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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킬(road kill)

  • 작성자 우기부기
  • 작성일 2007-12-30
  • 조회수 703

1

 

드라이브 중이었다.

2년 동안이나 미국에 나와 있던 삼촌이 돌아왔고, 그 덕에 나는 삼촌과 함께 마치 시골길같은 한적한 도로를 삼촌의 트럭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나는 삼촌을 무척 좋아했다. 삼촌은 늘 명랑했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대신 돌아올 때면 나에게 줄 선물을 잔뜩 안고 왔다. 무엇보다 삼촌은 나를 무척 좋아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저절로 좋아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그 날도 삼촌과 같이 드라이브를 나왔었다. 7월이었고, 끈적끈적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더운 날씨였다. 도로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삼촌은 차의 에어컨을 틀고 시끄럽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삼촌이 미국에서 사온 과자 봉지들을 뜯으며 킥킥거렸다. 무척 평화로운 순간이었는데, 난생 처음 보는 제품명의 음료수 캔을 집어들었을 때 그 평화가 갑작스레 깨져버리고 말았다. 삼촌이 갑작스럽게 트럭을 세운 것이다.

“삼촌?”

나는 음료수 캔을 입에서 떼며 삼촌을 바라보았다. 삼촌은 심각한 얼굴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촌이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덩달아 나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도로에는 우리 차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정적 그 자체였다. 나는 차체의 보닛 앞으로 다가가며 삼촌을 불렀다. 삼촌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유심히 보는 듯 했다. 삼촌이 무엇을 보는지 알았을 때, 나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건 고양이 시체였다. 차에 깔려 죽은, 고양이 시체. 우리보다 먼저 이 도로를 지나간 누군가가 고양이를 친 것이었다. 심지어 머리를 깔아뭉갠 모양이었다.

새빨간 살덩어리가 멀쩡한 고양이의 몸 위로 달려 있었다. 고양이 시체에는 시허연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고. 그런 걸 본 게 처음인 나는 여전히 헛구역질을 해대며 삼촌에게 다가갔다. 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삼초오오오오오온.”

더웠다. 정말 죽을 듯이 더운 날씨였다. 도로가 녹아서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머리가 터져버린 고양이 시체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삼촌의 어깨를 잡았다.

“삼촌.. 가자....”

“정현아.”

난데없이 삼촌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삼촌의 어깨를 좀 더 세게 흔들었다. 삼촌은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

“삼촌 트렁크에 삽 있거든? 트렁크 열고 그것 좀 가져와라.”

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삼촌을 바라보았다. 삼촌의 얼굴은 핼쑥했다. 이럴 때 삼촌의 언동을 반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뒤쪽으로 걸어가 트렁크를 열었다. 매캐한 연지 때문에 몇 번 기침을 하고 삽을 꺼냈다. 은색 삽이었다. 왜 이런 걸 트렁크에 두고 다니는 건지. 나는 질식할 정도의 더위 때문에 몸을 비틀거리며 삼촌에게로 걸어갔다. 나에게 삽을 받자마자 삼촌은 고양이 시체를 삽으로 퍼들었다. 내가 질겁해 소리쳤다.

“삼초온! 뭐해!”

삼촌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도로 옆으로 가더니 고양이 시체를 도로 옆 붉은 흙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흙을 푹푹 퍼서 구덩이를 만들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삼촌을 바라보았다. 내가 발을 동동 굴렀다.

“삼촌...”

“정현아, 네가 몇 살이지?”

삼촌이 또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삼촌이 구덩이에 고양이 시체를 집어넣는 걸 보면서 말했다.

“열.. 세 살인데.”

“정현아, 잘 들어.”

삼촌은 고양이 위에 흙을 쏟아부었다. 삼촌이 흙을 퍼나르며, 땀이 송골송골한 얼굴로 말했다. 삼촌은 나를 전혀 보고 있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들은 참 중요해. 사람들만 중요한 게 아냐.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참 몰라. 정현아. 넌 그럼 안 돼. 세상 모든 게,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해. 알겠어?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살아있는 생명들을 얼마나 중히 여겨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이 고양이를 친 사람들도 이 고양이를 묻어줬어야 했어. 생명이 얼마나 대접받을 가치가 있는지 그 사람들은 모를 거다.”

나는 삼촌이 왜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무슨 선생님 같은 말투였다. 삼촌은 이렇게 죽은 동물들이 너무나 많다고, 이렇게 도로에서 죽은 고양이들이 너무 너무 많다고. 이렇게 죽은 동물들을 ‘로드 킬’당했다고 한다고. 삼촌이 말하는 동안 나는 그 더위 속에서, 몸을 떨며 삼촌을 바라보았다. 삼촌이 울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땀을 흘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삼촌은 그 후 세 달 후에 죽었다. 암이었다. 미국에 간 것도 암의 발생을 막기 위해서였단다. 결국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삼촌은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삼촌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삽을 늘 트렁크에 두고 다녔는지를. 대체 어디에 사용하려고 가지고 다녔는지를.


2


"이정현, 정현아! 자? 야, 자?"

선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리고 선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 적응하기까지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얘, 너 어디 아파? 선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봉고차 안이었다. 재혁이 오빠와 호준이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정현이 어디 아프대?

“아냐.. 괜찮아...”

나는 힐끗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바깥쪽은 완연한 어둠이었다. 벌써 밤이라니. 자는 동안은 시간이 배로 일찍 지나간다. 이래서 나는 낮잠이 싫다. 자고 나면, 무언가 커다란 것을 하나 잃어버린 것 마냥 커다란 소실감이 느껴진다. 특히 삼촌의 꿈을 꾼 날은 더더욱.

무슨 일이든 세월에 풍화된다고, 시간을 이기는 것 따위는 없다고. 그렇게 배웠는데 이상하게도 요즘은 삼촌의 꿈을 자주 꿨다. 5년이나 지난 일이라 다 잊혀졌고, 이제 떠올려도 가슴 아프지 않은 기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현이 너 진짜 어디 아파? 그냥 돌아갈래?”

“아냐. 아냐. 오빠. 나 진짜 괜찮아.”

나는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차가운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이런 생각이 나는 게 싫다. 이런 복잡한 기분에 빠지는 것도 싫고.

삼촌의 꿈을 게 싫은 것은, 내가 지금 과연 행복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생명이 얼마나 가치받는 것인지 몰라서 그래.. 그런 삼촌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면, 내 생명은 과연 가치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나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선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며 운전을 하고 있는 재혁이 오빠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내가 행복해야 하는지 자문하는 거지? 난 거의 완벽하게 모든 걸 소비하고 있었다. 적당한 외모. 재밌는 친구들. 상냥한 애인. 그리고 별 문제 없는 가족까지.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하나하나마다 다 집착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선미가 내 얼굴이 유독 심각해 보였는지 장난스런 투로 말했다.

“왜. 재혁 오빠가 꿈에서 헤어지쟤?”

“야! 박선미!”

운전대에서 재혁 오빠가 소리쳤다. 선미와 호준이가 킥킥대며 웃었다. 선미는 내 이마를 슥슥 쓰다듬었다. 내가 그런 동작을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늘상 그랬다.

“하긴, 이제 스무살이나 된 남친을 뒀으니 복잡한 심정이겠지. 곧 군대 가면 언제 고무신 거꾸로 뒤집어 신을까 고민할 테구.. 물론 나랑 호준이는 한참 기간이 남았지만.... 재혁이 오빠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삭발하면 더 웃기겠다. 오빠, 영장 나왔어?”

“너 엄마한테 여기 나왔다고 이른다?”

“아, 하지 마. 하지 마! 오빠 제발~.”

호준이와 선미, 재혁이 오빠가 쉴 새 없이 깔깔댄다. 그 와중에도 나는 당연히 내가 선미네 집에서 자고 있을 거라고 믿을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진다. 선미네 어머님은 선미가 우리 집에서 자고 있는 줄 아실 테고. 이렇게 두 커플끼리 폭죽놀이하러 바다에 가시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계실텐데.

 나는 그 생각을 잊기 위해 운전대로 다가가 재혁이 오빠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오빠가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야, 나 사고 나겠다. 아우, 좀 놔봐.”

“아, 이정현. 너 진짜 차이는 꿈 꿨냐?”

“그런가봐, 쟤 표정 봐. 완전 우울해.”

또다시 한 번 꺄르르르. 차 안의 분위기는 잔뜩 들떠 있다. 나는 재혁이 오빠의 목을 좀 더 꽉 조르며 말했다.

“오빠, 나 좋아해?”

그 소리에 차 안은 한 번 더 뒤집어졌다. 심지어 재혁 오빠까지 운전대를 놓칠 듯이 끊임없이 웃어댄다. 나는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이런 진지한 질문을 할 때마다 오빠는 늘 이런 분위기다. 선미가 호준이의 허리를 꽉 껴안고 정신없이 웃어댔다. 야, 저거 봐. 저거 봐. 오빠 또 집에 와서 정현이 흉내 내겠네. 오빠아, 나 좋아해애?

그 말에 차 안은 한 번 더 웃음소리로 시끄러워진다. 나는 오빠의 목을 풀고 다시 뒷좌석으로 돌아갔다. 재혁 오빠가 부들부들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아주 아주. 응? 됐어? 만족하지?”

“어.....”

대답을 하려는 순간, 재혁이 오빠가 갑작스레 차를 멈췄다. 덜컹, 서로 껴안고 정신없이 웃고 있던 호준이와 선미도 동작을 멈추고, 나는 잔뜩 긴장했다. 어쩐지 데자뷰가 휙, 스쳐간 것이다. 멈춰선 차. 그리고 내려선 삼촌. 그렇게 재혁 오빠가 내려섰다.

“오빠!”

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재빨리 달려갔다. 또다시 구역질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헛구역질이 아니어서, 나는 도로가에 속 안에 든 것을 게워냈다. 오빠가 재빨리 다가와 내 등을 두드렸다. 놀랐어?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터덜터덜 그 물체 앞으로 다가섰다. 고라니였다. 사슴도, 노루도 아닌 고라니였다. 배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시뻘건 피를 잔뜩 흘리고 있는 고라니. 무엇보다 끔찍한 건 그 생물이 아직도 살아서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신고해!”

그 소리에 선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고라니를 보고 입을 틀어막던 선미가 잠시 후에 말했다.

“미쳤어? 야. 신고하면 우리 죽어. 엄마 아빠한테 완전 죽는다니까? 야. 야. 그냥 가자.”

“지금 장난해? 저 고라니가 죽으면 어떡할 건데?”
저게 고라니야? 호기심을 보이며 묻는 호준이가 더없이 역겹게 느껴졌다. 이 동물이 죽어가고 있어! 나는 그렇게 소리지르고 싶었다. 재혁 오빠가 내가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였는지 등을 툭툭 두드렸다.

“진정해. 정현아.”

“진정하라니, 이게 그런 문제야?”

재혁 오빠가 뒤로 물러섰다. 앞머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야. 왜 그래. 어차피 저거 그냥 놔두면 죽어. 어쩔 수 없어. 우리 들키면 죽는다. 정현아.... 우리 부모님 엄격한 거 알잖아. 나랑 선미랑 둘 다 아주 죽어. 너랑 호준이도 마찬가지일 테구...”

그 후로도 오빠가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고라니에게로 그저 비척비척 걸어갔다. 고라니의 눈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것이 말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살려줘.

생명이 얼마나 대접받을 가치가 있는지 그 사람들은 모를 거다.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위치가 갑자기 너무나도 정확히 파악된 것이다. 귀여운 애인. 예민하지만 재밌는 친구. 나름대로 착한 딸. 그런 거 싫어. 삼촌. 날 속이고 사는 거 싫어. 나는 고라니에게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뻘건 피로 물들어 있는 그 목을 끌어안았다. 선미가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다. 재혁오빠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야, 이정현. 너 왜 이래? 미쳤어?”

나는 그저 고라니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뜨끈한 온기가 팔 안에 퍼져나갔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미친 건 너희들이야. 하지만 내 목에서는 그저 꺽꺽거리는 소리밖에 새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고라니의 머리에 내 머리를 부비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소리질렀다.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신고해! 신고하란 말이야!! 얘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어버릴 거야! 어서 사람들 불러! 119 부르던지, 경찰 부르던지. 아무나 부르라고!”

“정현아..”

“미쳤어!! 정말 미쳤어!! 왜 그렇게 서 있어! 아무라도 불러!”

속이고 사는 건 싫다. 그저 착한 딸, 좋은 애인. 좋은 친구로 남는 건 싫다. 난 그냥 나로 살고 싶은데, 왜 그냥 이 상태에서 살아가는 걸까. 삼촌.

삼촌도 괴로웠을 거 아냐. 죽는다는 거 생각하면 지금까지 자기 진심 못 말해온 거 다 후회됐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라니의 온기가 식어가지 않게 좀 더 부드럽게 그것을 안았다.

“야, 이정현. 네가 좀 아파서.. 지금 힘드나 보다.. 그런데....”

“입 닥쳐!”

재혁 오빠가 빳빳히 굳는 것이 보였다. 선미가 핸드폰을 드는 모습도 눈물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고. 호준이가 뭐라고 만류했지만 선미는 그대로 통화를 했다. 나는 선미의 얼굴이 내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얼굴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흐느끼며 고라니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찝찝하고도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고라니의 피로 내 바지가 흠뻑 젖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미와 재혁 오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호준이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소리도 들렸다.

불이 보였고, 선미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자연 동물 보호 협회라느니,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네요. 좀만 더 늦었으면 이 복작 노루는 곧장 죽었을 겁니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선미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문득 선미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 아이는,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내가 일으키는 이 잔잔하고도 거대한 혁명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왜 그렇게 간단한 문제를 이렇게 힘들게 풀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울음이 조금씩 떨려나왔다. 선미가 내 곁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미안해. 처음에 곧장 신고 안 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선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선미는 어떤 것에나 낙관적이고 가볍게 생각하는 아이였지만, 이 행동의 의미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리라.


3


그 일이 일어난 후 두 달 뒤, 나는 재혁 오빠와 헤어졌다. 그 일이 원인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 고라니와도 관계가 밀접할 것이다. 나는 조그맣게 물었다. 왜 헤어져야 돼?

“...네가 너무 어려서.”

“옛날에는 안 그랬잖아.”

“그 때는 내가 널 잘 몰랐던 거였던 것 같아... 넌 좋은 애니까 나중에 재밌는 남자애랑 사귈 수 있을 거야.”

알았어. 나는 여전히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를 돌아서 가려던 재혁 오빠가 뭔가가 생각 난 듯 다시 몸을 빙글 돌렸다. 오빠가 말했다.

“그 고라니 소식은 들었니?”

나는 몸을 움찔했다. 뒷다리 한 쪽을 잘랐대. 그래도 무사하다더라.

나는 오빠가 약간 웃는 걸 볼 수 있었다. 어색한 웃음이었다. 오빠는 날 웃기게 생각하지? 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그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오빠는 다시 뒤를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좋아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건 괴로운 일이다.

선미와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예전에 비해 가벼웠던 관계가 뭔가 좀 더 묵직해진 감이 있지만, 둘 다 그것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선미는 간간히 내 눈치를 보면서 오빠가 대학생 언니와 사귄다고 말했다. 나보다 훨씬 못생기고, 성격도 나쁘다나.

난 괜찮아. 내가 약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미는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아는 애 중 괜찮은 애 있거든.”

“괜찮아. 지금은 누구 사귀고 싶은 마음 없어.”

선미는 자신의 오빠와 똑 닮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래. 그렇구나. 하고 말했다. 나는 선미가 집으로 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문득. 그 고라니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로 환경 보호 단체에 얘기하면은 이외로 쉽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고라니를 들고 그렇게 소리지르던 그 날의 혁명은 너무 짧았다. 솔직히 난 여전히 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 변화란 그렇게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나는 가만히 내 손을 보다가 로드킬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길을 무심코 건너다가 그대로 목숨이 날아가는 동물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었어. 무심코 건너다가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어.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요즘은 삼촌 꿈을 꾸지 않는다.

 

 

 

 

 

 

 

 

 

 

 

*

 

 

앞으로 계속 퇴고해야 하는 작품입니다.

어색한 점 있으면 바로 지적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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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기부기
  • 2010-05-20
돼지 사는 세상

  1  요즘 인간 값이 많이 올랐어요. 아빠가 비닐봉지에 고기를 담으며 말했다. 고기를 사러 온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는 빨간 동전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냈다. 나는 냉장고에 기대서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스케치북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줌마는 건조한 목소리로 안녕히 계세요, 인사한 후 문을 열고 나갔다. 문에 걸린 조그만 종이 딸랑거렸다. 나는 연필을 집고 콧구멍에 명암을 조금 더 그려 넣었다. 아빠는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내 그림을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아빠가 말했다. “콧구멍을 너무 작게 그렸다. 못생겨 보여.” “요즘은 콧구멍 작은 애들이 예쁜 취급 받아.” “나 참, 요즘 애들 취향이라고는. 몇 년 후면 삐쩍 마른 애들보고 예쁘다고 하겠다.” 그럴 일은 없을 걸, 나는 아까 문을 열고 나간 아줌마처럼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자화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 속의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귀를 조금 더 뾰족하게 만들고, 코를 둥글둥글하게 만들었다. 아빠는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불편해져서,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인간 값이 많이 올랐다고?” “그래. 아무래도 조류독감이나 광우병 때문에 문제가 많으니까. 인간고기 사는 돼지들이 많아지데. 맛있기도 하고.” 나는 혀를 내밀고 토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빠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가 말했다. “먹을 거 보고 그렇게 하면 안 돼지. 아프리카에서는 먹을 거 없어서 굶어가는 돼지들이 얼마나 많은데. 음식보고 맛없다 맛있다 그러는 거 다 사치야, 사치!” “아무리 그래도 맛없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인간고기, 진짜 맛없어. 비리고, 짜고.” “네가 이상한 거야. 다른 애들은 다 좋아하는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의 음식 취향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끝이 없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 집은 정육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자주 정육점에 나와서 손님 구경을 하고는 한다. 돼지 구경만큼 재밌는 일도 없다. 각자 돼지마다 외모도, 옷차림도, 말투도 다르다. 나는 옛날부터 돼지들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지하철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팔 사이에 얼굴을 묻고 늘 돼지들을 관찰하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오늘따라 몸이 눅지근했다. 나는 책상 위로 스케치북을 던졌다. 스케치북은 정확히 책상 위에 떨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썼다. 눈을 뜨니까 창밖은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다. 나는 이불을 치우고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간다. 거실에서는 기분 나쁜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인간고기 냄새다. 또다시 속이 거북해진다. 나는 양쪽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막고 거실 소파로 갔다. 아빠가 소파 앞에

  • 우기부기
  • 2009-08-10
졸업식, 그리고 국밥 한 그릇

1   중학교 졸업식 때였다.겨울 눈발이 여전히 세차게 날리고 있었고, 나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하루 종일 토악질 하듯이 기침을 내뱉어 내야만 했고, 휴지로 몇 백 번이고 코를 풀어대서 코는 형편없이 나달거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검은 코트를 입고 졸업식장에 가야만 했었다. 나 혼자서.엄마 아빠가 이혼한 것은 졸업식이 열리기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방학 때였던 셈이다. 나는 울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솔직히 놀라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는 이미 예전부터 서로에 대한 애정이 아예 식은 상태였으니까. 알고 있었다. 둘은 싸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밋밋한 시선으로 서로를 흝어내릴 뿐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여태까지 이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우리 설이의 유년 시절만큼은 부모님이 둘 다 있는 상태로 보내게 하자'라는 말 없는 합의 때문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부모님이 둘이 있으나, 하나가 있으나 우리 집이 썰렁하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결국 내가 졸업을 하기 직전 엄마 아빠는 내 앞에서 죄 지은 사람마냥 무릎 꿇고 앉아 빌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엄마 아빠가 헤어져야만 하겠다고. 이대로 살 수가 없다고.그럼 그렇게 해. 내가 말했다. 그 때 엄마와 아빠의 휘둥그레진 눈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나는 그 상황에서도 크게 웃어버릴 뻔 했다. 그 황당한 얼굴들 앞에서, 내가 말했다."살 수 없다며? 그럼 헤어져야지. 죽는 것보다야 헤어지는 게 낫지."엄마와 아빠는 그저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낯선 여자애를 보는 것 마냥, 그 시선은 아주 생소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그리고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냥 멀쩡한 여자아이라면, 나는 울어야 할 텐데. 말려야 할 텐데.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나는 왜 울지 않았을까?모르겠다. 내 피가 차갑게 식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미 오래 전부터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모든 걸 단념했던 걸까. 그래,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포기하는 건 쉬웠고, 그 후의 일을 자기연민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쉬웠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아빠를 속이는 것도 쉬웠다. 졸업식을 위해 온 학교 안내장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날씨 관계로 졸업식이 미뤄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 혼자 코트를 입고, 졸업식에 가는 것이다. 이틀쯤 후에 말하면 된다. 나 졸업식 갔다 왔어. 엄마나 아빠가 무슨 소릴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둘은 입을 헤 벌리고 있을 것이다. 이미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 이상 나에게 쓴 소리를 할 수 있겠어.아직 집을 구하지 못한 엄마 대신 아빠의 원룸에서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나는 졸업식장에 갔다. 여전히 바람이 춥고, 차가웠다. 로션을 바르고 왔는데도 피부가 따끔거렸고, 미처 장갑을 준비하지 못한 손이 에일 듯 아팠다.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졸업식

  • 우기부기
  • 200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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