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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과 단두대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06
  • 조회수 291

 나는 어쩐지 소슬한 바람에 잠을 깼다. 몸 아래로 기어가듯 나를 타고 올라오는 날카로운 한기, 고요 속에 울부짖는 쇳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이윽고 눈을 가늘게 떠 여전히 어떤 보이지 읺는 바다이자 무한히 멀리 있어 걷을 수 없는 장막인 어둠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아직 온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희망의 표시가 아니었다. 

 희망과 절망은 사실 같은 것이다. 어느 때는 희망이 곧 절망이고, 절망이 곧 희망이다. 상황이 불러오는 희망은 곧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말한다. 절망은 곧 자신이 희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말한다. 같은 상황에 느껴지는 양가적인 감정은 그저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희망과 절망은 어떠한 감정의 발출이 아니라 감정의 근원이자 상황 그 자체이다. 나는 그걸 이곳에서 배웠다.

썩은 붕대를 풀고 구더기가 들끓는 상처를 내려보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죽은 구더기를 움켜쥐고 입에 넣었다. 구더기의 시체에서는 씁쓸한 절망의 맛이 났다. 

그러나 말했듯이 절망은 곧 희망이라서, 구더기의 시체는 나에게 생존의 희망이 되었다. 적어도 하루를 더 살아갈 수 있도록, 나의 절망은 나의 양분이 되어 나의 희망이 되고 나의 내일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잠시 앞뒤를 더듬었다. 들어온지 한참 되었건만, 아직도 이곳의 구조는 익숙치 않다. 가장 오른쪽의 돌로 된 까슬까슬한 벽에 닿았다. 한 손을 짚고 벽에 최대한 붙어 걸었다. 그대로 한참을 걸으면 삼각형으로 툭 튀어나온 벽이 있는데, 그 곳을 돌아 이번엔 왼쪽으로 알 수 없는 거리를  걷다 보면 화장실이 있다. 이상하게도 왼쪽으로 돌았을 때는 화장실에 닿지 못했다. 이 기이한 구조는 나에게 온갖 상상을 하게 했지만 결국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다만 이것을 알아보며 이곳이 무지막지하게 넓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배에서 배설물을 밀어내며 이곳을 나가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한 명의 수감자에게 주어질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은 나를 불안하게 했고, 어떠한 알 수 없는 강렬한 감정에 나를 들끓게 했다. 아마 그것은 갇혀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갑갑함과 지나치게 넓은 감방에서 오는 두려움이 혼합되어 혼란스러움과 함께 배출되는, 어떤 공포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감정이란 것은 오묘하고 기이해서, 감정은 행복, 놀라움, 기쁨, 두려움 따위로 이름 붙일 수 없으며 순간적인 그 상태에 따라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며 그것은 일순간에도 수없이 운동해 제 모습을 바꾼다.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내부에서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비현실적이며 파괴할 수 없는 물체일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발산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배설이다. 그것은 제멋대로 만들어져 나를 더럽히고 사라진다.

 화장실을 떠나 같은 길을 지나며 나는 그 방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다. 나에게 있어 이 구조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었다.


...



이곳에 오기 전, 나는 혁명을 이끌었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역인 그것은 그야말로 모순적이었고, 나와 나의 사람들은 그런 사회에 반하고자 했다. 우리는 모순을 알리고자 나섰고, 실패했다. 썩은 사회의 개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려고 했다. 뻔한 이야기였다.

나의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사상을 믿어 주었다. 언제나 농담을 던지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던 일등 항해사와 허허롭게 웃던 농부,  든든한 얼굴로 우리를 보던 소방관, 자애롭게 모든 이들을 보듬던 집행관... 그들이 나의 사람들이었고 또한 그 일부였다. 나의 사람 중 일등 항해사는 그 직업처럼 모두의 항해를 이끌었다. 어떤 어려운 파도도 그는 웃으며 넘겨 버렸다.

한 번은 궁에 불을 지르고도 도망친 적이 있다. 궁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사흘이 흐르고, 또 잠입해 숨는 데도 사 일, 마침내 불을 제루고 도망가는 데에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우리는 웃음울 잃지 않았고 여타의 혁명처럼 엄숙하지 않았다. 절대 웃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우리는 푸른 모자를 쓴 일등 항해사의 농담을 들으며 웃었다. 마치 불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혁명에 웃음을 더했고 모든 것에서 순수함을 추구했다. 우리의 길은 어두웠지만 밝았고 먼 길의 끝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웃울 수 있었다.

혁명에 실패해 반역도가 된 뒤, 나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잘 도망쳤기를 바랐다. 나는 방이 갇혀 모든 것을 불라며 고문을 당했다. 쉼 없이. 

손톱이 뽑힐 땐 나의 손톱처럼 사라져간 무수한 동포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잃었을 때 우리는 멈추지 않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고통도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쇠가 몸을 지질 때, 나는 고문을 버티던 동포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위대했던 뜻은 이렇게 나로써 사라져 버렸다.

고문을 받으며 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는지, 나의 고문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우리의 노력을 무엇을 해 내었는지. 나느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한 번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과 이곳에 있다는 절망이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 둘은 하나였고 다른 방향만을 가지고 있었다. 내 희망과 절망은 그때부터 서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처넣어질 때, 나는 사실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른다. 기절한 상태에서 포대를 쓴 채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식량은 계속 배급되었는데, 그것 또한 내게 알 수 없는 점이었다. 내 추측으로는 나를 일시적으로 기절시킨 뒤에 음식을 넣거나, 아니면 정말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분명했다. 천장은 아무리 돌을 던져도 닿지 않을 정도로 높았기에 가능성이 적었다. 한 명의 수감자를 위해 밧줄을 수백 미터 타고 내려오는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원래의 자리에 돌아와 이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깔린 어둠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제자리에만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바뀌는 것은 없었고, 짜증스러울 정도로 변화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어둠에 질려 나는 이곳을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전부터 말이다.

내게 시간을 알 방법따윈 없었다. 다만 내가 자는 시간을 고려해 대략적으로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일주일 전이라고 생각한 그 날은 삼 일 전일 수도 있었고 이틀 전일 수도 있었다.

몇 번이나 오름쪽으로 진출해 아무것도 찾지 못한 뒤, 나는 이번엔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앙은 너무도 광활해서 내가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이 적었다. 방향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내 자리에 작은 돌멩이들을 모아 놓았고, 그곳에서 나는 움직이지 않으며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다시금 왼쪽으로 긴 길을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화장실 뿐만 아니라 익숙한 이끼도 없었다.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그것은 왼쪽 길로 갔을 땨 그려지는 사각형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길 표시용 돌멩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부턴 구상했던 이 계획은 중앙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처럼 돌을 길 삼아 중앙에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돌 모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리에 돌아와 마법처럼 놓여 있는 음식을 먹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딱딱한 빵이었다. 배가 고팠던 나는 순식간에 빵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잠을 청하기 위해 누웠다.

이곳은 언제나 잠을 자라는 듯이 새카맣게 어두웠고 시간도 알 수 없어서, 나는 내키는 때마다 잤다. 하루의 대부분을 걷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피로감도 컸다. 화장실로 가는 길은 그만큼이나 길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아무데서나 변을 보곤 했다. 내가 점점 인간 이하의 어떤 것으로 퇴화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언제나 회의감과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에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인간 이하의 무엇으로 퇴화시키기 위해, 화장실이라는 수단이 있어도 쓰지 못하게 만들어 나를 조롱한 것이지 않을까?

다음 날이 되어 나는 중앙으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십 미터 정도마다 돌울 하나씩 던졌고, 가는 길에 널부러진 돌들은 일부러 치우거나 손에 들었다. 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길은 직선적이었고 어느 때보다 나의 발걸음은 빨랐다. 드디어 이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새로운 자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이 길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몇 달의 감방 생활 중 내게 다가온 몇 안 되는 자극일 뿐더러 언제나 나에게 공포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늘 벌레와 쥐들이 기어 나왔고 고약한 악취가 났다. 분명 나뿐일 텐데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해 준비된 함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게 위협은 없었고, 내가 중앙으로 향하게 할 어떤 수단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설령 함정일지라도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마침내 어딘가에 도달했을 때, 나는 무언가에 쿵 부딪혔다. 처음 느꼈을 때 나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약한 악취가 풍겨 왔지만, 그런 사실을 내가 무시하게 만들 정도로 얼기설기 쌓여 장작 같은 형태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둥그런 무언가를 만지기 전까지였다. 그 장작에서는 소름돋는 감각이 전해져 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질척거리는 덩어리와 진흙 같은 것들이 묻어 있었고 표면에만 물기를 가지고 있었다. 

순간 든 생각에 나는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함정이었던가? 나에게 호기심과 답답함울 부여해 어디로든 나아가게 하려고 만든 의도였던가? 이것이 반역자에 주어진 마지막 말로인 것인가? 아니라면 어떤 분노의 발로일 것인가?

다시 일어나 만져 보니 그것은 단단하고 길쭉하며 끝은 동그랗고 여러 개가 뭉쳐 있어서 마치..... 마치... 뼈처럼 느껴졌다. 손울 뻗어 보니 그런 뼈들이 높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높게, 그리고 넓은 반경에 걸쳐 놓여 있었다. 

순간 내 몸이 굳었다. 거대한 뼈무덤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하늘이 그대로 열려 버린 것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빛이 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나의 약해진 눈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했다. 

저 빛은 뭐지?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인가? 아니라면 나에게 공포를 주려는 어떤 의도인가? 그렇다면 하늘은 왜 이제서야 열리는가? 설마...

눈이 보이기 시작하고서야 뼈무덤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뼈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훑기 시작했다. 나의 예측이 틀리도록.

거대한 뼈무덤을 이루는 해골들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파란색 모자를 쓰고 있는...그 뼈는 일등 항해사의 것이었다.

순간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눈으로 모든 뼈를 훑었다. 나를 위하던 농부, 집행관, 일등 항해사, 선원.... 모두 내 사람이었다. 내 사람들이 죽어 내 수감처를 떠받치고 있었다.

슬픔을 넘어선 어떤 감정의 폭발과 함께 토가 쏟아져 나왔다. 스스로 머리가 바닥을 향하고 팔다리가 무력하게 꿈틀거렸다. 눈이 또다시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느리게 느껴졌다. 몸의 괴로움을 떨쳐 내려는 움찔거림이 수백 초 동안 이어졌다. 눈 앞을 가리는 눈물이 모든 것을 가리고 마치 나뿐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그것에는 깊은 슬픔과 고통과 답답함과 공포의 집합체가 있을 뿐이었다.

시뻘개진 눈에 군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묶어 이 김방에 던진 그들이었다.그들은 분명히 저 하늘에서 내려왔다. 정말로 모든 사회의 산물들이 내 위에 있었단 말인가?

군화들은 나를 이끌었다. 내거 어떻게 옮겨졌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생각했다. 이 감방은 나를 위해 준비한 엄벌의 표상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감방과 고체처럼 방을 꽉 메워 오든 것에 얽매이는 어둠. 알 수 없는 구조와 형태와 존재가 나를 구속하고, 모든 것들이 나의 자유를 막았다. 그들은 나를 퇴화시키며 나의 혁명은 퇴화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그 탐험의 마지막 결과는 죽음이었다. 고문을 당한 듯 피투성이던 일등 항해사의 모자와 뼈가 기억났다. 내가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지금, 나는 처형대에 목을 올리고 있었다. 사회에 대항해 나아가고자 한 자들위 이상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느끼며. 다시없을 후회가 내 몸을 덮쳐 이미 온 사지를 잠식하고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운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사형 집행인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로 구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치 어떤 무기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어떤 덩어리처럼, 거기엔 의도와 감정 따윈 없었다. 

문득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모든 것에 의도가 있었다. 내 감방의 형태와 뼈무덤, 화장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내려오는 빵.. 그렇다면 우리가 의도를 가지지 못할 것은 없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일등 항해서의 손 모양. 그는.. 엄지를 올리고 있었다.

처형인이 그제야 단두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미소가 사라지고, 이윽고 천천히, 또 천천히.

칼날이 내려왔다.

...


그리고 빛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다시 깨달았다. 일등 항해사가 나에게 알리고 있었다. 우리가 이겼노라고.

그들은 나를 위해,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수많은 반역도들을 위해 거대한 감방을 지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우리는 이끈 것은 위대한 사상이었고, 우리는 움직인 것은 빵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현실을 제한했을 뿐 나의 사상은 전혀 막지 못했다. 사회의 강대한 힘조차도 우리를 멋대로 바꾸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범위에서 배제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결코 무시하고 짓밟을 수 없었고, 그저 밀어내어 닿지 못하게 할 힘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사회보다도 강했다. 그랬지만 사회는 어떤 뜻도 이해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우리의 위대한 뜻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언제까지나 남아 이 사회를 결국 변화시킬 것임을. 

그들은 우매했고 이 거악에 대항해 마침내 고결한 죽음을 맞은 우리는.

승리했다. 그들에게 지워지지 못할 상처를 남김으로써.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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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7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오드아이의 인형

인형그 아이는 두 눈의 색이 달랐다. 한쪽 눈은 바다 같은 푸른색, 한 쪽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검은색. 그 아이는, 한 마디로, 음, 기괴할 만큼 아름다웠다.그의 이목구비는 사람의 그것 같지 않았다. 오밀조밀하게 인형처럼 생겨서는 곱슬거리는 머리칼로 그런 분위기를 더했다. 그의 희고 가는 손목과 발목의 관절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그 뼈의 존재를 부드럽게 부각시켰다. 기다란 다리와 큰 키 키, 섬세하고 여린 손까지. 그는 정말 작은 인형 같았다.그래서 그 아이가 전학을 왔을 때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 소년은 무생물처럼 조용히 서서는 선생님의 재촉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휙!그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크게 움직였다. 그 커다란 오드아이의 움직임에 반의 모든 아이들은 움찔, 놀라고 말았다. 그 눈은 반 전체를 훑더니 자신의 자릴 찾았다. 소년은 그렇게 이름도 밝히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내 대각선 오른쪽 앞자리였다.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뒤통수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왠지 그것은 섬찟해서 갑자기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돌아볼 것 같은, 공포게임에 나올 것 같은 뒤통수였다. 아주 불편했다.그때 선생님이 말했다.“자, 우리 친구는 이번에 전학 온 정희연이야. 남자아이고, 그림 그리기를 잘한다더구나. 모두 잘 대해 주렴.”반 전체의 분위기는 그 아이에게 쏠려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1 교시가 지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반 밖으로 휙휙 빠져나가서 옹기종기 모였다.“야, 쟤 봤어? 진짜 잘생겼어.”“근데 왠지 좀 무섭지 않아? 시발, 나 그 눈동자 움직일 때 지릴 뻔했어. 거의 공겜 수준임.”“그렇긴 하더라. 야, 너 걔 옆자리지? 고생 좀 하겠다. 이상한 애가 와서.”“그러게 말이야, 망한거 같음…”나는 아이들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결심을 내리고 반 안으로 들어갔다. 눈동자들이 내게 쏠렸다. 나는 곧장 그 아이에게 걸어가 말을 걸어 버렸다. 나는 좀 거침없는 기질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했는데, 이건 나도 전혀 예상 못한 충동이었다.“안녕, 희연아? 나는 김연희라고 해. 우리 이름도 비슷한데, 친하게 지낼래?”얼핏 보니 아이들은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 입으로 미쳤냐고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그걸 무시하고 희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그림 그리는 거 좋아한다며? 나도 좋아해. 2교시 미술인데 같이 할래?”그 아이는 물끄러미 연희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좋아하지 않아. 잘 할 뿐이야.”당당한 자기자랑에 조금 놀랐지만 연희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그럼 같이 하는 거다?”“…그래.”그렇게 약속이 성사되었다. 그제야 연희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것이 설렘인지 공포인지 무언인지 알 수가 없었다.반 밖으로 나오자 말들이 쏟아졌다.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미술실로 향했다.2교시 미술 시간. 나는 미친 것을 보았다.다빈치의 환생이 여기 있었다. 그것도 인형 같은 외모로. 나는 그가 도저히 나와 같은, 소리치면 놀라고 때리

  • 김희수
  •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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