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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23
  • 조회수 435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재앙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다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현수는 자신을 겹겹이 감싸 안은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났다이불은 거의 열 겹에 가까웠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실 눈은 언제나 내렸다눈은 언제고 내려서 쌓이고 쌓여 아파트 일 층까지를 모두 채웠다그나마 정부에서 열심히 녹인 결과가 이거였다그리고 아마 정부는 눈 속에 파묻혀 어딘가의 얼음 궁전으로 변해 있을 것이었다.

현수는 사실 정부가 어떤지 잘 몰랐다그것이 유명무실해진 지가 벌써 오 년현수의 나이는 겨우 열셋이었다.

현수는 어린 나이에 시체를 많이 보았다얼어 죽은 그들은 사람이 아닌 듯 색이 변해있었다검게 변색되고 옅은 얼음으로 덮인 그들의 모습은 무시무시했다그러나 현수는 이제 익숙했다.

어젯밤 현수는 근처에 살던 친구의 시체를 찾았다식료품을 찾으러 간 마트에서였다시체는 고통스러운 듯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팔과 다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시체를 먹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그러나 그걸 눈으로 직접 보았을 떄의 공포는 상상과 달랐다.

몸통의 잘려 나간 단면에서는 딱딱하게 언 고기의 질감이 느껴졌다구더기는 없었지만 동상이 있었다그곳은 시커멓게 괴사되어 있었다.

얼음이 살갗에 눌어붙어 날카롭게 변해 있었고피는 이미 굳어버려서 흐르지 않았다이미 잘릴 때부터 돌덩어리나 다름없었으리라친구의 시체 옆에서 현수의 눈물은 얼어붙어 버렸다.

그 뒤로 현수는 울지 않기로 했다어차피 얼어붙을 눈물은 보이지 않는 것이 나았다현수는 눈물이 얼어붙은 죽음과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현수는 태양을 갈망했다태양은 양분을 내리고 따뜻함을 내리는 신이었다현수는 태양을 숭배하던 옛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언제까지나 자신을 지켜 줄 것 같았다.

추워.”

입에 얼음처럼 붙어버린 말을 뱉으며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지상 십사 층의 방은 얼마 안 남은 연료로 춥지 않았다.

춥지 않았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뜻이었다얼어붙은 이 도시에는 조금의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수는 몸을 일으켰다얼마 전에 동상에 걸릴 뻔한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얼음 구덩이에 한 시간가량 박혀 있던 결과였다.

엄마내일 출발이지기름은 얼마나 남았어?”

얼마 안 남았어내일 안에 도착 못 하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추위 이후에 생긴 엄마의 버릇이었다.

현수의 가족은 경기도 양평에 설립됐다는 캠프를 향하고 있었다현수는 그게 거기에 왜 설립됐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서울도 아니고 왜 하필 거기람?

그래서 현수의 가족은 서울부터 긴 거리를 이동해 올 수밖에 없었다추위에 차가 고장날 때까지 그들은 달리고 달렸다그리고 양평에서 얼마 안 남은 이곳에서 발견한 것이 이 아파트였다.

오래된 이 아파트의 이름은 백합이었다이름도 구린 이곳의 내부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현수의 가족은 그나마 얼어붙지 않은 집을 찾을 때까지 무려 십사 층을 걸어 올라갔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홀로 죽어 있는 한 노인이었다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그 사람은 얼음의 병으로 썩어 가고 있었다.

폭설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오래 전 들은 기상 예보에 따르면 아예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현수의 가족은 그걸 모른 체 하며 언젠가 일상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지만그 날은 오지 않을 것이었다.

현수의 가족은 마지막으로 식량을 찾으러 갈 준비를 했다일곱 겹으로 어떻게든 옷을 껴입고 핫팩을 붙였다얼굴엔 머리를 덮는 모자와 마스크를 여러 겹 뒤집어썼다.

발에 스키를 끼우고 눈 위를 걸어야 했다눈밭의 길은 멀고 멀었다현수의 가족은 근처 슈퍼를 찾으러 길을 걸었다.

백 미터정도밖에 가지 않았는데도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목 안에 돌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그때 아빠가 손짓했다.

여기야!”

마스크와 폭설의 소음을 뚫고 힘겹게 소리가 전달되었다현수와 엄마는 가져온 삽을 높이 들었다.

!

삽이 부드러운 눈을 강타했다현수는 눈을 사정없이 퍼올렸다팔이 끊어질 듯 아파오고 온 몸이 시렸다핫팩이 식어가고 있었다.

눈을 적당히 치우는 데 세 시간이 들었다마트 안으로 진입할 길은 그렇게 작게 뚫렸다.

얼어붙은 문을 삽으로 쳐서 부쉈다마트 안에는 아직 식료품이 조금 남아 있을 것이었다.

불이 꺼져 한없이 어두운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마트 안은 무언가라도 튀어나올 듯 음산했다현수는 손전등을 켰다.

허억!”

현수는 놀라 넘어지고 말았다마트 안에 얼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가득했다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대피했다가 모두 갇혀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팔다리가 없었다.

쿠쿵!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현수와 가족이 뚫은 구멍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죽은 사람들의 한이라도 서린 걸까.

안 돼!”

아빠가 재빨리 삽을 들이댔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현수의 가족 셋은 시체들과 함께 마트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눈을 다시 뚫을 수가 없었다눈을 파내는 족족 다시 안으로 밀려들어왔다문을 아예 부순 것이 화근이었다.

현수의 가족은 눈을 끝없이 퍼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첫날 밤이 찾아왔다핫팩은 완전히 식어 모래주머니가 되었다두껍게 입은 옷도 추위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상대적으로 얇게 옷을 입은 아빠는 특히 위험했다그들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팔다리가 남아 있는 사람의 몸을 끌어 왔다아마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다른 사람들을 먹인 사람일 것이다.

시체의 팔에 입을 대는 순간시체와 눈이 마주쳤다.

스산한 공포가 갑작스레 제 모습을 드러냈다시체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너도 이렇게 될 거야.

현수는 갑작스레 강한 충동을 느꼈다살아남아야 한다반드시현수는 시체의 눈에 손가락을 꽂아 버렸다.

너 뭐 하니!”

엄마가 외쳤지만 무시했다현수는 눈을 쑤시고 또 쑤셨다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아.

이틀째가 되었다.

현수에게 눈은 이제 하얀 죽음으로 보였다죽은 사람들의 얼어붙은 고기를 먹고 눈을 녹여 마시며 현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죽음은 어디에나 있었다.

현수는 바닥에 누웠다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귀신처럼 지나갔다.

다리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현수의 발끝과 손끝부터 얼음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얼음을 떼내고자 몸부림쳤으나 그것은 허사에 가까웠다.

뒤통수에 추위가 파고들기 시작했다살짝 열린 옷의 틈으로 추위가 뱀처럼 스며들었다그 뱀은 독한 괴물과도 같이 몸 안에서 나가질 않았다몸이 부서질 듯그저 추웠다.

추위가 아픔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겨울마다 찾아오던 빨간 볼이 이제는 붉은 죽음으로 변모했다.

이제 추위는 문제가 아니었다살을 칼로 도려내는 고통이 몸의 말단부부터 뻗쳐오고 있었다그 칼은 살인자가 든 듯이 한없이 잔인했다벤 곳을 또 배고 또 베었다잘린 살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붙고는 다시 베어졌다.

베어지는 것은 온 몸이었다옅게 뻗쳐오던 칼날이 현수의 온 몸을 범하고 있었다현수는 난도질당한 자신의 몸을 상상했다아마도 하얀 서리가 죽음처럼 스며들고 있으리라.

순간 눈 앞에 허연 것이 스쳐 지나갔다.

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마트 안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조금이라도 열을 내야 살 수 있었다.

!

다시 허연 것이 눈앞을 스쳤다현수는 그것을 무시하려고 애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흰 것이 현수를 집요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현수는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바닥과 부딪는 발이 석고로 만든 듯 부서지려 했다손도 마찬가지였다손은 마치 유리처럼 깨져나가고 있었다.

현수는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현수는 흰 것을 피해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부모의 시체를 비해 달렸다미친듯이 흰 것을 피해죽음을 피해현수는 무력했지만 다만 달렸다.

그렇게 삼 일 째를 맞이했다.

현수는 힘이 다해 쓰러져 있었다더는 달릴 수도 없었다시체를 먹을 만한 턱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애초에 사람의 언 몸은 너무나도 딱딱하고 질겼다.

썩은 몸은 마치 역겨운 맛이 나는 육포 같았다따뜻했던 날 즐겨 먹곤 했던 육포가 이제는 그리도 싫어졌다살아남아도 육포는 절대 먹지 않으리라.

그 따뜻했던 나날들현수는 그때를 떠올렸다그때는 모든 것이 선명하고 제 색을 가지고 있었다무자비한 흰색을 피해 무당벌레가 날고 꽃이 피었다덥다고 불평하던 그때가 그리웠다현수는 덥고 싶었다.

저 멀리에 있는 태양 근처에 갈 수만 있다면그 열을 쬘 수만 있다면현수는 차가움이 아닌 뜨거움 안에서 죽고 싶었다현수는 여전히 태양을 갈망했다태양은 아름다웠고 아직도 빛나고 있을 것이었다언젠가 전처럼 강렬한 빛을 내려 모든 눈을 녹여 줄 것이었다현수는 사랑하는 태양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몸이 태양 같았다.

온 몸이 뜨겁게 느껴졌다밤새 난도질당한 몸은 피를 흘려 대는지 너무나도 뜨거워 터져 나갈 것 같았다그 와중에 한기가 면도날로 온 몸을 그어 대고 있었다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때였다.

현수의 눈에 흰 빛 한 줄기가 내려왔다.

막혔던 통로가 뚫리고 있었다햇빛이 돌아와 눈을 녹여주고 있는 것일까현수는 사람들의 그림자 속에서 눈을 감았다.

 

 

눈을 뜬 곳은 천막 안이었다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펭귄처럼 열을 나누려 하고 있었다.

현수는 팔다리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아니아예 감각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현수는 절망스러운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봤다그때까지도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때현수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났구나여기는 양평의 생존자 캠프다살아남은 걸 축하한다.”

슬슬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그리고 옆에 무언가가 보였다그것은팔과 다리였다어쩐지 많이 익숙한.

현수는 눈을 다시 감아 버렸다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이곳만은 다를 줄 알았다.

잘려 나간 부모님의 팔다리가쓰러진 현수 옆에 놓여져 있었다.

 

 

캠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캠프의 사람들은 사람을 먹었지만 그래도 어린 현수를 내치지 않았다그들은 한때 현수의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을 먹어야 할 만큼 식량이 떨어졌어이곳을 떠나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가야 해거기서면 어떻게든 되겠지듣자하니 그곳에는 생존자들이 많다더라.”

친절한 누군가의 설명이었다하지만 부모님을 잃은 현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잘린 팔과 다리는 현수에게 익숙했다하지만 현수는 그걸 단 한 번도 가족에게 대입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것을 자기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었지 않은가이미 하루 넘게 부모님의 시체 옆에서 죽음과 사투하느라 마음이 부서진 상태였다그런 상태로 더 큰 충격을 맞이한 결과는,

조금 아팠다추위로 죽어갈 때보다는 조금 덜많이 아팠지만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왜일까어째서 이런 인간이 되었는가추위가 나의 마음까지 얼려 버리고 말았는가?

13살이 할 생각은 아니었다현수는 어느새 많이 깎이고 깎여 무뎌져 있었다.

현수가 캠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캠프는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들도 마찬가지로 마지막 식량을 모으던 것이었다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방한차를 타고 그들은 남쪽으로남쪽으로 내려갔다.

한 달이 지나 배에 도착했을 때캠프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식량이 없었다먹을 것이 부족했다캠프는 죽은 사람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는데도 자꾸만 줄어갔다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서로를 미래의 음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을 리 없었다.

현수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몰랐다남들이 먹을 때 전투적으로 먹고남들이 걸을 때 방한차에 붙어 있다 보니 어쩌다 살아남았다이제 캠프에 남은 어린애는 자신이 전부였다.

부두에 정박한 배가 철렁흔들렸다현수는 눈이 덮여 미끄러운 계단을 조심스레 올랐다앞에서 첨벙누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심지어 비명도살려달라는 말도 없었다떨어진 사람은 그대로 사라졌다.

현수는 배의 갑판에서 내부로 들어갈 차례를 기다렸다갑판은 녹슬어 있었고 이곳저곳에 얼음이 껴있었다아무리 보아도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태양이 그리웠다.

 

첫날에 현수는 콩 죽을 배급받았다어린아이니 적은 양이라는 말과 함께였다그래도 불만 없이 입에 넣었다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이 배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누가 이런 난민들을 위해 배를 대 준 것일까그렇다면 왜 이런 낡은 배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계단처럼 끝이 없었다.

배가 흔들렸다빙하에 부딪힌 것이었다벌써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출항한 지 하루 만에배는 거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배의 가장 아래 층부터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그렇다고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현수는 갑판으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을 따라 뛰어 나갔다.

뛰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사람들이 달리고 달려 갑판으로 올라갔다하지만 그 걸음걸이에선 왠지 살겠다는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배가 기우뚱거리고 점점 기우는 게 느껴졌다오른쪽이었다그래서 현수는 왼쪽으로 뛰었다.

사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다면 어디로 뛰든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이런 바다에서 얼어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현수는 일단 달렸다배는 더욱 더 기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배의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오르고 몇몇은 떨어졌다그들은 조용히 사라졌다마치 대사 없는 영화처럼조연들이 퇴장했다.

사람들은 배의 가장 높은 곳에 모였다배는 거의 40도로 기울어 있었다그러는 와중에도 아무도 말이 없었다사람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의 물품들이 모두 한쪽으로 밀려 나가다 바다로 떨어졌다시커먼 바다가 괴물처럼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현수는 자신도 곧 삼킬 바다를 바라보았다신기하게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배가 소란스러워졌다배 위에 있던 철골 구조물들이 끼익거리며 소리를 냈다그제서야 나는 한 쪽에 걸린 정부의 국기를 발견했다.

애초에 죽이기 위해 만든 배였다먹을 입을 줄이기 위해한 마디 더 할 사람을 줄이기 위해그래서 배는 이곳에 있었고 지금 기울고 있었다.

배가 이윽고 90도로 서기 시작했다많은 사람들이 떨어졌다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그들은 이미 모든 것에 초연한 것처럼 보였다.

현수는 배의 측면으로 난간을 잡고 기어올랐다누군가가 옆에서 현수를 도와줬다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서서현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태양이 작게 보였다.

빙하기는 왜 온 것일까왜 태양은 더 멀어진 것처럼 보일까나의 태양아왜 그곳에 있니 이곳에 내려와 나를 구해 주련.

나는 태양을 불렀다알아차렸을 땐 이미 목청을 다 해 부르고 있었다태양아태양아!

대답은 없었다.

그때무언가 작은 소리로 웅웅거렸다현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대신 보이는 것이 있었다.

하늘을 가리던 눈구름이 걷히고 있었다태양이 눈을 녹여내고 있었다현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빙하기는 끝났구나.

 하늘에 사랑하는 태양이모든 것에 은총을 내리고 있었다.

태양의 자태는 어느때보다 아름다웠다하늘에 붉은 빛을 내리고아름다운 노을빛으로 빛나며 모든 것을 사랑해주었다.

태양은 마치 어머니 같았다.

현수는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어쩌면 추락일지도 몰랐다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태양이현수에게 왔다.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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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7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오드아이의 인형

인형그 아이는 두 눈의 색이 달랐다. 한쪽 눈은 바다 같은 푸른색, 한 쪽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검은색. 그 아이는, 한 마디로, 음, 기괴할 만큼 아름다웠다.그의 이목구비는 사람의 그것 같지 않았다. 오밀조밀하게 인형처럼 생겨서는 곱슬거리는 머리칼로 그런 분위기를 더했다. 그의 희고 가는 손목과 발목의 관절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그 뼈의 존재를 부드럽게 부각시켰다. 기다란 다리와 큰 키 키, 섬세하고 여린 손까지. 그는 정말 작은 인형 같았다.그래서 그 아이가 전학을 왔을 때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 소년은 무생물처럼 조용히 서서는 선생님의 재촉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휙!그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크게 움직였다. 그 커다란 오드아이의 움직임에 반의 모든 아이들은 움찔, 놀라고 말았다. 그 눈은 반 전체를 훑더니 자신의 자릴 찾았다. 소년은 그렇게 이름도 밝히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내 대각선 오른쪽 앞자리였다.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뒤통수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왠지 그것은 섬찟해서 갑자기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돌아볼 것 같은, 공포게임에 나올 것 같은 뒤통수였다. 아주 불편했다.그때 선생님이 말했다.“자, 우리 친구는 이번에 전학 온 정희연이야. 남자아이고, 그림 그리기를 잘한다더구나. 모두 잘 대해 주렴.”반 전체의 분위기는 그 아이에게 쏠려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1 교시가 지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반 밖으로 휙휙 빠져나가서 옹기종기 모였다.“야, 쟤 봤어? 진짜 잘생겼어.”“근데 왠지 좀 무섭지 않아? 시발, 나 그 눈동자 움직일 때 지릴 뻔했어. 거의 공겜 수준임.”“그렇긴 하더라. 야, 너 걔 옆자리지? 고생 좀 하겠다. 이상한 애가 와서.”“그러게 말이야, 망한거 같음…”나는 아이들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결심을 내리고 반 안으로 들어갔다. 눈동자들이 내게 쏠렸다. 나는 곧장 그 아이에게 걸어가 말을 걸어 버렸다. 나는 좀 거침없는 기질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했는데, 이건 나도 전혀 예상 못한 충동이었다.“안녕, 희연아? 나는 김연희라고 해. 우리 이름도 비슷한데, 친하게 지낼래?”얼핏 보니 아이들은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입으로 미쳤냐고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그걸 무시하고 희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그림 그리는 거 좋아한다며? 나도 좋아해. 2교시 미술인데 같이 할래?”그 아이는 물끄러미 연희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좋아하지 않아. 잘 할 뿐이야.”당당한 자기자랑에 조금 놀랐지만 연희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럼 같이 하는 거다?”“…그래.”그렇게 약속이 성사되었다. 그제야 연희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것이 설렘인지 공포인지 무언인지 알 수가 없었다.반 밖으로 나오자 말들이 쏟아졌다.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미술실로 향했다.2교시 미술 시간. 나는 미친 것을 보았다.다빈치의 환생이 여기 있었다. 그것도 인형 같은 외모로. 나는 그가 도저히 나와 같은, 소리치면 놀라고 때리

  • 김희수
  •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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