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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함은 거짓을 낳는가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18
  • 조회수 528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정현은 고등학생이었다천정고등학교 학년의 평범한 고등학생그녀는 주로 자신의 담담함을 장기로 삼았다그녀는 언제나 폭력을 휘두르던 자신의 어머니가 집을 나갔을 때도아버지조차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됐을 때도 그저 담담했다.

사실 정현이라고 마냥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그녀도 슬픔과 분노를 느꼈고 방에 틀어박혀 홀로 슬퍼하곤 했다다만 그녀는 그저 평소에 겪었던 일 탓인지 웬만해선 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뿐이었다.

그래서 정현은 같은 반 아이가 투신했을 때도 유일하게 담담했다마치 많은 일을 이미 겪어 무뎌진 사람처럼정현은 그저 그렇구나하고 넘겨 버렸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런 정현을 곱게 보지 않았다시체를 처음 발견한 것이 정현이었기 때문이고그런 정현이 마땅히 보여주었어야 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한마디로 정현은 울지 않았고아이들은 분노했다.

정현은 그 시신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학교의 구린 녹색 교복을 적신 붉은 피머리가 깨져 흘러내리는 뇌수길게 뻗은 왼손은 저 먼 하늘을 향하듯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은 참혹했다바닥에 닿기 직전 입을 벌렸던 듯 아래턱이 완전히 분리되어 으깨져 있었다몸통도 마찬가지였다물에 젖은 미역처럼 끈적끈적하게 눌어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정현은 사람의 터진 내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러진 뼈붉은 피부러진 뼈붉은 피모든 것이 죽음을 나타내고 있었다시신을 감싼 붉은 그림자가 정현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거기서 정현은 시체를 관찰하길 멈추었다아무래도 시체의 참혹함을 나열하는 것은 시체에 대한아니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정현은 놀랐지만 그렇다고 경악한 것은 아니었다이미 비극 속에 살던 그녀는 새로운 비극을 발견했을 뿐이었다그래서 그녀는 담담했다.

담담했기에 또한 그녀는 시신을 앞에 두고도 침착하게 신고할 수 있었다신고를 받은 경찰과 구급대가 도착해 시신을 수습하기까지그녀는 모든 과정을 눈 뜨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누군가가 또 있었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다만 지나가던 학생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그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는 정현이 시체를 관찰하는 모습을 목격했고그대로 소문을 퍼트려 버렸다. 7반의 이정현은 싸이코라고.

그렇게 정현은 순식간에 싸이코패스가 되었다가끔은 정현이 죽인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학생들의 사정과 별개로 장례는 무사히 진행되었고정현의 반에서는 죽은 아이를 위한 엄숙한 묵례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죽은 아이는 원래도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누구도 그 여자아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아이들의 거칠어 보이는 치기 속에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있어서그런것과 관계없이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물론 정현은 예외였다.

 

 

소문은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가 정현은 학교에서 완전히 괴물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그녀에 관한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을 넘어 이제는 아예 대놓고 저지르는 일이 되었다.

이정현너 걔 죽은 거 보고도 신고도 안하고 꼬라보기만 했다며진짜야?”

방과후였다텅 빈 집에 가려는 정현에게 한 무리의 아이들이 찾아왔다정현은 무용한 질문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신고했어.”

신고했지그런데 너 그거 시체 보고도 놀라지도 않고 계속 꼬라봤다며너 싸이코야그리고 애들 다 슬퍼하는데 왜 울지도 않아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선두에 선 여자아이는 마치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한 듯이 입가를 비틀고 있었다이름이 김정민이었던가질문을 던지며 정현의 마음을 긁는 그녀는 완전히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너 며칠동안 지켜봤는데너 애들 수군거리는 거 다 들었을거 아냐근데도 왜 가만히 있어너 싸이코인거 과시하는 거야지금?”

정현은 순간 헷갈리기 시작했다이건 무슨 의도를 지닌 질문이지내가 담담한 게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걸까?

아니야.”

정현은 그저 짧게 대답했다이런 질문은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과실을 그저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기 위한 비난에 불과했다정현은 이런 질문을 이미 많이 받아보았다.

나도 놀랐어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하려고 한 거야마음 가라앉히려고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

사건은 거기서 일단락됐다하지만 소문이 사라지지는 않았다아이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 했고 그런 마음에 정현의 해명은 변명에 불과했다.

집으로 돌아가며 정현은 생각했다저 아이들은 자기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중인 것인지는 알까그저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것의 책임을 전가하는악의뿐인 행동임을 알까.

정현은 텅 빈 집에서 편의점 도시락을 뜯었다.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흥미로움을 잃기 마련이다그러나 이번 소문은 조금 달랐다시간이 자날수록 오히려 강해지기만 했던 것이다그 이유는 다음 날로 내정된 사망 학생 부모의 연설 때문이었다.

듣기로는 죽은 아이의 어머니가 같은 일을 막고자 연설을 직접 교장에게 부탁했다고 한다자식 잃은 슬픔의 눈물은 물론 함께였다정현은 그런 사람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자기 아이가 죽었는데 연설을 하겠다고아직 이 주 밖에 안 지났는데?

시간은 흘러 연설 당일이 되었다학생들은 반 순서대로 차례를 맞춰 강당으로 들어갔다.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마다 떠들고 장난치던 아이들은 평소와는 달리 조용했다너무나도 무거운 적막에 강당이 어딘가 늪에 빠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정현은 그런 늪이 자신을 향해 천천히 죄어오는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강당 무대에 불이 켜지고 한 여자가 올라왔다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고 검은 코트를 입은 죽은 학생의 어머니였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아이들은 죽은 아이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위해 연설하러 나온 여자를 위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여자는 잠시 마음을 추스르는 듯하더니 마이크를 잡았다그리고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저희 모두는 죽어버린 한 아이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그리고 전 그 아이의 엄마입니다저는 누구보다도 가슴이 찢어지고 아팠지만같은 일을 막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저희 아이는 원래부터 소극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연설은 애통한 감정과 함께 이어졌다때때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고죽은 아이의 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촉촉히 고이기 시작했다정현은 그런 모습을 언제나처럼 담담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현은 강력한 불안감에 지배되어 있었다왜인지 맨 앞자리에 앉은 자신에게 자꾸 시선이 맞춰졌다연설을 하는 중에도 수시로정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설자의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했습니다그리고 여러분저는 이 자리에 제 아이의 시체를 한 시간이나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순간 정현의 등허리를 소름이 쓸고 내려갔다그게 한 시간이나 되었던가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는 그 아이를 미워하지 않습니다결국 저희 아이를 위해 신고해줬으니까요하지만 저는 한 시간동안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여자의 눈에서 명백한 분노가 느껴졌다그녀가 정현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정현 양나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겠나요?”

정현은 다급히 선생님들을 찾았다그들은 이런 일을 막아 줘야만 했다하지만 그들은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총에 정현은 결국 무대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불쌍해 보이는 가정사로 시작하려던 정현은 멈칫했다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저는… 저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움직이지 못했고도망치고 싶다는 마음과 신고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을 뿐이었습니다저는.. 너무 무서웠어요.”

정현은 이어갈 듯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는 매섭게 째려보는 눈으로 정현을 바라보다 마이크를 다시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저는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을 위해 이런 짓을 해버렸네요많이 부끄럽습니다끝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여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설을 이어갔다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촉촉하던 눈물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연설이 끝난 뒤정현은 자신의 학교 생활도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전교생 앞에서 싸이코로 낙인찍혔다그나마 인사하던 친구들도 이제 다시는 눈을 마주치지 않을 것이었다.

 

 

 

연설 사건 이후 정현의 행보는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다하지만 정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저 수업을 듣고필기를 하고밥을 먹고집에 갈 뿐이었다그러자 정현에 대한 아이들의 흥미는 조금씩 옅어져 갔다다만 작은 사건들은 있었다.

정현이 밥을 먹을 때 누군가 일부터 국을 쏟고 간 일자꾸 교과서가 사라지고 자리가 엉망이 된 일그렇게 정현을 향한 의심은 점점 작은 괴롭힘이 되어 갔다.

 

그렇게 2학년의 마지막 날정현은 연설대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모두가 자리에게 수군거렸다변명을 할 모양이노라고하지만 정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정현은 준비한 말을 되뇌다가 입을 열었다모든 걸 밝힐 시간이었다.

여러분저는 싸이코패스로 지목되어 많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심지어는 저를 잘인자로 지목하고 머리에 압정을 던진 아이도 있었습니다여러분소문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사실만을 전한 소문에 의도가 더해지기는 얼마나 걸릴까요저는 어느새 살인자가 되었습니다제가 한 것은 시신을 바라본 것 하나뿐이었는데도요사실 그 소문을 처음 낸 건 바로 저였습니다제가 시체를 본 건 오 분도 되지 않았습니다처음의 소문은 단지 제가 십 분을 보았다는 내용이었지요그런데 어느새 한 시간이 되었습니다저는 궁금했습니다단지 소문만으로 한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여러분은 악마와도 같았습니다단지 소문만을 믿고 제 해명은 무시하며 저를 이내는 살인자로 몰아갔습니다여러분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저는 그 아이를 죽였습니까제가 그 아이의 시체를 유린했나요어째서 저는 악마가 되었습니까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살 사건은 왜 살인 사건이 되었습니까?”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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