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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프리허그(퇴고)

  • 작성자 J에대한
  • 작성일 2007-11-03
  • 조회수 928

명동, 프리허그

 

 어째, 상은 잘 치루고 오셨소? 밤새 내린 눈을 짓밟고 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옆 건물의 경비원이 물었다. 뭐, 그렇죠...사흘 동안의 일들을 생각해보다 일말의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씁쓸해 하던 차에 반대편 노점의 물건들이 땅으로 우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그의 소리를 잘라먹었다.

 

 무슨 일입니까? 경비원은 까치발을 세우며 많은 인파 사이와 위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남자의 욕설이 들려왔다. 싸움이 난 것 같은데 여자가 일방적으로 맞고 있소. 늙은 경비원은 몰려든 인파를 헤집고 들어갔다. 그는 잠시 구경꾼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경비원이 지나간 길을 비집고 들어갔다. 둥그렇게 모인 구경꾼들의 중심축에서 덩치가 큰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있었고 경비원이 이를 말리려 애를 쓰고 있었다. 어머, 저 남자 미친 거 아냐. 그의 주변에서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방을 둘러보니 모두가 구경꾼들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구경꾼들은 정작, 아무도 말리려 하지 않는다.

 

 현대인의 초상을 그리는 변주가, 보이지 않지만 곳곳에 존재하는 전기 줄을 타고 흐른다. 분주하고, 소외되고, 외로운, 허덕이기 바쁘고, 고단하고, 경계하고, 차가운, 가끔은 도도한, 세상의 불협화음. 불협화음 속에 변주가 묻힌다. 불현듯 자선냄비의 빨간 종소리가 그 변주를 이끌어 나가보려 하지만 소용없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춥고 적막한 공기가 흐른다. 이것이 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겨울의, 명동 거리의 편린이다.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셋... ... 쉰하나... 쉰둘... 쉰셋...그가 사람 수를 세고 있을 때 경비가 옆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으며 물었다. 또, 사람 수를 세고 있는 거요? 그, 사람 수를 맨날 세서 뭐하는 거요? 그는 피식 웃었다. 일하다 생긴 취미랄까? 사람 수를 세면서 사람 관찰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그는 명동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아 잡상을 벌이는 사람이었다.

 

 이곳은 시간이 썩 빨리 지나가지 않는다. 그는 명동 시내 한복판에 한 남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다 소모되어 꺼진 전구처럼 암전의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 그는 곧 서있는 남자의 얼굴 표정이 아침에 늘 거울 속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과 닮았다고 느낀다. 바쁜 일상 속, 현대인들 속에 그는 멈춰서 있었다.

 

 오늘따라 별 특별한 날도 아닌데도 꽤나 많이 몰리는 것 같지 않소? 인간주차장이 따로 없소. 사람들 줄이 끊길 생각을 안 하니. 건너편 의류건물 현관 앞에서 사람들이 신발 위에 쌓인 눈을 털고 있었다. 개중에 대다수의 커플들이 서로의 어깨에,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로 인해 여백의 점은 찾을 수 없이 빽빽하게 차있다. 소실점은 감춰진지 오래였다. 담배 한 개피를 물었다. 인생의 모든 것이 기대와는 달리 무의미하다고 느끼면서도 주어진 그대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구두점 없이 이어지는 일상 속, 자신의 소실점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 안타까움을 담뱃불로 태워나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 위에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기분도, 날씨도 뜨거운 꿀 속에 빠져버린듯한 꿀꿀함 그 자체였다. 요즘 들어서 눈이 지루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호-호 손에 입김을 불어 넣으며 신발 위에 쌓인 눈을 털기 위해 발을 툭툭거렸다. 잡화들을 펼쳐놓고 얼마 안 있어서 옆의 구역에서 일하는 그녀가 인사를 했다. 으으, 추워. 형, 오늘 기온이 영하 9도래요. 옷 좀 두껍게 입지 그래요. 영하 9도. 그는 집에서 나와 출근하는 동안 주머니에서 손을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손을 꺼낼라치면 바람이 갈기갈기 손을 찢어놓는 듯 했고 겨울바람은 칼날을 곤두세우고 모든 생명체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전시해놓은 잡화들 중에 귀마개 두개를 집어 하나는 자신의 귀를 막고 또 하나는 그에게 건넸다. 조금이라도 바람을 막아 봐요.

 

 그녀는 이 주변에서 ‘떠돌이 K군’으로 불렸다. 그녀를 만난 건 딱 이맘 때였을 거다. 그의 옆 구역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날씨가 굉장히 춥다며 말을 건네 왔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그녀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잔 뽑아와서 한잔을 건넸었다. 그녀에게는 조금 짧은 소매였는지 소매 끝이 올라갔었는데 손목에 가녀린 여러 금을 발견했었다. 유독 그녀의 손목에 있는 가녀린 금에 애착이 가 그때부터 그녀의 행동을 살펴보게 되었었다. 누구에게나 싹싹하고, 여자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힘도 세고, 정신무장이 된 사람. 그녀는 판에 박힌 일상을 싫어했는데 갑자기 자리가 며칠이고 빌 때도 있었고, 옷을 팔다가도 악세서리를 팔기도 했다. 어디 갔다 왔었냐고 물어보면 그녀는 다른 알바 뛰다 왔어요, 머리가 삭막해진 느낌이 들어서 도서관에서 책 빌려다가 3일 내리 책만 보고 왔어요, 아는 아줌마가 애기를 하루 봐달라고 해서요 라면서 늘 웃으면서 대답했다. 늘 올 때는 형, 저 돌아왔어요 라는 인사와 함께. 며칠 사이 그녀가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에서야 그녀가 돌아왔다. 형, 저 돌아왔어요. 으으 추워. 형, 오늘 기온이 영하 9도래요.

 

 뭐야, 그 고양이는? 그녀의 범퍼 재킷 사이로 검은 고양이가 얼굴을 빼곰히 내밀고 있었다. 아, 얘요? 길에서 주은 도둑고양이예요. 며칠 전 친구 장례식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걸 데리고 와서 키우고 있어요. 한번 만져 보실래요? 그녀가 품고 있는 검은 고양이는 순하고 얌전했다. 고양이의 새파란 눈이 신기에서 조금 다가가자 아직은 어색해서 그런지 주눅이 들 것 마냥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를 쓰담으며 말했다. 친한 친구가, 죽었어요. 고양이를 바라보던 그는 곧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살이었대요. 모질기도 참 모질죠. 자기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이예요. 웃긴 건, 우린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서로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는 거죠. 친구가 그렇게 가기 며칠 전에 술을 같이 했었어요. 생각해보면 그날 그 친구 눈이 좀 이상했어요. 그날 친구 눈 때문에 어찌나 마음에 걸리던지... 이제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진 거 같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죠.

 

 그 친구 눈을 보면 그 친구에게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날, 눈이 좀 달랐었어요. 술을 내내 먹으면서 그 눈을 바라보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나도 하도 각박하게 살아가니까 신경 쓸 여유도 없었죠. 근데 형, 그 친구 장례식 때 사진 속 덧없는 친구 미소를 보니까 가슴이 어찌나 죄이던 지요. 그 녀석, 자기가 존재하는 의미를 모르겠다고, 하루하루가 너무 무의미 하다고 술기운에 그러더니 결국 가버리고 말았어요. 희망을 잃었던 거예요, 제 친구는. 그래서 그날 그렇게 삶을 무용하고 희망 없다고 얘기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늘 왜 바빠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허덕이며 살고 있다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아, 형. 오늘 날씨 정말 우울하네요. 저녁나절쯤에는 눈발이 찾아올 것 같은데…….

 

 자살 또는 희망을 갖기. 그것은 부조리 앞에서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행동이다. 그녀의 친구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그 친구의 부조리도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가 승리한 것은 아니다. 문제의 소멸일 뿐, 해결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부조리 자체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겠지만 대처방안은 아닌 것이다. 그는 자살을 선택한 그 친구가 떠나가 버린 하늘을 바라본다. 낮은 하늘은 그를 더욱더 짓누른다.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음울한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우우우웅- 옆에 있던 그녀가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말을 건넸다. 형, 전화 받아요. 사람 수를 한참 세고 있던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형. 그녀의 부름에 그는 고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응? 되묻는 말에 그녀는, 진동이 울리고 있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제야 알아챘고 폴더를 열어 발신자표시를 본다. 누나였다. 여보세요.

 

 며칠 전에도 누나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반갑게 안부를 물으려 하는 내 입을 도로 굳게 만든 것은 누나의 무미건조한 첫 인사말이었다. 잘 지내냐라는 인사 없이 들려오는 아버지의 부음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 미리 녹음이라도 해둔 듯이 흘러나오는 누나의 목소리가 시린 겨울바람과 함께 귀에 꽂혔다. 그는 멍하니 왜, 갑자기 라고 물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상기시키려 애를 썼다. 그러나 떠올려 보려 할수록 아버지의 얼굴 모양이 변해만 갔었다.

 

 아버지 안 본지 한 이년쯤 되었을까, 아니, 일 년 반? 이마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경비가 무슨 일이시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골집에서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돌아가셨다. 누나가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자식이 크고 난 뒤에 시골로 내려가셔서 혼자 사셨다. 누나가 아홉 살 때 지병으로 떠나신 어머니가 묻혀있는 철원에 작은 집을 구해 밭을 가꾸며 지내셨는데 이년정도는 찾아가보지를 못했었다.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찾아가지 못했던 것인데 결국 나중에서야 생각해보니 정말 바쁜 게 아니라 바쁜 척이였었다. 별 다르게 아프신 곳은 없었다고 누나는 말했다. 그냥 자연의 순리를 따라 잠이 드셨고 일어나시지 않은 것이라고.

 

 돌아가신 걸, 마을 사람이 발견하고 연락했어. 아마, 한 달 전쯤에 돌아가신 것 같아. 옆에서 고양이가 갸르릉 거린다. 그는 이마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아버지 사시던 곳이 워낙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곳은 아니었잖아. 아무도 발견하게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버지네 길을 지나가고 있던 마을 사람이 알람소리를 듣고 발견했대. 너도 알잖아 그 시계. 사람이 끄지 않으면 시끄럽도록 지독하게 울리는 아버지 시계.

 

 따르르릉... 누나, 알람 좀 꺼. 잠결에 누나에게 말했던 것 같다. 따르르릉.... 누나... 이른 새벽에 들려오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는 상을 치루고 난 뒤 누나네 집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인 모양이었다. 알람을 끌려고 시계를 찾아보았지만 시계는 주변에 없었다. 막 일어나 불을 키려는 누나에게 방금 전까지 알람이 계속 울렸었는데 누나가 껐냐고 묻자 누나는, 우리 집은 알람 같은 거 안 맞추는데 무슨 소리냐며 반문했다. 분명히 알람소리였었다. 누나는 아침상을 차리며 피곤해서 그러는 것 같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더욱 자주 들려왔고 그는 알 수 없었다. 한참 뒤 명동 거리에서 아버지를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음을 알렸던 알람시계 소리가 아직도 꺼지지 않은 채 들려오는 것이지 않을까.

 

 여보세요. 폴더를 열고 귀에 가져가자마자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내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얘, 너는 전화를 왜 그렇게 늦게 받니? 그는 진동이라 못 느꼈어, 혼자 공허하게 대꾸했다. 매서운 바람에 코가 시큰했다. 콧등을 비비고 있을 때 누나가 스쳐가듯 말했다. 곧 있으면 아버지 사십구제인거 알지? 어차피 곧 엄마 기일이니까 한꺼번에 올리는 게 어때? 요즘 워낙 일이 많아서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아. 아버지도 참, 하필 이럴 때에 돌아가셨는지 원. 원래는 네가 결혼을 해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 건지 네가 아직 장가를 못 들었으니 골치가 더 아픈 거 아니야. 근데 너 내말 듣고 있는 거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것 같다. 아니면 무심하게 한 쪽 귀로 듣고 흘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에서는 누나의 말들이 쉴새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그는 다만 명동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포근하고 산소 농도가 짙었다. 그는 숨을 들이 마셔본다. 싸한 공기에 폐에 가득 찼다. 그 싸한 공기를 내뱉었을 때 밀려오는 답답함과 함께 차마 누나에게 말하지 못한 말들이 입에 고여 있었다. 듣고 있어. 근데 말이야, 누나. 그 시계도 약이 다 닳았더람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일부러 아버지가 계속 알람을 끄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 우리보고 듣고 달려오라고.

 

 서른아홉... 마흔... 마흔하 ... 눈에 익은 사람이 레이더망에 잡혔다. 언제서부터 인가 명동거리 한 가운데에 서있는 사람이자, 영화 해안선에서 장동건이 사람 많은 거리에서 미동자세로 서 있듯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이었다. 군중에 휩싸여 왠지 형언할 수 없는 아우라가 풍겨져 나오지만 다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언제서부터 저렇게 서 있었을까? 심심하다 싶으면 사람들 수를 세는 그조차 모르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는 그런 저 사람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양 겨드랑이에 빵 두개를 끼고 입으로 커피를 물고 고양이를 안고 온다. 형, 식사 안했죠? 그는 고양이를 받아 무릎에 내려놓으며 말한다. 응, 아직. 싱긋 웃는 그녀가 빵을 건넨다.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고맙다 말하고는 빵을 재빨리 입에 물고 다시 남자를 관찰한다. 근데, 형 아까부터 뭘 그렇게 유심히 봐요? 그녀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려온다.

 

 저기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 보여? 저 사람, 언제서부터 인가 계속 그 자리에 미동 자세로 서 있어. 그러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고 그러는데, 대체 왜 서 있을까? 품속에 있는 고양이가 따뜻한 체온으로 안겨 있다가 야옹, 하고 울었다. 자기는 그 이유를 안다는 것 마냥.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녀는 아예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아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해본다. 왠지 그 사람은 소외된 외로움을 상징하는 동상 같다. 아니면,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 같다. 높은 바위산 위로 거대한 바위를 계곡으로부터 밀어 올리는데, 정상에 올려놓으면 반대편 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시지프의 형벌처럼. 그러나 괴로워 보이면서도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녀와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저 남자는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상실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거 알아요?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녀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커피를 물며 말한다. 오늘, 요 앞에서 프리허그 팻말을 들고 서 있던 한 남자가 있었어요.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랬던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던 그녀는 아, 형이 자리를 비웠을 때 일이예요. 형 오늘 은행 갔다 온다면서 잠시 자리 비웠었잖아요. 근데 그 프리허그하는 남자 쪽에 김 씨 아줌마 네가 악세서리를 팔고 있었죠. 전 그때 김 씨 아줌마랑 얘기하고 있어서 그 사건을 잘 볼 수 있었어요. 어떤 여자가 악세사리를 구경하려고 서 있었는데 어떤 꼬마애가 지나가다가 그 여자가 이뻐보였었나봐요. 꼬마 애는 별 생각 없이 여자 손을 잡았죠. 그런데 그 여자가 손을 모질게 뿌리친 거예요. 어머, 뭐야. 이러면서요. 쳇, 솔직히 꼬마 애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흥분한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응, 그렇긴 해 라고 말했다. 사실 그 꼬마애, 온몸이 화상을 입어서 온전한 피부를 갖고 있지 않았어요. 얼굴도 예쁘지 않고 일그러져 있었죠. 그 아이 뒤에 애 엄마가 있었는데 난 애 엄마를 도저히 볼 수가 없었어요. 꽉 눈물이 쏟아져 나올 거 같아서. 그 여자가 뿌리치고 난 뒤 꼬마애가 굳어 있었어요. 눈에 눈물이 핑 돌아서 그 작은 눈에 눈물이 가득했는데 꼬마애가 꾹 참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이한테 가서 달래주려고 했는데 그 프리허그 하는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아이 앞에 서더라고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아이랑 눈높이를 같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말없이 꼭 안아줬어요. 사실 정말 화상이 심해서 보통 사람들은 꺼려할 아이였는데 그 남자, 정말 아무 말 없이 안아주더군요. 뒤에서 애 엄마가 조용히 울고 있는데 마음이 아팠었어요. 한참을 말하던 그녀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서 생각해본 건데 맨날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 남자에게도 프리허그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녁 늦게서야 짐을 정리하고 버스를 탔다. 퇴근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들 속에 끼어 버스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잠시 맡긴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버스에서 거리를 내다본다. 빵빵. 유난히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심해진다. 영락없이 소음공해 속에서 살고 있다. 요즘은 그 남자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반응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무관심. 냉소의 눈빛. 경계의 눈빛. 삭막함. 그런 눈빛을 지켜보다보면 그녀의 친구, 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던 그 친구가 생각난다. 그리고 지금 그의 모습에 대한 생각까지 덤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따라 소음 공해 속에서 늘 권태롭고 전망 없는 일상 속의 느낌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다. 편벽한 언어로는 그것을 잘 설명할 수가 없다. 사르트르의 구토 속 주인공처럼 낯설음을 느낀다. 가끔은 정말 낯설어서 야릇하기도 한. 이런 느낌을 그 친구도 느꼈을까? 걷잡을 수 없는 상념에 몸을 맡긴다.

 

 그. 자살한 그 친구. 미동자세로 늘 서있는 알 수 없는 그 사람, 이 세 사람은 사막에 서있다. 세 사람은 사막에서 버티는 중이다. 한 사람은 사막에서 희망을 갖고 그 장소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고 다른 두 사람은 희망을 갖지 않고 서있기만 한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기권하고 포기했고 남은 한 사람은 기권하지 않고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꿋꿋이 서 있다. 포기한 그 한명은 자살한 친구이고, 꿋꿋이 서있는 한명은 명동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고, 사막을 벗어나려고 하는 남은 한명은 바로 그였다. 그는 그렇게 규정지었다. 야오-옹. 하품하는 고양이를 따라 그도 같이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곧 느릿느릿 달리고 있는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녀는 점심때나 올 것이다. 어제 오랜만에 엄마한테 갔다 오겠다고 갔던 그녀는 고양이를 맡기고 갔다. 엄마가 고양이를 싫어하거든요. 고양이를 부탁하는 그녀에게 알았다고 잘 데리고 있을 테니 가서 잘 챙겨드리고 오라고 말하던 그는 고양이와 그녀가 매우 닮았다고 느꼈다. 그녀가 엄마에게 간 것은 그가 아버지의 부음을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순전히 누나와 전화통화를 끊고 씁쓸한 마음에 옆에 있던 그녀에게 얘기한 탓이었다. 따르르릉 - . 아직도 계속 알람소리가 들려. 아버지에게 얼마나 죄송한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는 그에게 고양이가 다가왔다. 그는 고양이를 안고 물었다. 네 가족은 어디에 있고 너 혼자 있는 거냐? 고양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품안에만 자꾸 파고들었다. 그는 동시에 서 있는 남자에게도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잃고 그 섬에서 갇혀있는 건지요. 당신도 나처럼 사람은 많은 곳에 있지만 정작은 외로운 것인가요?

 

 얼마나 그 자리에 그 남자를 바라보며 서 있었는지 모른다. 입안에서 껌이 분해됨을 느끼고 바닥에 뱉어버린 기억만이 날 뿐이다. 한참 뒤 갈증을 느끼고 주변을 돌아본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잊은 것 같은데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유독 그 사람이 시야에 가득 차 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남자는 무언가에 의해 다친 병사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사람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병상련의 감정 때문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다만 안아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명동에서 자주 보이는 프리허그 탓이었을까. 아니면 온몸의 상처투성이인 꼬마가 보였던 것일까.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걸어가면서도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발걸음마다 유난히 걷고 있는 것에 대한 느낌이 낯설고 크게 느껴진다. 정말 알 수 없다. 나아가는 순간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떤 소리들의 높이가 줄어들고 있다. 대신 그의 심장 고동소리가 점점 커져만 간다. 어느 점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무언가에 초점을 둔 (초점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정말 조심스레, 다가가 조금씩 감싸 안는다. 세상의 불협화음이 들리지 않았던 그 순간, 크게 들리던 그의 심장 고동소리는 그 남자의 심장 고동소리와 섞인다. 말없이, 조용히 전해지는 서로의 심장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얘야, 왜 알람을 끄지 않는 거냐. ....뭐, 괜찮다. 내가 늘 너에게 그러지 않았었느냐. 너희가 크면 제 살길에 바빠서 나에게 잘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네 누나도 결혼하고 나면 전화도 잘 하지 않게 될 거라고. 늘 너와 술 한 잔 할 때마다 내가 그러지 않았었느냐. 언젠가 나는 시골집에서 싸늘한 시체로 썩어서 발견될 거라고. 죽은 지 한 달, 두 달 아니면 반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모른 채 죽어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때 너희는 무슨 소리냐고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었었지.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되리라고. 그게 현실이다. 그리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나 같은 늙은이가 많고 부쩍 늘어가고 있다니까 말이다. 다행이다. 그래도 죽은 지 얼마 안 있어 네 엄마와 함께 묻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꿈속에서 아버지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니면 바람으로부터 들려온 목소리였을까. 그는 상을 치룰때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고였다. 땅에 눈물이 떨어져 조금씩 번진다. 그는 땅으로 끝없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젠, 알리지 않아도 되요, 아버지. 제가 알람을 끌게요.

 

 단 한발자국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 같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어느 것. 그러나 그는 아직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괜찮아요. 어디서 들린 것일까. 그녀가 돌아온 것일까. 그 말에 순식간에 쌓아놓은 벽이 무너지듯, 경계가 허물어진다. 따뜻한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오랫동안 무언가를 상실해 왔던 것을 메우는 느낌. 편벽한 언어구사력으로써는 설명하기 역부족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냥 단지 그것을 느끼고만 있을 뿐이다. 불현듯,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바쁜 누나가 생각난다. 눈물이 핑 돌며 가슴이, 먹먹하다. 시계에 안개가 낀 것 같다. 비로소 그는 타인을 통해 그 자신을 안아준다. 그리고 타인을 안아준다. 따뜻하다.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간 느낌 같은. 이 따뜻함이 36.5 도의 체온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 남자를 본다. 눈높이가 같다. 그 사람의 홍채 속에서 그는 강력한 무언가를 얻는다. 그 남자 역시 그의 홍채 속에서 무엇인가를 볼 것이다. 주변을 바라본다. 흑백의 모노크롬의 세상은 잠시 빛을 되찾은 것 같다. 그는 얼핏 자신이 그 남자를 찾아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들이 프리허그를 하는 것과 같이 타인에게 무언가를 베풀 만큼 넉넉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이 힘을 얻고 싶어서, 서로 부족할지라도 같이 있으면 치유가 되지 않을까 하고 직감으로 자기 스스로 찾아간 것일 것이다. 그리고 서 있는 그 남자는 자신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지도 몰랐다.
 
그녀가 했던 말이 다시 들려온다. 희망이라는 건 정말 지독한 명제죠. 또 다시 삶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가질 수밖에 없게 하는 게 희망이죠. 외면하려고 해도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게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이유에서 섬에 갇히게 되었든 간에 섬으로부터 나올 수 있게 하는, 노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누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조금은 쉽게 늪으로부터 헤엄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친구처럼 기권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왕 사는 거 내가 왜 살았는지 그 이유는 찾을 수 있게 만들어야죠. 그게 제가 사는 이유인걸요. 

 

 그와 그 남자는 사막 한가운데 서 있다. 무의미함에 의미를 주는 것, 그것은 이 상황에 가장 근본적인 답이 될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 방법 중에 하나로 사막에서 반항, 즉 견디라고 했었다. 무의미함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사막에 서 있는 상황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살, 희망, 반항 중에서 오로지 반항만이 올바른 대응이라고 그랬다. 그러나 그는 올바른 대응에 반항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함에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그 의미 나름의 희망이 생길 것이다. 그 희망을 믿는다. 게다가 그는 희망 없이 사막에서 버틸만한 용기도 없고, 기권도 하지 않을 거다. 그러므로 스스로 사막을 건너기 위해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막을 건너는 방법이자 버티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방법일 테니까. 사막에, 섬에 갇힌 그 남자는 무엇을 선택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섬으로부터는 헤엄쳐 나올 것이다. 어느 무언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으니까.

 

 명동 한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늘 미동자세로 무언가를 향해 바라보고 있다. 무관심과 냉소에 찬 눈빛 속에 그는 서 있다. 언제서부터, 언제까지 그렇게 서있었는지, 서있을 건지 아무도 모른다. 짐작은 가지만 그를 이해할 수는 없다. 조리에 맞지 않으며 비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부조리처럼.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자살을 선택하게도 만드는 그것처럼.

 

 세상은 정말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죠. 그래서 모든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불협화음이 되는 건지도 몰라요, 형. 왠지 명동은 그것을 축소 시켜놓은 것 같고, 그것을 축소시켜놓은 명동이기에 그곳도 불협화음인 것 같죠. 그 불협화음을 소소한 편린으로 잘라 내보면 각각의 온전한 음이 나올 거예요. 진열된 머리핀을 정리하며 그녀가 말을 마쳤다. 명동 거리는 오늘도 북적북적하다. 그는 담배를 한 개피 불에 붙인다. 그 편린들을 잘라내어 몇 가지만 다시 온전하게 화음을 만들면 사막을 건널 작은 방법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그 사람에게 얻은 소소한 편린의 어떤 음과 내게 힘이 될 꼭 필요한 몇 개의 음을 가지고 자선냄비 종소리의 굵은 리듬에 맞춰 하모니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그 사람과 함께 한 프리허그와 외로운 도둑고양이의 음도 함께.

 

 눈은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땅은 아무것도 받아주지 않아 눈은 눈물이 되어 땅에 번진다. 가로등 불빛이 눈빛 위에 차갑게 혹은 따뜻하게 쏟아지고 있다. 자칫 호흡을 놓칠 수도 있는 바쁜 일상의 허덕임으로부터 변주가 들려온다. 그녀가 돌아왔다. 무언가 짐이 한가득 들고서. 형, 반간거리 들고 왔는데 나눠 먹어요. 그녀가 짐을 푸르며 엄마가 이번에 담근 김치라며 김치 통을 꺼내 뚜껑을 열어 보여준다. 이야, 이거 내일 컵라면에다가 먹으면 제격이겠는데? 내 품에 안겨있던 고양이는 제 주인을 알아봤는지 운다.

 

 형, 오늘 군고구마 장수 아저씨 나왔네요? 저번에 교통사고 났었는데 이제 괜찮으신 건가? 고양이를 건네며, 정말 오랜만이지? 내가 가서 군고구마 좀 사올게. 안 그래도 아저씨 사고 난 뒤로는 힘드실 텐데 말이야. 몇 개 사올까? 라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그녀가 준 귀마개를 쓴다. 입김을 불고 있는 그녀가 무릎 위 담요에 싸인 고양이를 가리키며 3개라고 손짓한다. 머리에 눈이 소복이 쌓인 고양이는 몸을 완전히 말았다가 피며 세수를 한다. 자식, 호강하네. 바람이 포근하게 불어오고 눈발도 적당하다. 자선냄비 종소리 사이로 그녀의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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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술 (퇴고)

지독한 술    건너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공허한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나지막이 들려온다. 전화가 끊겼다. 침묵만이 무성한 주변. 찬바람이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창문엔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걸려있다. 고목 한그루. 나는 짙은 공허감 속에 빠져버린 것만 같다. 머리가 지끈 지끈거린다. 늘 예고 없이 찾아와 힘들게 하는 미열. 미열과 함께 어김없이 함께 찾아오는 두통까지. 내가 전화받는 틈을 타 은근슬쩍 찾아온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녀석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늘어나면서 진군해오고 있다. 머릿속에 벌레들이 뒤죽박죽 난동을 부릴 때쯤이면 습관적으로 책상 옆에 있는 두통 제를 하나 집어삼킨다. 약 10분에서 15분 정도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테지. 나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는다. 전화는 끊겼다. 그러나 올케의 목소리가 새록새록 다시 들려온다. - 형님, 사실은…. 그이가 알코올 중독증세가 있어요. 자꾸만 올케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형님, 사실은…. 그이가 알코올 중독증세가 있어요. 지그시 감은 눈을 비집고 허탈한 눈물이 새어나와 뺨을 타고 흐른다. 순간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울컥해 목에 메인다. 나는 힘들게 숨을 죽여 삼켜버린다. 북받쳐오는 슬픔은 소슬한 1월의 밤바람과 함께 유년시절의 방문 앞에 서서 조용히 노크를 한다.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심지어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지 사 개월이 지났음에도 술을 마셨다고 했다. 물론 아이가 들어섰다는 걸 알고 난 후에는 용케 술을 당분간 끊었지만. 나는 다행히도 보통의 상식을 뒤집고 아무런 지장 없이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임신 중에 알코올을 섭취할 경우 아기에게 심각한 해가 간다는 보통의 상식을 뒤집은 채 말이다. 그 후 동생이 태어났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짊어지고 태어난 위험이 한층 낮은 수위였다는 것. 동생은 엄마의 위험한 취미가 잠잠해갈 시기에 용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우리 둘 다 바깥공기를 마신 뒤로, 엄마가 안정을 찾게 된 뒤로는 이야기가 같으니까. 엄마의 취미는 마침표가 없이 쉼표만이 존재하는 지독한 진행형이었다. 매일같이 마셨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나름대로 어린 나와 동생에게 자신의 취미를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눈이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특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베란다에 나가서 무언가를 마시는 검은 실루엣은 관찰 대상 1호였으니까.  어느 날은 엄마가 술에 취해 자는 틈새를 이용해 베란다에 나가보았다. 까치발로 겨우 베란다 불을 켜고 엄마의 실루엣이 보이던 곳까지 걸어갔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검은 비닐봉지 사이로 진로 소주 여러 병이 가득 보였다. 푸른색 소주병에 두꺼비 모양이 그려진 빨간 뚜껑의 병, 진로. 그때는 잘 몰랐다. 그 수많은 병과 바닥에 누워 골골대는 엄마를 연방 바라볼 뿐.  엄마는 며칠간을 내리 술만 먹다가 며칠간은 술병으로 끙끙 앓았다. 힘없이

  • J에대한
  • 2008-01-08
푸른 곰팡이

푸른 곰팡이   은호냐. 조심스레 대문을 닫는 소리에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시며 물었다. 그리고 곧, 눈이 마주친 자가 형이 아님을 확인한 어머니는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나는 곧이어, 은호는 언제쯤 집에 온다더냐던 어머니의 말을 뒤로 한 채 작은 화실로 쓰는 방에 들어와 버렸다. 건조한 방 가운데에는 소나무가 그려지다 만 캔버스가 놓여있었다. 방문이 채 닫히지 않아 마당에 걸쳐 앉아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는 저 너머의 소나무를 또 바라보는 것이리라. 어머니는 큰아들이 생각날 적마다 개진 젖은 눈을 들어, 형이 좋아하던 소나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곤 하셨다. 비 오는 날 변변한 우산 하나 없이 거리를 헤매는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겨울 빛줄기를 잘 못 본 것일까. 한줄기 가는 눈물이 어머니 뺨 위로 흐르는 것을 언뜻 본 것 같다. 밖은 모두 회색빛을 띄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바라보는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렀다. 지상에 고독하고 푸르게, 겨울로부터 유폐되어있는 소나무. 형은 소나무를 닮았다. 4월 1일 만우절, 형이 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고 의식불명이라는 소식이 거짓말인줄로만 알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캔버스의 같은 부분만을 스무 번 덧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뒤늦게야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스스로 이 상태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무의식상태 자살이죠. 국어책 읽듯 메마르게 의사는 말했다. 형은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고. 팔 년 전에 의사는 내게 그렇게 선고를 했었다. 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 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형의 굳어가는 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 형이 좋아하던 소나무처럼 형은 병실에 뿌리를 박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뿌리째 썩어가고 식물처럼 가벼워져서는. 눅눅한 실내에 어눌했던 형의 음성이 들렸다. 네 형수는? 형은 집을 나간 형수가 돌아왔느냐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치매기가 있는 시어머니를 돌보다 형이 일하다 허리를 다쳐 일자리를 잃자 집을 나간 형수를 형은 내내 기다리는 것이다. 형수를 찾으러 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저렇게 팔 년을 식물인간으로 살아오면서도,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만날 바람결에 솔잎 향을 묻어내며 물어보는 것이었다. 네 형수는 돌아왔느냐고. 나는 그런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수는, 오늘도 내일도 오지 않을 거예요. 집에 돌아와 그리다 만 소나무를 그리고 있다. 소나무는 조금씩 푸른곰팡이가 되어간다. 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은호는 언제쯤 돌아 오냐, 은수야. 며늘아기는 어디에 있기에 나 밥 안주는 게냐. 은수야, 나 배고프다. 밥 좀 주어. 어머니는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형을 찾고 있었다. 어머니, 형은 돌아오지 않아요. 형수처럼, 돌아오지 않아요. 나는 단단하게 메인 목을 겨우 쥐어짜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얘야, 은수야. 은호는 언제쯤 돌아오느냐. 빗소리에 묻혔을까, 어머니 자신이 못 들은 척 하는 것일까. 어머니는 계속 같은 말만 내뱉는다. 나는 입을 다

  • J에대한
  • 2007-10-13
실종

  긴 소파에 쪼그리고 누워서 얕은 잠을 자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햇살이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깜빡깜빡 비추고 있었다. 오늘도 그와 그의 아내는 잃어버린 아이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온 터였다. 테이블 위에는 둥근 얼굴, 긴 머리, 125cm의 키의 아홉 살의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찍혀진 인쇄물이 놓여 있었다.  6개월 전, 그의 아내가 마흔 가까이에 겨우 갖은 아이가 동네 놀이터에서 사라졌다. 친구들이랑 잠깐 놀다가 들어오겠다고 나간 아이는 제 엄마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 상태로 더 이상 성장하지도 않고 멈췄다. 일단 파출소에 실종신고를 했지만 유괴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는 울지 않았다. 가만가만 제 풀에 지쳐 눈물이 고일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울지 않았다. 울면, 정말로 아이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일종의 스스로가 만든 미신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아이가 사라진 뒤로 악착스럽게 지금의 상황을 잘 견뎌 내고 있었다. 그는 그보다 더 위태로워 보이는 아내를 항상 조심스레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그 조차도 위태롭기는 그지없었다.  어디선가 듣기로 아동 실종은 3시간 안에 못 찾으면 3일, 3일 안에 못 찾으면 3달. 보통은 4, 5 년은 걸린다고 했었다. 그는 그 말을 떠올려보고는 씁쓸한 잔기침을 뱉어내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그는 애써 아기를 키우고 싶은 사람이 데려갔으려니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견딜 수 있다고 달래봤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올가미처럼 그의 마음을 옭아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목이 단단하게 메어와 아팠다. 딸의 모습은 딱 거기서 멈춰있었다. 그의 마음속의 시계도 함께 멈춰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딸아이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나눠줄테지만 아이의 얼굴은 조금은 변했을 것이다. 그는 부질없지만 이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것은 아내가 잠에서 깨어 늦게 저녁준비를 할쯤이었다.       - **경찰서입니다.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수사관의 말은 계속 그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유괴...라고. 딸아이가 유괴를 당해 죽었고 산에 매장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랬었지. 그는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계가 아득해져왔다. 어슴푸레 떠오르던 최악의 상황.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그것만은 아닐거라 애써 세차게 부인했었던 상황이 마침내 실제라고 판명이 나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산 속에 암매장되어있었던 딸아이의 몸을 보며 결국은 참아냈던 울음을 쏟아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범죄현장 속으로 들어가던 그의 아내는 땅 속에 있는 죽은 아이를 확인

  • J에대한
  • 20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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