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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 작성자 가로밑줄
  • 작성일 2024-04-05
  • 조회수 410

창밖을 응시하면서 새가 날아들기를 기다린다. 여학생 한 명이 211페이지, 다섯 번째 줄의 문단을 읽는다. “K는 외쳤다, 저는 죽음을 믿지 않겠습니다. 가는 파도에 쓸려가고 오는 파도에 깎여오는 제주도의 절벽처럼 살겠습니다.” 나는 교내에서 가장 높은 나무에 걸칠 듯 부유하는 뭉게구름을 조용히 바라본다. 나흘 전부터 학교가 바뀐 걸 눈치챈 나는 조용히 교과서가 팔랑팔랑 넘어가는 소리에, 나뭇가지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곤 한다. 학교의 변화는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학생들의 표정은 음울하게 사나워졌고, 선생님의 눈빛은 수줍게 기죽었다. 나는 학교의 낯선 변화에 몸서리치며 외톨이가 되지만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며 어깨를 두드려오지 않는다. 그것은 학교 나름의 다정함일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는 사과껍질을 나선으로 칼질해 벗기며, 아빠는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하다가 들어온다. 언니는 대학에서 안부 문자를 보내온다. 기상청에서는 비가 쏟아질 거라고 겁을 주지만 내 3월은 아직 맑고 등굣길에 우산을 챙겨 간 학생들은 우산을 도로 접는다. 기차는 치명적인 안전 사고에도 정상 운행 중. 옆자리 남자애가 말을 건다. 야, 애들은 학교 끝나고 걔네 집 갈 거라는데 너도 와. 너만 안 오면 그건 그거대로 우습지. 정작 유쾌한 일은 없는데, 일주일쯤 지나니 또래의 입가에는 붓으로 그은 듯한 미소가 걸린다. 지긋이 기다려도 새는 창턱에 앉아 교실 안쪽을 들여다볼 뿐이고 작은 발을 창턱 너머로 옮길 생각은 않는다. 새가 교실로 들어와 준다면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선생님이 뛰고 친구들이 도망가며 교실이 난리 날 것 같은데, 졸업할 때까지 새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뭐가 돼? K는 웃는다, 새가 와야 새 흉내를 낼 수 있다는 말은 유치한 변명입니다. 당신의 떠난 친구에 대한 음침한 동경을 숨겨봐야 우습지. 나는 얼굴이 시뻘게져 K에게 책 속으로 들어가라고 비명 지른다. 선생님은 나의 K에 대한 인물 연구가 틀렸다고, 다시 해오라며 과제를 돌려주신다. 책이 작가를 떠나면 오직 독자의 해석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독자는 독자끼리 촘촘한 거미줄을 짜서 책을 독점하고, 거미줄 바깥으로 몸부림치며 나가려는 독자를 잡아먹지, K는 조언한다. 나는 일부러 다른 아이들보다 사흘은 늦게 그 아이의 집에 들러서 K와 함께 유감을 표한다. K와 나는 그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저녁을 얻어먹고 간다. 키이잉, 키이잉, 기차 지나가는 소리는 여전히 크고 요란하다. K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키 164. 몸무게 48. 국적 대한민국. 출생지 일본 오사카. 취미는 날씨 예측과 자전거. 시한부. 다음 봄에 죽음. K는 투쟁하는 인간형. 덜컹덜컹. 책 속에서 기차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K의 이야기를 끝내고 창밖에 여름이 작열하고 다음 책을 펼칠 때가 왔는데도, 나는 K의 책을 몰래 학교에 가지고 다닌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학교는 그 아이의 존재를 탈 없이 추방할 방법을 고안해 낸 듯싶었다. 학교는 위협적으로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압박한다. 어느 쪽도 탈출구는 못 됐다. 삶과 죽음의 거대한 벽이 양쪽에서 밀고 들어와 나를 납작하다 못해 이차원적으로 가공한다. 나는 납작해진 시선으로 눈을 흐리게 뜨고 세계를 관측하며, K는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긴다. 학교는 어떤 무서운 존재로 변했지만, 알아챈 것은 그 아이의 추방을 뼈저리게 체감한 나뿐. 사방에서 매섭게 위협해 오는 학교를 등지고 K의 인물 연구를 계속한다: K는 투쟁하는 인간형.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다가 도쿄로 유학. 시한부를 선고받자 자퇴. 부모와의 갈등. 남자 친구와의 고통. K는 그동안 현실의 사건들을 글로 적는다. 현실을 꾸미고, 미화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자전적 소설을 쓴다. 그 소설에서 어머니의 압도적인 슬픔에 K는 감동하고, 아버지의 매몰찬 호통에 K는 단단해지며, 남자 친구의 우유부단한 나약함에 K는 사랑을 느끼고, 다가오는 죽음에 K는 완성된 일기를 집 앞에 둔 뒤 자신을 위한 여정을 떠난다. K의 범죄는 현실의 위조와 사십만 원가량의 도둑질. 이윽고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울다가 잠드는 장면이 그야말로 마지막 페이지에 있다. K와 그 아이는 모두 기차를 이용해서 떠났다. 내게 손을 흔들면서 먼 외국으로 갔다. 나는 공책에다가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퍼부었다. 다음 날 오전 나는 선생님에게 K를 제출한다. 선생님은 운다. 친구들도 운다. 학교는 서둘러 모든 창문을 닫지만, 나는 분명 새들의 검은 그림자들이 복도를 다정한 속도로 비행해 가로지르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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