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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 작성자 M.B
  • 작성일 2006-02-05
  • 조회수 508

 

 

 

“비가 올 거예요.”

내가 소녀에게 돌린 관심은 잠깐의 눈짓이 전부였다. 나는 다시 거리를 내다봤고 소녀도 거리를 내다봤다. 유쾌하지 않은 날씨에 지나다니는 행인은 거의 없었고, 재빠른 차들만이 파도를 만들며 빗길을 나아갔다. 우리는 아까 전부터 그렇게 처마 밑에서 시간을 낭비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소녀의 말은 완전히 난센스였다.

“이미 오고 있잖아.”

나는 그리 사교적인 인간이 아니다. 처음 보는 꼬마가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릴 한다고 해서 그걸 바로잡아주는 성격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한 시간을 햇빛 아래 기다렸고 두 시간을 빗속에서 기다렸다. 이쯤 되고 보면 뭐라도 말을 꺼내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거리에서 눈 돌리지 않은 채 대답한 것이었지만, 소녀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어색하게 대답한 게 퉁명스럽게 들렸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소녀의 음색은 경쾌했다.

“세상이 절 앞질러 버렸군요?”

나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소녀를 보았다. 내가 ‘세상’이란 형이상학적인 단어를 들을 때는 대부분 앞에 ‘빌어먹을’이라던가 ‘엿 같은’ 따위의 질 낮은 수식어가 붙곤 했었다. 이 꼬마처럼 ‘세상’을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부끄럽지 않나. 문득 나는 세상을 얘기하는 것이 부끄러워야 할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아파져 그만두기로 했다.

소녀는 그 사이의 침묵을 질문으로 해석한 듯싶었다. 소녀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가 비가 올 거라고 했는데, 세상이 한 발 앞서 비를 내려버렸어요. 그러니 세상이 제 말을 두 시간 앞질러버린 거죠. 하지만 이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어요. 제 자신이 세상을 한참 앞지르고 있거든요.”

나는 따라 웃어줄 수 없는 내 처지가 불쌍해졌다. 아이들 유머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꼬마의 경우에는 철학적인 냄새가 지나치게 많이 배여 있긴 하지만.

호응 없는 농담 때문에 분위기는 조금 뒤숭숭해졌다. 나는 다분히 의도적인 헛기침을 꺼냈다.

“누구 기다리니?”

“아뇨. 그냥 서 있는 거예요. 아저씨야말로 누굴 기다리나보죠?”

“그래.”

정곡이군. 나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시은이 녀석, 평소에 하늘같이 떠받들어줬더니만 기껏 한다는 짓이 남친 바람맞히기이다.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아량 있게 기다려줬지만 비가 오기 시작한 후부터는 기분이 바닥에 깔려버렸다. 진작 택시 잡아 가버릴걸 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통화도 안 되고.

“누군데요?”

“…친구.”

“에, 너무한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그 때부터 이 애가 여기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이 애의 존재를 알아챈 게 조금 전의 일이다. 내가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는지 한심해지기도 하고, 그렇다곤 해도 한 시간씩이나 자신을 감출 수 있던 소녀의 정체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아주 소중한 사람인가보네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네?”

“일단, 기다리는 사람이 정확히는 내 여자 친구야. 하지만 걔가 보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야.”

“그럼요?”

“세 시간 넘게 기다렸다고 하면 한 달은 떵떵거릴 수 있거든.”

“아항.”

소녀는 숨죽여 쿡쿡거렸다. 내 썰렁한 농담이 먹혔나 싶어 피식 웃어버렸다. 뭐, 솔직히 말해서 시은이 때문인 건 아니다.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행동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 경우가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 묘하게 어른스런 꼬마와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어서, 나를 당분간 이 주인 모를 처마 밑에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렇다고 너무 구박하진 말아요. 그 언니.”

“응? 안 해. 그리고 그 녀석이 얼마나 드센 앤데. 눈도 꿈쩍 안 할걸.”

“너무 쉽게 생각하시네요.”

나는 답할 말을 잃고 잠시 주춤거렸다. 소녀의 말 속에는 비난하는 어조가 담겨 있었다. 이 꼬마도 나한테 여자가 어떤 동물인지 줄줄 읊어줄 작정인가? 성별에서 오는 입장차는 이해해줄 수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2년 넘게 부대낀 여자 친구에 대해 설명하려 드는 건 조금 거슬린다. 그것도 연애의 연 자도 모를 새파란 꼬마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소녀의 말은 훈계라기보다 예언에 가까웠다. 소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잘 들어요. 오빠는 장난스럽게 그 일을 꺼내겠지만 언니는 미안한 마음에 도리어 예민하게 반응해버릴 거예요. 그러면 오빠는 역성을 드는 언니 모습에 놀라 화를 내겠죠. 언니 성미에 그걸 웃으며 물러나줄 리 없으니 서로 다투다 헤어질 거고요.”

“그리고 오빠는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하겠죠. 그 날 내가 기다린 시간은 뭐였지? 그 전부터 양보해왔던 다른 일들은 뭐고? 이전엔 신경 쓰지 않았던 서운한 일들이 떠오르고 오빠는 억울함을 느낄 거예요. 사람 마음이 돌아서는 건 한순간이죠. 둘은 싸우고 싸우다 지쳐 헤어질 거예요.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서로 다가가길 거부할 테고요.”

“그렇게 기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연애는 끝나는 거랍니다. 디 엔드. 아쉽지만 이만 폐막합니다. 총총.”

나는 잠시 벙한 채로 낙숫물 줄기를 응시했다.

내가 이 기껏해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꼬마의 얘기를 들은 게 맞나?

- 쏴아아아아아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빗소리가 내 대답을 필요 이상으로 지체시켰다. 말 같잖은 소릴 한다고 머리를 쥐어박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맥 빠지게 대답했다.

“비약이 심하구나.”

“아-뇨! 흘려듣지 마세요. 전 세상을 앞질러 왔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온 것이기도 하고요.”

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처음 알았다. 이 꼬마는 말할 때마다 나를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

“넌 대체 누구지?”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소녀는 배시시 미소를 머금어보였다. 커서도 미인이 될 상이다.

“오빠의 가능성 중 하나… 라고 할까요?”

21세기는 정보화 시대라고 한다. 빛의 속도를 따라 과학도 문화도 빠르게 발전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 공학이 내 몸을 10대 소녀로 만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머리를 흔들어 시답잖은 생각을 떨쳐냈다. 소녀의 ‘가능성’이라는 말이 뭔지는 몰라도 일단 덮어두기로 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이 시간을 너무 아까워하진 마세요. 가끔씩은 이렇게 느긋하게 있는 것도 좋잖아요. 사람은 좀 더 느리게 살 필요가 있다고요.”

나는 잠시 입가를 실룩였다. 입 밖으로 꺼내기엔 조금 민망한 얘기다. 하지만 비는 쏟아지고, 소녀는 신비로워서 나를 약간 감상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빗방울이 만드는 불규칙한 리듬을 들으며 다소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느리게 살아야 된단 소린 안 믿어.”

“네에?”

도시에 살면서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처음엔 즐겁겠지. 한 열흘 정도. 외부 왕래도 없이 벌레가 득시글한 집에서 살려면, 정말 도시 생활에 염증이 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견디기 힘들 거다. 사는 속도야 다를 게 있겠나.

빠른 시간에 많은 걸 팔기 위해 대량 생산 체계가 만들어졌다. 빠른 시간에 많은 걸 알기 위해 대중 매체가 등장하였다. 현대 사회는 ‘더 빠르게’라는 원동력을 품고 전진해온 곳이다. 그 단물은 기꺼이 받아 마시는 주제에 여유를 갖고 고상해지려는 인간들은 투정을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 느린 삶이 그토록 절실한 거였다면 라다크의 아이들이 돈에 굶주려야 할 필요는 없지.

사람들은 자신이 빠른 삶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잊어버린다. 빠름에 중독된 인간들은 그저 그러기 위해 버려야 했던 다른 삶의 방식에 한번쯤 가져봄직한 미련을 던질 뿐이다.

“냉소적이네요….”

내 짤막한 얘기를 들은 소녀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꼬마한테 괜한 소릴 꺼냈다 싶어 부끄러워졌다. 젠장, 철학도도 아닌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소녀는 말했다.

“그래서 오빠는 빠르게 사는 게 좋단 거예요?”

“중독이란 말은 좋은 뜻에서 쓰는 게 아냐.”

때때로 한숨 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그 뒤에 따라올 금단 증상을 두려워할 뿐이지.

“피이.”

소녀는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순간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려 버렸다. 부끄러움을 참느라 긴장하고 있던 탓일까, 저렇게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이면 견딜 재간이 없다.

한번 터진 웃음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소녀는 낄낄대는 내 모습에 더욱 기분이 상했는지 눈썹을 세우며 말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내 모습이 우습단 말이죠? 좋아. 오빠는 느린 삶이 싫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 시간이 아까워요? 여자 친구한테 바람맞은 채 3시간이나 본 풍경을 보고 또 보고 있는 게 기분 나빠요? 그래요?”

나이에 맞지 않게 또랑또랑한 그 질문이 다시 한 번 나를 웃겼다. 그래도 소녀의 뜻을 존중해서 미소 정도에 멈추기로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예쁜 턱선, 오뚝한 콧날. 서늘한 날씨에 스타킹을 입은 게 어린애답다. 분명 이 꼬마를 보기 전까지 내 기분은 바닥을 맴돌고 있었지만, 지금은 뭐랄까….

“…나쁘진 않아.”

그때까지의 불유쾌함은 이 기분 좋은 꿈을 위해 준비되었던 것 같다. 설명할 수 없었던 미련도 이와 같은 걸까. 시원한 빗속에서, 세상을 앞질러왔다는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은 아마 다시는 겪을 일이 없을 테지.

“잘 됐다. 그럼, 여자 친구한테 떵떵거리지 않기에요.”

뭐가 마음이 놓이는지 활짝 웃는다. 그 얼굴이 무엇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와서 소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인 날 보고 헤헤거리던 소녀는 문득 바깥을 보고는 신나게 인도로 뛰어나왔다.

“와! 그쳤다!”

먹구름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밝아진 하늘을 보고 눈부셔했다. 막 갠 하늘은 언제 비를 뿌렸냐는 듯이 파랗기만 했다. 더 이상 처마 밑에 서 있을 이유가 없어진 나는 집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내심 생각하던 대로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저, 같이 걸어도 되죠?”

“마음대로 해.”

소녀가 반전해서 로우 킥이라도 날리지 않는 한 계속 내버려둘 생각이다. 허락을 받은 소녀는 즐겁게 뒷짐을 진 채 내 옆을 걸었다. 내가 시은이와 다투지 않겠다고 한 게 그렇게도 기쁜 걸까.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모습을 보니 그냥 나도 즐거워졌다.

한동안 걷다 보니, 소녀가 발걸음을 늦췄다. 계속 서 있어서 나도 무릎이 욱신거릴 지경이니 쉬고 싶을 만도 하다. 나는 소녀를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소녀는 다시 걸음을 내딛는 대신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람이 빠르게 살 수밖에 없다는 오빠 생각을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소녀는 웃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제일 즐거웠던 기억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산책이었어요. 하루 종일, 아무 생각 없이 걸었는데도….”

그 누가 어떤 동화를 구연한다 해도, 저 목소리만큼 감미롭게 낭만을 노래할 순 없겠지.

나는 억누를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뭔가를 말하려던 나는 그 것을 그만두었다. 저 소녀가 겉모습 이상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도, 사실은 인과적으로 이곳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시간을 앞질러 나타났기에 일어났다는 것도 그녀 자신에게 얘기하기엔 너무 무가치한 얘기다. 대신 나는 소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름이 뭐지?”

“…노을이에요. 이 노을.”

“노을. 좋은 이름이구나.”

“순 한글이라 서류 적을 때 편해서 그렇게 지었대요.”

우리 둘은 동시에 킥킥거렸다. 편안한 웃음을 멈추고, 눈앞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넘긴 노을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제 전 가봐야 돼요.”

“그래.”

“제 시간은 이보다 한참 뒤에 출발하지만… 오빠를 만나기 위해 억지로 앞질러온 거예요. 떼를 쓴 거죠. 그래서 더 끌 수가 없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의 말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 애에겐 존재가 걸린 문제였으니까, 어떻게든 내게 다가오지 않으면 안 됐겠지.

노을은 등을 돌려 내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문득 멈춰선 노을은 내게 짓궂은 어조로 충고했다.

“여자친구, 허브 좋아하니까… 한 번 사가 보세요.”

“고마워.”

나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가는 모습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 걸로 내 하나뿐인 꿈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다. 내 의도를 눈치 챘는지, 노을이 걸음을 돌려 내 곁으로 다가왔다. 노을은 발돋움해 내 귀를 끌어당기고 기쁜 어조로 속삭였다.

“안녕. 오빠.”

눈을 떴을 때, 노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데도, 노을이 있었던 자리엔 아직 그 애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 그 느낄 수 없는 온기를 손에 휘감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녕… 노을.



* * * * * *



나와 시은이는 반 년 뒤 결혼했다. 그녀는 아직도 내 프러포즈 때를 얘기할 때면 배를 잡고 웃는다. “노을로 하고 싶어.” “뭘?” “우리 아이 이름.” 내가 지금까지 보였던 행동 중에 가장 대범했다나.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내가 그 때 반쯤 실성했던 모양이다.

시은이는 아들일 땐 어쩔 거냐는 대답으로 멋지게 청혼을 받아줬지만, 첫 아이는 여자애였다. 당연히 이름은 노을이다. 아직 걷지도 못하지만 걸을 때가 되면 마구 돌아다녀줄 생각이다. 노을에게 보내는 내 사랑이 너무 과도하다고 시은이가 불평 아닌 불평을 할 때면, 나는 그녀가 날 바람맞힌 날 얘기를 해줄까 생각하다가 이내 웃고만 만다. 어차피 애들은 크면서 엄마와 어울리기 마련이니까, 아빠만 간직하고 있는 추억도 하나쯤은 있는 게 좋겠지.

덧붙여 말하자면, 시은이 말로는 그 때 내가 허브를 사들고 가지 않았으면 우리가 찢어졌을 거라고 말하긴 한데, 지금까지 사간 허브 십 여 분이 모두 제 명에 못 간 걸 보면 그녀가 허브를 좋아한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다. 어쩌면 시은이에게도 노을이 찾아왔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둘째 아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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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저곳 뼛속까지 우려먹은 글이라 조금 찔립니다만 (..)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깐 말씀드리자면 라다크는 히말라야 부근의 조그만 마을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서구 자본이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장소입니다 ; 자세한 건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 나와있구요, 저희 학교 필독도서였습니다 (..) 백일장으로 썼던 거라 언급이 되었습니다 -_-aaa

 

부모님은 글을 쓰는 걸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 같더군요... 저도 취미로 남겨둘지 먹고 살 생각 하고 전력투구할지 고민입니다

 

M.B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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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7-12
평행거울

  평행거울  기분 나쁠 정도로 농밀한 향수 냄새 속에서, 눈을 뜬다.손끝에 스치는 맨살의 감촉이 불안해진다. 보통 이불을 덮을 정도면 이만큼의 노출은 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자 몸을 일으키니,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겨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잊어버렸다. 내가 마주 대한 것은 거울. 자기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다니 나사 빠진 짓이다. 아래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리며, 나 자신이 어느 호텔방에 알몸으로 던져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카펫은 붉고 벽지도 따스하다. 고풍스런 디자인이지만 향기만큼은 머리를 쪼갤 만큼 지독하다. 나는 코가 빨리 마비되어 주길 기다리면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전날 밤의 상황을 기억해보려 하지만, 약이라도 먹었는지 기억이 왕창 날아간 상태다. 추측을 해보려 해도, 알몸으로 혼자 호텔방에 누워 있는 여자라면 자연스레 그 쪽으로 상상이 닿을 수밖에 없다. 동행한 자가 있었나 생각해보지만, 애초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조차 알 방도가 없다.가만히 누워 있어봤자 상황이 바뀔 리 없으니 일단 이 곳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침대 주변을 뒤진 나는 소지품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고 당황했다. 소지품은 둘째치더라도 입고 있던 옷가지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말 그대로 맨몸뚱이만 던져진 상태였다. 나 자신과 일어나면서 흐트러진 이불 외에는 호텔방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 없다. 이 정도로 괴이한 상황에 빠지면, 기막힌 수준을 넘어서 오히려 차분해지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있어."머릿속에 담고 있던 말을 내뱉자 그 생각이 좀 더 분명해졌다. 그래, 누군가가 있다. 물건도 꼭꼭 숨겨놓은 채 알몸으로 누워있는 걸 내 자의로 했을 리가 없지. 어떤 갈아 마실 놈인지는 몰라도 나를 여기다 처박은 놈이 분명히 있단 말이다.그렇다면 더더욱 여기 있어줄 순 없다. 타월이든 뭐든 걸치고 나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다행히 이곳은 여러 사람이 쓰는 호텔이다. 안 되면 호텔 보이라도 불러서 상황을 설명하면….철컥!막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밀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누구지? 설마…. 나는 몸을 다시 침대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의 전화기에서 연결선을 빼내 슬그머니 이불 안쪽으로 감췄다. 일부러 신경 써서 보지 않는 한, 그 둘둘 말린 선의 일부가 내 손에 쥐여져 있다는 걸 알아챌 일은 없을 것이다.다행히 그 모든 일은 문을 연 누군가가 방 안에 들어서기 전에 끝났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며 눈을 감았다.부드러운 카펫 위에서도 뚜벅, 뚜벅, 하고 발소리가 울린다. 건장한 남자의 것이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나는 낙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손에는 나름대로의 도구가 있다지만, 이 알량한 전화선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빠릿빠릿하게 달아오른 신경 앞에서 발소리는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와 멈췄다. 얼굴에 개미들이 잔뜩 기어 다니는 것 같다."

  • M.B
  • 200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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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불

    스티븐 킹은 고교교사를 하면서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절망하지않고 끊임없이 글을 썼습니다. 창작이란 그것을 고민하고 고민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면의 욕구가 글쓰기를 부르지 않고, 그것을 전력투구하겠다고 마음 먹어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있거나, 글쓰기에 재능이 없거나의 하나라고 보이네요. 앞에 거론한 위대한 작가들은 생활을 위해 글쓰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직업을 가진 것입니다. 새로나온 디카를 사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답니다.

    • 2006-02-05 02:01:59
    초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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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불

    글이 취미냐, 먹고 사는 것이냐가 왜 고민이 될까요? 황무지 작가 TS 엘리엇은 은행원이었고,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쓴 쥘 베른은 중권 중개인, 테스를 쓴 토마스 하디는 건축가, 야성의 부름을 쓴 잭 런던은 부두노동자,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피츠제랄드는 광고 일을 했고, 타잔을 쓴 버로우즈는 연필깎이 외판원, 아이반호우의 월터 스콧은 법원 서기, 안톤 체홉은 내과 의사, 노벨문학상을 탄 윌리엄 포크너는 미시시피 대학 우체국장이었습니다.

    • 2006-02-05 01:49:44
    초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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