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피스타치오

  • 작성자 J에대한
  • 작성일 2007-08-24
  • 조회수 134

피스타치오

 

 

 

 기억하니, 늘 여름이 찾아오면 내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곤 했었던 거. 글쎄, 언제쯤 내가 봉숭아물을 들이기에 질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거라곤, 올해도 봉숭아물을 들였고, 지금 내 손톱은 선명한 자연의 붉은 꽃잎 색으로 물들어 있다는 거야. 장을 보러 나가든, 술자리에 나가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사람들이 내 손톱을 보면서 어김없이 한마디씩 하곤 해. 어머 봉숭아물 들이셨어요? 예쁘게 물들었네요, 어디서 팔아요? 그럼 나는 살짝 웃으며 말하는 거지. 아뇨, 어디에서도 팔지 않아요. 그냥 눈에 띄는 봉숭아 꽃잎을 따다가 빻아서 물들였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똑같은 반응들을 보이곤 해. 어머, 직접 물들이신거라구요? 대단하시네요. 와, 그래서 그런지 색이 참 잘 나왔네요.

 올해는 휴가지에서 봉숭아물을 들였어. 작년에는 집에서 물들였지. 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봉숭아들이 언뜻 많이 보이기에, 손에 두르고 있던 손수건을 펼쳐 팔랑팔랑 거리는 꽃잎을 담아왔었어. 네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마다 봉숭아를 따는 장소는 같지 않아. 이번에는 바닷가 마을에 있는 도로 주변에서 따와 그날 바로 물들였단다. 그래서 그런 걸까. 손을 오므리며 코에 손톱을 갖다 대보면 짭조름한 바다의 내음이 나는 것 같아. 손톱에 물들여진 색은 바다가 삼켜버린 빨간 노을빛이야. 올해의 봉숭아물이 가장 선명하고 자연색 같다고들 그러더라. 아는 동생이 저도 물들이겠다고 물들여봤는데, 영 아니올 시다여서 울상 짓더라. 하기야, 매니큐어를 바르는데 익숙해져버린 손이 어떻게 자연의 색을 자연스럽게 입을 수 있었겠어. 예전에 내가 네게 말했듯이 매니큐어를 바르고 지운 뒤 봉숭아물을 들여도 손톱이 색을 잘 입지 않아. 매니큐어를 바른 만큼의 손톱이 잘려져 나가고 순수한 손톱이 다 자리를 잡게 되면 그제서야 손톱이 자연의 옷을 예쁘게 갈아입을 수 있는거지. 결국, 내가 아는 동생은 세 번을 물들였는데도 한번 물들인 내 손톱 보다 색이 잘 나오지 않았단다. 그렇게 나는 늘 여름이 되면 강렬한 여름의 색으로 옷을 갈아입곤 해. 너는 여름이 되면 어떤 색으로 옷을 갈아입니.

 

 지금은 새벽 세시야.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서 그런지 별빛이 우수수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어. 하지만 나는 열대야에, 마감일에 시달리며 깜빡거리는 노트북의 커서를 가만히 쏘아보고 있는 중이야. 이번 소설의 제목은 '바다 옆 방' 이야. 같은 제목의 그림이 하나 있어. 에드워드 호퍼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인데, 그 그림에 영감을 받아 글을 쓰고 있단다. 너도 알다시피 나의 영원한 화가는 고흐지만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호퍼가 있어. 이 화가에 대한 단어를 열렬해 보자면, 공간, 빛, 고요함, 고독, 환멸, 환기, 낯선, 평범, 차분, 각도, 권태, 외로움, 불안 이정도. 나는 특히 이 화가의 '바다 옆 방'이라는 작품을 좋아해. 방문을 열면 문지방 너머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지는 그림이야. 너는 분명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겠지. 난데없이 문을 열면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다니. 참 황당하군.

 넌,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셈이지? 그리고 분명 너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있을 거야. 어떻게 널 잘 알아맞히느냐며. 난 말이야 네가 하는 건보지 않아도 다 눈에 그려져. 물론 너는 이 말을 아직 이해 못할 거야. 그냥 언젠가 너도 누군가의 행동을 보지 않아도 눈에 그려질 날이 올 거야. 그게 언제가 될지는 나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아직 구성이 제대로 잡힌 건 아니야. 대충 네게 살짝 귀띔 해준다면 전체적인 분위기는 외로움, 상실감이 주조를 이루면서 한 인간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써볼 생각이야. 하지만, 결국 나는 노트북의 커서만 노려보다가 네게 편지를 쓰고 있단다. 아무래도 오늘은 네 편지만을 다 마무리하고 잠이 들것 같아.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하구나.

 

 서른이 되어서 새로 추가된, 가장 기분이 좋은 일과는 오후 다섯 시의 잔잔한 햇빛을 받으며 소파에 누워 나른함을 덮고 자는 일이야. 서재에 보라색 소파가 하나 있는데 나는 늘 책을 한두 권씩 꺼내와서 소파 밑에 내려놓고 누워 느릿느릿 읽곤 해. 그리고 오후 다섯 시의 햇빛이 들어오면 잠에 들곤 하지. 물론 배가 밥을 달라고 할 즈음이면 살며시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을 시작해. 너도 알다시피 난 야행성이잖니.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제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잠이 많아. 늘 둘이서 소파에 누워 늦은 낮잠을 잔단다. 둘 다 누가 더 게으른가 시합 하면 글쎄, 누가 이길까. 고양이 풀이가 이길까, 내가 이길까. 이 녀석은 비오는 날 집 앞에 웅크리고 있는 새끼 고양이였는데 뭔가 예전부터 친구였다는 느낌이 들길래 데려와 키우고 있어. 식구가 된지 한 육개월 됐나, 내가 집을 새로 마련한지 얼마 안돼서 데리고 온 녀석이거든.

 아, 네게 집을 마련했다는 얘기를 안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처음으로 내 스스로 마련한 집이야. 조금 아담한, 노란색 집.

고흐의 아틀리에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 언제 한번 연락해서 집에 놀러왔다가렴. 훗날 네 아이를 데리고 놀러 오는 것도 좋겠다.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한 가득이구나. 넌 집밖의 노란 색깔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테지만 안은 좋아할 거야. 네가 좋아하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푸른빛들이 가득하거든. 꼭 수목원의 느낌처럼 말이야. 하지만 왠지 네 아이는 너와 달리 노란빛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아는 사람들이 놀러오면 거실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만 난 역시 서재를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해. 서재에는 큰 창문이 하나 있는데, 나는 창문 밖으로 아몬드 나무를 보고 싶었어. 그런데 아몬드 나무는 지중해연안에서 재배되는 나무고, 기후가 따뜻하고 건조한 지방에서 자란다고 키우지 못한다고 그러더라. 결국은 서재 왼쪽 벽에 고흐의 '아몬드 꽃가지들' 그림을 걸어놓고 마음을 달래고 있어. 아는 친구가 이 얘기를 듣더니 그런 다른 나무를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하기에, 나는 아몬드 나무 다음으로 라임오렌지 나무를 키우고 싶다고 했었어. 그랬더니 그 친구가 얼마전에 라임오렌지 나무도 우리나라에서는 키우기 적합하지 않다는 소식을 가져왔지 뭐야. 근데, 사실 라임오렌지나무 보다는 그 나무의 친구인 '제제'가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결국 서재의 큰 창문 밖으로는 푸르른 하늘만이 보이고 있단다. 가끔은 심심하니까 신비한 모양의 구름 몇 점을 좀 띄어주었음 좋겠어. 내게 안부를 전하는 새를 보내도 나는 기분이 좋을 거야.

 

 벌써 한 장을 넘어서 두 장 째 너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우리 중학교 때가 생각난다. 늘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었지. 뭐가 그리도 할 말이 많았던지 일단 흰 종이를 꺼내 첫 줄을 사각사각 연필로 쓰다보면 어느새 두 장, 세장쯤에서 멈춰져 있었어. 그리곤 네게 그러는 거야. 아, 벌써 한 장을 넘어서 두 장 째, 세장 째 너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 라고.그리고 늘 항상 아쉬움을 남기며 편지를 마무리했어.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유독 나는 네게 하고 싶은 얘기들이 꽤나 많았거든. 그렇게 나는 두툼한 편지를 접어 너에게 전했고 너는 무덤덤하게 네 특유의 무표정으로 편지를 받았지. 물론 네게서 답장을 받지 못했어. 왜냐면 너도 알다시피 넌 답장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아이였으니까. 나는 늘 네가 답장을 쓰도록 갖은 꾀를 쓰곤 했었어. 네게 묻는 형식으로 편지를 마친다던가, 네게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네가 답장을 쓰도록 유도했지. 넌 몇 번은 답장을 썼지만, 대체로 넌 답장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아이처럼 내 편지는 너에게 가면 그걸로 끝이었지. 나는 늘 불만이었어. 화가 많이 날 때 즘이면 나는 네게 편지라는 게 일방적 통보만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고, 오고 가는 게 있어야 제 맛인거 아니냐고 그랬었어. 하지만 넌 끝까지 답장을 하지 않았지. 가끔 내가 너 때문에 어떤 이유로 화가 나서 아주 긴긴 편지를 보낼 때면 그것을 해명하느라 답장을 써야만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은 말이야.

너는 남자아이 같은 구석이 많았어. 여자애라고 보기가 힘들 정도로. 모든 친구들이 그랬지. 신체적으로 여자를 상징하는 부분이 두드러지면 그래도 장난치다 말겠는데, 넌 가슴도 작으니까 이건 완전 남자라고 해도 믿겠다, 옷을 다 벗지 않는 한은. 남자 애들도 네게 형, 형 거리며 잘 따르곤 했지. 게다가 넌 스포츠에 관심이 아주 많았고 취미는 게임이었어. 책 읽는 건 매우 싫어하는 데다 조금 생각을 깊이 해야 하는 것이면 멀리 했고, 목욕과 친하지도 않았지. 운동도 잘했고, 주변 여자애들이 감수성 타며 운운할 때 넌 퉁명스럽게 왜 그러냐며 이해하지 못했어. 그런 남자애 같은 네가 고등학교를 가니까 점점 여자가 되어 가더구나. 여자다워졌지. 주변사람들은 아직도 멀었다고 했지만, 나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어. 고등학교는 너와 같은 학교가 되지 못했지. 그러다 보니 집은 바로 앞 동 뒷동 같은 호수에 살았지만 우리는 거의 못 만나게 되었어. 하지만 나는 횟수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꾸준히 네게 편지를 보냈었지. 그리고 늘 비슷한 자리에 늘 같은 소리를 하며. 벌써 한 장을 넘어서 두 장 째 너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지금도 간직하고 있니, 내가 네게 준 편지들…….

 

 어째, 오늘은 늘 어김없이 마무리 짓던 세장을 훌쩍 뛰어넘을 것 같아. 너랑 안본지도 꽤 오래 되어서 그런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많거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오늘 써야 할양은 족히 단편소설 한편을 써야 될 정도일 거야. 내가 너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한...사년 되었나? 아니, 좀 더 오래 되었나. 그럼 한 스무 장은 써야 되겠구나. 일 년에 2장에서 4장 사이로 적어도 네 번씩은 보내왔었으니까. 걱정마, 설마 내가 스무 장 가까이 되는 편지를 네게 보낼까. 하지만 넌 지금 이렇게 생각 하고 있겠지. 설마가 사람 잡을 수도 있겠다고, 게다가 상대는 강주하가 아닌가. 라고 말이야. 하긴 내가 좀처럼 예측 할 수 없는 애긴 해. 그래서 별명이 외계인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좀처럼 예측할 수 없고, 제 멋대로, 보통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사는 강주하. 그게 나였다지 아마.

 옛날 얘기 하니까 며칠 전에 만난 푸름이가 생각나. 일본으로 이민 갔는데 잠시 일 때문에 왔다고 하더라. 한번 만나자고 전화가 왔길래 나가봤는데 얼굴은 옛날 어릴 적 그대로인 거 같더라. 너도 만났나 모르겠구나. 일본에서 결혼 했고 지금은 아이가 둘이래. 일찍 결혼했다고 하더라. 나보고 아직 결혼 안했냐고 묻는데, 난 그냥 아예 결혼 안할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해버렸어. 그랬더니 푸름이가 나답다고 하더라. 네 소식도 묻던데, 나도 4년 정도 널 못 만난 상황이라 제 소식을 잘 모르겠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푸름이가 눈이 휘동 그래져서 묻더라. 너네 친한 친구사이 아니었어? 뭐하느라 그렇게 연락이 안 돼? 나는 그냥 웃었어. 차마 나만 연락하기만 하는 게 질려버려서 연락을 하지 않아버렸다고 그리고 언젠가 먼저 연락해줄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더라. 그냥 또 가만 웃었지. 그리고 무소식이 희소식이였음 좋겠다고, 언젠가 만나게 되면 꼭 한대 세게 패줄꺼라고 말했지. 푸름이는 또 다시 나답다고 커피를 마시며 씩 웃더라. 그때 시킨 커피가 에스프레소였는데, 잔의 밑바닥에 남아있는 커피 찌꺼기를 바라보다 네가 어찌나 보고 싶던지. 참, 무심한 네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도 뭐하지만, 넌 내가 보고 싶지 않았었니...?

 아, 잠시만. 내가 언젠가 책을 보다가 네게 해주고 싶은 글이 있어서 적어놓은 게 있어. 가서 수첩 가져올게. 이쯤에서 잠깐 물 한잔 마시거나 화장실에 다녀와도 좋아. 설마 남은 편지의 장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젓다가 편지를 덮는 건 아니겠지?

 

 어떤 책에서 본 내용이야. 아프리카 스와힐리족 사람들은 ‘사사’와 ‘자마니’라는 독특한 시간관념이 있대. 누군가가 죽었더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여전히 ‘사사’의 시간에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 되는 거야. 그리고 더 이상 그 사람을 기억해 줄 사람이 없으면 그때야 비로소 영원한 침묵의 시간인 ‘자마니’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대. 즉, 사람들이 그 사람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셈인거야. 이 내용을 보는데, 있지... 또 네가 생각 났어. 그리고 우리 엄마도. 언젠가 네가 엄마가 보고 싶다는 얘기를 내 앞에서 한 적이 있었어. 죽어도 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애가, 특히 부모님 얘기는 잘 하지 않던 애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조심스럽게 얘기했었지. 나는 그때를 기억해. 잊을 수가 없었지. 그때 내가 깨달은 건 역시 너도 사람이구나. 라는 거였어. 아빠도, 엄마도 일찍 돌아가셔서 오빠와 단 둘이 사는 너는 늘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했었어. 당시 엄마는 돌아가시고 다행히 아빠는 계셨던 나로서는 대단하다고 여겼었지. 나는 엄마가 없다고 엄마의 부재에 사춘기때 엄청 힘들어하고 했었는데, 넌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으니까. 나는 엄마가 이제 없다는 걸 인정하고 집안 얘기도 하고, 하다못해 청소 분담이 잘 안돼서 싸웠다느니, 집안에 남자들만 둘이여서 여자 혼자로써 기분이 나쁘다더니 그러고 있을 때, 넌 힘든 내색도, 슬픈 내색도 아무런 감정 없이 일관된 행동, 자세, 표정이었으니까. 근데, 그러던 네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아빠가 보고 싶다고 그랬을 때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어. 늘 네게 하루 종일 말을 해도 그치지 않던 내가 그때만은 조용해졌었어. 뭐라고 할 말이 없었거든. 그리고 또 하나 느꼈지. 아... 내가 보통의 아이들 앞에서 나, 엄마가 보고 싶어. 라고 말하면 그 애들은 지금의 내 느낌을 겪겠구나. 라고. 아무튼, 아프리카 사람들의 시간관념에 대해 보면서 네가 자꾸 떠오르더라.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던 네가. 그리고 우리 엄마도. 너희 엄마랑 우리 엄마는 얼마나 ‘사사’의 시간에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얼마나 ‘사사’의 시간에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갑자기 대답이 없는 질문을 왠지 허공에 던져보고 싶어.

 

 혹시,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기사를 본 적 있니? 아니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었거나.

아마 이 얘기를 내 주변사람들에게 말한 지 벌써 스무 번은 넘었을 거야. 만나기만 하면 얘기를 해주었거든.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는 했고, 누구에게는 안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 요즘은 순간 입버릇처럼 이렇게 화두를 시작한단다. 내가 네게 이 얘기를 했었나,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이 흐릿해져서 알 수가 없다니까... 다행히도 너와는 만난 지 아주 오래 되었으니까 분명히 내가 너에게 이 얘기를 해 주지 않았을꺼란 확신을 갖고 있어. 별로 재미있거나, 중요한 얘기는 아니야. 요 며칠 전에 플라토닉 러브의 사례가 되는 일이 생겼대. 영국 출신의 백만장자 여인이 수컷 돌고래랑 정식 결혼식을 했다는 건데, 여자가 무려 15년 동안이나 흠모에 왔다는 거야. 물론 흠모라는 단어를 쓰기엔 좀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 여자는 의상 디자이너에 엄청난 부잔데 15년 전부터 돌고래를 흠모해 왔다고 언론에 밝히기도 했었대나봐. 그 돌고래랑 만나려고 1년에 2~3회 이스라엘 여행을 다녔다고 그러더라. 여자의 말로는 돌고래를 만나면 정신적인 평화와 안정을 느낀다며 진심으로 돌고래를 사랑하고 있대. 신부는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갖춰 입고 돌고래 신랑은 물속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신부는 돌고래 신랑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는데 그 주변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고 그랬었나. 그리고 결혼 선물로 고등어를 준비했다고 하더라. 어어, 너 피식 웃고 있는 거 아냐? 이래뵈도 돌고래는 35세고 여자는 41세의 어른들이라고. 게다가 여자가 강조하길, 돌고래와 진실한 사랑과 애정을 나누고 있다면서 자신이 '도착자'가 아니라고 그랬어. 난 그 기사를 보면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잠시 해봤었단다.

 

 

 아, 또 기억나는 게 있어. 사귀던 사람이 이별선물로 물고기를 줬어. butterfly barb라는 물고기인데, 열대어 중에서는 가장 작고 귀여울 물고기래. 갈색 빛이 도는 금색바탕에 세 개의 검은 무늬가 있고 대게 온순해. 대신 수질변화에 민감하므로 물갈이할 때 특히 주의가 필요한 물고기야. 대게 수컷, 암컷을 쌍으로 선물하는데 나는 암컷만 두 마리 선물 받았어. 안 그래도 번식이 어려운 물고기라던데. 너도 알겠지만 나는 물고기 눈을 싫어하잖아. 하지만 작은 물고기들은 눈이 크지 않으니까 그럭저럭 키울 만 했어. 물론 물 갈아 줄때는 꼭 일회용 숟가락을 사용했지. 절대 손을 어항 속에 넣지 않아. 뭐랄까... 물고기랑 닿는 게 싫어서랄까...? 약간 무거워하기도 하고...말이야. 물고기 눈이랑 닿을까 말이야. 아무튼, 그 작고 귀여운 물고기가 며칠 전에 한 마리가 죽었어. 그리고, 또 한 마리가 그저께 죽었지 뭐야. 잠시 죽은 물고기를 보면서 멍해있었어. 그리고 정신이 들어서 이 물고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에게 물어봤는데, 쓰레기통이나 변기통에 버리라고 하더라. 나는 물고기를 숟가락에 건져서 고양이, 풀이에게 줘봤어. 고양이가 물고기를 먹지 않더라. 갑자기 목이 메였어. 그리고 나는 그날 체했어. 흐음, 손을 따봤는데 검붉은 피가 나오더라. 나는 풀이를 보면서 눈물을 그렁그렁 거렸지. 근데, 이틀이 지난 지금은 고양이랑 죠리퐁을 먹고 있는 중이야. 풀이가 자꾸 내 야식을 뺏고 있어, 풀이 이 녀석!

 

 아,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너, 벌써 지루하다고 편지를 접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혹시 모르지 ‘벌써 한 장을 넘어서 두장 째 너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라는 말이 나올때쯤부터 이미 넌 질려버린 상태였는 지도. 왠만하면, 그냥 한 번에 쭉 읽어주길 바래.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가능한 한 빨리 내 뱉어버리고 과거가 되어버리길 바라는 말이거든.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이었는데 흐음.....아무래도 그 이야기를 해야 겠어, 오늘은.

사실 언제든지 이야기 할 수 있었어. 근데, 왠지 오늘 얘기하고 싶어졌어. 너도 알잖아. 나 기분대로, 내 멋대로 사는 거.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돼야 하는 직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지금 네게 내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얘기하려고 하고 있어. 그리고 널 좋아했다는 것도. 친구로써의, 우정의 ‘좋아한다’는 걸 넘어선 ‘좋아하다’의 의미라는 것도 덧붙여 말할게. 생각해보면 아마 넌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 같기도 해. 나 자신 조차도 내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난 그런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 다만 내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놀랬지만. 뭐... 가족들은 아직 몰라. 얘기하면 꽤나 충격 받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하지만 결혼을 할 정도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리고 당사자가 여자라면 얘기해야 겠지. 나는 내 성적 취향을 숨기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 너도 양성애자라는 게 동성과 이성에게 향하는 성 지향성이 일생에 걸쳐 고정되어 나타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겠지. 뭐, 양성애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야. 한 성보다는 다른 성을 선호할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양성애자들에게는 그런 성적인 선호도가 없으며, 상대방의 성에 관계없이 개인적인 특징들에 이끌리기도 한대. 아무래도 난 복합적인 느낌의 양성애자라고 할 수 있을거 같아. 너의 경우라면 글쎄……. 개인적인 특징에 이끌려 좋아한 경우가 되는 걸까?

 아무튼 처음으로 동성으로써 좋아한 사람이 너였어. 아, 이 대목에서 넌 이질감을 느끼고 있을까. 처음에는 나도 잘 몰랐어. 그냥, 다만 널 친구로서 꽤나 좋아하는 구나라고 느꼈을 뿐이야. 근데 그게 아니더라. 대학교에 들어가서 남자와 사랑이란 걸해보고 나니까 그제야 알겠더라. 내가 널 좋아했고, 사랑했었다는 걸. 생각나니...너랑 나랑 친한 친구라고 같이 다녔을 때 말이야. 우리들 싸운 얘기를 말하다보면 애들이 너네 사귀냐? 꼭 애인사이 같잖아. 라고 말하거나 강주하 넌 여자고 김소은 넌 남자니까 딱 커플하면 되겠네, 성격들도 다 달라가지구 말이야. 라는 소리들을 많이 들었잖아.지금도 그 말들이 들려와. 새록새록. 여기서 넌 분명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을지도 몰라. 남자와도 사랑할 수 있고 여자랑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그래서 얘기하자면, 양성애자들도 동성과 사귀다가 헤어지고 이성과 사귈 수 있어. 저번에 내게 암컷 물고기를 두 마리 선물 주었다는 사람은 여자였고, 고양이를 줍기 전에 사귀었던 사람은 남자였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사랑에 빠지고 보니 상대가 여자였는걸. 보통은 이성이라는 게 조금 다를 뿐이지.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야. 다만, 넌 첫사랑의 느낌이라는 거지. 친구기도 하고, 첫사랑이기도 하고. 왜,,, 첫사랑은 다만 풋풋하게 좋아하고, 두근거리고, 설레고, 이루어지지 않아서 가슴 아리고, 그런. 그리고 첫 키스의 상상 까지만으로 끝나는. 왠지 넌 내가 이런 얘기를 해도 불쾌할 거 같지는 않다고 느껴지는데, 내 착각인걸까? 아무튼, 언젠가는 꼭 말하고 싶었었어. 그래야 편할 것 같았고. 아마 넌 내 얘기를 들으면서 예전의 내 편지를 뒤적거릴 지도 몰라. 왜냐면 난 전부터 너에게 이런 비슷한 얘기를 많이 했었거든.

있지, 생각해보면 말이야. 난 여자가 내가 좋다고 키스를 하려고 하면 말리지 않을 거 같아. 그냥 할 거 같은데?

 여자를 사랑 하냐 남자를 사랑 하냐는 상관이 없는 거 같아. 일단 사랑에 빠지고 봤더니 여자였다. 그럼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생각해보면 말이지,,, 나 양성애자일 수도 있을 거 같아.

 이러한 말들이 아마 고스란히 편지에 적혀있을 거야. 아무튼 나의 첫사랑, 그게 너야. 그리고 나는 이말을 줄곧 하고 싶어했던 거지. 그러고 보면 넌 참 내게 못됐어. 연락도 안하고 답장도 안하고 보통 여자친구들 사이에서 하는 스킨십도 잘 안하고. 후후. 물론 넌 스킨십을 굉장히 싫어하는 애였지만 내가 널 바꿔놔서 나만큼은 새끼손가락을 잡을 수 있게 허용하는 수준까지가 되었지만.

하아, 역시 말하고 나니까 편하네. 근데, 나는 왜 널 좋아했던 걸까...(여기서부터 약 20분가량이 흘렀어) 아마, 널 나무같다고 생각해서 그런게 아닐까. 나무를 좋아하는 나로썬 나무같은 너도 좋아하게 될걸 거야. 어른스럽고, 기댈수 있고, 푸르른 느낌이 나는 너였으니까.

 네가 내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날 나는 꿈을 꿨어. 너랑 키스를 했는데(너도 나도 누구도 먼저 다가간 사람은 없었어. 둘 다 조금씩 다가갔었지.) 피스타치오 맛이 나더라. 푸른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의 느낌. 넌... 그 느낌을 알까.

 

 아, 이제 점점 마무리를 해야 겠어. 그러고 보니 생각난 건데 말이야. 어제 책에서 이런 글을 봤어.

‘나는 전사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죽고 싶을 때 죽을 것이다.’ 좋은 말인 거 같아. 특히 보헤미안처럼 살고 있는 내게는 더더욱. 나는 누군가에 의해, 운명에 의해 전사되고 싶지는 않아. 내가 죽고 싶을 때 죽을 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할 거야. 어떻게 죽음을 내가 정할 수 있냐고? . 물론 난 운명을 움직일 수 없지. 그러나 늘 동경해온것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고 싶은 날에 자살을 할 생각이야. 어떤 책의 내용인데 60살 된 할머니가 예전부터 계획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자기가 60살이 되는 생일날에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는 거야. 그 할머니의 생일이 다가오기전 정말 잘생긴 젊은 사람이 할머니가 좋아서 정말로 프러포즈를 했는데, 할머니는 기뻐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계획대로 자살을 했대. 이 얘기, 언젠가 너에게 말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 기억나니? 그때 네가 막 화냈었잖아.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그리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자살한다는 소리같은 건 하지 말라고 그랬었지? 사실 화내는 널보며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기분이 좋더라. 후후. 지금도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 화내줄꺼니? 갑자기 궁금해지네.

 

 방금 전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별 효과가 없는 거 같아. 다시 땀이 나 등을 타고 내려가고 있으니까 말이야. 경찰 생활은 잘 하고 있니. 아무래도 네 생각하게 되면 걱정으로 끝나게 되는 게 바로 네 직업 때문이다. 군인 아니면 경찰한다더니, 결국 경찰이 되었고, 그렇게 오빠랑 이모랑 그리고 친구인 내가 내근직으로 사무 보는 일을 하랬더니 강력계 형사 한다고 그렇게 고집부리고말이야. 나도 못났지만 너도 참 못났다. 그래, 신랑 되는 사람은 너랑 같은 부서에 일하는 사람이라고. 참 못났다. 못났어.

 결혼한다고, 너에게서 연락이 왔어. 오랜만에 네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너무 듣고 싶어 했던 목소리여서 그랬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결혼한다는 소식 때문에서야 전화를 한 사실에 화가 나서 그랬던 걸까. 조금은 쑥스럽다는 듯이 네가 말했어. 잘 지냈냐는 네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어. 목이 아주 단단히 메였지. 나는 그때 화가 났었을까, 아니면 목이 메여 말을 못한 걸까. 나는 아무 말도 못했어. 여보세요? 나는 말을 꺼냈어. 참 나쁜 애야, 넌. 이번엔 네가 말이 없더구나. 나는 소리를 질러댔어. 수화기를 붙잡고 하고 싶었던 말을 다 꺼내버렸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냐라는 걸로 시작해서,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이 바보야 까지.( 차마, 이기집애야 라는 말은 못쓰겠더구나.) 내가 너무 감정을 드러내놓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었지.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던 네가 그러더구나. 결혼 한다고. 다음 주 일요일 날 한다고. 나는 좀 허망했어. 사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났는걸. 나는 네가 결혼한다는 사실로 연락해올꺼라는 생각을 못했으니까. 나는 가만히 있다가 너에게 말했지. 난 몰라, 끊을 거야. 안녕. 철없는 짓이었지.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네가 미웠으니까. 단지 결혼한다고, 그 말 하려고 연락한 거 였잖아. 전화를 끊고 나는 허공에 대고 말했어. 넌 정말 바보야. 그랬더니 네가 말하더라. 응, 난 바보야.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어. 정말 넌 바보야. 예전에도 그랬었어. 정말 무심한 너에게 가끔 문자를 보내고 답장이 한참 뒤에 오거나 안 오면 ‘넌 정말 바보야’ 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지 그럼 네가 항상 그랬어. ‘응, 난 바보야.’ 라고. 한참을 나의 보라색 소파에 앉아서 고양이를 껴안고 울었더니 마음이 싹 가라앉더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지.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 내가 말을 안하고 있자 네가 먼저 물었어. 주하? 나는 능청스럽게 말했어. 아, 8월의 신부신가요? 그러자 너는 네? 라고 말했지. 순간 당황한 네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터트려 버렸어. 야~ 8월의 신부라니까 느낌이 좋은데! 짜식, 반성은 했냐? 전화선으로 너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어. 넌 정말 바보야. 그랬더니 네가 말하더라. 응, 난 바보야. 나는 다시 눈물이 핑 돌아 빨리 손등으로 훔쳐냈어. 응, 그래 넌 정말 바보야. 결혼축하해, 바보. 야아, 오늘은 결혼축하 선물로 편지를 길게 써야겠는데? 눈 아플때까지 읽을 수 있게, 아주 길게 쓸거야. 넌 반성의 의미로 꼭 다봐야 해. 꼭, 봐! 그리고 수화기 넘어 선을 꼬불꼬불 타고 다시금 들려오는 웃음소리. 너는 내게 물었어. 너는 결혼 안하느냐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얘기했지. 나 결혼하면 그날 장례식장 분위기 될 텐데? 야아, 말도 마. 다들 펑펑 우실꺼라고. 아빠 쪽 식구들이 다들 마음이 여리셔서 제 딸로 아닌데도 불구하고 펑펑 우실 분들이야. 게다가 통곡까지 하실 분들도 몇몇 계신다구. 그리고, 난 싫어. 아마 내가 제일 많이 울다 병원에 실려 갈 것 같거든. 사실은 그게 두려워. 엄마도 보고 싶을 테고. 가끔 상상해보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평생 연애만 하다 죽어야지. 네가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어. 기분이 대게 좋더라. 환해진 느낌이랄까. 나는 결혼식 준비할 때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라고, 부르면 달려가겠다고. 그랬어. 고맙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데, 쳇. 병 주고 약주고라니까. 라면서 전화를 끊어버렸지 뭐야. 후후.

 

 여기까지가 내가 너에게 주는 결혼축하편지야. 선물은 무엇을 해줄까... 고민하고 있어. 넌 내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선물이 된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꼭 네 결혼 선물은 챙길 생각이야.

 결혼 축하해. 사실 나는 아까서부터 너 때문에 눈물이 축축해지다가도 그렇게 남자 같았던,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생각하면서 킥킥 웃고 있어. 그런 나를 풀이가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어. 임마,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내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풀이 저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 아무튼, 분명 여자다워졌을 테지만 속은 남자 같은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는다는 게... 영 아니올 시다란 말이지.

잘 살아라, 친구.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이 찾아오면 집에 한번 놀러와 네가 좋아하는 율무차 끓여놓고 있을게. 그리고 네가 아이를 낳으면, 그땐 자주자주 놀러와. 그리고 남자아이는 몰라도 여자아이는 꼭 널 닮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딸이 무심하고 무뚝뚝한 너의 유전자를 복제해 가져가서 제 2의 김소은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난 아마 며칠간을 나의 보라색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아, 그러고 보니까 너랑 나의 암호가 이젠 네 남편이 생기므로써 효력을 잃게 되었구나. 왜, 그거 있잖아. ‘보쿠가 키미오 마모루 치카우’ (널 지킬거야. 맹세할게) 학창시절에 마법처럼 외우고 다니곤 했었는데, 이젠 네 남편에게 넘겨야 겠구나.

사랑해, 내 첫사랑, 그리고 나의 친구.

 

 

2007.8.15

웨딩드레스를 입은 너를 생각하며 너의 베스트프렌드 주하가.

 

추신. 정말 털털하게, 다 말해버렸네. 이것도 저것도 다. 기분 좋게, 유쾌하게, 이제는 괜찮다고 다 말했는데 왠지 편지를 마무리 짓고 너에게 전해주고 나면... 난 그만 입을 닫아버리고 씁쓸해 할 거 같아. 쓸쓸함에 고양이 풀이랑 며칠을 보라색 소파에서 뒹굴며 먹고 자고 영화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러겠지. 아무래도 넌, 피스타치오 맛 나는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

참고: 조경란 작가님의 '나의 자줏빛 소파'의 소설 형식을 빌려왔습니다.

J에대한
J에대한

추천 콘텐츠

지독한 술 (퇴고)

지독한 술    건너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공허한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나지막이 들려온다. 전화가 끊겼다. 침묵만이 무성한 주변. 찬바람이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창문엔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걸려있다. 고목 한그루. 나는 짙은 공허감 속에 빠져버린 것만 같다. 머리가 지끈 지끈거린다. 늘 예고 없이 찾아와 힘들게 하는 미열. 미열과 함께 어김없이 함께 찾아오는 두통까지. 내가 전화받는 틈을 타 은근슬쩍 찾아온 모양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녀석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늘어나면서 진군해오고 있다. 머릿속에 벌레들이 뒤죽박죽 난동을 부릴 때쯤이면 습관적으로 책상 옆에 있는 두통 제를 하나 집어삼킨다. 약 10분에서 15분 정도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테지. 나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는다. 전화는 끊겼다. 그러나 올케의 목소리가 새록새록 다시 들려온다. - 형님, 사실은…. 그이가 알코올 중독증세가 있어요. 자꾸만 올케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형님, 사실은…. 그이가 알코올 중독증세가 있어요. 지그시 감은 눈을 비집고 허탈한 눈물이 새어나와 뺨을 타고 흐른다. 순간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울컥해 목에 메인다. 나는 힘들게 숨을 죽여 삼켜버린다. 북받쳐오는 슬픔은 소슬한 1월의 밤바람과 함께 유년시절의 방문 앞에 서서 조용히 노크를 한다.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심지어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지 사 개월이 지났음에도 술을 마셨다고 했다. 물론 아이가 들어섰다는 걸 알고 난 후에는 용케 술을 당분간 끊었지만. 나는 다행히도 보통의 상식을 뒤집고 아무런 지장 없이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임신 중에 알코올을 섭취할 경우 아기에게 심각한 해가 간다는 보통의 상식을 뒤집은 채 말이다. 그 후 동생이 태어났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짊어지고 태어난 위험이 한층 낮은 수위였다는 것. 동생은 엄마의 위험한 취미가 잠잠해갈 시기에 용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우리 둘 다 바깥공기를 마신 뒤로, 엄마가 안정을 찾게 된 뒤로는 이야기가 같으니까. 엄마의 취미는 마침표가 없이 쉼표만이 존재하는 지독한 진행형이었다. 매일같이 마셨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나름대로 어린 나와 동생에게 자신의 취미를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눈이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특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베란다에 나가서 무언가를 마시는 검은 실루엣은 관찰 대상 1호였으니까.  어느 날은 엄마가 술에 취해 자는 틈새를 이용해 베란다에 나가보았다. 까치발로 겨우 베란다 불을 켜고 엄마의 실루엣이 보이던 곳까지 걸어갔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검은 비닐봉지 사이로 진로 소주 여러 병이 가득 보였다. 푸른색 소주병에 두꺼비 모양이 그려진 빨간 뚜껑의 병, 진로. 그때는 잘 몰랐다. 그 수많은 병과 바닥에 누워 골골대는 엄마를 연방 바라볼 뿐.  엄마는 며칠간을 내리 술만 먹다가 며칠간은 술병으로 끙끙 앓았다. 힘없이

  • J에대한
  • 2008-01-08
명동 프리허그(퇴고)

명동, 프리허그  어째, 상은 잘 치루고 오셨소? 밤새 내린 눈을 짓밟고 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옆 건물의 경비원이 물었다. 뭐, 그렇죠...사흘 동안의 일들을 생각해보다 일말의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씁쓸해 하던 차에 반대편 노점의 물건들이 땅으로 우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그의 소리를 잘라먹었다.   무슨 일입니까? 경비원은 까치발을 세우며 많은 인파 사이와 위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남자의 욕설이 들려왔다. 싸움이 난 것 같은데 여자가 일방적으로 맞고 있소. 늙은 경비원은 몰려든 인파를 헤집고 들어갔다. 그는 잠시 구경꾼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경비원이 지나간 길을 비집고 들어갔다. 둥그렇게 모인 구경꾼들의 중심축에서 덩치가 큰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있었고 경비원이 이를 말리려 애를 쓰고 있었다. 어머, 저 남자 미친 거 아냐. 그의 주변에서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방을 둘러보니 모두가 구경꾼들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구경꾼들은 정작, 아무도 말리려 하지 않는다.   현대인의 초상을 그리는 변주가, 보이지 않지만 곳곳에 존재하는 전기 줄을 타고 흐른다. 분주하고, 소외되고, 외로운, 허덕이기 바쁘고, 고단하고, 경계하고, 차가운, 가끔은 도도한, 세상의 불협화음. 불협화음 속에 변주가 묻힌다. 불현듯 자선냄비의 빨간 종소리가 그 변주를 이끌어 나가보려 하지만 소용없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춥고 적막한 공기가 흐른다. 이것이 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겨울의, 명동 거리의 편린이다.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셋... ... 쉰하나... 쉰둘... 쉰셋...그가 사람 수를 세고 있을 때 경비가 옆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으며 물었다. 또, 사람 수를 세고 있는 거요? 그, 사람 수를 맨날 세서 뭐하는 거요? 그는 피식 웃었다. 일하다 생긴 취미랄까? 사람 수를 세면서 사람 관찰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그는 명동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아 잡상을 벌이는 사람이었다.   이곳은 시간이 썩 빨리 지나가지 않는다. 그는 명동 시내 한복판에 한 남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다 소모되어 꺼진 전구처럼 암전의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 그는 곧 서있는 남자의 얼굴 표정이 아침에 늘 거울 속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과 닮았다고 느낀다. 바쁜 일상 속, 현대인들 속에 그는 멈춰서 있었다.   오늘따라 별 특별한 날도 아닌데도 꽤나 많이 몰리는 것 같지 않소? 인간주차장이 따로 없소. 사람들 줄이 끊길 생각을 안 하니. 건너편 의류건물 현관 앞에서 사람들이 신발 위에 쌓인 눈을 털고 있었다. 개중에 대다수의 커플들이 서로의 어깨에,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로 인해 여백의 점은 찾을 수 없이 빽빽하게 차있다. 소실점은 감춰진지 오래였다. 담배 한 개피를 물었다. 인생의 모든 것이 기대와는 달리 무의미하다고 느끼면서도 주어진 그대로 하

  • J에대한
  • 2007-11-03
푸른 곰팡이

푸른 곰팡이   은호냐. 조심스레 대문을 닫는 소리에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시며 물었다. 그리고 곧, 눈이 마주친 자가 형이 아님을 확인한 어머니는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나는 곧이어, 은호는 언제쯤 집에 온다더냐던 어머니의 말을 뒤로 한 채 작은 화실로 쓰는 방에 들어와 버렸다. 건조한 방 가운데에는 소나무가 그려지다 만 캔버스가 놓여있었다. 방문이 채 닫히지 않아 마당에 걸쳐 앉아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는 저 너머의 소나무를 또 바라보는 것이리라. 어머니는 큰아들이 생각날 적마다 개진 젖은 눈을 들어, 형이 좋아하던 소나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곤 하셨다. 비 오는 날 변변한 우산 하나 없이 거리를 헤매는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겨울 빛줄기를 잘 못 본 것일까. 한줄기 가는 눈물이 어머니 뺨 위로 흐르는 것을 언뜻 본 것 같다. 밖은 모두 회색빛을 띄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바라보는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렀다. 지상에 고독하고 푸르게, 겨울로부터 유폐되어있는 소나무. 형은 소나무를 닮았다. 4월 1일 만우절, 형이 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고 의식불명이라는 소식이 거짓말인줄로만 알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캔버스의 같은 부분만을 스무 번 덧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뒤늦게야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스스로 이 상태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무의식상태 자살이죠. 국어책 읽듯 메마르게 의사는 말했다. 형은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고. 팔 년 전에 의사는 내게 그렇게 선고를 했었다. 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 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형의 굳어가는 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 형이 좋아하던 소나무처럼 형은 병실에 뿌리를 박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뿌리째 썩어가고 식물처럼 가벼워져서는. 눅눅한 실내에 어눌했던 형의 음성이 들렸다. 네 형수는? 형은 집을 나간 형수가 돌아왔느냐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치매기가 있는 시어머니를 돌보다 형이 일하다 허리를 다쳐 일자리를 잃자 집을 나간 형수를 형은 내내 기다리는 것이다. 형수를 찾으러 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저렇게 팔 년을 식물인간으로 살아오면서도,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만날 바람결에 솔잎 향을 묻어내며 물어보는 것이었다. 네 형수는 돌아왔느냐고. 나는 그런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수는, 오늘도 내일도 오지 않을 거예요. 집에 돌아와 그리다 만 소나무를 그리고 있다. 소나무는 조금씩 푸른곰팡이가 되어간다. 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은호는 언제쯤 돌아 오냐, 은수야. 며늘아기는 어디에 있기에 나 밥 안주는 게냐. 은수야, 나 배고프다. 밥 좀 주어. 어머니는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형을 찾고 있었다. 어머니, 형은 돌아오지 않아요. 형수처럼, 돌아오지 않아요. 나는 단단하게 메인 목을 겨우 쥐어짜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얘야, 은수야. 은호는 언제쯤 돌아오느냐. 빗소리에 묻혔을까, 어머니 자신이 못 들은 척 하는 것일까. 어머니는 계속 같은 말만 내뱉는다. 나는 입을 다

  • J에대한
  • 2007-10-13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