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에서 기록하는,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고 (퇴고)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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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 속의 마음들은 흘러가지 않고 고인다. 기록함으로써.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 알맞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휘몰아치며. 이런 기분들은 마치 우리가 급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은 우리의 골조이자 연료가 되어준다. 한 사람이 믿고 행동하며 내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뼈대이자 동시에 원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급류, 휘청이다가 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마음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지닌 마음이 시간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어린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적어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지나가며 휙, 휙 바뀌는 기분과 감각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새겨둔 순간의 감각, 그리고 기분 위로 마음이 ‘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나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떠나지 않는 그런 마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기왕이면 문학의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바로 진은영 시인이 있었다. 초등학생일 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마음의 물성이니 고이고 흐르니 그런 사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슬픔과 사랑이라는, 흔하기도 하며 나와 친숙한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지? 나 또한 그런 시인이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많은 계절을,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꼭 쥔 채 건너왔다. 그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굳게 먹은 그, 열셋 겨울의 결심,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시인이라는 꿈을 안고서 뛰어든 험한 급류에 서 있을 때.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신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집으로!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몇 번이고 읽었고, 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시집 중에선 표지를 닮아 유연하게, 그리고 분홍빛으로 흘러가는 시집 『훔쳐 가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그 『훔쳐 가는 노래』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집이 바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이토록 진은영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지, 또 이 시집을 읽고 그렇게 감명받았는지, 나의 마음들을 기록하려 한다. 다름 아닌 감상문, ‘문학의 방법으로.’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물 위를 떠도’는 (「사랑의 전문가」) 기분을 맛보았다. 수중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나는 이 시집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 우리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하루, 계절 속에 있다. 그러나 잠시만 ‘문학의 방법으로’ 멈추어 서서 고여 본다. 그렇게 우리가 흘려보낼 뻔했던 시간과 기억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음은 우리의 심장에 천천히 고이고. 나는 이런 모든 과정을 압축하여 ‘수중’을 배경으로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저 시간에 발목을 담근 채 멍하니 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서 있던 시간들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는 시간.
‘가을은 독을 삼킨 로미오처럼 기어’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사랑의 신은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닳은 얼굴을 하고서 내게 오’지만 (「파울 클레의 관찰 일기」) 그럼에도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니. 표제작 「청혼」은 ‘사랑’으로 피어나 ‘슬픔’으로 끝나듯, 사랑과 슬픔은 샴쌍둥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가지의 마음 중에서도 사랑과 슬픔이 나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줄곧 믿어 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요소가 기억의 ‘섬’으로서 존재한다. 이를테면 가족의 섬, 하키의 섬.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나에게 만약 섬이 있다면 ‘연인의 섬’과 ‘문학의 섬’은 꼭 존재할 거라고 믿는다. 나의 연인들, 나의 문학 작품들. 그건 내가 흩어지지 않고서, 모든 걸 그만두지 않고 비로소 살아 있도록 한 요소들이다. 그런 요소들의 섬을 지을 때면, 아마 사랑과 슬픔을 주된 재료로 삼아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므로 슬퍼했고, 슬퍼하므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더는 연인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에 나는 슬퍼했고, 그런 슬픈 마음을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사랑으로 채워 나갔다. 그래, 그렇게. 사랑과 슬픔은 줄곧 연결되어 있다. 슬픔이 내 옆구리에 붙어 있어도 내게 사랑이 있음을 알고 맹세를 속삭이는 사랑의 달인, 나는 언제나 진은영 시인을 사랑의 달인으로 불러왔다. 표제작부터 시작해 ‘사랑의 전문가’라는 시가 등장하듯, 그런 나의 믿음이 이번 시집을 읽는 동안 인정을 받은 듯 해 기쁘기도 했다.
시집 속의 시 중 가장 나의 깊은 곳까지 다가와, 오랫동안 내게 머물렀던 시는 바로 「청혼」이다. 내가 앞서 언급한 표제작 말이다. 이 시집을 펼친 이상, 「청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이 시는 말 그대로 물속에서 속삭이는 고백 같다.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주’겠다 하는 문장들. ‘슬픔’은 ‘투명한 유리 조각’처럼 널려 있고 또 우리가 쉽게 마주하는 정물인 ‘물컵’에 담겨 있다. 이렇게 슬픔이 옷을 흠뻑 물들이는 수 있는 거리에서 사랑을 노래하다니. 마치 슬픔이 비처럼 내리는 거리에서 우산은 ‘너’에게 내어준 채 오직 ‘청혼’에만 집중하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노래는 거품처럼, 물방울처럼 뭉쳐지고 흩어지며 ‘너’의 방향으로 흐른다. 시적 화자의 속삭임은 하나의 소용돌이가 되어 파도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자연스레 가닿은 고백은 ‘너’만이 아닌 독자인 우리의 살갗까지 간지럽히는데. 이 간지러움, 꽤 기분이 좋다. 우리 또한 물속 극장에 들어온 것처럼 먹먹해지기도 하고, 볼이 눅눅해지기도 한다. 이건 곰팡내 나도록 습기 높은 시간이 아니라, 덜 마른 빨래처럼 촉촉하고도 젖어 있는. 그런 물기가 살아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진은영 시인의 시를 논하려면 매력적인 비유를 빠뜨릴 수 없는데, 과연 어느 시인이 너를 ‘오래된 거리처럼’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이 비유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아주 낯선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인 장소로써 비유함에 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쯤은 ‘오래된 거리’를 지나칠 수 있겠다. 이렇게 우리와 가까운 공간이지만, 사실 이곳에는 수많은 유년이 고여 있고 그 유년들은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릴 것이다.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공간을 잡아내어 서정적인 비유로 사용한 점이, 나는 무척이나 애틋하게 느껴졌다. 또한 청혼이라는 짧은 시 속에서는 여러 번의 비유가 등장하는데, 나는 그중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에 가장 집중하였다. 여름이라는 계절의 특성을 가지고 ‘너’와 화자가 함께 보낸 계절에 활기를 불어넣다니. 이렇게 낭만적인 표현이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이어서 「사랑의 전문가」의 비유도 살펴보자면, 나는 바다이자 기름의 일종이라는 은유가 등장한다. 은유는 직유보다 사용하기 어렵지만 한 번 제대로 사용하면 그 빛이 폭발적으로 발산할 수 있다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진은영 시인의 은유는 폭발하다 못해 활자로부터 튀어 올라 내게로 다가온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하는 이미지가 등장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고 고백한다. 이 모든 문장들이 모여 ‘나는 바다의 일종’이자 ‘나는 기름의 일종’이라는 낯선 은유을 독자들에게 설득시킨다. 모든 시가 논리적일 필요는 없지만, 시인은 던져둔 문장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진은영 시인은 낯설고 아름다운 비유를 던지는데 그치지 않고, 사랑스러운 시적 서사와 ‘사랑의 전문가’다운 고백들로 비유를 짊어지고 간다.
한편 진은영 시인은 비유에만 능한 것이 아니다. 나는 시가 이미지와 리듬을 각각 한 손에 쥔 채 균형을 잡으며 나아가는 장르라고 믿는다. 진은영 시인은 이미지의 전문가이기도 한데, 가령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의 경우에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녹색광선』을 떠올리게끔 한다. ‘무한한 녹색 심장을 찌를 수 있다’는 진술로 시작되는 시는, ‘빛나는 여름’을 그려내지만 ‘하나의 영원에서 다른 영원으로 날아가는 붉은 단도처럼’ 날카롭다. 이는 여름을 그려내고 있지만 어쩐지 겨울의 기후에 더욱 어울리는 『녹색광선』과 닮아있다. 예민하고 약간은 우울한 영화 속 주인공 델핀은 여행을 통해 자그마한 감정들을 발견한다. 이처럼 진은영 시인의 시도 ‘그 잎 하나를/ 가만히 쥐어보는 동안에’ 발견되는 작으면서도 선명한 감정들을 그려낸다. 시 곳곳에 배치된 ‘가을’이라는 시어가 같은 감독의 『가을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텍스트 예술에서 영상 예술을 바로 떠올릴 수 있다는 건, 놀라운 경험이다. 한편으로는 「파울 클레의 관찰 일기」처럼 미술가를 바로 데려오는 시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고통과 절망의 ‘색채’를 가지고서 ‘슬픔이 소녀들의 가슴을 파내’는 이미지를 그려내고 ‘그들이 절망을 한쪽 가슴으로 삼아 노래를 쏘아 올리는 것’ 또한 그려내다니, ‘슬픔으로 얼룩진’ 이 시를 보면 나 또한 밀려오는 슬픔과의 ‘경쟁에선 번번이 패배’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도 독자를 단번에 설득하는 비유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진은영 시인을 존경하는 마음에 그치지 않고, 나 또한 독자적인 비유로 시를 직조하고 싶다는 열정이 생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는 좋은 문학이란 다른 문인의 사유를 촉진하여 창작 욕구를 일으키는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기준에서 이 시집은, 내게 굉장히 좋은 시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집 곳곳에 차오른 이미지를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리듬을 보아야 할 때겠지. 이는 지정된 시 중 「한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날 이후」에서 두드러진다. 『훔쳐 가는 노래』에서 ‘청춘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청춘이 끝난 뒤에도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어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는 거/ 나무들, 나무들의/ 회색 밑동 아래로 슬픔의 기름이 흐른다는 것’ (「지난해의 비밀」)을 노래하던 시인답게, 말하듯 전개하는 시 속에서 리듬이 느껴진다. 두 시 중 「한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실존하는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쓰였다. 더불어 구체적인 이름들이 시 속에서 언급되는 걸 보아 적어도 화자가 받는 이를 마음에 두고 썼을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시 속의 리듬은 산뜻하고 간결하다. 반복으로 인해 어떤 잔잔한 파도가 우리에게 물결치듯 다가오는 것처럼 만드는데, 이는 다소 슬픈 내용을 중화시키고 감정 과잉을 막으며 우리에게 더욱 담담하고 아름답게 시가 다가오도록 한다. 나는 어떻게 이미지와 리듬 속에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평소 산문시를 쓰며 문장이 끊어지고 이어지는 호흡에만 신경을 쓰고, 이미지에 비해 다소 리듬을 잊곤 했다. 그러나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정말로 내가 무엇을 쓰고 싶어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꼭, 이미지만이 아니라 리듬과 호흡을 잘 활용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 느꼈다. 지면을 꽉 채우는 ‘박스형 산문시’만이 아니라 중간중간 정형시의 형태를 차용하여 리듬과 호흡을 살리는, 그런 시를 써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날 이후」는 모든 독자가 알 법한 ‘그날’, 돌아오지 못하는 수학여행 이후를 시적 배경으로 삼는다. 나는 이 시가 무척 기억에 남았다. 특정 사건을 모티프로 한 시일 뿐만 아니라, ‘미안’과 ‘있어’로 끝나는 문장들이 마음을 연속해서 노크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츠만 입게 해서 미안’ 같은 문장들. 부모를 잃은 아이를 칭하는 단어는 있으나 아이를 잃은 부모를 칭하는 단어가 없는 이유는 감히 그 슬픔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처럼 우리는 시 속에서 함부로 파헤칠 수 없는 슬픔을 마주하는데, 이 슬픔이 물처럼 천천히 우리에게 걸어와 심장 속으로 스며든다. 그런 물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끝나는 시를 마주한다.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국어 선생님도 있어’. 어느 참사에만 특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재난의 피해자는 여전히 ‘있고’ 그런 그들을 우리가 계속해서 기억해야 함을 떠올리게끔 한다. 나는 이곳에서 사랑을 읽어냈는데, 성애적인 사랑이 아닌 인간을 들여다볼 줄 아는 마음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 타인을 불순물이 끼지 않은 맑고 밝은 눈으로 깊게 바라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같은 슬픔을 나누어 가지고 애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건에 대하여 과연 글을 쓰는 것이 맞느냐 묻는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괜찮을 것이라 답하고 싶다. 그것이 부정적인 의도가 아니라, 진은영 시인과 같이, 「그날 이후」가 쓰인 것과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슬픔을 사랑으로 쓰다듬는 글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쓰일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나도 진은영 시인처럼 용기를 내어, 이러한 느낌의 시들도 써보고 싶다. 시인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아름다운 언어로, 용기 있게 앞장서 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걸 시집을 읽으며 깨달았다.
나는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시인의 꿈을 키웠고,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으며 내가 왜 그런 꿈을 키웠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를 향해, 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니. 나는 급류에 서서 한창 내가 시를 쓰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시를 쓰며 보내는 시간은 너무나도 괴로웠고, 비유하자면 흘러가는 시간이 나의 발목을 따끔하게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집을 읽으며, 그래. 나는 이런 마음들로부터 태어났지. 이런 마음을 위해 시를 쓰고 싶었던 것 같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리고 괴로워하며 고민했던 소재의 당사자성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수중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지금의 나는 어디서 무슨 기록을 하는 중일까? 얼마 전 나는 나의 팬으로부터 나의 시-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주문 제작한 향수를 받았다. 그 향수는 새콤하면서도 시큼한 레몬 향을 기반으로 하여, 물비린내가 살짝 나는 향을 지니고 있다. 확실히 나도 생이라는, 물 같은 흐름을 활자로써 기록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마음속 상처마다 고여 있는 슬픔과 사랑, 나는 그런 걸 시로써 나타내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그건 우리를 때로는 좌절하게 하지만 내일로 나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 마음이다. 진은영 시인의 아름다운 시처럼. 시집의 마지막 시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의 마지막 문장, ‘멈추는 것들은 대개 그렇듯, 슬프거든’. 나는 그렇게 시를 쓸 것이다. 모두가 정신없이 앞으로, 또 위로 달려가는 오늘날에.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시를 쓸 테다. 나는 대개 슬퍼하므로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슬퍼하므로. 그런 마음들을 기록하며, 나처럼 어느 아이가 나의 시를 보고 시에 푹 빠지게 되길 바란다. 내가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그랬던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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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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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모코
- 2024-05-28
연말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끝이 세상에 있을까. 연말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반짝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늘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랑이 과거형이 되었건 현재 진행형이 되었건, 어쩌면 사랑하고 싶다는 미래형이 되었건. 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생각해 보며 내가 걸어왔던 길을 더듬어본다. 나는 줄곧 아주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왔다고 믿어왔으나 나와 함께했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그 길은 결코 험하거나 나만이 걷는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절망이나 후회보다는 감사와 사랑을 채집하는 시기가 바로 연말일 테다. 나는 올해 열 통이 조금 넘는 편지를 썼고 스무 명이 있는 동아리에서 롤링 페이퍼를 하였고, 내게 문학만이 아니라 올곧은 생의 태도를 알려주신 선생님들께 엽서를 썼고. 사랑하는 Y에게 나의 사랑이 당신에게 어쩌면 짐이 될 걸 알아서 미안하다는 말 또한 했고. 그렇게 온갖 곳에 내가 받았던 마음을 다시 돌려주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기 길을 걷고 있는, 내 앞의 아저씨도 올해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했을지 모른다. 방금 지나온 유치원 버스의 아이들은 또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았을까.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각자가 꾸려내는 생의 주인공이자, 화자이며, 히어로와 히로인이다. 나는 그런 개인을 움직이는 힘이 분노나 질투보다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사실이지만, 올해 내가 미워하는 아이가 1지망 대학을 떨어졌을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기적과 같이 정시 최초 합격에 성공하자 눈물이 났던 것을 보면. 확실히 사랑이 결국 이기는 것 아닌가 싶었고. 우리는 모두 각자 그런 사랑을 마음에 지닌 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사랑, 사랑,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일 년의 마지막 페이지. 나는 이 시기에 유난히 장수양 시인의 시집과 싱어송라이터 미츠키의 노래를 반복해서 찾게 된다. 그들의 작품은 장수양 시인과 미츠키가 어떤 사랑을 해왔을지 궁금해질 정도로, 사랑스럽고 또 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나는 영화와 시를 사랑하지만, 이 두 가지의 예술은 동시에 읽어낼 수 없다. 서안나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프레임을 겹쳐 보거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보며 백은선 시인의 시편을 떠올렸던 것처럼 이미 내가 한 번 씹어 넘겨서 소화한 적 있는 작품을 겹쳐 보는 일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과 노래는 다르다. 두 가지의 예술은 동시에 재생할 수 있는데, 나는 그 두 가지의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녹아내리는 순간을 정말이지 사랑한다. 그 녹아내린 작품들은 나의 마음속, 한층 더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어떠한 예술 작품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 마음에 품을 수 있다는 일이라니. 이토록 기쁠 수 없다. 사실 사랑 시를 쓰는 내가 늘 고민하는 지점이 ‘세상에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일 정도로, 이미 멋진 사랑시와 사랑 노래는 넘쳐난다.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 모모코
- 2023-12-3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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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실 어제 글을 저의 '비평과 감상' 게시판의 마지막 투고 글로 두고 싶었어요. (절필을 하는 건 아니고, 저는 나이 탓에 내년부터 글틴에 올 수 없거든요. 글은 정말 죽을 때까지 쓰고 싶어요 후후후) 그런데 어제 남겨주신 멘토님의 댓글을 읽고, 또 대댓글을 다는 동안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응원의 마음을 보내 주셨는데, 제가 정말이지 부족한 글을 올렸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고민하다 제가 멘토님께 처음으로 보여드렸던, 그리고 이 게시판의 활동 계기가 되어준 진은영 시인의 시집 감상글을 퇴고하여 올려 보아요. 수필 게시판에도 연말 보고서를 올리며 한 말인데, 이걸 올림으로써 제 이십 대를 잘 보내겠다는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려고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표현하는 게 참 어렵네요. 그냥 늘 제 글 읽어주시는 몇몇의 글티너분들, 그리고 무엇보다 김태선 멘토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다들 2024년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