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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아이의 인형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26
  • 조회수 409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인형

그 아이는 두 눈의 색이 달랐다한쪽 눈은 바다 같은 푸른색한 쪽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검은색그 아이는한 마디로기괴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의 이목구비는 사람의 그것 같지 않았다오밀조밀하게 인형처럼 생겨서는 곱슬거리는 머리칼로 그런 분위기를 더했다그의 희고 가는 손목과 발목의 관절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그 뼈의 존재를 부드럽게 부각시켰다기다란 다리와 큰 키 키섬세하고 여린 손까지그는 정말 작은 인형 같았다.

그래서 그 아이가 전학을 왔을 때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 소년은 무생물처럼 조용히 서서는 선생님의 재촉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무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

그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크게 움직였다그 커다란 오드아이의 움직임에 반의 모든 아이들은 움찔놀라고 말았다그 눈은 반 전체를 훑더니 자신의 자릴 찾았다소년은 그렇게 이름도 밝히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내 대각선 오른쪽 앞자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뒤통수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왠지 그것은 섬찟해서 갑자기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돌아볼 것 같은공포게임에 나올 것 같은 뒤통수였다아주 불편했다.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

우리 친구는 이번에 전학 온 정희연이야남자아이고그림 그리기를 잘한다더구나모두 잘 대해 주렴.”

반 전체의 분위기는 그 아이에게 쏠려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1 교시가 지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반 밖으로 휙휙 빠져나가서 옹기종기 모였다.

쟤 봤어진짜 잘생겼어.”

근데 왠지 좀 무섭지 않아시발나 그 눈동자 움직일 때 지릴 뻔했어거의 공겜 수준임.”

그렇긴 하더라너 걔 옆자리지고생 좀 하겠다이상한 애가 와서.”

그러게 말이야망한거 같음…”

나는 아이들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결심을 내리고 반 안으로 들어갔다눈동자들이 내게 쏠렸다나는 곧장 그 아이에게 걸어가 말을 걸어 버렸다나는 좀 거침없는 기질이 없잖아 있었다그래서 평소에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했는데이건 나도 전혀 예상 못한 충동이었다.

안녕희연아나는 김연희라고 해우리 이름도 비슷한데친하게 지낼래?”

얼핏 보니 아이들은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입으로 미쳤냐고 지껄이고 있었다나는 그걸 무시하고 희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한다며나도 좋아해. 2교시 미술인데 같이 할래?”

그 아이는 물끄러미 연희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좋아하지 않아잘 할 뿐이야.”

당당한 자기자랑에 조금 놀랐지만 연희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그럼 같이 하는 거다?”

“…그래.”

그렇게 약속이 성사되었다그제야 연희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이것이 설렘인지 공포인지 무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반 밖으로 나오자 말들이 쏟아졌다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미술실로 향했다.

2교시 미술 시간나는 미친 것을 보았다.

다빈치의 환생이 여기 있었다그것도 인형 같은 외모로나는 그가 도저히 나와 같은소리치면 놀라고 때리면 아픈 인간이라는 게 신기했다.

그의 그림은 정말로 예술이라 부를 만했다왜 자화자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저렇게 잘 하니 그럴 만도 하지그는 고작 한 시간 만에 그럴듯한 실사화를 그려 내고는 자리에 바르게 앉아 있었다.

...너 진짜 대단하다벌써 다 그린 거야?”

“….”

대답이 짧아 불만이었지만 연희는 어차피 먼저 말 건 거 계속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그려오래 배웠어?”

.”

대답이 조금 빨라졌다.

그럼 나도 좀 알려줄 수 있어나도 그렇게 그리고 싶어.”

희연은 말없이 연희를 바라보더니갑자기 손을 쭉 뻗었다한 손으로 붓을 잡더니 연희의 그림 위로 되는대로 선을 죽죽 그어 나가기 시작했다.

…”

연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것을 바라봤다순식간의 연희의 꽃 그림에 생기가 더해지고 유리병에서는 광이 나기 시작했다살아있는 것 같은 꽃이 되기까지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본판이 좋아서빨리 끝났어이렇게 하면 돼.”

연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희연은 연희에게 붓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때였다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확 뻗었다동시에 물통이 쓰러져 희연의 몸을 적셨다.

미안… 어떡해…?”

연희가 어쩔 줄 몰라하는 동안희연은 묵묵히 물을 털어내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물이 쏟아질 때 놀라지도 않았다.

싸이코인가...?’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그러다 빨리 일어나 제 옷으로 희연을 닦아주기 시작했다희연은 그것도 묵묵히 그저 받았다.

2교시 쉬는시간연희는 희연 옆에 서 있었다.

미안해사실 네 손목 보고 놀라서 그만…”

희연의 손목엔 수없이 칼로 그은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연희는 그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었다또 망할 놈의 충동이 문제였다.

이거봤구나.”

희연이 처음으로 사람 같은 감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까지 살짝 지었다.

괜찮아옷이야 말리면 되고내 손목은너무 걱정하지 마아마 괜찮을 거야.”

그러고는 희연은 자리를 떠나 버렸다.

연희는 왠지 희연이 걱정되기 시작했다사람 같은 감정을 보여준 뒤로 그의 매력이 연희를 흠뻑 적셔 버렸다그의 아름다운 외모가섬세한 손길이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연희는 좀처럼 희연의 몸짓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소문이 퍼졌다.

김연희 쟤 정희연 좋아하는 거 같은데?”

진짜물 쏟은 거 땜에?”

아니수업 중에 눈을 떼지도 못하더라고완전 빠진 거 같은 느낌?”

걔가 진짜 잘생기긴 했지근데 왠지 인형 같아서 난…”

그 말들을 들으며 연희는 얼굴이 화끈해졌지만 왠지 모를 승리감을 느꼈다.

난 걔 웃는 것도 봤어걔도 사람이라고!’

연희는 자기만 아는 비밀이 생긴 것처럼 왠지모를 기쁨을 느꼈다동시에 희연을 향한 감정을 아직 정리하지 못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걔를 좋아하는 걸까…? 이렇게 갑자기?’

연희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희연은 그대로였다무정물처럼 앉아 수업을 들었고 수업이 끝나면 데리러 온 차를 타고 사라졌다다만 식당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연희는 그런 희연을 미술실에서 발견했다비품을 정리하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미술실에 도착했을 때희연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연희는 그런 희연이 신기했다그는 언제나 조각상 같았지만 가끔은 사람 같기도 하고아무튼 이상했다연희는 희연에게 다가갔다.

우연히 만났네안녕나 너 스토킹하는 거 아냐선생님이 비품 정리하래서…”

그때희연은 돌아보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연희는 갑작스레 그것이 미친 듯이 황홀해 보였다.

쿡쿡그래솔직히 스토킹하는 것 같은데뭐 상관 없어하고 싶은 대로 해.”

연희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나에게만은 사람처럼 대해 주는 걸까이거 뭐지?

그런 연희의 감정도 모르고 희연은 또 다시 말을 던졌다.

우리친구 하자너한테는 좀 편한 거 같아친구 해줄 거지?”

당연하지!”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수락해버렸다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어 비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희연이 사라졌다.

 

그것은 체육대회 날이었다여전히 반에서 희연은 무정물 같았고 아이들은 아직도 그런 희연에게 익숙해지지 못했다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반티 맞추기와 응원봉 준비하기 등은 순식간에 이루어져서 어느새 체육대회 날이 되었다.

릴레이 달리기가 끝나고 단체종목이 시작되었다연희는 봉을 잡고 미친 듯이 달리고개구리처럼 앉았다 일어나고다음 주자가 어디에 있는지 찾느라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겨우 한숨을 돌리고 물을 마시다가 주변을 보았다체육대회의 열기가 학교를 잠식하고 있었다뜨겁게 타오르는 학생들의 열의가 느껴졌다체육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연희는 그걸 보다가 뇌까렸다저 애들은 뭐가 저렇게 열심일까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개인 종목으로 경기가 바뀌고 연희는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경기를 구경했다연희의 반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말했다.

근데 네 남친 어디 갔냐오늘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네.”

연희는 주위를 연신 둘러보았다희연은 커녕 그의 흰 셔츠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연희는 주변을 둘러보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바다처럼 푸른 눈이 보였다.

연희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너 어디가!”

친구의 외침이 들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희연의 손목에 그어진 선들이 생각났다희연은희연은

연희가 옥상에 도착했을 때희연은 난간에 앉아 연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엔 물기가 가득했다.

널 기다렸어와 줄 거 같아서죽으려고 했는데우리 부모님엿 먹일려고.”

말이 툭툭 끊어졌다연희는 숨을 고르다 말고 희연에게 달려들었다그리고 난간에서 잡아채 옥상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너 죽는 줄 알았잖아미친놈아!”

바닥에 던져진 희연은 순간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하는 웃음소리가 옥상을 가득 메웠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미성이었다.

그 순간에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기분을 느끼는 자신을 욕하며희연은 말했다.

내가 죽는 거 가만 안 둬내 마음 뺏어가 놓고죽는 꼴 못 봐.”

연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뱉다 얼굴이 붉어졌다하지만 뒤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질러 버리기로 했다언제나처럼 강한 충동을 느끼며.

우리 만난 진 얼마 안 됐지만나랑 사귀자뭐가 그렇게 슬픈 진 몰라도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희연은 연희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대신정말 행복하게 해 줘야 해약속해.”

희연의 부모는 부모같지 않다고 했다아이를 그림 천재라며 미친 듯이 교육시키고마치 인형처럼 말을 잘 듣도록 교육했다고 한다웹소설 같은 데나 나올 법한 뻔한 얘기였다.

뭐 그런 거 갖고 죽을라 해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이리 와요내 사랑.”

연희는 장난스레 희연의 볼에 키스했다희연은 기겁했지만 그렇다고 싫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검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희연의 오드아이를 보며연희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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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수
  • 202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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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간의 항해자별이 윤슬처럼 흐르며 사라지길 반복한다. 끝없는 바다 위로 비친 별이 짙은 황홀경을 품고 나아갔다.나는 황금빛 노를 잡고 바다를 밀었다. 내가 아닌 바다를 움직이는 항해자의 심상(心象)으로, 검은빛에 수놓인 별을 비추는 바다에 파문을 드리웠다. 그 파문은 작은 고리를 그리더니 이내 별들 사이로 밀려가 소멸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끝없이 파문을 그렸다. 파문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수많은 동심원을 형성하며 내가 지나온 길들을 축복했다. 나의 길은 빛나는 고리들로 가득해졌다.밀려나는 바다에 한 잎 별똥별이 서렸다. 이윽고 수많은 별들이 기나긴 꼬리를 남기며 낙하를 시작했다.유성우였다.나는 잠시 노질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의 덩어리들은 어딘지 모를 곳에서 몰려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것은 나를 띄운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별하늘의 찬란함은 위아래로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며 끝없고 아주 긴 여정을 시작했다.나는 그 유성우의 작은 천체 하나와 같은 존재였다. 무한한 우주의 바다를 밀고 나가서, 이내 영원한 미래의 고향을 향하는 항해자였다. 바다의 끝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끝의 고향은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그 고향을 향하여 영원히 바닷물의 별기운을 밀어낼 것이었고 그 바다 위에서 잠들 것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성간의 항해자, 영원한 항해자였다.나는 우주에서 가장 작은 존재였다. 나의 작은 황금빛 배는 저 하늘의 별과 같아서 그 반짝임의 순간이 영원과 같은 빛을 내뿜었다. 이 배가 인도하는 물길을 따라 나는 언제까지고 바다를 여행했다.바다는 우주와 같았다. 그것은 무한히 넓고 저 바다의 빛을 흡수해 또다른 빛으로 뱉어냈다. 그것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는 신의 궁전과도 같았고 그것의 너비는 한없는 고랑을 자아내는 저 지평선과도 같았다. 그래서 바다는 또 하나의 우주였다. 나는 그 우주를 유영해 다른 우주로 나아갔다.내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첫 기억은 폭발하는 천체의 기억이었다. 그것의 초신성(超新星)은 미친 듯이 밝아서 나는 그 안에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고도 나는 그것을 보았다. 휘황한 오색을 품은 단 하나의 백색이 저 우주를 삼킬 듯 뻗쳐 가는 모습. 나는 그것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우주에는 가끔 초신성이 제 모습을 비췄다. 하지만 내가 본 것 같은 거대한 것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의 초신성은 무엇보다도 밝고 넓어서 정말로 우주의 한 부분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 나는 거기서 나의 배를 얻었다. 바다에 수장될 듯 위태롭게 수영하던 나는 황금빛 배를 얻고 노를 저었다. 보석으로 이루어진 돛을 펴고 영원히 꺾이지 않을 흑요석의 돛대를 매단 나는 그날부터 지칠 줄 모르고 우주의 웅대함을, 그 안의 무한한 찬란함의 축복을 여행했다.나는 바다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별의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나는 돛을 접고 닻을 내렸다. 그 닻은 어딘지 모를 바다 밑으로 무한하게 가라앉을 수 있었다. 비록 방금 전에 물에 담겼지만 그 닻은 시간을 초월해서 무한에 닿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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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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