. 1월 23일.
- 응, 그러네. 잘 됐다. 그때 올케네 애들 보러 가면 되겠네. 아…. 애들 많이 컸을 라나? 우리 아우는 잘 지내고 있어, 올케? 아우가 좀처럼 연락을 안 하네.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하더니 말이야.
 동생을 떠올리며 달력 한 장을 넘겨 구정을 찾고 있는 데 조금 힘이 꺾인 올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아. 저기, 형님. 뭐 궁금한 게 있는데…….
 나는 구정 날에 동그라미 표시를 한 뒤 어깨에 걸치고 있던 전화기를 바로 잡는다.
- 응? 뭔데?
 올케는 힘겨운 듯 조심스레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 저…. 형님. 어머님이 술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저번에 그러셨었죠?
 이미 흉터가 되어 만져도 별 느낌 없는 이십 년도 얘기였다.
- 응.  알코올 중독이셨어.
 올케의 한숨소리가 미세하게 전화선을 타고 느껴진다. 육감이 발동한다. 안 좋은 일이 있는 걸까. 듣고 싶지 않을 만큼의 안 좋은 소식.
- 저…. 형님. 그럼 어머님의 가족 분 중에 알코올 중독이셨던 분이 계시나요?
 가슴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대체 올케는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 우리 엄마 쪽? 아. 외할아버지가 술로 돌아가셨어. 그리고 우리 엄마도 술로 돌아가셨지. 근데 올케,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나는 조심스레 묻는다. 잠시 침묵이 돈다. 정체된 주변. 그 침묵을 깨고 올케가 나지막이 말을 한다.
- 저……. 형님.
 평소에 시원스럽기만 한 올케가 뜸을 들인다. 그래서 더욱더 기분이 좋지 않다.
- 저……. 형님. 사실은…. 그이가 알코올 중독증세가 있어요.
 나는 물어뜯던 손을 멈춘다. 멍하니 창문의 걸린 겨울을 바라본다. 시선은 흰 눈이 덮인 고목을. 그러나 내 눈에는 아무것도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수화기 너머에선 올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 한 일 년 정도 됐어요. 처음엔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특히 심해졌어요. 한……, 삼 개월 전부터는 술만 마셔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애들도 때리려고 하고, 화도 심하게 내고, 툭하면 소리 지르고…….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입이 열어지지 않는다. 귀에서는 자꾸만 남동생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얘기만이 허공에서 맴돈다. 한참 수화기 너머로 무거운 공기만 오가고 있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겨우 입을 떼어 올케에게 말한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집에 찾아갈게.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부모 중에 한 사람이 알코올 중독이면 자식이 알코올 중독이 될 가능성은 약 50%. 엄마의 취미는 외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두 사람의 마지막 선택은 같았다. 술이 좋으니, 하늘로 가겠다. 외할머니와 아빠는 술 한 잔 하시는 날이면 꼭 나를 옆에 두고는 말씀하셨다. 알코올 중독은 유전이란다. 지독… 하기도 하지. 너랑 네 동생은 외할아버지처럼, 엄마처럼 되면 안 된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외할머니는 내 머리를 가만 쓰다듬어 주시다가 소주잔을 한잔 비우시더니 으… 이 쓴 걸 뭐가 그리 좋다고,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셨다. 아빠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 중에서 누군가 엄마를 닮게 되면 아빠는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둘 다 제발 엄마를 닮지 말라고 쓴 술을 넘기며 말씀하셨다. 끝내는 쓴 술이 아빠의 눈을 충혈되게 만들면, 너보다는 네 동생이 엄마를 닮을까봐 걱정이란다, 라고 토로했다. 나는 분했다. 아빠가 내려놓은 소주잔을 타고 흐르는 술을 보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재빨리 훔쳤다. 정말 분할 일이었다. 나는 결국 속으로 울분에 차 파란 소주병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독해. 넌 이제 엄마도 모자라서 남은 사람들도 데려갈 생각이구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술을 싫어했다. 친척들 모임에서 장난으로 술 한 잔 마셔보지 않겠느냐고 하면 강하게 거부하곤 했다. 술잔만 가까이 갖다 대도 뿌리쳤다. . 하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나는 술을 마시게 되었다. 친척들은 조심스레 술을 건네며 짓궂게 말을 걸었다. 어릴 땐 그렇게 안 먹겠다고 하더니. 그리고 한참 뒤에는 술을 잘 마시는 나를 보곤, 너 술이 센 편이로구나. 네 동생은 약하던데. 누굴 닮았을까?, 라고 말했다.
 누굴 닮았을까. 처음엔 엄마도 아빠도 술을 잘 먹었으니까 둘 다 닮았으려니 했다. 하지만, 옆에서 아빠는 엄마는 술을 잘 먹은 게 아니라 오히려 잘 못 마시는 편이였다며, 다만 술을 좋아했을 뿐이라고 했다. 누가 뒤쪽에서 말했다. 그건 말이다, 네가 엄마 배속에 있었을 때부터 술 맛을 알았기 때문이야. 모두가 인상을 찌푸리고 바라본 곳에는 술 취한 엄마와 몇 번 싸우곤 했던 고모부가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안 그래, 여보?
 아빠는 술에 취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더 이상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유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누군가가 닮아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엄마를 닮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내 의지력에 대한, 또는 그 문제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라기보다는 동생이 엄마를 닮게 되면 말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다. . 다만, 육감으로부터 전해오는 예감이었다. 물론 우리 둘 다 보통의 상식을 뒤엎고 정상적으로 태어난 것과 같이, 한 번 더 오류가 일어나길 바랐지만.
 
 초인종을 누른다. 아이들이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정겹다. 문이 열리고 잔뜩 든 선물상자 사이로 아이들의 미소가 보인다. 살짝 수척해진 올케도 곧이어 나온다. 나는 올케와 눈인사를 하고 아이들에게 이끌려 방에 들어간다. 아이들이 선물로 사온 장난감에 빠져있는 사이 조용히 방에서 나와 올케에게 다가간다.
- 올케, 살이 더 빠진 거 같네.
- 한…. 2kg 빠졌나 봐요.
- 애들 아빠는 어디 있어?
-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형님 온다는 얘기는 그냥 안 해놨어요.
 밖이 깜깜해지기 시작한다. 일단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 일은 하는 거야?
- 이번 달에 장기휴가를 냈대요. 그래서 요즘은 제가 시간제로 일하고 있어요.
- 장기휴가?
- 저도 아침에 애들 아빠 깨우다가 들었어요. 회사 안가냐고 그랬더니, 장기 휴가를 냈다지 뭐예요. 회사에 전화해서 알아보니까 맞대더군요.
 나는 점점 열이 나기 시작했다.
- 애들 아빠, 어느 정도인 거야?
- 처음에는 고민이 있는 줄 알았어요. 자꾸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에. 그런데 어느 날 서부터는 집에서 술을 혼자 먹더군요. 그리고 세지도 않은 술을 자꾸만 마셔요. 그만 마시라면 막 화를 내고. 원래 그렇게 화내는 사람이 아닌데…. 어느 날은 술을 숨겨봤어요. 그런데 술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더니 숨긴 거 다 안다고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제가 딱 잘라 숨기지 않았다고 인제 그만 마시라고 애들이 보는 앞에서 왜 이러냐고 그랬죠. 그랬더니, 애들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물건을 집어던지더군요. 그때 애들 아빠 얼굴을 보는데 다른 사람 같더라고요. 무서웠죠. 지금은 더 악화되었어요. 될 대로 되라는 듯 행동을 해요. 항상 술을 달고 살아요. 근데, 워낙 애들 아빠가 약해서…. 며칠은 술을 먹고 지내다가도 며칠은 앓더라고요. 한 일주일을 그렇게 술병을 앓고 나면 좀 멍하니 며칠을 지내요. 술은 먹지 않아요. 다만, 말이 없어져서 조용히 지내죠. 전 애들 아빠가 아프고 나서 술을 먹지 않기에 이제 괜찮나 보다 생각을 했는데 근데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조용히 2주쯤 지났더니 또 술을 먹기 시작하더라고요.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술 먹고, 술병 나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게다가 성격이 더 날카로워져서 아무 이유 없이 애들을 때리는 일이 벌어지곤 해요. 전 애들을 막느라고 바쁘죠. 근데 제가 어떻게 애들 아빠를 힘으로 막을 수 있겠어요. 애들 둘을 껴안고 맞고 애들 아빠는 나중에 제 풀에 지쳐 잠들길 기다릴 수밖에요. 시간이 좀 있으면 괜찮아 질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어느 날은 술병을 앓고 누워있는 애들 아빠를 붙잡고 펑펑 울었어요. 당신이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자꾸 그러냐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애들 아빠가 아무래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자신이 닮아버린 것 같다고 했어요. 노력하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술을 안 먹을 때에 인제 그만 마시자고 그렇게 얘기하면 알았다고 하면서도 술만 다시 마시면 자기는 어머니랑 다르다고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친정에서는 아직 모르고 있어요. 혼자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게다가 애들 아빠 쪽이라고는 형님 한 분 계시고, 어머님이 술로 돌아가셨었다고 형님한테 들은 것도 불현듯 생각이 나고 해서 이렇게 털어놨어요.
 나는, 돌아가신 엄마가 오롯이 떠올랐다. 어쩜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올케가 말한 동생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 모습들이 엄마의 모습과 겹쳐지며 뿌옇던 기억들이 안개 걷히듯 점점 선명해진다.

 

 술만 먹으면 엄마는 아빠랑 싸웠다. 말다툼으로 시작됐는데, 결국은 폭력으로 이어졌다. 엄마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늘 아빠를 향해 폭력을 사용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막으면 막을수록 엄마는 손 놓으라면서 악을 쓰곤 했다. 더는 못 살겠다고 이혼하자고. 집 나가겠다고. 엄마가 그러면 아빠는 문으로 향하는 엄마를 막고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했다. 어떤 날은 엄마가 너무 강하게 나와 집 밖으로 나가게 되어 아빠의 신경이 곤두서있기도 했다. 엄마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 갈 때쯤 아빠는 자고 있던 나를 깨워 엄마를 따라가 보라고 했다. 늦은 밤, 잠결에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녔었다. 엄마는 집에서 가까운 술집에 들어가 술을 시켜먹었고 나는 그런 엄마 곁에서 엄마가 무슨 일을 내지 않을까 노심초사 발을 동동거리곤 했다. 양말을 신지 않고 나온 탓에 발이 꽁꽁 얼어갈 때쯤 이면 엄마는 어김없이 포장마차에서 잠이 들었다. 그제야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고 엄마는 아빠 등에 업혀 집에 모셔졌다.
 가끔은 엄마의 불똥이 내게 튀어 애를 먹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도망 다니기 바빴다. 온 집안을 엄마를 피해 다니며 울기만 했다. 엄마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면 전쟁이 선포된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집안의 모퉁이란 모퉁이 속으로, 아빠 등을 방패 삼아 숨어야 했다. 하지만, 아빠의 등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휴전상태가 찾아오고 제일 안전하다고 들어간 곳으로부터 나와보면 나는 서너 군데는 새빨간 자국을 훈장처럼 지니고 있었으니까.
전쟁으로 초토화된 집에 평화가 찾아오면 부상병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내가 무엇 때문에 맞았는지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맞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이유를 찾은 것이라곤 이번 주 받아쓰기 점수가 엉망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로서는 받아쓰기 점수 때문에 엄마가 저렇게 뿔이 났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다만, 엄마가 화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순한 양처럼 잠들어 있는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엄마 품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곤 했다.
 엄마는 그렇게 술을 며칠간을 먹고 술병을 앓았다. 계속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 아빠가 만들어오는 미음을 다 먹지 못하고 게워냈다. 힘없이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공부를 하거나 동생이랑 놀고 있다가도 금세 바가지를 가지고 뛰어가 건네 주웠다. 엄마는 헛구역질만 해댔다. 엄마가 안쓰러운 마음에 이불 속 엄마 옆에 가만 누워 있었다. 그럼 엄마는 동생이랑 가서 놀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또 혼이 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다가 화가 나있지 않은 엄마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픈 엄마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라 엄마 가까이에서 동생이랑 놀며 엄마를 연방 쳐다봤다.
 힘없이 꼼짝 못하고 누워 있기만 했던 그 며칠이 지나면 엄마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침대 밖을 별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묻곤 했다. 신이 나 온종일 있었던 일을, 아니 엄마가 술 먹는 동안 하지 못했던 학교이야기들을 쫑알쫑알 얘기했다. 그럼 엄마는 잠자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마가 심하게 아프면 아빠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에 늘 엄마 옆에서 놀았다. 엄마가 침대에 있을 때는 늘 동생과 종이접기를 하고 놀았는데 엄마도 심심했던 모양인지 같이 종이 접기를 접어주곤 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 예쁜 색종이를 잔뜩 엄마에게 주었다. 하지만, 엄마가 잘 접고 있나 확인하면 엄마는 게거품을 문 경우가 많았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 다이얼을 누르면 아빠는 아침이고, 점심이고 회사에서 급히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면 엄마는 정상적인 생활을 했다. 숙제도 챙겨줬고 일기도 매일 확인하면서 맞춤법 검사도 했다. 머리도 예쁘게 묶어주고 맛있는 밥도 해주고 옷도 사주고 집안 청소를 했다. 학원도 데려다 주었다. 발레학원에 갔다 와 엄마에게 그날 배운 발레를 선보이면 환한 얼굴로 엄마는 예쁘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하지만, 행복한 그 며칠이 또 지나면 엄마는 다시 술을 먹고 아빠에게 화를 내며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지끈 머리가 아프다. 미열이 점점 강도가 세지는 거 같다. 나는 올케의 얼굴을 바라본다.
- 지독… 하지 우리 엄마가 그랬어. 술을 막 먹고 술병 나서 앓다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했지. 그리고 술이 그리워 질쯤이면 다시 술을 먹기 시작했어. 아빠가 엄마를 닮아서는 안 된다고 엄마도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늘 말씀하셨는데…….
 올케는 말이 없다.
- 다행히도 아빠가 엄마 곁에 계시네. 아마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아빤 미쳐버리셨을지도 몰라. 모르지…. 충격을 받고 아빠 스스로 술을 드시고 세상을 떠나셨을지도.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동생이 들어온다.
- 다녀왔어.
내가 동생을 맞이한다.
- 이제 오는 거야?
- 어, 누나 왔어?
 수처하고 거칠어진 동생의 모습. 술이 잔뜩 취해있다. 동생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 아우님이 하도 연락을 안 하기에 직접 찾아왔어. 누나랑 술 한 잔 하자.
 올케는 걱정스럽게 나를 본다. 나는 괜찮다고 눈짓을 한다. 올케는 애들을 재우고 술과 안주를 가져온다. 동생은 내 술잔에 술을 따라 준다. 나는 술 한 잔을 들이켰다. 목이 화끈하면서 무언가 뻥 뚫린다. 올케와 내 눈이 마주친다. 거실에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올케, 그리고 그 눈을 지나쳐버리는 나와 술에 잔뜩 취한 동생 사이로 적요한 공기가 맴돈다. 상에는 소주 한 병이 있다. 나는 계속 내 술잔에 술을 부어 마신다. 동생은 그런 나를 보며 어리둥절해한다.
- 이야, 오랜만에 술친구 상대하니까 좋긴 한데…. 무슨 일 있어, 누나?
- 있음 해결해줄 거야?
- 그럼. 해결은 못 해도 딸꾹- 도와는 줘야지.
- 말은 참 잘한다. 아, 오늘따라 엄마랑 아빠가 생각나네. 아빠가 늘 하던 레퍼토리 있잖아. 엄마 닮으면 안 된다고. 다른 건 닮아도 좋은데 술 먹는 건 엄마 절대로 닮지 말라고 하던 거 말이야. 생각나?
-……. 생각나지
 술이 찌든 동생의 눈빛, 흐리멍덩한 눈빛, 술 먹은 엄마의 눈빛. 슬픔이 간헐적으로 치밀어 오른다. 철컥. 술로 말미암아 제어장치가 슬며시 풀린다.
- 근데 어뜩 하냐. 그렇게 닮으면 안 된다고 아빠가 그랬는데 네가 닮아버렸네.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린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 엄마를 닮아가고 있잖아. 그 고리를 못 끊고 닮아가고 있잖아.
- 아니야. 난 엄마랑 달라. 닮지 않았어.
- 아니, 넌 닮았어. 네가 하는 행동들 모두 엄마랑 똑같아. 어쩜 그렇게 똑같니.
 동생의 눈빛이 변한다. 순간 멈칫한다. 엄마가 화나면 변하던 그 눈빛과 같다. 그 눈빛을 보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저미는지.
- 엄마를 닮았다고? 웃기지 마. 누나가 뭘 알아.
- 애들 잔다. 소리 낮춰.
나는 화가 치밀기 시작한다.
- 너 그거 알아? 엄마도 누가 당신보고 알코올 중독 아니냐 그러면 너처럼 화냈어. 그리고 너처럼 술만 마시다가 술병 나서 앓고, 앓고 나서 다시 며칠은 술을 안 먹다가 다시 술을 먹곤 하는 생활이 계속 이뤄졌어. 이게 비단 엄마의 생활이라고만 생각하니?
 그 순간, 동생의 술이 찌들어 병든 눈빛이 악하게 변한다. 두려우면서 한편으로는 두렵지 않다. 동생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엄마를 관찰한 것으로 봐서는 이제서부터 동생은 막 나갈 것이다.
 
 외할머니는 술로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신 외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꾸려나가셨다고 했다. 삼 남매. 외삼촌은 집 밖을 전전하며 다녔고 장녀인 이모는 이모대로 살기 바빴다고 했다. 다들 그렇게 나가버리고 나면 막내인 엄마는 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다. 엄마는 학창시절 친구를 잘못 사귀었고 잘못된 길에 빠져있다가 아빠가 내민 손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사람들은 엄마가 그렇게 된 이유를 가족에게 돌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가족으로써 엄마를 잡아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제3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 없이 내뱉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외할머니, 이모, 외삼촌은 그 화살을 고스란히 아빠에게 넘겼다. 이미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 오래다, 라는 것이다. 서로 자기 잘못이 아니라며 발뺌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아빠는 세상에 있는 슬픔이란 슬픔은 모조리 끌어와 껴안고 있었다. 모두 가버리고 우리 가족만 남았다. 나는 아빠를 달래준답시고 쫑알대다가 아빠를 울렸던 것 같다. 아빠는 조용히 말했다. 아까 조금은 서운했었어. 최선을 다했냐, 고 하면 감히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 나름대로는 엄마를 바로 잡으려고 했었어. 하지만, 너무 삐뚤어진 지 오래라 힘들었어. 이미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굳어져 온 걸 쉽게 바꿀 수 있겠니. 고작 1년 정도의 알코올 중독자도 바로잡기 어려운데. 그래도 아빠는 한 번도 엄마를 포기한 적이 없었어. 그리고…. 그냥 미안할 따름이야.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더라면, 바로잡지도 못했더라면 차라리 같이 술친구라도 해줄걸 하고 말이야. 그래도, 조금씩 술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좀 더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 시작이다. 곧 있으면 욕설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상대방이 꿈쩍 않고 강하게 나오면 폭력을 휘두르겠지. 엄마가 그랬었고, 알코올 중독자들의 특징이었다. 역시나 생각대로다. 올케는 내심 겁에 질려 있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동생을 바라본다. 동생의 얼굴에 엄마의 얼굴이 언뜻 비치는 듯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런 꼴을 제정신으로 못 볼 거 같아 독한 술을 마셨지만, 하나도 취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생은 내가 대꾸를 안 하며 무시하자 욕설을 내뱉는다. 나는 그런 동생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아빠가 엄마를 바라봤을 때처럼. 가슴이 먹먹하다. 올케는 연방 나와 동생을 바라본다. 동생의 목소리가 잠이 든 첫째 애를 깨웠나 보다. 방문이 살며시 열리고 첫째 애가 나온다. 눈을 연방 비비며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더니 그 주변에 있는 제 엄마와 나를 바라본다. 올케는 당황하며 아이를 다시 재우려고 아이에게 다가가려 한다. 그때였다. 동생은 한참을 소리 지르고 욕이란 욕을 다 퍼붓더니 아이를 발견한 모양이다. 아이를 향해 와보라며 소리를 지른다. 올케가 급히 동생을 말린다. 왜 애를 불러요? 자게 내버려둬요. 동생은 올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언성을 높여가면서 아이를 부른다. 올케는 아이의 등을 방으로 떠민다.
- 괜찮아. 자, 어서 빨리 방으로 들어가. 아빠가 술을 많이 드셔서 그러는 거야.
- 야, 아빠 말이 말 같지 않아?
엄마도 그랬다. 술에 잔뜩 취한 엄마도 동생처럼 나를 부르곤 했다. 나는 충혈 된 엄마의 눈을 바라보면서 겁에 질렸다. 쉽게 엄마한테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면 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나를 때리곤 했다. 엄마가 미웠다. 마냥 그땐 미웠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어렸을 때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미운 감정은 내가 성장함에 따라 같이 자랐다. 아이를 때리는 사람을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증오심이 솟구치게 되었다. 어느 날은 TV의 한 장면을 보고 있었다. 부모가 아이를 무차별적으로 때리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나는 아이를 때리는 부모의 목을 당장 조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같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 충동은 어린 날의 감정에서 피어오른 증오심 탓일까.
 동생의 손은 아이를 겨냥하고 있었다.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맞았다. 올케는 부리나케 아이를 감싼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져 백지가 된다.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결국 나는 동생을 세게 밀쳐낸다.
- 야. 이 새끼야. 술 처먹었으면 곱게 취해 잘 것이지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때려! 네가 그러고도 애 아빠야? 왜? 이젠 나도 때리려고? 왜 물건은 안 집어던지니? 술 먹고 화내고 사람 때리고 소리 지르고 욕하고 물건 던지고 그래야 하잖아? 이래놓고도 네가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는 거야?
 동생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 아이를 때린다. 올케가 이리저리 아이를 숨겨봤지만 무리였다. 목이 단단하게 메온다. 어렸을 때의 상처가 다시 금이 가고 갈라지는 것 같다. 순식간에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엄청난 고함을 지른다. 우악스럽게 아이를 잡아 숨긴다.
- 애한테 손 하나라도 까딱하면 너 죽는 줄 알아!
- 비켜.
- 못 비킨다면?
- 비켜!
 술을 먹었다 해도, 힘으로는 동생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자꾸 울음이 나오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는다. 힘이 달린다 하더라도 비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동생은 나를 밀쳐낸다. 그 힘에 잠시 밀쳐지지만 아이는 계속 뒤에서 보호한다. 아이는 등 뒤 모서리에 숨어 울음을 참고 있을 것이다. 동생은 아이를 자꾸 데려가려고 했다. 많이 봐왔던 일이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TV에서 볼 때마다 강한 충동을 일으켰던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였다.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제어장치가 한순간에 풀러 진다.
- 야! 애한테 손 하나라도 까딱하지 마! 하나라도 건드리면 나도 죽고 너도 죽는 거야! 그래, 어디 한번 계속 그렇게 나가봐.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그냥 우리 죽자. 그게 어떠니? 어차피 너 이렇게 살아봤자 애 엄마나 애들한테 도움 안 돼. 왜, 죽는 건 싫으니? 대답해봐. 왜 말을 못해. 인마, 나한테 가족이라곤 너 하난데 너까지 술로 먼저 가는 꼴을 보라는 거야? 어? 대답을 해보라고.
고래고래 울며 소리를 지른다. 올케는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애 우는소리, 올케 울음소리, 내 울음소리에 정신없다. 동생의 눈이 잠시 살짝 흔들리지만 다시 새빨개진다.
- 비켜. 왜 다들 울고 지랄이야! 시끄럽다고!
 동생은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엄마도 물건을 던지곤 했다. 접시가 깨진다. 그때도 접시가 깨졌다. 술병도 깨지고, 시계도 깨졌다. 어지럽다. 올케가 물건들을 피해 아이를 안는다. 테이블에는 지난번 동생 생일날 손수 만들어 선물한 파란색 투명 유리 재떨이가 살아남아 있었다. 동생은 재떨이를 발견하고서 아이를 향해 던지려고 한다. 나는 동생을 향해 돌진해 벽에 밀친다. 동생이 든 재떨이를 뺏으려 하지만 무리다. 올케는 아이를 급히 방에 들여보낸다. 동생은 손을 비틀기 시작했고 잡고 있던 재떨이는 벽에 부딪혀 조각난다. 손에서 붉은 피가 새어나오고 있다. 어지럽다. 늦은 밤, 유리 파열의 소리 때문에 나머지 소리가 자취를 감췄다.
 
 그 날 따라 낮부터 엄마의 주정이 심했다. 날카로운 엄마를 피해 밖에 나와 아빠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 갔다 온 옆집 친구를 붙잡고 길가 모퉁이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그리다가 기지개를 켜고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을 바라봤다. 예쁜 여자를 그린다고 그렸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림 속의 여자는 엄마가 되어 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때의 엄마 모습. 옆에서 내가 그린 그림을 힐끔 쳐다보더니 옆집 친구가 물었다. 너 그림 대게 잘 그린다. 커서 화가가 될 거야? 나는 친구를 가만 바라보다 엄마의 치마를 칠하며 말했다. 아니. 난 대통령이 될 거야. 엄마의 치마는 보랏빛이 나는 검은 색이었다. 대통령? 친구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하고는 물었다. 나는 엄마의 종아리에 대일 밴드를 마지막으로 그려주었다. 어젯밤 어디에 긁혀 피가 흐른 종아리를 보았던 탓이었다. 응. 대통령이 되면, 술이란 술은 다 없애버릴 거야. 아무도 못 마시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풋, 하고 웃다가도 끝내 씁쓸해지는 그날의 기억이다. 대통령이 되면, 술이란 술은 다 없애버릴 거라더니 동생이 알코올중독자가 될 때까지 결국은 없애지 못했다.

 

 동생은 주춤해 한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새빨간 피를 보며 안정이 된 것일까. 나는 엄마는 제발 닮지 말라고, 외할아버지를 제발 닮지 말라고 내내 말씀하시던 아빠가 생각난다. 서늘한 우물처럼 깊어져만 가던 아빠의 눈이 생각난다. 짙은 물안개처럼 주변이 흐려진 채 동생의 얼굴에 어린 동생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다. 뜀박질하다 넘어진 손에 피가 나 찔끔찔끔 울고 들어오는 나와 내 손을 연방 바라다보던 동생. 나랑 눈이 마주치자 울상이 되어 아프지 말라고 약 발라주겠다고 펑펑 울던 어린 동생의 모습이 보인다. 동생의 눈빛이 조금씩 순하게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은 독한 술에 취해 결국엔 목구멍 안에서 그 말을 죽여 버릴 테지만 분명히 괜찮냐고, 내가 어제는 미쳤었나 보다, 라면서 미안해할 것이다. 내일이면 내게 그렇게 말할 것이다. 지독한 술에서 깨면 엄마가 그러하였듯,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앞으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잘못했다고 말할 테지. 또다시 그럴 거다. 엄마가 그러하였듯, 누군가 옆에서 이제 술 먹지 말자. 이제 정말 술 끊자, 고 하면 조용히 알았다고 끄덕일 테지. 아연한 기분이다. 나는 허탈하게 웃어버린다.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그때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이 내리고 있었다. 엄마 산소를 다녀오는 길이였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난 탓에 한쪽 면이 푹 가라앉은 산소.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라 하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게 아니었다. 길어져만 가는 그림자를 질질 끌며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는데 옆에서 동생이 말했다.
“누나. 난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는 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알겠다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만 했었다.
나는 유리조각을 구깃구깃 삼켜 넣듯 술잔을 들이킨다. 그 쓴 술을 마시면서 하던 아빠의 말이 생각난다.
“네 엄마도 처음에 잡아 주었더라면 고칠 수 있었을 거다.”
동생도 처음에 바로 잡아주면 괜찮을까. 엄마를 처음에 잡았다고 해서 고칠 수 있었을까. 진눈깨비가 혼란스럽게 내리고 있다. 모든 게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지금 믿는 건 책이든, 인터넷이든, 상담센터든 똑같이 내리던, 내 책상 메모지에 잔뜩 줄이 쳐져 있던 결론이다.
“결국, 본인 의지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침묵만이 무성하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소파에 주저앉은 동생은 정적 뒤에 숨어 잠이 들기 시작한다. 은은한 빗소리의 리듬 속에서 잠든 동생에게 나는 눈으로 말한다. 지독…하지? 너까지 지독하게 연결되었어. 남은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너까지 그러니 난 어떻게 해야 하니. 그땐 말이야, 내가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어. 그래서 엄마를 잡을 수 없었는데, 물론 내가 잡는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누나는 그때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지독해질 거야. 상대가 지독한 만큼 나도 지독해 질 거야. 적어도 엄마가 자신에게까지 해가 미치자 정신병원에 막무가내로 넣으려고 했던 너희 외삼촌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난 말이야, 널 잃지 않을 거야. 엄마를 술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던 아빠도 결국은 실패했지만 포기 할 수도 없는 일이야. 사람이 사람을 바꾼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나름대로 위안을 삼을 수 있다면 엄마는 오랫동안 술을 마셔왔지만 넌 술 마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거야. 지독한 것에 대해서 지독하게 대처해야 하는 수밖에 없어. 나도 지독해 질 거고 네 가족도 지독해 질 거야. 한동안 알아봤는데, 알코올 의존 치료에서의 가족의 개입은 너의 변화 동기 향상에도, 회복과 안정감과 재발 예방에도 크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더라.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다만, 네가 외할아버지 때부터 걸쳐온 술의 문신을 지우기만 하면 돼.


 잠든 동생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긴다. 내 눈에 고인 슬픔 한 방울이 수증기로 증발한다. 나는 남은 독한 술을 마신다.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은 알코올 의존자의 가족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기 때문에 가족 병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지. 결국, 나는 계속 같은 병을 앓아오고 있었던 것이고. 치유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병 말이야.
 알고 있다. 지독한 고리를 끊기란 매우 어렵다는 걸. .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어려서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집안은 어지럽혀져 있다. 전쟁 뒤 찾아오는 평화는 이런 느낌일까. 올케는 깨진 물건들을 치우고 있다. 은은한 빗소리의 리듬이 들려온다. 동생의 책상에 치료에 관련된 문서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 옆에 단주를 원하는 알코올중독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익명의 자조 모임 A. A 에 대한 내용의 종이도 같이 올려둔다. 지독한 알코올이 동생의 뺨을 타고 흐른다. 잠잘 때만큼은 평화로워 보이는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지난날 어린 내가 엄마에게 그러하였듯이.

 

“누나, 난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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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니까, 작년에 올린 글을 퇴고한 셈이네요^^

어쩌다가 다시 읽고 고치게 되었어요...;;

맞춤법 검사도 하고, 문장도 좀 고치고...

아주 새롭게 변한건 아니지만 삭제할건 삭제하고

다른 얘기도 드문드문 좀 넣었습니다...^^;;

 

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J에대한
J에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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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3
실종

  긴 소파에 쪼그리고 누워서 얕은 잠을 자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햇살이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깜빡깜빡 비추고 있었다. 오늘도 그와 그의 아내는 잃어버린 아이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온 터였다. 테이블 위에는 둥근 얼굴, 긴 머리, 125cm의 키의 아홉 살의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찍혀진 인쇄물이 놓여 있었다.  6개월 전, 그의 아내가 마흔 가까이에 겨우 갖은 아이가 동네 놀이터에서 사라졌다. 친구들이랑 잠깐 놀다가 들어오겠다고 나간 아이는 제 엄마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 상태로 더 이상 성장하지도 않고 멈췄다. 일단 파출소에 실종신고를 했지만 유괴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는 울지 않았다. 가만가만 제 풀에 지쳐 눈물이 고일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울지 않았다. 울면, 정말로 아이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일종의 스스로가 만든 미신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아이가 사라진 뒤로 악착스럽게 지금의 상황을 잘 견뎌 내고 있었다. 그는 그보다 더 위태로워 보이는 아내를 항상 조심스레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그 조차도 위태롭기는 그지없었다.  어디선가 듣기로 아동 실종은 3시간 안에 못 찾으면 3일, 3일 안에 못 찾으면 3달. 보통은 4, 5 년은 걸린다고 했었다. 그는 그 말을 떠올려보고는 씁쓸한 잔기침을 뱉어내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그는 애써 아기를 키우고 싶은 사람이 데려갔으려니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견딜 수 있다고 달래봤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올가미처럼 그의 마음을 옭아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목이 단단하게 메어와 아팠다. 딸의 모습은 딱 거기서 멈춰있었다. 그의 마음속의 시계도 함께 멈춰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딸아이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나눠줄테지만 아이의 얼굴은 조금은 변했을 것이다. 그는 부질없지만 이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것은 아내가 잠에서 깨어 늦게 저녁준비를 할쯤이었다.       - **경찰서입니다.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수사관의 말은 계속 그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유괴...라고. 딸아이가 유괴를 당해 죽었고 산에 매장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랬었지. 그는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계가 아득해져왔다. 어슴푸레 떠오르던 최악의 상황.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그것만은 아닐거라 애써 세차게 부인했었던 상황이 마침내 실제라고 판명이 나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산 속에 암매장되어있었던 딸아이의 몸을 보며 결국은 참아냈던 울음을 쏟아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범죄현장 속으로 들어가던 그의 아내는 땅 속에 있는 죽은 아이를 확인

  • J에대한
  • 20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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