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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류잔화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15
  • 조회수 872

달밤의 향내를 머금은 작은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이내 눈을 뜨고 조금쯤 열린 창문을 흘겼다. 한껏 어질러진 방과 꺼진 모니터, 아무렇게나 던져진 헤드셋. 나는 키보드 앞에 속옷만 걸친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미친 듯이 폭발하는 찬란함. 무엇보다도 강렬한 빛이 모두의 눈을 파고들고, 그 안에 천사를 닮은 잔상을 남긴다. 모든 학생들의 우상인 아이돌, 그 첫 무대를 본 날이었다.

나는 아이돌이 되려고 했다. 고작 한 무대를 본 뒤였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운명이었다.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서서 새하얀 빛을 뿌리는 우상, 나는 그것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화만 내며 반대하는 부모님과 친구들의 무시와 연습의 가혹함,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깎여 나갔다.

"너 따위가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정말 뛰어난 아이들이나 하는 거야!"

"지민아, 솔직히 친구로서 말하는 건데,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아..."

"더 열심히 안 해? 이런 마음가짐으로 되겠어? 재능도 없는 게..."


그러던 어느 날, 연습 중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영양실조와 과로. 부족한 재능을 채우고자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혹사한 대가였다.

한 달 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느꼈다. 나는 분명히 아이돌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부족한 재능을 가진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돌뿐이었지만, 그것은 내가 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그댜로 아이돌이 되기를 포기했다. 평범한 삶도 포기했다. 그냥 백수처럼 부모님에게 빌붙어 살다 죽어버릴 작정이었다. 정신과 상담도 받아 봤고 약도 먹어 봤지만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목표를 이룰 수 없는 삶은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삼 년이 지나 지금이었다. 게임에 인생을 바치며 학교도 가지 않고 사는, 전형적인 쓰레기 같은 인생. 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벌써 이렇게 실패했다.

"원석 살 돈 부족한데... 이번 뽑기....해야되는데..할 수가 없..해야.. 그렇지만...이런 씨발."

거친 욕설을 뱉으며 벌써 엉덩이까지 길어 버린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감은 지도 한 달인지 두 달인지가 넘어 기름 덩어리가 되어 버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도 없는데 뭐, 상관 없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문간에 엄마가 만들어 두고 간 밥이 차려져 있었다. 

"다 식었네..."

메뉴는 쌀밥에 계란말이, 김, 소시지볶음. 하는 것도 없이 돈만 날리는 인간에게는 호화로운 식사다. 대충 숟가락인지 포크인지도 모른 채로 음식을 떠 넣었다.

그때였다.

띠링!

모니터에 작은 알림이 표시되었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이번엔 왠지 눈길이 끌렸다. 마우스를 움직여 자세히 보기를 눌렀다.

'단기 고수익 알바! 식사만 해도 10만 원! 데이트 해주면 50만 원까지! 원조교제 아닙니다. 이건 단순히...'

성의도 없이 만든 광고였다. 당연히 이런 굉고가 얼마나 질이 나쁜지는 알고 있었다. 무시하고 지우려는데 한 가지 문구가 추가로 띄워졌다.

'1000만원 드립니다. 저랑 데이트 해주세요.'

1000만 원? 생각보다 훨씬 큰 액수였다. 그러나 혹하기는커녕 웃음만 나왔다. 저런 광고가 진짜일리도 없고, 진짜여도 돈을 제대로 줄 리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눌러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이미 망한 인생, 걸려들어 봐야 죽기야 더 하겠어.

광고 아래애 뜬 승낙 버튼을 누르자, 갑자기 카메라가 켜졌다.

'얼굴 사진을 찍어 보내주세요.'

어이가 없었다. 이건 대놓고 범죄가 아닌가? 하지만 얼굴 사진 정도야 sns에도 올리는 걸, 호기심에 그대로 버튼을 눌렀다.

"아, 속옷 나왔네... 그냥 보낼까."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번엔 제법 큰 창이 뜨면서 자세한 정보가 나왔다.


날짜:6월 17일

위치:xx공원 입구

...                          


어, 이거 진짜인가. 심심하고 돈도 없으니 한 번 나가 볼까.

나에게 던지는 모든 질문에 긍정하고 있음을 느끼며, 나는 오랜만에 거울을 보았다.

관리하지 않은 지 오래 됐지만 미모는 녹슬지 않았다. 나름대로 예쁜 얼굴에 열심히 만들었던 몸매. 이 정도면 1000만 원쯤 아깝지 않겠지?

스스로도 우스운 생각을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날짜는 바로 다음 날이었다.


...



오랜만에 꾸민 채로 공원 앞에 나와 상대 남자를 기다렸다. 분명히 뚱뚱하고 씻지도 않은 더러운 인간이겠지? 나는 오히려 그런 인간이 오기를 기대했다. 패배자들의 데이트를 꿈꾸며.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조금 높은 미성의 목소리였다.

"지민 씨! 지민 씨 맞으세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탄탄한 몸. 사람들이 말하는 '존잘' 이 그곳에 서 있었다.

'어? 이런 사람일 리가 없을 텐데...'

순간 놀랐지만 그런 기색을 지우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아 네.... 저 맞아요."

남자는 순식간에 다가와 자연스럽게 손을 잡더니 입을 열었다.

"어디부터 갈래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멋진 사람이 그런 짓거리를 왜? 그리고 이게 진짜였다고? 아니 근데 어디를 가야....

"어... 그게...어...."

댜답을 하지 못하자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당황했죠? 이런 멋진 남자가 나와서. 저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거든요. 아무튼 제 이름은 재환이예요. 유재환. 일단 아무 카페나 가 볼까요?"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자 머리가 더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침착한 척 대답했다.

"네, 네! 그래요.그럼 저쪽에 있는 카페가 제가 아는 곳인데..."

재환과 함께한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남자를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재환은 말을 잘했고 위트가 있었고 내 마음을 누구보다 쉽게 알았다. 어느새 나는 내가 아이돌을 포기한 이야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랬군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어요? 혹시 그 일 때문에 이런 일 하는 거예요?"

정확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네, 어느 정도는요. 사실 이런 일 처음이예요. 돈 많이 준다길래, 죽기야 하겠어, 하는 심정으로 해 봤어요, 하하."

재환은 쿡쿡, 하면서 웃더니 대답했다.

"사실 인생 별거 있나요. 한 번 사는 건데 내 맘대로 살아야지. 보통은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나는 못 그러겠네요. 저도 당신 같은 사람이라서."

"그러고 보니 제 얘기만 잔뜩 했는데. 재환 씨 얘기도 좀 해줘요."

조금 애교를 섞어가며 말했다. 점점 그에 대한 호감이 크기를 불려가고 있었다.

"그 얘긴 좀 나중에. 일단 지금은 일어날까요? 제가 아는 식당이 있어요. 거기서 나머지 얘기 해요."

왜인지 부푼 마음으로 재환을 따라 나섰다. 돈으로 만난 사람이지만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 혹시 이 남자와 잘 되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쿡, 하고 작게 웃음울 터뜨렸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외진 술집이었다. 조금 위험하게 생긴, 영화에 나올 법한 곳.

속으론 당황했지만 일부러 강한 척했다. 어차피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온 참이다.

"이제 여기서 술 먹고 야한 짓도 하고 하는 거예요? 후후."

일부러 야릇한 웃음소리를 내는 자신을 갑자기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냥 데이트만 하려는 거였는데.. 이상한 게 돼버렸잖아.

그런데 재환의 태도가 바뀌었다.

"당연하지 이 썅년아. 너 이제 하루종일 **당하는 거야."

"네? 잠깐..."

그 순간, 술집에서 남자들 여러 명이 나와 나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



새벽 4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왔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무려 네 시간 동안, 나는 남자들에게 거칠게 유린당했다. 내 아무것도 몰랐던 마음은 짓밟히고 그것은 몸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꿈도, 미래도, 나 자신도...



한 달이 지났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 파과의 고통도, 남자들의 거친 숨결도 모두 꿈이었다는 듯이. 그렇게 넘어갈까도 생각해 봤다. 그냥 잊어버릴까. 진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내 작은 희망은 무참히 깨어졌다. 임신한 것이다.

"나는...나는...어떻게 해야 되지?"

부모님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이런 나를 더 살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그들에게 고문일 것이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아이도 함께 죽는다. 하지만... 하지만....




아파트 옥상에서 별을 보았다. 오늘따라 밝게 빛나는 별들이 야속했다. 내 마지막을 장식해주려는 걸까. 그러지 말고 고개 좀 숙여 주지.

1000만 원은 실제로 받았다. 입막음 용도였던 모양이다. 유언장과 함께 부모님께 남기고 집을 나왔다. 나를 낳아 키우는 데 천만 원보단 많이 들었겠지만,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이었다.

내가 해야 했던 것은 공부였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돌이었다. 폐인처럼 살면서도 속으로는 하늘의 별을 꿈꿨다.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부모님을 위해 돈이라도 벌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위했던 모두에게, 그리고 나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할까. 나에게도 행복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난간에 올라서며 다시 하늘을 보았다. 저 하늘을 보며 누군가는 꿈을 그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의 염원을 쫓듯이, 잃어버린 내 존엄을 쫓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내밀었다.

낙하가 시작되었다. 고개 숙인 꽃의 꽃잎처럼, 아름다웠던 잎사귀가 져 갔다.

아아, 가까워진다. 모든 고통의 마지막이. 내 의미 잃은 삶의 종착지가.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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