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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20
  • 조회수 456

우리 집에는 늙은 개가 한 마리 있었다언제 입양을 한 건지누군가 주워온 건지 그 개는 언제부턴가 그냥 이 집에 있었다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그럴 수가 있나 싶겠지만그 개를 보면 이해할 것이다.

내가 그 개를 문득 깨달았을 때그 개는 다 무너져 가는 방 한 구석에 퍼질러져 있었다얼굴에 진 주름은 세월을 겹쳐 빚은 듯 자글자글했으며 그것은 주로 콧잔등 근처가 그랬다귀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붙어 있었던 양 머리에 들러붙어 있었다머리의 선을 따라 몸통을 내려다보면 그것은 정말로 뼈다귀에 가죽을 얹어 놓은 듯 갈비뼈뿐만 아니라 골반뼈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그 개는 잡종인지 무엇인지 견종도 알 수가 없어서 그냥 황구라고 불렸는데그 이름이 무색하게 털 색깔이 빠져 점점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볼품없는 외모와 달리 황구의 눈은 세월의 바다를 머금은 듯 깊은 빛을 발할 때가 있었다하지만 평소에는 눈꺼풀이 절반까지 내려오고 눈꼬리가 축 처져 늙은 분위기를 더욱 증폭했다.

황구는 그 상태로 바닥에 달라붙을 기세로 몸에 힘을 쭉 빼고 있었다그 개는 밥을 주어도 하루종일 질겅질겅껌을 씹듯이 입만 움직였고 아무데나 누런 변을 싸댔다.

그 변의 형태가 정말 가관이었는데질척질척하게 온 사방에 눌어붙어 있어서 황구를 둘러싼 모습이 정말 끔찍했다그래서 나는 그 개를 혐오했다.

그 개를 싫어하는 것은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온 사방에 문질러진 변을 볼때마다 아버지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고 어머니는 오만상을 쓰고 그것을 닦았다.

한 번은 참다못한 아버지가 그 개를 죽이려 든 적도 있었다발로 밟고 차며 개가 피를 토할 때까지 때렸지만 그 개는 기어코 살아남아 꿈틀거렸다아버지의 폭력은 어머니의 중재가 있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황구는 그럼에도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그 이유는 나는 알 수 없었고 부모님은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다나는 언제나 그 개를 참기 힘들었지만 무시하며 살려고 했다.

나에게 큰 문제는 오히려 개가 아니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머리에 실내화 가방이 날아왔다나는 익숙한 그 타격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매일 나를 괴롭히는 놈들 둘이 보였다.

조병신이너 오늘 꼬라지 아주 가관이다?”

나는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몇 달이고 빨지 않아 기름때가 잔뜩 낀 옷이 내 시선을 억울한 듯이 마주했다네가 뭐라도 해 준거 있냐?

잠시 옷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 나는 조용히 반 안으로 들어갔다그때까지도 나에게 들려오는 욕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교시가 시작되었다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책상 안에는 썩은 우유가 있을 것이었고 자리에는 압정이 있을 것이었다나는 익숙하게 압정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우유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떄 내게 뭔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아마 지우개 덩어리이리라덩어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는 주먹만 해졌다주먹만 한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지우개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

나도 모르게 반응해 숙이고 있던 고개가 힘없이 책상을 들이받았다목에 힘을 빼고 있던 것이 원흉이었다.

그떄쯤 담임이 나를 보고는 혀를 찼다.

무식한 놈뭐 하냐?”

순식간에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누구도 내가 지우개에 맞은 사실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 외에도 괴롭힘의 개수는 무궁무진했고 또 진부했다나는 익숙한 괴롭힘은 어느새 일상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가 끝나고 골목으로 끌려갔다이건 오랜만에 일어나는 전개였다어디부터 맞을지 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너 돈 있냐아니있을 리가 없지그러니까 좀 맞아야겠다.”

한 놈의 주먹이 오른쪽 눈을 때렸다이윽고 배다리쓰러져서는 온몸이었다아무도 말려 주지 않았다나는 한참 뒤에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이게 내 일상이었다.

안 그래도 서러운 날에 내게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부모님은 돈을 벌어야 하니 내가 황구를 돌보라는 것이었다.

싫어요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요!”

열세 살짜리 아이의 목소리는 아버지는 분노한 표정 아래에서 점점 작게 수그러들었다차라리 저 개를 쫓아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공포 속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첫 날이었다나는 개를 돌보는 척만 하기로 마음먹었다그래서 시간이 되었을 때 밥만 주고 변을 닦기만 했다그 이외의 온정은 없었다나는 우리 집안에 피해만 주는 그 개가 정말로 혐오스러웠다.

나는 그 개를 내려다봤다언제나처럼 집안의 한 구석을 차지한 녀석은 자는 건지 깨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누워 있었다나는 놈을 발로 쓱 밀었다반응이 없었다.

밥 먹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놈은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밥을 천천히 입 안으로 욱여넣기 시작했다.

놈의 입이 열리자 시큰거리는 냄새가 진동하며 침이 쏟아져 나왔다그렇게 질질 흐른 침이 쏟아진 밥을 놈은 우걱거리며 먹는 것이었다그것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을 토해내는 것처럼 보였다썩은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황구는 바닥에서 꾸벅거렸고 나는 그놈에게 밥을 대접했다놈은 여전히 어디가 변소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그날도 나는 황구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는데아버지가 나에게 손짓하는 것이었다.

조민욱이리 와봐라.”

나는 아버지 곁으로 갔다.

너 오늘 산책 좀 해라어린 놈이 집 안에서 뒹굴거리는 꼴을 보니 못 참겠다그리고 저 개도 데려가.”

나는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싫다고 했다간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억지로 황구를 일으켜 세웠다놈의 몸은 놀라울 만큼 가벼웠다살이 없는 것을 넘어 뼈가 비었기라도 했는지 의심될 지경이었다놈은 한동안 일어나기를 거부했다나는 놈을 걷어찼고 그제서야 그 개는 몸을 일으켰다중력에 의해 가죽이 짓눌리자 놈의 몸은 더욱 앙상해 보였다빠진 털 사이로 갈비뼈가 돌출됐고 축 처진 놈의 성기가 덜렁거렸다나는 놈에게 오래된 옷을 입히고는 집 밖으로 나왔다.

공기는 맑지 않았다어디선가 불어온 미세먼지에 저 먼 도시의 마천루들은 보이지도 않았고 온 사방이 구름으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개를 발로 밀며 공원을 걸었다이놈은 어떻게 된 개가 냄새를 맡기는커녕 자리에 앉아서 쉬려고만 들었다십 분쯤 걷다 나도 지쳐 그냥 벤치에 앉아버렸다.

하늘이 누랬다해질녘인데도 아름다운 박명 따위는 개뿔그냥 하늘이 조금 더 누래질 뿐이었다.

다리를 쭉 뻗었다더럽고 찢어진 바지가 비명을 토했다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더럽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로 아무도 없는 공원에 미친 개를 끌고반 친구들에게 맞은 다음에나는 벤치에 앉아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눈가를 훔치자 어느새 눈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나는 내가 왜 우는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웃었다나는 슬퍼서 울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다만 비참한 것 같기는 했다옆에 있는 개의 등에서 똥 덩어리를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나는 그냥 그렇게 가만히 울었다.

점점 목이 메어 와 고개를 내렸을 때황구가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작스레황구의 눈이 깊었다.

놈의 눈에서는 생기가 아닌 어떤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새카만 홍채가 빛을 빨아들이고 나의 시선도 함께 빨아들이고 있었다나는 거기서 어떤 것을 발견했다.

웃음다시 말해 희망이었다.

나는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황구의 눈 안에서더럽고 퇴락한 육체 안에서 두 눈이 생생히 빛나고 있었다내려 뜨고 있던 눈의 눈꺼풀은 이미 힘 있게 올라가 제 자리를 찾고 있었다.

황구의 안에 숨어있었을 그 힘은 어느새 황구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황구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웃음 지으며 말했다.

집으로 갈 테냐?”

 

 

할아버지는 내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어린 나를 잘 놀아주었고 엄마 몰래 간식도 챙겨주었다할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 희망을 주는웃는 사람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미친 것은 몇 년 전이었다할아버지는 마치 개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뛰어다녔고 더러운 오물을 흘려댔다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해냈고 병원에서는 난동을 피우기 일수였다.

병원비는 금방 바닥났다우리는 할아버지를 집 안에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누구도 할아버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개가 되었다우리 할아버지 조황구는.

할아버지가 정신을 차린 날우리 가족은 이사했다아버지가 살 만한 곳을 구했다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정신을 차렸다고 건강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암 말기 환자였다할아버지와의 시간은 짧았다황구와의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할아버지는 우리의 곁을 떠났다다행히 제정신으로.

나는 황구와의 시간들을 기억한다그것은 폭력과 더러움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나와 할아버지의 시간이기도 했다할아버지는 나에게 결국 황구였을까할아버지였을까나는 알지 못한 채 오늘도 좁은 집에서 눈을 감았다.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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