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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4-08
  • 조회수 285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1)

누런 천장의 얼룩이 보였다생기를 다 잃은 낯을 한 채 누운 노인의 추한 얼굴이 보였다세월의 압력에 늘어나고 짓이겨진 듯 깊게 고랑이 파인 피부허여멀긴 빛만을 내비추는 두 눈눈에는 백태가 없었지만 그 색은 바래고 바래 오래된 석고의 빛깔이 되어 있었다오랜 세월 배신과 절망에 시달린 고집스러운 입은 비딱하게 꺾여 있었고눈매는 힘을 잃어 절벽처럼 뚝 떨어지고 있었다그 위로 끔찍한 흉터가 가로질렀다억지로 얼굴의 한 부분을 뜯어낸 듯벽지가 찢어진 그 곳에선 피가 흘러나오는 듯했다그 얼룩은 어쩌면 천장에 달린 거울일지도 몰랐다.

노인은 그 거울을 부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저 천장보다 높은 것을 볼 수만 있다면앳된 나이에 이미 잃어버린저 하늘에 대한 동경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이미 거동할 수 없게 된 뒤에야 노인은 하늘을 갈망했다그러나 어두운 그림자에 덮힌 몸은 무거운 돌 이불을 얹은 것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

나는 어느새 노인이 되었는가짧고 헛된 상념이 노인의 머리를 스쳤다눈을 감아 버리려 했지만 눈을 감을 힘이 없었다그래서 눈에 힘을 줬다더 또렷하게죽어가는 노인을천장의 얼룩을 보고자 했다.

생기 없는 눈에는 회한만이 맺혀 있었다그 회한 안에서 노인은 무수히 많은 스쳐감을 보았다무엇을 찾아 그리도 지나치고 지나쳤는가노인은 핏발이 서기 시작한 건조한 눈을 더욱이더욱이 세게 떴다.

(2)

벚꽃이 만개한 교정의 나무 아래소년은 작은 편지에 마음을 담았다이 년을 숨겨 온 작고 애틋한 마음을조금이라도 새겨 넣고자 했다글씨도내용도 빈약했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담겼을 거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전해진다면삐뚤빼뚤한 글씨와 어설픈 사랑 고백은 아름다운 마음의 노래가 될 것이었다.

편지는 절반쯤 읽혔을 것이다모든 것을 담은 편지는 야속하게도 다시 돌아왔다미안이라는 짧은 말과 함께그리고 그 작은 말 안에 담긴 진심에 설레고 마는 마음과 함께끝났음을 직감했지만 아직도 마음의 온도는 식지 못했다아직 뜨거운 마음에 닿은 편지는 타들어갔다그렇게 마음이 돌아왔다 하얀 눈처럼 고운 손을 거쳐길게 드리운 머리카락의 샴푸 냄새가 가득 밴 채 그것은 이내 돌아왔다모든 걸 다시 받았으니 잃은 것은 없어야 하건만많은 것을 잃은 듯했다.

유난히도 흐드러진 꽃비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떠나가는 사랑을 배웅하듯한 차례의 축복과 함께 벚꽃도소년의 첫사랑도 끝이 났다.

씁쓸한 미소는 눈물과 함께였다.

(3)

불합격입니다.

걸려 온 전화 너머에서는 마음을 절단내는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부족한 학벌이 문제였을까어려운 집안이 문제였을까면접장에 마땅히 입고 갈 양복도 없었던 청년은 벌써 사 년째 합격하지 못하고 있었다아직 군대도 가지 않은 스물넷의 나이꽃다운 나이를 어두운 반지하에서 허비하는 청년은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모조리 잃어버렸다.

사실 불합격쯤이야 예상하고 있었다오늘만 세 번째로 받는 불합격 전화였으니까청년은 햇빛 한 점 없는 바닥에 누웠다끈적끈적한 여름의 방바닥에 몸이 쩌억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팔에 앉아 있는 모기가 한 마리 보였다청년은 전부터 알을 낳겠다고 쪽쪽 열심히도 피를 빨아 대는 모습이 자신과 비슷해 보여서 모기를 죽이지 않았다.

모기의 반짝이는 작은 눈과 징그러울 만큼 기다란 다리빨대 같은 주둥이를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부풀어 가는 배를 보았다.

역겨웠다.

왼손을 들어 모기를 내리쳤다허망하게 죽어 버린 모기의 잔해가 남았다피 한 방울이 꺾인 다리와 터진 내장 사이에 스며들었다그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죽은 뒤가 조금 나은 것 같았다.

(4)

삼십 대의 남자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트럭을 몰았다트럭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몰랐다사실 관심이 없었다.

건강은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편의점 음식과 라면만 줄기차게 먹어 댄 끝에 찾아온 당뇨와 각종 합병증이 아직 젊은 육신을 짓누르고 있었다두 차례 부러진 다리는 평생 절게 되었고 시력이 악화되어 안경을 써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박과 술여자에 빠져 빚은 늘어만 갔다밥 먹을 돈이 없어도 술을 마시고 불법 업소를 드나들었다어린 시절 조금도 채우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채우려는 것일지도 몰랐다남자는 더러운 냄새와 음식물 쓰레기술병마약 사이에서 짐승 같은 교미를 했다그것은 인간 사이의 관계라기엔 지나치게 더럽고 저속했다남자는 자신이 인간 이하의 무엇이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짐승은 트럭을 몰며 하얀 차선을 바라보았다.

도로의 선은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사실 아무리 앞으로 가도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남자의 트럭은 저 멀리 보이는 종착지를 향해그리고 사실 종착지 따위는 없다는 깨달음을 향해 달려 나갔다.

부웅허연 매연을 토해내며 오래된 포터가 가속했다그러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트럭은 무한한 선 위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마치 의미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 평생을 허비하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나지막이 상스런 욕설을 뇌까렸다언제나 똑같기만 한 풍경은 조금도 더 보기 싫었다검고 흰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자동차또 자동차…. 그 사이를 질주하는 오래된 식료품 트럭.

검고 흰 통장 위를 달리는 월급월급월급…. 그 사이를 질주하는 끝없는 빚더미.

자신이 생각한 말에 남자는 픽웃음을 흘렸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죽음을 향해 달리는 게 아닐까그 끝은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죽음이란 편안한 휴식인 것일까.

남자는 왜인지 죽음에 조금씩 매료되어 가는 것 같았다.

(5)

오십 대의 남자는 벗겨진 머리와 다 헤진 양복 차림으로 교도소에서 걸어 나왔다아무도 맞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를 기대했던 남자는 이유 모를 실망감에 절어 있었다.

상습적인 업소 출입과 폭행으로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된 지 칠 년이었다무려 칠 년을 교도소 안에서 보냈다여름이면 죽을 듯이 덥고 겨울이면 살을 에는 그 작은 방 안에서 거친 남자들과 함께 살아갔다언젠가 술집 TV에서 하던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작업을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먹었다생각보다 살 만했다오히려 밥도 잘 주고 하니 계속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나오고 보니 그제서야 밖이 좋은 걸 알았다자유란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남자는 살던 반지하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아직 계약이 유지되고 있을지 알 수도 없었지만어차피 갈 곳도 없었다사실은 그 집이 교도소에서 어느 방향에 있는지오래된 건물이 철거되지는 않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남자를 그 반지하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집을 찾고 있었다자신을 맞이해 줄작더라도 따뜻하고 가족이 있는 곳으로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그 집을 찾고 있었다.

그때문이 반쯤 열린 주택 하나가 보였다온 몸에 멍이 든 아이와 술병을 든 여자가 보였다남자의 표정이 악독하게 일그러졌다.

(6)

재판이 끝나고 다시 교도소였다이번엔 조금 더 크고 삼엄한 경비가 있는 곳이었다대성교도소라고 했다큰 별이라는 웃긴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무기징역을 받아 앞으로 죽을 때까지 지낼 곳이었다.

앞으로 자유의 아름다움을 느낄 날은 없었지만남자는 후회하지 않았다오히려 그 남자는 아주 기뻤다.

남자는 처음으로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폭력을 당하던 아이는 아마 좋은 집으로 입양되었을 것이다남자는 작은 아이를 학대하던 악마를 쳐 죽였다직접 그 술병을 빼앗아 머리를 부수고분수처럼 치솟는 피를 맞으며 깨진 술병으로 악마를 찌르고 찔렀다아이의 울음소리 속에서남자는 광기에 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을 행사했다그 결과는 유례없는 잔혹한 살인 사건이었다하지만 남자는 그보다 깊은 쾌감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정의를 온 몸으로 실현하던 그 도취감남자는 진정한 정의의 영웅이 되었다고 자신했다교도소에서 만난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남자를 칭찬했다살면서 처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의로운 사람이라고 일컬어졌다.

진짜로 아이를 때린 건 다른 남자라는 소문여자도 피해자였다는 소문 등은 남자의 정의로움 앞에서 묵살되었다그런 사실은 없었다자신의 자유를 바쳐 어린아이를 구한 한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7)

칠십 대의 노인이 되어 십수 년째 자신의 이야기를 자랑하던 노인은어느 날 거울을 보았다평소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탓인지거울 속 자신이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마치 쪼그라든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노인은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속에 비친 것은 멋지게 나이 먹은 영웅이 아니라 보잘것없이 늙어 버린 미치광이였다노인은 자신의 두 눈 안에서 피할 수 없는 광기를 보았다쇠 거울 안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던 그 불빛은지나치기엔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었다.

노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숨겨 뒀던 칼로 거울 속 악마를 마구 찌르고 베었다악마를 죽이며남자는 또다시 알 수 없이 강력한 도취감을 느꼈다노인의 마음에 정의감이 가득 찼다그는 기쁨 속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악마를 찢고 부쉈다악마의 파멸을 바라며그 악마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억센 손길들이 노인의 칼을 빼앗고 팔을 잡는 게 느껴졌다왜 이러세요하는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8)

노인의 치뜬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그것이 한 줄기 슬픔에서 비롯되었는지그저 눈을 오래 떠서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노인은 영원히 자신을 구속하던 교실의 천장반지하의 천장트럭의 천장교도소의 천장을 떠올렸다노인은 마치 자신이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그것이 한없이 억울했다.

노인의 숨이 가빠졌다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느리게 뛰고 생각이 늘어지기 시작했다노인은 무엇이 도래하는지 깨달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노인의 마음이 급해졌다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그러나 노쇠한 육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서평생을 마신 독에 마침내 노인은 숨을 거뒀다.

노인은 죽어서도 눈 감지 못했다.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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