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오면 우리는
- 작성자 미할
- 작성일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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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오면 우리는
온하결의 유서엔 그런 말이 적혀있었다.
'습한 것을 싫어해, 장마가 오기 전에 죽습니다.'
하결의 세계는 늘 가슴팍까지 차올라 일렁였다. 열여덟 이후로는 더 이상 차오르지도 않아서 잘난 얼굴은 잠기지도 않고 둥둥 잘만 떠다녔지만, 하결은 텅 빈 폐부에 물이 가득 들어찬 것 처럼 헛숨을 쉬는 일이 허다했다.
하결은 유서를 썼다. 그것도 꽤 자주. 큼직한 에이포용지에 수성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유서로 종이학을 접어 마치 보란 듯 실로 매달아 두곤 했는데, 그 애의 고약한 성미를 알면서도 홍서는 늘 마른 입술을 축여야 했다. 홍서는 하결의 그 빌어먹을 유서를 매번 퍽 정성스럽게도 읽었다. 입으론 욕을 짓씹고 눈으론 걔가 눌러쓴 글자들을 씹었다. '홍서'하고 시작하는 첫 머리에서는 늘 헛구역질이 났다.
홍서는 하결을 처음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퍼붓던 된소나기와 틈이 벌어진 대문 밖으로 바람에 못 이겨 구르던 샛노란 참외, 마루에 앉아 시대에 맞지 않는 마이마이 카세트 테이프를 돌리던 열여덟의 온하결. 열인 문틈으로 발을 디미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도 하결은 홍서를 올려다보며 씩 웃기나 했다. 오랜 시간 손길이 닿지 않아 작은 숲이 되어버린 공용 텃밭을 사이에 끼고 나란히 자리한 두 집과 일면식이라곤 없던 사이. 그럼에도 하결은 꼭 홍서를 아는 것 처럼 또렷히 뜬 두 눈을 깜박였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이어폰 너머 소리에 몸을 오뚜기 처럼 움직이면서. 아마 인사가 아니었을까.
홍서는 그날 하결의 유서를 처음 발견했다. 간혹 이 순간으로 돌아와 그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니 처음부터 떨어진 참외를 모른 척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이쳤으나 그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은 이렇게 될 거란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 웃는 얼굴에 정신이 팔려 뒤늦게야 보게 된 그 애의 머리 위 불안정한 궤도를 그리던 하얀 종이학. 하결이 홍서가 주워 들어온 참외를 깎으러 들어간 사이, 들이치는 비바람에 못 이겨 떨어진 학을 펴 마주한 하결의 말들. 다시 접는 법 따위를 알지 못해서 구기듯 접은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유월의 낮. 하결은 제 학의 행방을 알면서도 별 대꾸 없이 홍서의 옆에 앉아 껍질이 덜 까진 참외를 씹었다. 군데군데 노란빛이 선명했으나 이런 데에 영 젬병인 홍서의 실력 보다야 봐줄 만했다. 비 맞은 참외 껍질은 유독 질긴 것 같았다.
하결이 대문 앞에 과일 따위를 놓아두는 일은 종종에서 매일로 그 빈도수가 늘어났다. 그럼 홍서는 모르는 척 그걸 주워 마당으로 발을 들이곤 했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앞이 어색해질 지경에 이를 떄 쯤 홍서는 제 집에 돌아가는 일이 드물어졌다. 하결의 집 마당 한 구석에 작게 만들어진 화단 속 잡초의 피비린내가 홍서의 발을 묶어 맸다. 그럼에도 하결은 해가 떠오르면 여전히 대문 앞에 과일을 내두었고. 불만 가득한 볼멘소리 없이 그걸 착실히도 주워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하결은 꿈을 잘 꿨다. 종종 자곤 하는 낮잠은 꼭 죽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이 자면서, 밤에는 눈만 붙였다 하면 별로 있지도 않은 손톱을 세워 제 팔뚝을 벅벅 긁어댔다. 그 덕에 늘 바짝 깎여있는 하결의 손톱 아래에는 불에 그을린 듯한 검은 자국이 자리했다. 그건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결이 팔뚝에 그림을 그릴 때, 홍서는 하결의 푸석한 머리채를 잡아 젖혀 눈을 뜨게 하곤 했는데, 열에 아홉의 온하결은 기괴하게 까뒤집히던 눈을 스스로 제자리에 돌려놓았고 남은 하나의 온하결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아주 전부터 깨어있던 사람을 흉내 내듯 까만 눈동자로 홍서를 마주 보며 '홍서, 나 머리 다 빠지겠어.' 따위의 시시한 소리를 해댔다. 그리고선 맥없이 픽 쓰러져 잠드는 하결의 둥그런 머리통을 감싸 안는 것은 누구도 시킨 적 없는 홍서의 몫이었다. 날이 밝으면 홍서는 간밤에 부은 눈을 끔벅이며 린넨 커튼을 걷었고, 하결은 홍서가 누워있던 자리에 시린 몸을 파묻어 이불을 두른 채 땀에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그럼 꼭 그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드림캐처. 나쁜 꿈을 먹는 부적이라고 했던가. 홍서는 그걸 사 들고 왔다. 한 손엔 열 구짜리 계란을 들고 반대 손에 들린 만 오천 원짜리 드림캐처를 흔들었다. 짜잔. 허술하게 달린 깃털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어디에 달래? "
"홍서가 달고 싶은 곳에."
하결은 마루 밖으로 내놓은 두 다리를 흔들었다. 홍서는 사 온 것을 마루 위 잘 보이는 곳에 달았다. 하결의 흰 학이 날갯짓하는 옆에. 손끝이 뾰족하게 갈라진 나무에 걸려 찢어질 때까지 풀리지 않게 바짝 동여맸다. 개인에게서 비롯된 지나친 욕망의 대가라도 되는 것인가, 살점이 뭉개진 손끝이 쓰렸다. '아.'하는 홍서의 외마디 비명에 하결은 먹던 사과를 흙바닥에 내버린 채 다급히 자리를 박찼다. 엉성하게 매듭지어진 흰 실에 붉은 물이 들었다. 그게 못내 찝찝해 상처를 살피는 하결의 물음에도 정신이 산만했다. 하결은 길게 배인 홍서의 검지 손가락을 제 입에 물고 상비약 가방을 헤집었다. 쇠 비린내가 역하지도 않은지 태연한 낮으로 소독약 뚜껑을 돌러 여는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홍서의 눈 속으론 이내 장난기가 어렸다. 검지에 부드럽게 말리는 하결의 혀 위로 상처 난 손끝을 꾹꾹 눌러 헤집었다. 헛구역질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깊게. 길게 뻗은 날랜 혀 중앙의 오목하게 파인 곳에 붉은 선을 그었다. 하결이 홍서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발음이 모조리 뭉개져 '흥스'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꽤 깊게 베인 탓에 하결이 혀를 거두고 난 뒤에도 갈라진 사이로 단숨에 핏방울이 베였다. 상처를 닦으려 흰 그릇에 떠 온 물이 핏빛으로 흐트러졌다. 틈 없이 맞물린 입에선 화단에 박힌 잡초와 같은 비린 맛이 났다.
새벽달이 흐릿하게 드리운 때에 홍서는 새 실로 다시 매듭을 지어 묶었다. 탁하게 물든 실은 화단에 묻었다.
'장마가 시작되면 우리 사랑할까요.' 홍서가 그 문장을 읽었던 건 늦여름 장마가 지난 팔월의 이른 아침. 봄은 설레어 싫다는 화자의 말이 늘어진 곳에 가름끈을 끼워둔 홍서는 저만치에 앉아 소다 맛 하드를 깨물어 부수는 하결을 바라봤다.
"장마가 시작되면 우리 사랑할까요?"
그것은 나직한 방백에 가까웠다. 저를 불렀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결을 보며 홍서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방긋. 그럼 하결도 따라 웃었다. 방긋. 더운 여름에 퍽 조화롭지 못하게도 눅눅한 소다 향이 범벅이었다. 물을 뿌려둔 마당에선 더운 기운이 올랐다. 홍서는 제가 웃으면 꼭 따라 웃곤 하는 하결을 알았기에 부러 더 자주 웃음을 지었다. 마당을 비질하다가도, 수돗가 시린 물에 손을 씻다가도 경우 없이 자꾸만.
"홍서"
"응?"
"나 저거 해볼래."
여기저기 깨진 벽돌로 어설프게 울타리를 만든 화단에는 봉숭아가 피어있었다. 늦봄 언저리에 홍서가 심어두었던 봉숭아는 벌써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결의 손끝은 그곳을 향했다. 지난밤 내린 소나기에도 떨어지지 않은 꽃잎들이 물을 잔뜩 먹음은 채였다. 홍서는 마당 구석진 곳, 언젠가 하결이 주워다 놓았던 둥근 돌을 찾아 그걸 뭉갰다. 봉숭아를 올린 손에 비닐장갑의 끝을 잘라 씌우고 흰 실로 나풀거리는 끝을 맸다. 하결은 그 물컹한 느낌이 어색했는지 자꾸만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창가에 기대어 앉은 홍서의 다리는 늘 그래왔듯 온전히 하결의 차지였다. 금세 풋잠이 들어 고르게 퍼지는 숨소리가 혹여 유서장 소리에 몽땅 묻혀버릴까 홍서는 노심초사하며 숨을 참았다. 유서의 첫머리는 여전히 '홍서'로 시작했다. 단조로운 부름에 어울리지 않는 그 애의 물빛 웃음은 야트막한 여름에 예외 없이 존재했다. 발치에 걸리는 인견 이불에서는 장롱의 퀴퀴한 냄새가 배어있다.
두 사람 모두 잠에서 깨었을 때, 하결의 손끝은 온통 풀 비린내로 가득하게 물이 들어있었다. 마당 개숫가는 지하수를 끌어 쓰는 턱에 하결의 물 맺힌 손은 늘 벌겋게 물이 들어있었는데, 다홍빛이 왈칵 번진 것이 꼭 그 모양과 같았다. 홍서는 그 두 손을 잡고 입김을 불었다.
"홍서, 나 손 안 시린데."
하결은 그러면서도 얌전히 손을 맡긴 채 보시시 웃음을 지었다. 묽은 풋내가 콧잔등을 헛돌았다.
하결이 애정으로 하는 것들 중에는 달이 있었다. 매일 밤 홍서의 다리를 베고 누워 검게 칠해진 하늘이 뚫어져라 올려다보는 하결의 정성을 알았는지 하결이 늘 자리를 틀고 앉아 있는 마루 위 자리에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닮는다고 했던가. 하결의 동그랗게 뜬 눈은 보름달 같았고, 웃을 때 굽어지는 눈은 손톱달 같았다. 홍서는 하결이 나열하는 달 이름이나 뜨는 시간 같은 건 몰랐으나 달을 볼 때 유독 푸르게 일렁이던 하결의 눈동자를 알았다. '오늘은 그믐달이 뜨는 날이야.' 하며 손톱달이 뜬 하늘을 손끝으로 콕 집는 하결의 새까만 반구는 형형했다.
달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유난히 긴 밤이 있다. 어떤 날에는 빛 하나 없이 어두웠고, 어떤 날에는 별들만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런 날이면 까만 도화지에 바늘로 낸 것처럼 작은 구멍도 있었고, 거인의 손가락으로 쿡 질러 낸 것처럼 크고 밝은 구멍도 있었다. 그렇게 흩어지는 별로 좋았으나 그럼에도 홍서는 하결이 올려보는 하늘에는 늘 달이 뜨기를 바랐다. 달이 뜨는 날이면 하결이 아주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서. 어느 날부터는 홍서가 하결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였다. 하결보다 앞서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언제쯤 달이 그 빛을 낼지 골몰했다. 어쩌면 이미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을 것을 기다렸다. 하결은 홍서의 옆에 나란히 앉아 무리에서 떨어진 외딴 별 조차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실타래처럼 여리게 늘어진 구름이 흘렀다. 그럴 때면 하늘은 꼭 맑은 물에 막 풀어지기 시작한 먹 같았다.
"홍서, 오늘은 달이 안 보이는 날이야."
이미 오늘은 달이 보이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을 하결은 그럼에도 한참을 기다리다 그런 말을 했다.
"응 그런 것 같네."
하결도 저처럼 매일 달빛이 들길 바라는 욕심을 냈을까.
"그러니까 오늘은 홍서가 달 해줘."
홍서는 달이 보이지 않는 새벽을 뜬 눈으로 지켰다. 불 꺼진 무대 위 작은 먼치처럼, 빛이 없는 서러운 먹빛 하늘 아래에 곤히 잠든, 애정으로 하는 어떤 이를 위해서.
하결의 마지막 유서는 단조로운 부름이 부재한다. 이제는 더 이상 주울 일 없는 시퍼런 대문 앞 과일처럼.
흰 여백에 긁어 써진 문장 속 하나의 쉼표와 한의 마침표만이 홍서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틈이 되었다.
'습한 것을 싫어해, 장마가 오기 전에 죽습니다.'
홍서는 끝이 붉은 담배를 잇새에 걸쳐 짓물렀다. 지붕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마루 밖으로 나온 하결의 발이 푹 젖어 든다. 걔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가지런히 모인 두 다리를 마루 깊게 밀어 넣은 홍서는 끝에 앉아 이어폰 한쪽을 나누어 꼈다. 제 무릎 위엔 하결의 머리를 뉜 채로. 학의 날개 죽지를 찢어먹은 덕에 유서 종이가 너덜거렸다. 홍서는 그걸 입속으로 구겨 넣어 꾹꾹 씹었다. 턱이 뻐근하다. 종이가 껍질이 덜 까진 참외 처럼 질겼다. 몇 해를 어지러이 쌓여 소화시키지 못한 글자들이 온 몸의 구멍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주인을 잃은 담배는 가느다란 연기를 흘리며 하릴없이 타들어 간다. 홍서는 문득 그 끝이 둥글게 타들어 가는 장초가 하결의 어깨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밤, 잘게 떨리던 둥글고 붉은 것을.
공기를 누르고 내려앉은 습기에 하결의 살가죽이 반질반질하다. 저를 닮은 달을 보다 잠에 든 걸까. 지나치게 안온해 보이는 얼굴 위로 달빛이 들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 달이 떴다. 멀건 얼굴이 그 빛에 이지러져 저 멀리 달까지 단숨에 사라질 것 같았다. 홍서는 평온한 얼굴을 한 하결의 머리통을 품속에 끌어안고 숨을 속삭이며 멍청하게도 달이 떠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걔는 무언가를 싫어해 죽을 성정이 못됐다. 스물둘 그 애의 죽음은 열여덟의 방종 따위가 아니었다. 온하결은 달을 사랑해 죽었다. 홍서는 그 문장을 곱씹는다.
지체 없이 돌아오는 새벽엔 비가 내렸다.
피가 말라 붙은 하결의 손톱에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때늦은 장마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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