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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소녀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24
  • 조회수 381

하얀 비가 내렸다어쩌면 검은색일지도 몰랐다.

회청빛 운동화가 젖어서 검은색이 되었다양말까지 젖은 발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앞으로 옮겼다.

작은 웅덩이 위로 깊은 고랑이 새겨지며 파문이 일었다그것을 가만히 바라본다운동화가 조금 더 젖어 어느새 찔꺽찔꺽 빗물을 토해 냈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한 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한 방울어느새 엇박으로 두 방울비는 그렇게 스스로의 박자감에 취해 멈추지 않고 울었다.

비를 쏟는 하늘도 나의 운동화처럼 회청빛에서 검은색으로 변해 갔다마음의 심마(心魔)처럼 드리워진 비구름은 서서히 뻗쳐 와서는 어느새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 덩어리는 한없이 짙어서어쩌면 비를 쏟아 내는 것이 아니라 토해 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그래서 이런 점에서도 나의 운동화와 밤하늘은 같았다.

비에 젖은 밤하늘은 빛을 내리지 못해서그 아래의 도시는 어둠에 물들었다사람이 줄고 상권이 기울어 가는 도시는 밤에도 스스로의 광원을 담지 못했다.

낮에는 한없이 비어 있는 도시가 밤이 되면 어둠으로 채워진다어둠은 깊고도 넓어서 언제까지고 도시를 잠식할 것만 같았다.

재형은 하늘을 바라보다 말고 걸음을 옮겼다밤을 걷는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도로 올라가 버려 남은 인구가 얼마 없었다그래서 재형은 오히려 특이한 경우였다이십 대의 청춘의 나이에도 그는 꿈을 좇기보다 이 어두운 도시에 남길 선택했다그랬기에 그의 곁을 지켜줄 사람도 없었다부모마저 수도로 올라가 버렸고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남은 것은 재형의 늙은 할아버지뿐이었다.

재형은 도시의 짓다 만 건물의 공사장으로 들어섰다이 건물은 공사 중에 투자가 끊겨 그대로 방치된 오래된 곳이었다재형은 비가 오는 날마다 이곳에 올라 한 사람을 기다렸다.

그녀를 본 것은 사 년 전이 처음이었다우연히 공사장을 발견해 들어선 재형은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그녀는 우산도 우비도 쓰지 않고 헤드셋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재형은 그날 특별한 경험을 했다그것은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아 수도로 올라가려던 재형의 발목을 붙잡고 아직도 놓아 주지 않았다한 마디로 재형은 그 소녀를 기다리기 위해 이곳에 남았다.

그런 재형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다만 편의점에서 하는 알바와 집안의 돈으로 먹고살면서도 재형은 그녀만을 기다렸다비 오는 날에 다시 보기로 한 그녀를.

그날도 재형이 발견한 것은 비어 있는 공사장의 시커먼 어둠뿐이었다그 어둠은 어쩐지 도시를 잠식한 어둠과는 결이 달랐다왜인지 이곳의 공기만은 은은한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재형은 그 달빛의 향을 소녀의 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소녀는 문득 뜬 달처럼 찾아왔다 서울의 별처럼 사라졌다그리고 재형은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린 헤드셋을 발견했다.

재형은 집으로 돌아왔다발견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은 아프지 않았다그저 오늘도 그곳에 갔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다.

재형의 할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또 그곳에 다녀오는 거냐너도 참 징그럽구나.”

재형은 말없는 미소로 답했다할아버지의 말에 악의가 없음을그저 옅게 띈 웃음만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형은 주방으로 들어섰다.

대파를 넉넉하게 잡고 얇게 썰었다새우는 썰지 않고 가볍게 씻어 담아 놓았다.

계란을 풀어 이리저리 저으며 스크램블을 만들었다이번엔 스크램블을 덜어 내고 베이컨과 대파를 넣어 볶기 시작했다불 향을 입히는 것이 중요했다.

잘게 썬 베이컨을 볶다가 손목으로 웍질도 해봤다다행히 넘치지 않고 제자리에 떨어졌다그렇지만 불에 닿지 않아 아무 쓸모도 없는 행동이었다재형은 쿡웃어 버렸다.

이번엔 간장과 밥스크램블을 모두 넣고 볶았다그렇게 볶음밥을 완성했다. TV에서 본 백종원의 레시피였다.

재형은 이 볶음밥을 좋아했다비록 귀찮아서이긴 했지만 부모님이 자주 해 주신 요리였기 때문이다고등학생 시절 재형은 거의 이 볶음밥만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볶음밥 드세요식사 안 하셨잖아요.”

오냐.”

할아버지가 일으키기 어려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다양한 병으로 할아버지의 건강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다.

이놈의 파킨슨 때문에...참 나이 드니 힘들구나그나저나 이 양반은 병 이름을 제 이름으로 해 놓았어두고두고 욕 먹게 말이야.”

그거 재밌는 생각인데요그렇게 생각해 본적은 없었는데.”

재형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입담으로 재형을 즐겁게 해주었다물론 세월이 흘러 농담을 바닥나버렸지만 말이다.

그 아이도 참 야속하지벌써 사 년이나 됐는데나타나지도 않고 말이야.”

비 속의 소녀를 말하는 것이었다할아버지만은 그 이야기를 믿어 주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아쉬운 거죠언젠간 오지 않겠어요.”

재형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실제로 사 년이 지나며 재형은 마음이 많이 침착해졌다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소녀 때문이었다그래도 재형은 소녀가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아이가 말을 빼먹었을지도 몰라요보름달이 뜨는 비 오는 날에만 찾아온다던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달하고 관계가 깊어 보이니 말이다내가 보았을 때너는 하늘의 선녀를 만난 것이야달의 선녀를 말이다그렇게 아름답게 져 가는 아이가 어디 따로 있겠느냐.”

재형은 할아버지의 말에 떠 넣던 숟가락을 멈췄다달의 선녀아름다운 표현이었다.

할아버지는 밥을 다시 뜨며 말했다.

선녀의 연인이 되려고 하니 그리도 힘들지특별한 날에야 찾아올 수 있을텐데 말이다너는 아주 잘못 걸렸어.”

할아버지는 작게 웃었다말과는 다르게 할아버지는 퍽 이 상황이 재밌어 보였다재형은 할 말이 많았지만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이었다재형은 달력을 들여다보았다할아버지의 말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그 날이..음력으로..”

재형은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4월 26일의 그 날그 날은 양력으로는 5월 18일이었다그리고 지금의 2024음력 4월 26일은 양력으로 6월 2일이었다.

오늘이었다.

 

재형은 미친 듯이 달렸다헤드셋을 들고다리가 불에 타는 듯하고 차오른 숨이 목을 메어왔다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마음 속의 강력한 힘이 재형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보름달이 뜨고 비가 오는 음력 4월 26그것은 바로 오늘이었다.

어쩌면 오늘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재형은 확신했다그 소녀가 오늘 와 있을 것이었다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마침내 공사장에 도착했다재형은 고개를 돌렸다아직 달이 떠 있었고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재형은 공사장을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십사 층의 난간을 등지고 그 소녀는 앉아 있을 것이었다.

난간을 잡고 계단을 뛰어 노르길 오 분십사 층에서 재형은 떨고 있었다.

그곳에그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헤드셋을 끼고 있지 않았다달빛처럼 밝은 긴 머리를 드리우고그녀를 그렇게 앉아 있었다 기다란 다리는 창백한 달처럼 희었다그 하얀빛은 그녀의 전신을 타고 올라서 이목구비까지도 희게 빛나고 있었다고운 선이 달의 가루 같았다.

한쪽 다리를 뻗은 자세는 소녀 같으면서도 고아한 면이 있었다갸웃젖힌 고개는 하나의 정물처럼 그 자리에서 또한 빛났다.

그때소녀의 뒤에서 달이 솟아올랐다.

세상을 물들이는 검은빛을 뚫고달밤이 재형을 맞이했다.

미칠 것 같이 아름다웠다하늘에서 뻗은 달빛이 소녀를 비추고는 맹렬하게 산란되었다사방으로 비산한 달의 파편들이 모두 소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때소녀가 입을 열었다은은하게 밝은 달의 목소리였다.

또 만났구나.”

너무나도 당연하고 여상스러운 말이었다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무엇과도 다른 특별함을 안고 있었다목소리 안에 숨은 달은 제 모습을 온전한 형태 없이 잔향만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달빛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재형은 그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재형의 가슴에 손이 닿았다그 순간이었다과거의 기억이 겹쳐졌다재형은 이 순간이 오면 그녀에게 말을 걸겠노라고 굳게 결심했었지만그 결심은 여기서 무너졌다.

다음 순간재형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저 드높은 밤하늘 위로저 어둑한 비구름을 넘어그는 달 위에 떠 있었다.

거대한 달의 빛에 그에게 드리웠다.

그리고 그 위에 소녀가 있었다동화 속의 여신처럼 달 위에 앉아그녀는 재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러 와 줬구나.”

나의 신랑.”

나의 친우.”

나의 사랑.”

재형은 홀린 듯 헤드셋을 건넸다소녀는 그것을 목에 걸고는 말했다.

나와함께 가겠니?”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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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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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수
  •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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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기

    너무 좋다

    • 2024-02-24 22:52:17
    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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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수

      @원기 원기님 댓글 진짜 고마워요ㅠㅠ 그동안 자신감 많이 없었는데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

      • 2024-02-25 01:19:43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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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