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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무한하게 확장되는 순간을 포착하며 - 시집 '오트 쿠튀르'를 읽고

  • 작성자 파르페
  • 작성일 2022-12-25
  • 조회수 711

이지아 시인의 이 첫 번째 시집 <오트 쿠튀르>에 실린 시편들은 여태까지 축적되어왔던 ‘시’의 이미지를 완전히 부수고 파괴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형식을 한 시 대신 새로운 시를 창조해내려는 움직임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 역동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시집을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 시집에 ‘언어의 무한한 변화성’이라는 말을 감히 붙여보려 한다.

 

어떤 고어의 건너편에 가기 위해 가방을 팔아야 한다. 나무들이 서 있다. 지상을 들고 다니던 손잡이처럼. 강아지 한 마리를 산다. 데리고 다니는 걸 좋아해서 가방이라 부르기로 한다.

 

가방, 거기에 싸면 안 돼, 착한 짓을 해야 간식을 주지.

가방, 알았지. 조용히 있어.

 

퇴원한 아버지 혹은 아무거나 머물던 자리. 베개도 없이 가방을 베고 잤다. 추웠어. 계속 추웠지. 퇴근 후에 잠에게 용서를 빌면 된다. 씨앗은 눈을 옮기고. 사람을 옮기고. 목도리. 도리 도리.

 

가방. 너도 멀리 갈 거니.

 

가방이 짖는다. 나를. 보면서. 새침하게. 나는 계속 흐느적거리는 문장을 말한다. 흐느적거리는 공예가 될 테야. 결의도 없이. 세계인이 즐기는 공예 축제는 계속된다.

 

특이하고. 온유적이고. 감각을 잃지 말고. 유유자적 용맹스럽게. 목도리. 목을 조르며 아버지는 내 머리카락을 다 가져가신다.

 

시집에 수록된 시 <여름 나무들은 계속 장발이 되었지> 전문

 

이 시에서 드러나듯이 대부분의 이지아 시에서는 하나의 주제로 시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아닌 어떤 공통점을 지닌 것인지 짐작하기 힘든 몇 개의 시어들이 시의 주축이 되고, 또다시 의미가 불분명한 사물과 개념의 연속이 시의 전체적인 틀을 꾸미며 시의 본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 붙일 때 일정한 호흡으로 써 내려간 것이 아닌 잡지나 공연의 해설, 시나 소설의 한 구절들을 조각조각 모아 하나의 시편으로 응축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위의 시 <여름 나무들은 계속 장발이 되었지>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가방’을 팔아야 하지만 새로 산 강아지에겐 그 ‘가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퇴원한’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화자의 머리칼을 전부 다 가져가며 목을 조른다. 앞서 말한 아버지가 화자의 머리칼을 ‘가져갔다’ 했지만 정작 제목에는 그와 정반대의 뜻을 지닌 단어 ‘장발’이 들어간다. 정반대로 성립되는 의미들이 하나의 시 속에서 엉키며 기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문장과 문장이 잘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듯한 느낌 또한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시의 흐름이 잘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지아의 시는 쓰여진 글 그대로를 이해하려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와 시 쓰기 자체를 일종의 ‘놀이’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장난감 놀이하듯 시로써 풀어나가고 있다.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터무니없는 공상이 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의미 전달의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닌 텍스트 그 자체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의미의 탄생과 점멸을 반복하게 하며 그것이 지닌 성질을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글자와 문장에게 직접 운동성을 부여해 글 스스로가 뛰놀 수 있게 한다. 이처럼 하나의 시 속에서 뒤섞여지는 다소 난해하면서도 서사적인 텍스트들은 본래의 단어가 지닌 의미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의미들을 쌓아 올리기를 반복한다. 언어를 사물로, 사물을 언어로 바꾸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언어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굳게 믿는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는 새롭게 구축되고 또다시 관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리프트 위, 홍학 옆에 클립, 그 옆에 모직 코트가 있다.

 

모직 코트 (혼잣말) 느낌이 없어. 아무 느낌이

홍학 스타일이 좀 멋진 친구다.

모직 코트 처음 보는데요.

클립 나는 당신을 봤어. 당신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건물 계단에 떨어져 있었어.

모직 코트 나를 모른 척 해주십시오.

홍학 어떻게 여기에

모직 코트 묻지 말아주십시오. 저희 같은 존재들은 어떤 원인이나 본성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클립 그럼, 배고픈가?

모직 코트 얼마나 굶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클립 이것 좀 먹어보겠어? 내가 먹는 건데. 귀한 거네. 지우개 가루로 만든 건데. 이걸 먹으면 배고픈 것도 잊게 되고, 힘든 기억도 잊게 된다네.

모직 코트 효과가 있을까요?

홍학 잊을 수 있다 해도, 힘든 건 계속 이어지는 게 여기의 논리 아닌가?

 

시집에 수록된 시 <반인류를 향한 태양과 파동과 극시> 中

 

또한 이지아 시인은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전무 하다시피 한 시의 갈래 중 하나인 ‘극시’를 개척한 시인이라고도 평가받는다. 극시란 희곡의 형태를 한 시를 말한다. 이지아의 시는 대부분 공간이나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전개되는데 극에는 필시 정해진 시간과 대사와 결말이 있다. 본질부터가 다른 이 둘이 함께 시로써 표현된다는 것은 곧 그 자체로 어느 한 장르에 갇히지 않은 진정한 예술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지아의 극시 속 인물들의 대화는 어느 정도 현실적이면서도 어딘가 이상하고 기묘하다. 마치 난해한 미래파 연극의 각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언어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무엇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나야 할 이야기를 다양한 성질의 언어로 마구 꾸미기 시작하며 언어의 또 다른 변화를 추구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에 인격을 부여해 시를 이끌어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현실의 우리 사이의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 역시 포착할 수 있다. 이지아의 시는 얼핏 보면 굉장히 어렵지만 그 답은 아주 간단한 수수께끼 문제 같다. 휘몰아치는 비논리적인 말들에 당황해하다가도 곧 이것이 언어의 극단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특수한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그 사이에서 나타나는 서사는 다소 엉뚱하지만 냉소적이고,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다양성을 취한다.

 

그것은 속도와 힘으로 가득한 것이다. 놀리고 싶은 것들이 생길 때는 그 뒤에서 따라 했는지 모른다. 가령 희망이거나 가능성. 아니면 상관없어 이런 말들

 

굴뚝을 돌아 다른 구멍을 찾아 헤맸는지도. 거짓을 믿어주는 것은 승리자의 배려이고. 세무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박수 치며 수박을 깨는 것도 괜찮지 싶다

 

문어 빨판을 처음으로 만지면서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소름과 소음 속에서 끓는 물이 생성된다. 누운 이의 두껍고 웅장한 마음을 이끌면서

 

시집에 수록된 시 <들판 위의 챔피언> 전문

 

이 시는 이 시집의 첫 번째 시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는 시어들이 여러 도구로써 작품의 분위기에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주제와 흐름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자연스레 이미지를 생성해내는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나의 이런 관점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만약 어떤 시를 읽었을 때 시의 흐름과 시어가 조금 어울리지 않는 정도라면 그것은 그저 다소 아쉬운 시라고 생각하는 데에 그치지만 이 시는 시의 흐름이 자리하고 있는 것 대신 기묘한 시어의 무한한 반복만이 이어지는 시라 오히려 그 극단적인 점이 시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지 짐작이 되는가? 시의 시작부터 갑자기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이야기는 점점 산으로 간다. 사실 이 시에 대한 완벽한 해석을 나타내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하다. 이 시는 해석하기 위해 쓰인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인간 중심의 해석을 시도하려 한다면 더더욱 어려워진다. 이 시는 사물의 물성을 쪼개 다른 것과 합쳐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몸을, 숨을, 모든 것을 사물로 치환하는 화자가 바라본 세상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시들은 인간 중심으로 쓰인다. 그런 시 속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나 인생처럼 오직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내용의 주가 된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러한 접근을 거부한다. 오히려 인간의 삶의 부속품으로 여겨져 왔던 사물들을 주체 삼아 이야기를 던진다. 이 시 속에서는 인간과 사물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 오히려 사물이 인간보다 더 우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이야기라 표현되는 것들마저 사물의 특성을 활용한 문장으로 감싸고 가리다 보면 그 본질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내가 생각하는 현대 시의 기준에 가장 적합한 시이다. 내가 ‘현대시’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든 쓰일 수 있고,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시’였는데, 이 시가 바로 그러한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다소 낯설지만 혁신적인 시작법은 더 폭넓은 현대 시로의 새로운 도약이다.

 

스무 살 내 피는 초록이었나. 밀림을 찾아 얼쩡거렸지. 갈기처럼 두껍고 뻣뻣한 파마에 술을 마시고 토하면 초록 웅덩이가 생겼지.

 

아침마다 전철을 타고 커피를 탄다. 털을 숨기며 상냥해지기

 

야간대에 들어가서 다른 사자들과 만난다. 누가 더 위엄스럽게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얼마나 더 여린 짐승을 가져야 하는지 의논한다. 몇 달 만에 집에 가면 어미는 얼갈이김치를 담그던 바가지를 던지며

 

저 사자 같은 년

 

굵은소금을 뿌려도 순해지질 않아. 정맥 속엔 긴 실이 기어 다니고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을 안다. 나는 여섯 살 망원동 뒷방에 버려져 있었다. 어미는 나를 구했다. 어미는 함정이었지

 

이 사자 같은 년

내 방에서 나와

 

시집에 수록된 시 <초록 방> 전문

 

그러나 이지아 시가 단지 언어의 놀이만을 목적으로 하거나 사물들의 이야기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 시 <초록 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실제의 경험처럼 느껴지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의 중요한 소재로 삼기도 한다. 이 시는 화자가 초록 피를 지녔던 스무 살의 이야기이다. 당연하게도 인간의 피는 빨간색이다. 그러나 화자는 스무 살 때 자신의 피를 초록이라 말함으로써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고 어색했지만 꿈 많던 어린 시절을 남들과는 다른, 오직 그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평범하지 않은 피와 서툰 마음을 지녔던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스무 살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숨기기도 하고, 그러면서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해하다가도 어쩔 수 없는 결핍과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어미에게 ‘사자 같은 년’이라 불리며 살아왔던 때,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지만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때를 담담하지만 슬프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가 지닐 수 있는 것들이다. 자신의 피가 초록이라 느껴질 만큼 남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두려움이나 특별함 같은 양면성을 지닌 감정과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지 못해 그저 두려워하기만 했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기억이다. 이지아 시인은 이러한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기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화자 자신, 또 화자를 둘러싼 주변의 것들이 ‘사자’라는 공통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가지를 치듯 뻗어나가며 시의 전체적인 느낌을 형성한다. 하나의 시를 묶고 있는 것은 곧 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다. 이 주제는 제멋대로 날뛰는 텍스트들을 하나의 그릇 안으로 집어넣고 섞는다. 날이 선 문장도, 문맥에 맞지 않는 문장들도 한 번에 전부 다 고르게 섞으면 비로소 이러한 시가 탄생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는 분명히 드러나는 주제와 마음껏 뛰노는 언어의 동작을 한 번에 모두 느낄 수 있는 시가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의 나열이라 인식하다가도 이내 공감하게 되는, 말 그대로 ‘이상하고 완벽한’ 시는 일반적인 시 쓰기에서 요구하는 것을 일부러 어렵게 비틀며 또 다른 차원의 글쓰기를 선보이고 있다. 이것은 곧 다른 세계의 말로 받아적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집은 처음 보면 상당히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시집이다. 나 역시 이 시집을 처음 접하였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시집의 진짜 목적은 단지 시가 지니고 있는 주제의 논리성이나 흐름보다는 사물 그 자체로 표현해낸 다양한 이야기와 재미있는 표현법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난 후에는 이 시집을 좋아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 시집의 제목은 ‘오트 쿠튀르’이다. ‘오트 쿠튀르’란 프랑스어로 고급 의상점을 뜻하는데, 그러한 고급 의상들을 선보이는 패션쇼의 뜻 역시 담고 있다. 나는 이 제목이 이 시집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오트 쿠튀르는 패션의 실용보다는 예술과 의상으로만 표현해낼 수 있는 미 그 자체에 초점을 더 많이 두었는데, 오트 쿠튀르의 이러한 점이 시를 읽음으로써 공감과 감동만을 주는 것 대신 언어로만 표현해낼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변형시켜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는 이 시집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오트 쿠튀르 자체는 옷의 실용도가 매우 떨어지고 다소 괴상하고 화려한 디자인을 한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누군가는 오트 쿠튀르를 보며 대체 왜 저런 비싸기만 한 옷을 입느냐며 불만을 지닐 수도 있겠지만, 오트 쿠튀르는 그저 사치스럽고 불필요한 것이 아닌 패션만이 지닐 수 있는 특성을 활용한 진짜 예술이다. 이 시집 역시 그렇다. 말과 의미의 뒤틀기가 과도하게 많고 연관성 없는 단어들이 무지막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은 오직 글로만 수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야기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은 글로도, 영상으로도, 그림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언어의 운동은 그렇지 않다.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모순도, 비논리성도 결국은 언어의 특징 중 하나로 포함된다. 나는 시 속에 수수께끼처럼 숨어든 언어의 재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될 때, 시 읽기는 더더욱 즐거워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이지아의 시를 읽는 것처럼 말이다.

파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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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파르페 님, 안녕하세요. 이미 글틴 캠프에서 익히 읽고 소상히 이야기 나눴던 글이라 더 어떤 코멘트를 해야할 지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개별 작품 독해에 대해서는 그때 말씀을 드렸으니 이번에는 비평글의 구조를 쌓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하고 싶은데요. 비평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파르페 님의 의제가 있고(물론 그 의제는 저절로 아무때나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들과 꾸준히 마주하며 생성되는 것이겠지요), 작품을 꼼꼼히 읽으며 그 자신의 의제를 견주어 가며 전체 글의 서사를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글의 제목과 구성 그리고 개별 내용에서 파르페님만의 목소리가 묻어나서 좋았고, 그때도 말했던 바이지만 작품 선택도 유기적입니다. 혹여 실타래를 찾기 어려울 때는 첫 번째로 배치된 글, 첫 문장을 유심히 읽어보세요. 글쓰기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반드시 더 나아지게 된다는 것, 잘 아시지요? 나아가 더 조언드리고 싶은 것은, 이 글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 파르페 님은 특히나 언어의 물질성을 감각하는 일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데, 그 물질성이 행과 연을 쌓아가며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있는지, 그 궤적에 어떤 심상이 깃들고 어떤 의미가 획득되는지도 함께 파악해볼 수 있다면 앞으로 파르페님의 글이 더욱 파워풀하게 발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캠프에서 만나서 정말 반가웠고, 앞으로도 글을 계속 쓰신다면 어느 자리에서든 다시 만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어요. 늘 정진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2023-02-12 05:30:13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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