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동의어
- 작성자 김서멍
- 작성일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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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동의어
-김서멍
1
여름은 후, 하고 숨을 불었다. 손에 들려 있던 민들레에서 홀씨가 바람을 타고 훌훌 날아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흩어지는 먼지 같은 씨를 바라보는데 햇빛이 날카롭게 눈을 찢고 들어왔다.
24절기 중 각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것들. 입춘, 입하, 입추, 입동.
그리고 오늘이었다. 여름의 시작, 입하. 달리 말하면 여름이 가장 괴로운 시점이란 의미였고.
넓고 뜨거운 잔디밭에 털썩 누워서 쨍한 태양과 눈싸움을 했다. 노랗고 하얀 덩어리들이 눈에 박혀 들어오며 색이 변색된다. 곧 붉은 듯한 무늬가 시야에 점을 찍은 듯 돌아다녔다.
뜨거운 감각은 어쩌면 익숙하다. 여름은 그랬다. 울음을 울면서도 웃음을 웃으면서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그 태양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시작이라는 건 어떤 기다림으로부터 기인되었다.
몇 년도의 초여름인지도 가물가물한.
그래서 여름은 제 이름을 싫어한다.
초여름.
그저 저주한다.
2
―사상 최악의 폭염이 예상될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이나 노약자는 가급적 외부 활동을 주의하시고…….
뉴스데스크에 앉은 여자 아나운서가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테이블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여름이 고갤 위로 올렸다. 화질이 그리 좋지 않은 텔레비전에서 점심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아나운서 옆에 앉아 있던 전문가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화면의 반쪽으로는 한반도 모양의 시각 자료가 함께 송출되고 있었다.
―이번 여름 같은 경우에는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력이 굉장히 커져서…….
“아가씨.”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한 여름이 반사적으로 비닐을 받아들었다. 여름에게 포장된 음식을 쥐여준 식당의 아주머니는 일이 바쁜지 바로 안으로 돌아갔다. 여름은 머쓱하게 음식을 들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역시 온도라는 것도 공기의 흐름을 따라 전달되는 것인가 보다. 고작 얇은 유리문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덥다니.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숨 쉬는 것이 힘든 느낌이었다. 도시 전체가 큰 찜통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지방에서 소위 말하는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여름이, 열기가 푹푹 찌는 서울로 올라온 이유란 간단했다.
어머니의 가장 친했던 친구. 여름에게는 ‘아주머니’라 불러야 마땅하겠지만 호칭은 그냥 ‘이모’인 이 때문이었다.
잠깐 걸음을 걷던 여름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지도 앱을 켜 현 위치를 확인하고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본다. 아, 하고 감탄사를 뱉더니 골목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금 더 가니 한 주공아파트 단지의 입구가 나왔다. 여러 번 와보았던 곳이지만 이리 푸릇한 식물들이 가득한 것은 처음 보았다. 여름은 안쪽으로 들어가서 202동을 찾았다.
띵동. 202동 404호에 도착한 여름이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무언가 우당탕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문이 열렸다. 진갈색의 파마머리를 한 여성이 나타났다.
“왔니.”
“네.”
이모는 문을 열어주기만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은 음식이 든 무거운 비닐을 오른손으로 옮겨 쥐고 문을 닫았다.
이모 집 특유의 짙은 향을 맡으며 집 내부로 들어섰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고지식한 이모더라도 에어컨 트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어서 여름은 좋았다. 걸어가 식탁 위에 음식을 올려놓고선 이모와 눈을 마주했다.
“뭐야?”
“갈비탕이요. 이모가 사오라 했으면서.”
“그랬지.”
어쩜 겨울에 왔을 때보다 더 건망증이 심해지신 것 같네.
여름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틀려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연예인이 피부 건강을 위한 저만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었다. 저는 세안을 하기 전에 꼭 손을 씻어요. 아무리 귀찮아도 스킨 케어는 꼭 하고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여름이 비웃었다.
쟁반 위 사과를 들고 온 이모가 여름의 옆에 앉았다. 과도를 들고 사과 껍질을 유려하게 벗겨냈다. 칼을 든 손으로 그녀가 사과 조각을 여름에게 내밀었다. 여름은 조심스럽게 과육을 집어 입에 가져갔다.
“되게 맛있다.”
“비싼 거야.”
“그래요?”
응, 이모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름은 함께 고개를 까닥이며 다시 시선을 텔레비전으로 향하였다. 방송에서는 직접 연예인이 제 손등에 제품을 발라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제형도 되게 쫀쫀하고.
여름이 미간을 좁혔다.
이게 토크쇼야 홈쇼핑이야.
“딴 거 틀어도 돼요?”
“어엉.”
여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리모컨을 찾았다. 채널을 휘리릭 돌리면서 볼 것이 없나 잠깐 훑었다.
애초에 드라마나 영화를 그리 즐겨 보는 편이 아니다. 예능도 아는 것이 많이 없고. 결국 여름이 택한 것은 동물 다큐멘터리였다. 낮은 내레이션 음성이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수사자가 암사자에게 다가가는데요. 한 쌍의 사자가 짝짓기를 하네요. 이렇게 사자가 짝짓기를 자주 하는 이유는 바로 사자의 수정 가능성이 낮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새끼 사자 다섯 마리중 한 마리만이 성체가 될 때까지 생존합니다.
곁눈질로 텔레비전을 보던 여름이 문득 물었다.
“수현이는요?”
“그 호주-”
“아 맞다, 호주 갔지.”
뒤늦게 기억을 떠올린 여름에 츳 하며 이모가 혀를 찼다.
수현은 이모의 아들이다. 여름보다 5살이 적으니, 지금 아마 대학 복학생이거나 졸업생일 거였다.
지난번 왔을 때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 간다는 거 들었었는데. 그새 또 까먹었다.
어쩌면 건망증은 나한테 있나, 여름은 실없이 생각했다.
“그러면 언제 오는 거예요?”
“올해 12월에.”
“그렇구나,”
잠깐 둘이 아무 말 없이 텔레비전을 보았다. 화면에서는 새끼 사자 몇 마리가 어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걸음을 걷는다 하더니 곧 새끼 사자들이 작은 몸싸움을 시작했다. 어미가 뒤를 돌아보며 새끼들을 챙겼다.
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옆에 앉아 있는 이모를 곁눈질하였다. 뭐냐는 듯 이모가 마주 쳐다봤다.
“왜?”
여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
“배, 고파요.”
엄마와 웃으며 장난치던 이모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차마 말할 수는 없어서.
어휴, 이모가 한숨을 쉬었다.
“밥 먹을래?”
“네.”
“그래,”
이모가 읏차, 하며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여름은 밀림 속 사자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후우우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숨을 뱉었다.
하품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나오려고 했다.
3
희암리는 충남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전원주택 단지지만 면적에 비해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희암리는 살기 좋은 곳이다. 가장 높은 건물이 5층짜리라 일출도 일몰도 가장 먼저 볼 수가 있다. 10층 이상 되는 건물을 보려면 차를 타고 20분 이상 나가야 하지만 동네에도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미용실 하나, 잡화점 하나, 편의점 하나, 카페 하나…… 각 업종이 모두 독과점이긴 하였지만.
이웃 주민인 한창욱 씨는 우락부락한 외양과는 다르게 식물 가꾸는 걸 좋아해서 집 앞에 다섯 평 정도 되는 작은 정원을 꾸렸다. 겨울에는 버려졌다고 오해받을 정원도 봄이 오면 이름값을 한다고 꽃이 심겼다. 채송화, 금잔화, 원추리, 그 밖에 품종을 알 수 없는 꽃들이 쨍쨍한 낮에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주로 노란색 꽃이 많았다. 언젠가 여름이 그에게 왜 노란 꽃들만 심냐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한창욱 씨는 얕게 웃고는 대답하였다.
노란색이 햇빛을 닮아서 좋아한다고. 그 답을 들은 후부턴 밤에 창문 밖으로 노란 꽃들을 휘둘러볼 때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한창욱 씨의 아내인 신영화 씨는 남편과 반대였다. 눈웃음이 예쁘고 서글서글한, 엷은 인상을 가졌지만 사실은 등산과 같은 스포츠를 즐기는 강인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한창욱 씨가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볼 때마다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따가운 햇볕 밑에서 뭐 하는 거냐며 양산을 씌우곤 했다. 사이좋게 햇빛을 가리고 있는 둘의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여름에겐, 조금 겸연쩍기도 했고.
상가 가까이 사는 민제인 씨는 교포 출신이라 한국보다 영어를 더 편하게 여긴다. 물론 한국어도 회화는 원어민 수준이었지만 사자성어나 한자나 속담, 격언 같은 것은 어려워했다. 가끔 상가의 카페에서 만나면 주문을 할 때 아메리카노를 굴려 발음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민제인 씨는 ‘아메리카노’라고 발음하는 것보다 ‘Americano’로 발음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였다.
민제인 씨의 옆집에 사는 박재형 씨네 가족은 셋이었다. 박재형 씨, 그의 아이들 두 명이었는데 박재형 씨의 아내가 이미 세상을 떠서 그랬다. 아이들은 이제 6살, 5살이라 2년 뒤에는 초교를 찾아야 해서 새로운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전체 주민 수가 100명 안팎의 작은 마을은 살기 좋은 곳이었다. 언덕이라 불러야 마땅할 뒷산에는 큰 느티나무가 서 있고. 새벽빛의 잔디밭은 이슬을 머금어 기분 좋게 습했다.
다만 작은 마을, 희암리에는 오래도록 해가 비쳤다. 사람이 없는 틈을 노려 잠깐씩 잔디에 누워 볼 때 여름은 목구멍이 콱 막힌 듯한 감정을 느꼈다. 제 이름을 딴 한국의 여름은, 그러니까 제 눈 앞에 펼쳐진 일몰은 덥고 습한데, 어찌하여 내 몸속은 아직도 건조한가 싶었다.
응. 여름은 제 이름이 싫었다.
4
이모네 집이 있는 서울에서 희암리로 돌아온 여름은 일찍 잠이 들었다. 뜨거운 햇빛을 반사시킬 목적이란 산토리니의 하얀 골목들처럼, 온통 희게 칠해 놓은 제 주택 안에서 달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일어난 시각은 오전 7시였다. 여름은 침대맡에 있는 자명종을 확인하고선 잠깐 눈을 감았다. 감았다, 떴다, 감았다가, 떴다가.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보이는 풍경은 같았다. 온통 암흑으로 덮인 검은 배경이 전원을 켜기 전의 텔레비전처럼 까맸다.
리모컨으로 전원을 켜면 갑자기 빛을 뿜어버릴까 봐.
새까맣던 암흑이 급작스레 눈을 아프게 할까 봐. 밝을까 봐. 그러니까 밝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 전에 제가 하얗게 물들어버릴까 봐.
여름은 잠깐 눈을 굴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깜박, 깜박, 감았다 떴다를 몇 번 반복하면서 눈을 어둠에 적응시켰다. 작게 하품을 하면서 창문가로 다가섰다. 온통 어둡게 밖을 가리고 있던 암막 커튼을 열자 빛이 조금씩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름의 눈동자 안으로 조금조금씩 노란 기운이 끼쳐 들었다. 눈물로 희게 덮은 각막 위로 빛이 세밀하게 마찰했다. 여름은 또다시 눈을 깜박거리다가 완전히 열린 커튼을 보고선 몸을 돌렸다.
깬 정신을 그대로 붙들고 계단을 내렸다. 좁은 층계를 내려가면 바로 화장실이 나왔다. 여름은 이참에 정신 말짱하게 세수까지 하고 나왔다.
거실 가운데의 테이블에 의자를 빼 앉았다. 다리를 올려 접어 가만히 팔로 끌어안고는 앞을 보았다. 창문 밖으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삐이- 하며 이명이 울렸다. 허공에 떠도는 먼지가, 비치는 햇빛 사이로,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깜빡 눈을 뜨면 사라졌다가, 다시 깜빡이면 생겼다가,
그 모습이 마치 초여름 같았다.
봄도 여름도,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긴 스펙트럼의 한 부분일 뿐이니. 어디까지 봄이고 어디부터 여름이라 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은 없다.
이쯤 초여름 같은데 다른 사람은 늦봄이라 느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미 완연한 여름이 왔다고 하기도 하고. 어라, 하다 보면 금방 지나가기에 십상인 것이 그 초여름이니.
그리고 나, 초여름도.
흔하지 않은 성, 흔하지 않은 이름. 이름 석 자가 모두 같은 사람을 찾는다면 전국 팔도를 다 뒤져야 가능할 것이다.
‘초 씨로 흔한 이름 짓는 것보다야, 특이한 게 낫지 않아?’
‘그러게, 우리 여름이. 이름 특이해서 고생하네.’
이름으로 놀림당하고 집에 돌아온 어린 여름, 저를 품에 넣고 애지중지하던 당신들 손길이 기억난다. 작은 여름은 온종일 뾰로통한 채로 아빠 엄마 품에 들어가 있었다. 엄마가 저녁으로 제가 좋아하는 부침개를 해주었을 때야 겨우 기분이 나아졌었다.
셋이서 따듯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던 그 밤. 혹한을 견디는 작은 가족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가만가만 얼렀던 목소리.
‘우리 아가는 어디서든 엄마하고 아빠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 아빠가 가긴 어딜 가.’
온전히 따뜻하게 느꼈던 그 온도가 더 이상 영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여름아 사라ᅟᅡᆼ해]
[아가 압빠가 ㅅ]
결국 그 사랑한단 말이 저를 끌어 내리는 족쇄가 되어서. 무엇보다 저는 저의 일부를 과거에 위탁하여 살고 있으니.
여름은 오래도록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도록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눈이 멀어버릴 때까지.
상념에 빠져 있던 여름을 움직이게 한 것은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였다. 경쾌하게 울리는 알림음에 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였다.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방문자가 누구인지 확인도 전에 문을 열어버렸다.
“여름 씨!”
문 앞에 서 있던 이는 옆집의 신영화 씨였다. 평소에도 가끔 집을 오고 갔던 터라 여름은 어색하지 않게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여름 씨 아침은 먹었어요?”
신영화 씨가 물어왔다. 여름은 눈을 올려 뜨며 고개를 저었다. 신영화 씨가 눈가가 휘어지도록 웃음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감자 삶아서 샐러드 만들었는데 같이 먹어요.”
그녀가 말을 뱉어놓고 슬슬 걸어갔다. 고개를 돌려 안 와요? 하고 묻는다. 여름은 이를 보이게 웃어 보이며 현관문을 닫았다. 신영화 씨를 따라 옆 주택으로 향하였다.
“여보, 여름 씨 오셨어.”
신영화 씨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창욱 씨에게 말했다. 이미 부부와는 친해서 여름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한창욱 씨가 마주 까닥여 주었다.
여름이 테이블의 의자를 하나 빼 앉았다. 큰 거실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이 테이블은 10인용 원목 테이블이었다. 이웃들과 식사와 커피 타임 하는 것을 즐기는 신영화 씨의 취향이라고 했다. 곧 신영화 씨가 앞접시와 수저를 들고 여름의 옆자리에 앉았다.
“먹어봐요.”
“잘 먹겠습니다.”
여름과 신영화 씨는 15살 차이가 났다. 큰언니, 혹은 사촌 언니 같은 느낌으로 여름을 잘 챙겨주었다.
여름이 숟가락으로 샐러드를 듬뿍 떠먹었다. 물컹물컹, 죽 같이 차가운 감자를 삼키며 대답하였다.
“맛있네요.”
“그렇죠, 그래, 맛있다니까.”
신영화 씨가 아이처럼 웃으며 좋아했다. 여름의 반응에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창욱 씨가 샐러드를 한 숟가락 떴다. 우물거리는 동안에 신영화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주시했다.
“나하고는, ……안 맞는 것 같은데.”
마침내 한창욱 씨가 뱉었다. 신영화 씨가 아휴우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양반으은, 너무 편식이 심해애, 음을 붙여 노래하듯이 흥얼거리는 것에 여름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신영화 씨가 여름을 돌아보며 같이 웃었다.
“어제 외출하셨다면서요.”
문득 한창욱 씨가 말했다. 밖 풍경을 보고 있던 여름이 휙 고개를 돌렸다.
“아. 네.”
“어디 갔다 오셨어요?”
부부가 쌍으로 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뚫릴 것 같네, 내가 딸 같은가. 여름은 괜한 심통을 누르며 대답했다.
“아, 이모네 집에요.”
뭐, 정확히 말하면 진짜 이모는 아니지만 진짜 이모나 다름없는 분이시니까.
여름의 대답에 신영화 씨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이모랑 친하신가 보다,”
여름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
친하다기보단, 친해야만 하는 사이.
아니, 먼 사이를 상상할 수 없는 사이.
그러니까 하나의 고인을 가운데에 두고 있으니.
“그렇죠.”
여름은 전혀 다르게 생겼으나 그 안에 기묘한 조화가 있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한창욱 씨와 신영화 씨. 그들을 볼 때면 여름은 항상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그 초여름, 부모님의 나이가 딱 그들 같았으므로.
“아침인데 벌써 해가 쨍쨍하네.”
신영화 씨가 통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한창욱 씨가 그릇을 들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아득하게도 울렸다. 낮게 뱉은 말에 여름이 움찔했다.
“이제 여름이잖아.”
여름, 여름, 여름.
그리고……,
여름에게는 열 두번째 여름.
12년째 제자리. 남쪽을 향해 가만히 서 있다면 땡볕이었다가 그늘이었던 그런 지난날들. 그럼에도 아직도 여름이 싫었다. 나는 여름이 제일 좋아, 내 이름이 여름이니까, 깔깔거리며 외쳤던 어린 시절이 전생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다림은 지긋지긋했다.
5
“파트 투 내년에 나온대. 아이씨, 보지 말걸.”
수현이 투덜거렸다. 요즘 10대 사이에서 인기인 드라마에 관한 얘기였다. 전체가 16부작인데 여덟 편씩 두 파트로 나누어 방영하는 탓에 시청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수현과 여름은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들이었다. 둘 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고, 작품에 과몰입을 잘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둘에게도 다른 점은 있었다.
“딴 거 보고 있음 금방이야.”
여름은 잘 기다리는 것.
“세 달이나 기다려야 되는데?”
수현은 못 기다리는 것.
아니, 사실 여름이 이상하게 너무 인내심이 길기는 했다. 시험을 못 봐도, “그럴 수 있지.” 카페에서 음료를 흘려도, “그럴 수 있지.” 친구하고 싸워도, “그럴 수 있지.”
오죽하면 별명이 ‘현자’였다. 어떤 대단한 일이 벌어져도 “그럴 수 있지.”하며 수긍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여름은 그런 자신의 인내심 많은 성격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 체질이거니, 하고 받아들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성격에조차도 여름은 수용적인 그 기질을 발휘하였던 거였다. 응, 인내심 길 수 있지. 수용적일 수 있지. 그냥 이렇게.
달리 말하면 여름에게 자신의 그 인내력은 당연한 것이었고,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기다림을 잘하는 것. 성적이 쉽게 오르지 않아도 인내심을 가지고 착실히 노력할 수 있었고. 친구가 냉하게 돌아서도 마음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을 줄 줄 알았다. 나는 애초에 기다림을 잘하는 사람이구나, 그리 확신했다.
기다림을 잘한다고.
아니? 서른 살의 여름은 코웃음을 픽 친다.
나이를 먹고 알게 된 사실은 간단했다.
여름의 인내심에는 조건이 있었다.
기약이 있는 기다림에만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것,
반대로 말하자면,
기약이 없는 기다림엔, 여름 또한 전혀 재능이 없었다.
6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당연하다 느껴지던 날들이 있었다.
얼굴에 얇게 달라붙은 염도가, 그 습기가 흐르는 땀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저 평범한 영도의 기온을 영하로 느끼던 나날이 있었다.
숨이 막혀 잠에서 깨어나던 때가 있었다.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던 어떤 밤이 있었다. 뱉어내려 켁켁거리면 이물이 아닌 눈물이 나오던, 그런 시간이 있었다.
어떤 것도 구원이 될 수 없었다. 아침 햇살이 따가워 이불 속으로 숨는 날들이 많아졌다. 부재는 존재의 증명이라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저를 세상에서 추락시키려는 누군가의 의도를 느꼈다.
상실에게 외쳐 따지고 싶었다. 대체 이제 나는 어떡하냐고 울부짖고 싶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밤을 새우는 나날이 쌓여갔다. 모두가 제 끝을 찾아 떠나는데 저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 긴 외로움의 마라톤에서 여름은 명백한 우승자였지만 기쁘지 않았다. 어쩌면 단거리 달리기를 저 혼자만 마라톤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세상은 여름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렸다. 다만 떨어지는, 지나치게 긴 체공 시간이 오히려 여름의 힘이 되었다. 얼마나 더 내려가야 땅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빠른 속도의 낙하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비로소.
7
“와. 민들레가 엄청 많네요.”
민제인 씨가 말했다. 커피를 들고 함께 산책하던 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노란 민들레가 동네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여름은 가만 바라보았다. 야생화 셋이 나란히. 하나는 노랗고, 하나는 여물었고, 하나는 하얗게 솜털이 보송보송.
“민들레는 뿌리가 깊이 있대요.”
날아가는 여럿을 위해서는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할 테니. 여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제인 씨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밟아도 잘 안 죽는다 그러더라고요.”
“으음.”
여름은 샛노란 민들레를 즈려 밟는 발을 상상했다. 꽃물이 잔뜩 새도록, 잎도 꽃도 상처투성이지만 그 뿌리가 깊이 있다며 다시 일어설 민들레도.
여름은 문득 물었다.
“민들레가 영어로 뭐에요?”
“민들레?”
민제인 씨가 잠깐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Dandelion.”
댄덜라이언, 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여름은 잠깐 작게 따라해 보다가 옅게 웃었다. 혼자 중얼거렸다.
“라이언,”
사자네, 끝이.
얼마 전 이모네 집에 갔을 때 봤던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몸을 뒤엉키며 장난치던 새끼 사자들과. 새끼들을 챙기던 어미 사자. 새끼 다섯 마리 중 한 마리쯤만 성체가 될 때까지 생존한다는.
민들레와 반대구나. 사는 것이 질긴 그 꽃과는.
사자는 쉽게 죽는구나.
“라이언 맞아요.”
그때 민제인 씨가 말했다. 여름이 미간을 좁혔다. 민제인 씨가 이어서 설명했다.
“어원이요. 라이언, 그 사자 맞다구요. Dandelion 자체가 불어 dent de lion에서 나온 말인데, 사자의 이빨, 이라는 뜻이에요.”
“…….”
여름은 잠깐 말을 잃었다.
민제인 씨와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땀을 식혔다. 생각이 나서 노트북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dandelion 어원.
가장 위로 한 포스트가 떴다. 마우스로 클릭하여 글을 읽어보았다.
내용은 민제인 씨가 설명한 것과 같았다. 고대 불어에서 유래한 영어단어이고, 이빨 모양의 잎사귀가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
그 이빨이 사자의 이빨 같았나. 여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그 이름을 지었던 사람이 사자를 좋아했던 거 아닐까. 몇 이미지를 첨부한 포스트를 대충 훑어 읽어 내려갔다.
별 내용이 없는 것 같아 인터넷 창을 닫으려던 때였다. 웃는 얼굴의 이모지와 함께 작성자의 인사말이 담겨 있었다. 여름은 입술을 짓씹었다.
[민들레는 뿌리가 깊어서 밟아도 쉽게 죽지 않는대요. 우리 모두 질기게 살아갑시다.]
질기게.
‘이럴수록 여름이 네가 더 독하게 살아남아야지.’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여름은 노트북을 덮었다.
8
저는 사실 질기게 살고 싶지 않아요.
밟히면, 악 하고 쓰러져 죽고 싶어요. 밟은 사람이 오히려 더 당황하게요. 자기가 더 깜짝 놀라서 미안해하게요.
지나치게 연약하게, 뿌리를 얕은 곳에 두고 살고 싶어요.
작은 자극에도 몸을 꺾으며 괴로워하고 아픔을 버티지 않으며, 도망가며, 오히려 그렇게…….
한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근데 세상이 날 다르게 만들었어요. 오래 간의 기다림 앞에 무릎을 꿇게. 몸에서 이끼가 자라나고 버섯이 자라날 때까지, 제 몸 안에 기생하는 생물이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다 지쳐 허기에 절규할 때까지. 그 아픔을 그 오랜 시간, 그저 버티게.
눈물 줄줄 흘리며 굳은 다리로 도망가지 않고 그렇게 오랜 고목이 된 것처럼요.
그래서 이제는 도망가는 방법을 알지 못해요.
이미 다리가 모두 썩어서 굳어버렸는걸.
9
태양은 여름의 끝을 빛내듯 더욱 활활 타올랐다. 지구상의 많은 생물을 먹여 살린다는 제 영향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초여름에 기상한 식물들이 징그럽게 무성하게 자라나는 시기. 그러니까 여름의 끝물.
희암리, 여름의 집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이모의 아들 수현이였다. 예고가 없었던 터라 여름은 조금 얼떨떨했다.
“음료수라도 줄까?”
여름이 테이블에 앉은 수현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손부채질하던 수현이 여름을 돌아봤다.
“주스 있어?”
“엉. 기다려.”
잠깐 흰 집에는 액체를 졸졸 따르는 소리만이 울렸다. 수현은 창밖 푸릇푸릇하게 자라난 풀을 바라보았다. 여름이 쟁반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되게 초록색이, 힐링이 된다.”
여름은 유리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래?”
“응. 눈이 편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건너편에 앉았다. 잠깐 음료를 동시에 홀짝거리다가 여름이 먼저 물었다.
“어떻게 왔어?”
“……기차 타고?”
“아니.”
얘가 미쳤나.
“호주에 있었다며.”
“아아.”
수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름은 그의 시선을 눈으로 좇았다. 이모는 여름에게 제2의 엄마였으니, 수현 또한 그의 동생과 다름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지만 오늘의 수현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잠깐 나왔지.”
“그래?”
여름은 태연한 척을 하며 잠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현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어렴풋이 들리는 새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었다. 조금의 시간을 그러다가 수현의 짧은 머리카락, 거칠한 얼굴 피부를 차례로 훑었다.
“무슨 일인데.”
넌지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수현이 잠깐 굳었다. 목이 타는지 유리컵을 쥐어 주스를 천천히 마시고는 남은 단맛을 꿀꺽 삼켰다.
“엄마하고 싸웠어.”
“이모하고?”
끄덕,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은 미간을 좁히고서 이어 물었다.
“……왜?”
“엄마한테 소개시켜줬거든,”
잠깐 수현이 침을 삼켰다. 여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했다. 꿀꺽, 어떤 상념이 머릿속 구석으로 삼켜졌다.
“……내 남자친구.”
“…….”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여름은 당황하였다. 다만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초조해하며 여름의 눈치를 살피던 수현이 여름의 표정을 보고 흠칫했고 여름은 올라간 입꼬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랬구나.”
왜 몰랐지. 여름은 잠깐 드는 기묘함을 생각했다.
여름이 6살 때 수현이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친했고, 청소년기에는 데면데면했고, 그 일 이후엔 다시 가까워졌다.
다만 그 관계는 온전히 서로를 안다기보단, 어떠한 상실로서 서로 예의 바른 애정을 끼워 붙이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랬을까.
“애인이 미국으로 장기 출장을 가서. 롱디 반년도 힘들었는데 3년 더는 진짜 못 하겠더라고.”
수현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이 김에 정식으로 부모님께 소개해 드리고, 결혼은 어렵더라도…….”
말끝이 흐려졌다. 수현이 입술을 짓물고 있었다. 얇은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여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원래 고통을 처음부터 겪은 사람은 그리 힘들지 않는다. 행복을 맛본 후 얕은 고통에 빠진 사람이 오히려 더 고통스럽지.
가끔 여름은 수현을 부러워할 때가 있었다. 왜 쟤네 집은 저렇게 멀쩡한데 우리 가정만 풍비박산이 났는가 억울했다. 우리 여름이 불쌍해서 어떡해, 하며 끌어안고 오열하던 이모도, 그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던 수현도 모두 꼴 보기 싫었다.
네가 울어봤자 어쩔 건데. 그런 심통이었다. 너는 엄마 아빠 다 건강하게 살아 계시잖아. 날 동정해서 어쩌겠다고.
어린 그 감정은 이후 느낀 극한의 고통에 희석되어 조금씩 묽어졌다. 또 다른 이유로는 순식간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동시에 치른 그 앳된 어른에게로 이모가 자주 찾아왔고 그때마다 수현이 따라왔다는 것. 호의를 받기만 할 수 없어 그녀의 아들을 무작정 미워할 수 없었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었다. 어린 감정을 외면하여 온, 겉만 번지르르한 지금의 형태로.
여름은 수현이 궁지에 몰린 지금의 상황에서야 미묘한 통쾌를 느낀 저 자신이 끔찍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그 일 때문이었다. 제 인생의 모든 불행은 다 한순간으로부터 기인하였으니.
10
여름의 부모님 두 분은 교수셨다. 학회며 세미나며 바쁘셔서 일 년에 두 번씩은 집이 비었다.
스무 살. 입시를 끝내고 학교 기숙사로 독립했던 해. 처음 맛보는 자유에 정신 못 차렸던 그 몇 달. 부모님께 오는 연락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돌아다녔다.
술을 마셨고, 나이는 잊고 친구를 사귀었고, 수업을 쨌고,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기숙사에서 강의동으로, 또 학교 앞 술집으로, 과방으로, 다시 기숙사로. 대학 지박령처럼 살던 시간은 찰나였다.
그러니까 MT를 갔던 날이었다. 엄마의 상태 메시지에는 날짜와 함께 ‘카톡 못 받습니다’라는 글자가 떴다. 독일에서 하는 학회라고 했다.
숙취에 쩔어 널브러져 있던 여름은 한낮이 되어서야 뒤늦게 전화를 받았다. 얼굴은 일찍 일어난 친구들의 장난으로 잔뜩 낙서가 된 채였다.
11
승객 76명, 승무원 7명. 탑승객 83명 전원 사망.
원인은 악천후, 그리고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한 착륙 시도.
뒤늦게 문자가 왔다. 저를 더 찢어발긴 활자였다.
추락하는 그 기체에서 어떻게 문자를 보냈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그것이 전송되었는지,
그러고도 대체 왜 뒤늦게 전달되었는지. 여름은 발개진 눈으로 통신사에 문의하고 또 문의했다. 정확히 어디라 말할 수 없는 어떤 지구의 영공에서 날아온 문자였다.
다만 들려온 답변은 항상 같았다.
모른다고.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항공기 이름으로 사건명이 붙고 각종 매체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여름은 숨었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 다른 희생자의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카페를 만들었는데 들어오라고 했다.
그곳에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사건 조사에 관한 것을 논의했고 조사가 시작되자 또 종일 떠들었다. 며칠 안 되어 추락한 항공기가 발견되었고, 희생자들도 한 명씩 시신이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유해를 수습한 이들은 각자 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한참을 슬퍼하고 애도하고 또 울면서 그렇게 그들만의 이별을 해나갔다.
여든셋 희생자의 가족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과정을 지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여든세 명의 사망자 중 두 명의 사람을 잃은 여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대로 가만히.
모두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여전히 소중한 사람을 가슴 속에 품고서 다시 일상에 뛰어들었다. 손에 쥔 것이 없는 여름만 그 자리에 망연자실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두 명은 발견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둘은 발견되지 않았다. 조사는 마침표를 찍었다. 시신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사망으로 처리된다고 하였다. 사건 조사가 끝났다는 기사에도 83명 사망, 이라고 여전히 찍혀 나갔다. 여름은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왜 81명 사망, 2명 실종- 이라고 써 주지 않는 건지.
당신들은 왜 아무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은 사람들을 사망했다 단정 지어버리는지.
너무너무 싫었다.
왜냐하면 여름 또한 아무것도 몰랐다.
12
방송국에서 지속적으로 연락이 왔다. 여름은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유일한 실종자’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노리고 기자들이 집을 찾아왔다. 여름은 서울 안에서 몇 번의 이사를 하다가 결국 충남으로 내려갔다.
10년일지, 11년일지 모를 시간 동안 여름은 어쩌면 울었다가, 어떤 때는 웃었다가, 그렇게 하루를 살아나갔다. 잠이 깨면 일어났고, 배고프면 밥을 먹었고, 심심하면 밖에 나갔고, 외로우면 사람을 만났다. 현재에,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게 살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돈 들어올 구멍은 생겼다. 고소득은 아니었으나 여름은 만족했다. 일어나고 밥을 먹고 걷고 씻는 하루에 일이 들어갔다는 것이 좋았다.
정신없이 지내다가도 여름은 가끔씩 멍했다.
아주 오랫동안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계속 지루했어서 언제 내가 그리 온전하게 행복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내가 뭘 기다리고 있었지, 생각하다가 아, 하고 사건 이름이 떠오를 때면 저 자신이 불쌍해 코끝이 찡해오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름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부모님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바다 어딘가에, 아님 산비탈에, 눈 속에, 인간의 문명이 건설되지 못한 곳에 침몰하여 그대로 부패했을 거란 걸.
다만 그 발견되지 않은 시신이라는 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었다.
여름은 아직도 엄마 아빠가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무인도에서 몇 년간 생존하는 이야기를 담은 외국 영화처럼, 머리를 산발로 기른 늙은 아빠가 10년 만에 나타나 여름을 끌어안는 꿈을 꾼다.
여름은 아직도 생각했다. 어쩌면 파도에 떠밀려 육지에 도달한 엄마가 기억을 잃은 상태로 그곳의 언어를 배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저의 존재도 잊고 그렇게 이 지구 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 수 없는 것이 여름을 힘들게 하였다.
무한한 가능성이 도리어 여름을 죽였다.
기약 없는 기다림. 시 분 초로도, 연월로도 셀 수 없는 제한 시간이었다. 5년일 수도, 20년일 수도 있었지만 어쩌면 20세기도 부족한 무한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무한을 유한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지도 몰랐다.
13
수현은 코를 심하게 골았다. 1층 손님방에 술을 먹고 잠든 그를 눕혀놓고 여름은 깜깜한 거실로 나왔다.
온통 차가운 장판 바닥. 테이블의 표면. 여름은 테이블 위를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의자, 소파의 팔걸이, 진열장,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마침내 창문가로 다가서게 되었다.
여름의 밤은 낮과 완전한 반대이다. 차갑고, 그렇게 아리고. 그래서 더욱 울렁이고.
내가 여태껏 어떻게 겨우 살아왔는지 다 잊어버릴 것만 같이. 그리움이 대체 뭐라고, 그 사무친 감정이 손에 잡힐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여름은 이럴 때마다 괴로웠다.
깊은 물 속으로 침잠하고 싶었다. 이미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땅이 되었을 그들을 따라 어딘가로 급히 쌓여 산산이 부서지고 싶었다. 오래된 먼지처럼 부스스 흩날리고 싶었다.
정말로 사후 세계라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뜨겁고 또 차가운, 그 아리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정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만 있다면. 여름은 정말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여름은 귀뚜라미가 우는 창밖을 가만 바라보다가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가운 장판 바닥에 몸을 뉘고 가만 천장을 바라봤다. 거실에 걸린 벽시계가 틱, 틱, 하며 초침 소리를 냈다.
하나의 초가 지날 때마다 정신이 이리저리 기울었다. 차가운 바다에 침잠하는 것처럼 차가운 바닥에 온몸을 붙이고 가만 숨을 멈추었다. 호흡이 잘되지 않았다. 점점 편안해졌다. 스르륵 가라앉았다. 추워, 근데 참아야 해. 계속 가보자.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는 듯한, 뼈가 시리게 추운 느낌.
머리끝까지, 그리고 또 발끝까지. 손가락 끝으로, 또 입술 끝으로. 저릿하게 소름이 솟았다. 여름은 움찔 눈을 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름아?
손에 들려 있던 스마트폰에서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모와의 통화가 시작된 지 11초.
“네. 이모.”
여름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바닷속에 가라앉는 꿈을 꾸었나, 여느 날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어, 진짜 나는. 나는 설마 걔가 그럴 거라고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여름이 물었다. 이모가 어허엉, 우는 소리를 내며 대답하였다.
―몰라. 모르겠다구. 정환이 엄마는 이미 손녀딸까지 봤는데 나는 이게 뭐 하는 거야아. 뭐, 게이? 어떡해 정말 여름아…… 우리 수현이…….
여름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수현과 이모 사이에 낀 자신의 처지가 좀 처량했다.
“……수현이하고 싸웠어요?”
―그럼 안 싸우고 배기니. 내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데…….
이모는 시원시원한 성격과 다르게 생각보다 보수적이었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수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들에 거부감을 가지고 계셨다. 수현이의 그 성 지향성도 마찬가지였다. 이모가 사랑하는 수현은 평소와 모두 같은데 오직 한 가지의 이유만으로 내쳐진 것이었다.
여름은 이런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려다가 잠깐 입을 닫았다.
아니, 내가 왜 모자의 화해를 시켜주고 있지?
급히 황당함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내가 왜? 내가 이모의 친딸도 아닌데? 난 그냥 엄마 친구라서 친한 것뿐인데.
그리고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름에게는 어딘가 뒤틀린 그런 감정도 있었다는 게.
“이모.”
여름은 자기 자신이 싫었다.
근데 억울했다. 아이의 감정이 어른의 감정을 넘었다.
“제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
여름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여느 것과도 같지 않은 여름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식어 있던 공기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짜증이 난다고. 그 무엇도 아니고, 짜증이.
당신들은 대체 나보다 뭐가 잘났길래 그러는데. 별것도 아닌 것 때문에 그렇게까지 서로 미워하고 도망치고 난리야. 나는 이미 사라져버린 사람들 때문에 10년을 고통받고 있는데.
“수현이 호주 안 갔대요. 워홀요, 안 갔대요.”
여름은 말을 계속 이었다. 눈에 새빨갛게 실핏줄이 터졌다. 그냥 울고 싶었다. 다 같이 우리 나갈래? 우리 이 세상에서 도망쳐볼까? 제안하고 싶었다.
아직도 검은 하늘은 밝아질 기미가 없고. 응, 그 태양은 온통 숨어서 없어져 버렸고, 여전히.
인생은 밝아질 기미가 없고. 수현이는 술에 꼴아서 지금 기절해 있고.
여름은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나는 수화기 건너편을 외면하며 말했다.
“거짓말 한 거래요. 애인 때문에. 수현이 지금 저희 집에 와 있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억울하다고.
14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부재중이 정확히 22통 찍힌 수현의 스마트폰을 들려주며 그를 깨웠다. 우윽, 드라마 속 입덧하는 임산부처럼 수현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여름은 부엌으로 향해 냉장고에서 국이 든 냄비를 꺼냈다.
여름은 모두가 미웠다. 자신조차 미웠다.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었다.
이모와도, 수현과도 연락을 끊고 싶었다. 근데 그럼 가장 허망할 것은 자신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어떤 증오는 어쩌면 애정을 닮아서, 여름은 잘 알았다.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해, 제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팔에 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몇 분이나 지났을까.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바닥 위 울리는 파동이 가까워졌다. 여름은 잠자코 국을 데웠다.
“누나.”
뒤에서 수현이 저를 불렀다. 여름은 돌아보지 않으며 그저 숟가락으로 저었다. 몸의 감각이 무섭도록 곤두섰다.
“엄마한테 누나가 말했어? 나 애인 때문에 워홀 안 갔다고?”
여름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시원한데 저렇게 보면 답답했다. 그러니까 합쳐서 괴로웠다.
저 자신의 편에도, 이 세상의 편에도 설 수 없었던 여름은 이미 썩어 없어져 버린 다리로, 일어설 수도 없이, 마냥 하늘을 바라봤다.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나요, 마지막 숨을 내뱉은 그곳이 대체 어디일까요, 머릿속으로 한참을, 몇 번을, 몇백 몇 천번을 했던 그 상상의 회로를 다시 돌려가면서.
“초여름.”
이미 초여름은 지나갔는데.
15
여름은 욕했다. 그리고 뺨을 맞았다.
수현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여름은 망연자실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어쩌면 내가 알던 수현은 허상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탓이었다. 그러니까 아팠다. 누군가 심장에 까끌한 모래를 뿌려놓은 것만 같았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제가 살아 있다는 걸 굳이 제게 자각시켜줄 때마다 부끄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가정 파탄 내려고 작정했냐고. 수현이 모멸감에 소리쳤다. 비가 내렸다.
여름은 입을 열었다. 가시가 잔뜩 든 말에 수현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수현의 손이 위로 들리고 여름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비가 내렸다.
수현은 잠깐 놀란 표정을 하다가 다시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누나는 나한테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구나, 애초에. 처음부터 날 그렇게 생각했었구나. 그러면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여름은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거실 천장 등을 하나하나 분리했다. 프레임만 남은 등에 단단히 끈을 묶었다.
고리를 만들어 놓고서는 내려와 테이블을 조금 밀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여름은 이제야 용기가 났다. 물속으로 뛰어드는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거실 한 가운데에서 뛰어내려도 어차피 같은 물로 통할 텐데. 바다는 호수가 아니니까.
여름은 흘렀다. 반신욕을 하다 잠들고, 차가워진 물에 놀라서 깼다.
밥을 먹다가 잠들었고 또 욕조에서 깨어났다. 울음도 웃음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일을 하다가 한참을 방 안에서 정처 없이 걸었다. 속이 쓰렸다. 인터넷을 차단하고는 어떤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동안. 제가 턱없이 미워지는 순간이면 테이블 위로 올라섰다. 끈 앞에서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려면 그리운 날이 있었고, 억울한 날이 있었다. 결핍감이 드는 날이 있었고, 충족감이 드는 날이 있었다. 여름은 항상 한참을 그리 있다가 테이블에서 내려갔다. 언젠가는 두꺼운 끈을 손으로 붙잡았고, 언젠가는 고리 안에 머리를 집어넣었으나 다시 금방 관두었다.
여름은 저물고 있었다.
16
태풍이 왔다. 그날의 여름은 아마 조금 많이 외로워서 또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었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선 정처 없이 초점이 나가버린 눈동자를 하였다.
시각은 그런 절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낮 2시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끈을 양손으로 잡은 여름이 옆을 돌아보았다. 뭐, 택배인가. 아니면 우편인가. 누구지.
조금 있으면 가겠지 싶어 여름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때 다시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 씨!”
신영화 씨의 목소리였다. 여름은 문을 열까 말까 고민했다. 당장 그녀가 들어온다면 거실의 이 엉망진창인 상태를 보게 될 텐데. 그걸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여름은 희암리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밝힌 적이 없었다.
다시 한번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름 씨!”
어쩔 수 없이 여름은 끈에서 손을 내렸다. 테이블에서 내려오려고 발을 내리는데 잠깐 무게중심이 삐끗했다.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짧은 찰나가 슬로우모션처럼 서서히 일어났다.
쿠당탕! 몸이 중력으로 곤두박질쳤다. 골반뼈와 팔뼈가 징징 울렸다.
파열음을 들었는지 여름 씨! 하고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문고리를 덜컥 덜컥 열려는 소리가 들려서 여름은 잠깐 통증을 식히고서는 무리하여 일어났다.
“무슨 일이세요?”
현관문을 살짝만 열고서는 물었다. 문 앞에는 무척 놀란 표정의 신영화 씨가 있었다. 그녀가 저, 여름 씨…… 하며 말을 흐렸다.
“아니, 괜찮아요?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데.”
신영화 씨가 물었다. 여름은 빼꼼 뺀 얼굴에 태연한 표정을 띠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 일 없어요. 무슨 일이세요?”
“아, 그래요? 다름이 아니라…….”
신영화 씨가 여름의 집 밖에 세워진 화분을 가리켰다. 고무나무가 자라고 있는 화분이었다.
“저거요. 오늘 태풍 오니까 집 안으로 넣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네,”
여름은 철벽을 쳤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안의 상황을 보여주기 싫어서 더 차갑게 말하게 되었다.
“이따 넣어 둘게요. 그럼…….”
여름이 고개를 까닥이며 현관문을 천천히 닫았다. 그 순간 문의 열린 틈으로 신영화 씨가 발을 밀어 넣었다. 닫히려는 문을 억지로 벌린 운동화 코가 여름에게 울렁거리며 다가왔다.
“잠깐만. 여름 씨.”
나는 왜 이렇게 걱정이 되지?
신영화 씨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성이 틈으로 비집고 나왔다. 여름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주름졌던 그 엄마의 눈과 꼭 닮은 신영화 씨의 눈을 마주하였다.
“잠깐만 열어 봐요. 여름 씨.”
“이러지, 마세요.”
“안에 무슨 일 있잖아, 뭔데요.”
울음이 목구멍을 타고 울컥 올라왔다. 당신이 살아 있었다면 이랬을까. 나를 걱정하고 또 나의 불행으로 절망하였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탓이었다.
여름은 세게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신영화 씨가 발을 비집고 있는 탓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잠깐의 힘겨루기 끝에 결국 신영화 씨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몸에 힘이 풀린 여름이 그대로 신발장에 주저앉았다.
신영화 씨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거실의 처참한 잔해를 보고서는 숨을 삼켰다.
“……이게,”
“…….”
신영화 씨가 잠깐 거실로 다가가려 하다가, 다시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여름이 그녀의 좁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어깨 너머로 테이블이, 천장 등에 연결된 끈이, 매듭과 고리가. 바닥으로 떨어진 눈물과 타액의 흐릿한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름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예요…….”
신영화 씨가 돌아보며 훌쩍였다. 여름은 붉은 눈을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독백했다.
죽고 싶어서요. 내가 너무 싫어서요.
그러니까 뛰어들고 싶어서요. 영원히 잠들고 싶어서요.
사자처럼 태어나서 민들레처럼 살다가 다시 사자처럼 죽으려고요. 요절이 당연한 그 동물처럼요.
더는 버티고 싶지 않아요.
숨이 막혀요.
죽고 싶어요. 너무 아파요. 호흡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삶을 살고 싶어요.
신영화 씨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와 신발장에 마구잡이로 앉은 여름에게로 다가왔다. 바닥 소재의 차가운 기운과 따뜻한 인간의 손이 교차하며 오묘한 감각을 주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여름의 뺨을 닦아 주었다. 여름은 어느 순간부터 제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히끅, 울음이 섞인 숨이 삼켜졌다. 신영화 씨가 울면서 여름을 끌어안았다.
울어요. 울어도 돼. 괜찮아요.
여름은 그날 오랜만에 남 앞에서 울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어떤 여름의 태풍이 오는 날에.
17
어떤 힘듦은 그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일부분 치유되기도 한다.
18
오랜만에 꿈에 엄마 아빠가 나왔다.
여름은 잠깐을 반가워하다가, 그리고는 당신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며 오열하였다.
엄마 아빠는 제가 우는데도 눈을 깜짝 안 하고 떠들어댔다. 그래서 아빠가 엄마한테 뭐라 했는데, 엄마가 아빠보고……. 그랬다니까?
그러면서 별 영양가도 없는 얘기를 계속하길래 여름은 훌쩍이며 물었다.
그런 말 말고 중요한 얘기 좀 해주면 안 돼?
아빠가 피식 웃었다. 무슨 얘기를 해 줘야 하는데?
여름은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
어디에 있는지.
나를 사랑하는지. 나를 사랑했는지.
죽었는지, 혹은 살았는지.
어쩌다가 문자를 보냈는지.
그 추락하는 기체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도 내 생각을 했는지.
죽음으로서 당신들은 소멸하였는지. 내 곁을 영원히 떠났는지.
엄마와 아빠가 웃었다. 엄마가 말했다.
태풍이 온통 휩쓸고 지나간 아침에 여름은 깨었다. 한참을 울어 눈이 잔뜩 부었지만 머리가 무겁지 않았다.
멍한 기분으로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밖으로 비 냄새와, 바람 냄새와, 그리고 가을 냄새가 났다.
그 순간 여름은 깨달았다.
나는 지나왔구나.
그 빌어먹을 여름을 내가.
‘엄마 아빠는 항상 네 옆에 있었어. 여름이 네가 몰랐을 뿐이지.’
나는 더 이상 내 이름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19
태풍으로서 더위가 한풀 꺾여 희암리가 서늘해졌다. 강풍이 지나간 자리를 사람들이 손봤고 여름도 거들었다. 신영화 씨는 누구에게도 자신이 본 것과 여름이 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고된 작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했다.
다음 날에 상가 카페에 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박재형 씨네 가족을 보았다. 첫째 서윤이가 먼저 이모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걸어오길래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박재형 씨가 어디 다녀오는 길이세요, 하시길래 카페요, 하고 대답했다.
둘째 혜윤이가 멀리서 민들레를 두 송이 꺾어 가지고 왔다. 하얀색 홀씨가 도드라져 있는 그런 꽃이었다.
혜윤이 하나를 제 작은 입으로 후우, 불었다. 작은 꽃의 형태를 가진 조그마한 홀씨들이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남은 한 손에 든 민들레를 혜윤이 여름에게로 건네주었다. 불어봐여, 하고 혀 짧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에 여름이 얼떨결에 숨을 불었다.
후우우우-.
그리고 그 순간. 여름은 파란 하늘 너머로 퍼져나가는 홀씨를 보았다.
뿌리가 깊고 깊게 박힌들,
어쩌면 홀씨는 대체 어떤 식물보다 더욱 자유로운 비행을 할 텐데. 그럼 제가 한 민들레의 정의가 틀린 게 아닐까.
질기지만,
질기기만 한 것은 아니고,
자유롭지만,
자유롭기만 한 것도 아닌, 그런,
응.
그러니까 그 자체로.
애초에 민들레는 사자의 이빨이니까.
20
불쑥 이모네 집에 찾아갔다. 이모와 수현은 다행히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지는 않고 냉전 중이었다.
여름은 성대를 열어 함몰되려는 목소리를 꺼냈다. 긴 이야기를 했다. 얘기의 끝은 사과였다. 수현은 여름의 사과를 받아주었고 손을 댄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여름 또한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팅팅 부은 눈으로 셋이서 도란도란 앉아 사과를 먹으며 엄마 얘기를 했다.
아빠 얘기도 하고, 이모에게 둘의 옛날 이야기도 들었다. 잠깐은 웃고, 또 잠깐은 눈물 글썽거렸다가. 그렇게 또 제 미움에 관해 이야기도 하고. 수현의 이야기도 듣고, 잠깐의 갈등을 잠재웠다가 다시 웃고.
이모네 집에서 자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침에 무심코 가로수를 보았다. 나뭇잎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여름은 온통 여름 옷차림인 저를 바라보다가 옷장에서 겨울옷을 꺼내야겠다, 웃으며 생각했다.
햇빛이 더 이상 따갑지 않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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