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나, 그리고 흐르는 세월
- 작성자 다은047
- 작성일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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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벤치 위에 걸터앉았다. 사방에 쌓여있는 낙엽들과 녹색으로 가득 차 있는 한적한 공원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싱그러운 풀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는 건 당연지사. 후읍,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확실히 나이가 드니 이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고역이었다. 마치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죽음이라는 결말이 아른거리는 것 같다고 할까.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자글자글한 주름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온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늙음만이었다. 그래, 이게 바로 세월이구나.
고개를 돌려 벤치 옆에 있는 나무를 보았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소나무 한 그루. 나는 그 나무를 알았다. 알지, 알고야 말고. 마지막으로 본 적이 너무 오래돼 기억이 가물가물할 수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한눈에 보자마자 알겠더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나의 가족이자 친구이며 동반자였으니까. 나무의 모습은 수십 년 전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아니, 사실은 내심 부러웠던 걸지도 몰랐다. 그야 이토록 추레하게 늙은 나와는 다르게 저 나무는 아무런 변함이 없어 보였으니.
“뭐, 그래도 보기 좋긴 하구나.”
혼잣말을 되뇌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잊고 있던 옛 추억들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수많은 기억의 파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다름 아닌 학창 시절의 기억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당시에 나는 친구를 사귀는데 소질이 없었다. 맞다, 그랬었지. 거기엔 아마 내 내향적인 성격 또한 한몫했을 거다. 딱히 나에게 먼저 말을 거는 친구는 없었고, 그렇기에 나 역시도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는 청춘이라 부를 고교 생활 3년을 마땅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보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힘들었다거나 속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뭐, 어쨌거나. 나는 하교 후 시간이 남아돌 때면 하루도 빠짐없이 공원으로 달려가 벤치를 사수하곤 했다. 그곳에 앉아 독서를 하기도 하고, 가끔은 누워서 낮잠을 자곤 했다. 딱히 문제가 될만한 건 없었다. 비가 오면 옆에 있던 나무가 우산이 되어 주기도 했고, 햇빛이 너무 강할 때면 그늘이 되어 주기도 했다. 내가 유일하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어 주었다. 그곳에 나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아무런 걱정이 없었지, 내게 너무나도 과분한 생활이었어.”
시간이 흘러, 내가 사회에서 청년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자 그때부턴 인생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었다. 일찍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멸시당했다. 상사는 나를 보고 일 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머저리라고 비난했고, 후배들은 그런 내가 상사에게 까이는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때문에 오랜 시간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생활을 보냈다. 내가 이러려고 지금껏 살아온 건가, 내 지난 생애는 아무 쓸모가 없나, 하고 자괴감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건 내가 늘 가던 공원 벤치에 아무리 오래 앉아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억울함과 분노 같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쳐 내 마음속 한구석을 비집고 들어왔다. 심장이 뜨거웠다. 제길, 나는 이런 취급을 받으려 여태껏 살아온 게 아니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더욱 노력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밤을 새우며 일했고, 사회라는 수레바퀴에 치여가며 살지 않기 위해 구두 밑창이 떨어질 때까지 뛰어다녔다. 십수 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부터 사람 취급은 받으며 살 수 있더라. 이후로는 흔해 빠진 이야기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그 결과로 공원에는 한동안 찾아오지 못했지만 이리 늙은 때까지 오래도록 살았다. 그저 그게 전부였다.
눈을 살며시 떴다. 시야에는 여전히 한적한 공원과 내 옆의 나무가 보였다. 그렇다. 나무의 모습이 보인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균열들이 나무 곳곳에 생긴 게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나무도 나와 같았다. 나처럼 세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같이 늙어가고 있던 것이다.
“아아, 그렇군. 너도 지금껏 고생 많이 했겠어.”
주름이 가득한 손을 나무에 손을 얹었다. 나무는 단단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것을 굳건히 견뎌낼 만큼이나 단단했다. 생명의 기운이 손을 타고 넘실거리며 흘러넘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무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잔상이 그려진다. 이런, 나는 항상 너에게로부터 은혜만 받는군.
“지금껏... 정말 수고 많았네.”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나무가 나에게 해준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공원에 추레하게 늙어버린 노인과 볼품없이 몸에 균열이 생긴 나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그저 삶을 살아가는 나무와 나, 그리고 흐르는 세월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맞다, 지금 나는 내 친구와 함께 있다. 그래, 단지 그뿐이었다.
나의 오래된 친구야, 너는 그날과 다를 게 없구나.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물론, 나도 그렇고 너또한 마찬가지로 하고싶은 말이 있단 걸 안다. 그러니까.
그러니 지금은-
"고맙다."
-이 말 한마디만 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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