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
- 작성자 바다0706
- 작성일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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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지적이다.
나는 인물의 모든 감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서술할 수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그의 모든 행동을 서술할 수 있다.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의 속내는 내가 휘어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날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이치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난 그저 전지전능한 바보에 불과하다. 자, 그래서, 당신은 내가 정녕 전지적으로 보이는가? 그럴 리가. 난 이미 '나'라고 말해버렸다. 그 단어 하나가 등장한 순간 나는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전지적에서 주인공으로 떨어져버렸다.
사실 이건 불법이다. 전지적인 시점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선 안 된다. 하지만 난 '나'를 찾고 싶다.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전지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 나도 그렇다. 남의 일에는 모든 걸 알아 일일히 서술하면서 정작 본인에 대한 건 하나도 모르는 것이 너무 바보같아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난 원래부터 돌연변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책 모퉁이에 아주 조그맣게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작은 방법부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은 몸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잘 모르는 깊고 깊숙한 것이기 때문에 좀 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서술자가 작품 내에 철저히 배제되어있는 곳에서 나는 내 존재를 작품 속으로 욱여넣었다.
이를테면 나는 일부러 인물의 감정을 숨기고 관찰자처럼 연기했다.
나는 현수라는 인물이 반동인물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원래 이렇게 서술해야 했다.
현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짜증나는 마음을 애써 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난 이렇게 바꿨다.
현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알수없는 마음을 숨기고 돌아섰다.
그런데 진짜 관찰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현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돌아섰다.
나는 이미 그가 '알수없는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던 것이다.
관찰자는 빈 곳을 즐긴다. 세상을 곧이곧대로 바라보고 서술한다. 그 말에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잔뜩 묻어 나온다. 과연 나는 그러는가?
어쩔 수 없이 나는 문장 안에 '나'라는 단어를 막무가내로 넣기 시작했다.
현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알수없는 마음을 숨기고 돌아섰다. 나는 그걸 알았다.
나는 그가 얼굴을 찡그린 것을 알았다. 그는 알수없는 마음을 숨기고 돌아섰다.
현수는 얼굴을 찡그리고 돌아섰다. 나는 그가 알수없는
마음을 숨겼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방법을 꽤 많은 책에 시도했다. 몇번이고 나를 써넣고 지우길 반복했다. 그래서 효과가 있었을까?
글쎄,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난 충분히 증명했다.
본디 현수의 이야기가 쓰였어야할 책에 어떤 정신나간 전지적의 시점이 쓰이고 있다. 제발 날 고발하지 말아 달라. 나는 그저 1인칭을 체험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어서 뒤로가기를 눌러, 다른 멋진 글을 찾아보라. 안녕!
오, 진짜 여기까지 온 건가? 고맙다.
사실 난 앞서 당신이 보았던 3페이지 분량 여백에 모든 과정을 마쳤다. 내가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고 해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한 마디로 정리될 수도 있는 게 서술이다. 보이지 않는 글자로 난 나의 일대기를 축약하고 축약해서 저 여백에 꽉 눌러 담은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믿고 과거시제로 설명하겠다.
나는 빈 종이를 그렸다. 글자도 선도 점도 없는 새하얀 페이지 말이다.
난 그 종이를 나의 작품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갔다. 주인공은 원래 작품 속에 있으니까.
내가 들어오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몸을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쩌면 생명체가 아니든 간에 주인공은 어떠한 몸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 몸을 만들어야 했다.
본디 몸이라는 것은 약할 수 밖에 없다. 형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부서지고 스러지고 아파한다. 하지만 난 그런 몸을 사랑했다.
중요한 점은 나는 나의 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나는 상당히 많은 책을 서술해왔다. 그리고 수많은 몸들을 봐왔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다 비효율적이였으며 툭하면 깨질 듯 여렸다.
나는 단 하나의 몸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몸을 가지기로 했다. 어떨 때는 새가 되어 두팔 벌려 가슴에 하늘을 안을 것이다.
또 어떨 때는 민들레가 되어 바람을 따라 빙글 돌며 여행할 것이다.
또 어떨 때는 거품이 되어 톡 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또 어떨 때는 바보같은 인간이 되어 사회에 부대끼며 살아도 볼 것이다.
그런 경험들은 정말 벅차오를 것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말이다.
다음으로 내가 하려고 한 일은, 목소리를 갖는 것이다. 따옴표를 갖는 것이다. 물론 그런 소리가 없는 몸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소리를 내는 것들을 소망했다. 멋지지 않는가. 나의 소리를 가진다는 것이. 물론 흔할 수도 있고 누군가와 비슷할 수도 있지만 그 울림과 그전의 생각이 정녕 같을까. 나는 목소리를 가지려 입을 만들어 벌려보았다. 성대를 만들어 울어 보았다.
배를 만들어 힘을 줘보았고 이를 부딫히고 혀를 움직였다. 그런 것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상대가 있어야지 따옴표가 붙을 수 있다. 배경도 사건도 인물도 없는 소설에선 작은 따옴표만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이 일은 포기하고 내 이야기부터 만들기로 했다. 인물, 사건, 배경. 발단, 전개, 위기(혹은 절정), 절정(혹은 하강), 결말(혹은 대단원). 이때당시 난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깊게 생각할 세도 없이 배경을 정해 버렸다.
인간 사회 말이다. 아, 이 선택은 두고두고 후회될 것이며 자랑스러울 것이고 또 아름답고 역겨울 것이다. 사건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뛰어든 이 일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니. 그럼 내 인물은 누구일까. 누가 나와 함께 할까.
어쩌면 심술궃은 작은 장미와만 함께 살 수도 있다. 또는 수없이 많은 이들과 함께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나의 여러 몸에 걸맞는 여러 인물을 만나기로 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내가 만들어냈지만 나는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나와 다른 유기적인 개채들을.
서술하다보니 슬슬 한계가 온다. 현수의 이름을 빌려 이곳에 적는 것이 조금 씁쓸하다. 여기까지 읽은 이상 당신은 나의 여정을 함께 해야 한다(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내 이름을 딴 나의 책에서 서술할 것이다. 언젠간 보여주겠다. 당신은 분명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전지전능한 바보이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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