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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27
  • 조회수 366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통조림

사람들은 잘 모르기도 하지만 통조림에는 참 많은 종류가 있다주로 많이 먹는 참치 통조림부터 고기 통조림빵 통조림케이크 통조림방울뱀 통조림까지방울뱀 통조림은 구호식품에 한 개 섞여 들어온 것을 먹어 본 적이 있다생각보다 특이한 맛은 아니다오리의 맛과 비슷하다다만 생긴 것은 뱀 형태 그대로라서 먹기는 다소 거북한 면이 있었다그래서 나의 친구들과 나는 이걸 먹는 데 내기를 걸었었다물론 진 것은 나였다.

구호식량의 종류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많은 것은 통조림이다그리고 맛이 가장 괜찮은 것도 통조림이다통조림은 그나마 먹을 만하기라도 하지전투식량은 모두 질색하면서 먹는다.

한국이 통조림으로 연명하게 된 것은 5년 정도 되었다북한과의 전쟁으로 전국은 위험 지대가 되었고 수도인 서울은 더했다나는 거기서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고 여기는 경기도 양평이었다.

대부분의 고층 건물은 폭격으로 부서졌고 북한의 최후의 발악으로 평양 부근은 핵폭탄으로 사지가 되었다도시에 침투한 유엔군과 한국군을 죽인다고 내린 결단이었다.

덕분에 북한은 완전히 망했지만 그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유엔의 지원이 황폐해진 나라를 되살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거대한 국제 정세와는 관계없이통조림은 그날마다 맛이 똑같았다통조림의 맛은 수십 수백 년이고 같을 것만 같았다그래서 통조림을 먹는 우리의 나날은 언제나 같았고 우리가 먹는 통조림도 나날이 같았다.

나날이 같은 통조림이 함께한 오 년은생각보단 살 만했다캠프에서 노숙하듯이 자며 만난 아이들과 떠들었고 함께 통조림을 먹었다통조림 국물을 들이켤 때의 기분은 언제나 씁쓸하고도 즐거웠다아이들의 나이는 제각각 달랐지만 생존과 죽음 사이에서 나이는 무의미했다그래서 우리는 모두 친구였으며 동료였고 모두가 경쟁자였다.

통조림 뚜껑은 칼로 쓸 수 있을 만큼 날카롭고 통조림 자체도 딱딱해서 둔기로 쓸 만했다먹기 위한 통조림들은 가끔씩 무기로 변했고 그럴 때마다 한국의 생존자는 적어졌다.

그날도 통조림은 우리 넷의 든든한 무기였고 화폐였으며 식량이었다.

해가 어슴푸레 떠 오르는 새벽우리는 오랜만에 얻은 고기 통조림을 통째로 끓이고 있었다그 고기 통조림은 맛이 이상해서 다시 익히지 않고는 도무지 먹을 것이 못 되었다물론 그걸 익힌다고 환상적인 스테이크 같은 맛이 나는 건 아니었다.

고기 통조림은 버려진 듯한 야영장에 놓여 있었다야영장의 불은 꺼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다 쓴 생활용품들이 방치되어 있었다나와 민수는 그곳을 수색했고 찾아낸 것은 그 소고기 통조림 하나뿐이었다.

다행히 아직 남은 식량은 많았다우리는 또다시 통조림을 까 먹기 시작했다끓인 소고기 통조림은 다 같이 나눠 먹었다.

세 번째 참치 통조림을 깔 때였다.

거기우리 자리다.”

키가 큰 남자아이 둘에 작은 남자아이 둘이었다맨 앞의 아이가 각목을 든 채 우리가 앉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의북한 애들이냐?”

그렇다너희는 남조선 간나들이지?”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나와 근수는 각각 야구 배트와 부엌칼을 든 채 천천히 일어났다.

상황이 상황이니 싸우지 말자식량을 나누는 거다유엔의 지원은 충분해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기래우리도 싸울 마음은 없다.”

우리는 무기를 내렸다북한 애들은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내 우리와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식량은 우리 넷이서 이 주 정도 버틸 양이야너희는 얼마나 있니?”

“…우리도 비슷하다그런데 어린 간나들 먹을 거 뺏는 어른들이 많다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북한 아이의 말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이미 그 아이는 많은 일을 당한 듯 눈이 늑대처럼 날카로운 기색을 띄었다.

우리 중 가장 어린 채린이 그 눈에 겁을 먹었다채린은 나의 뒤에 붙어 앉으며 속삭였다.”

민준 오빠저 오빠 무서워…”

나는 채린의 손을 잡았다분위기는 한순간에 비극으로 치닫을 것마냥 무거웠다누구도 당황하거나 겁을 먹어서는 안 되었다.

채린아괜찮을 거야일단은 함께해야 해어른들을 우리가 이길 수는 없어.”

나는 17살이고 민수는 16살이었다둘 다 어린아이는 아니었지만 어른도 아니었고특히 우린 중 채린이와 정하는 11살짜리 어린애였다우리는 약육강식의 야생으로 바뀔 수도 있는 한반도에서 작은 약자에 불과했다.

북한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마쳤다우리 두 무리는 조금 떨어져서 각자 물품들을 꺼내 잘 준비를 했다.

그날 밤이었다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잠을 깼다.

북한 아이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님이대로면 다 죽습니다저 남조선 것들을 다 죽이고 식량을 빼앗아야 합니다.”

아직은 일러그리고 나는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다.”

형님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다 잠들어 있지 않습니까우리 식량 이제 하나도 안 남은 거 알면 저것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내일내일 하자오늘은 우리 쪽도 자고 있으니 말이다.”

형님….”

당장이라도 일어나 그들을 공격해야 할 것 같았지만 참고 기다렸다이름도 모르는 북한 아이들에겐 남은 식량이 없었다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새벽이 되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민수를 흔들어 깨웠다.

저놈들우리를 다 죽일 작정이야남은 식량이 없대우리 먼저 죽여야 해.”

민수는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칼을 잡았다민수는 삼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것을 몸에서 떼 놓지를 않았다.

나도 알루미늄 야구 배트를 들고 천천히 북한 아이들의 야영지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이런 간나새끼들!”

북한 아이들이 각목과 작은 칼을 쥐고는 벌떡 일어났다둘과 넷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나는 아슬아슬하게 각목을 피했다각목이 스친 얼굴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이제 보니 각목에는 긴 못이 박혀 있었다.

순간 분노가 차올랐다과하게 앞으로 몸을 빼내며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미처 피하지 못한 놈의 관자놀이에 야구 배트가 작렬했다.

!

놈이 뒤로 넘어갔다나는 기세를 몰아 놈에게 올라타 야구 배트를 휘둘러댔다하는 소리가 점점 둔탁한 소리 바뀌어갔다놈의 머리가 내려앉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온 몸이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민수와 다른 놈은 아직도 견제 중이었지만 이쪽을 연신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북한 아이들의 대장은 잘 먹지 못해서인지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리고 나도 사람을 허무하게 죽여 버리고 말았다살인의 감각을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야수처럼 적들에게 뛰어들었다가까이서 멍해져 있던 아이의 머리에 야구 배트가 피의 꽃을 피웠다.

 

그날북한 아이들은 모조리 죽었다민수는 칼에 찔렸지만 무사했다나와 민수는 제자리에 안자 헐떡거렸다.

나도 칼에 여러 번 찔렸지만 급소를 피해서 무리는 없었다다만 빠르게 치료를 하지 않으면 패혈증에 걸려 죽을지도 몰랐다챙겨온 붕대를 꺼내 나와 민수를 감았다내 붕대는 감기도 전에 이미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민수는 말이 없었다오 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던 아이들이 한순간에 살인자가 되었다민수는 나이도 아직 중학생의 나이였다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충격을 받은 건 민수만이 아니었지만나는 고개를 내밀려는 양심의 가책과 공포를 짓눌렀다여기서 이런 일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우리는 굳세게 살아남아야만 했다.

민수야사람을 죽인 게 충격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우리는 이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해그리고 저것들은 우리를 먼저 죽이려 한 북한 놈들이야.”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채린이랑 정하가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 걔네 얼굴 못 보겠어.”

“…채린이랑 정하도 현실을 볼 줄 알아야지우리는 이제 익숙해져야 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채린이랑 정하는 이제 겨우 열 한 살이라고!”

민수야…”

우리 둘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생각을 정리한 나는 민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민수야일단은 다시 채린이랑 정하한테 가자옷도 좀 닦고.”

민수는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우리 둘은 이겼음에도 착잡한 표정으로 걸어갔다네구의 시체를 남기고서였다.

캠프로 돌아가자 두 아이가 불안한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그 둘은 우리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빠들어디 갔었어그 피는 뭐야설마….”

그 애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어그래서 싸운 거야.”

나는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하지만 채린이와 정하는 오히려 더 겁을 먹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 오빠들을죽인 거야?”

“…그래.”

민수가 나를 째려봤지만 나를 무시했다그리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 통조림을 깠다.

먹자.”

내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두 아이와 민수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그대로 앉아서 조용히 밥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일어난 나는 무언가 허전할 것을 느꼈다주위를 둘러보자 채린이와 정하가 없었다두 아이는 겁을 먹은 채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민수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나는 조용히 통조림 하나를 들고 그것을 까기 시작했다.

통조림의 맛은짜고도 씁쓸했다.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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