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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이미지의 진실과 허구 - (전시) 오메르 파스트의 '차고 세일'과 '세상은 골렘이다'를 보고

  • 작성자 파르페
  • 작성일 2022-12-02
  • 조회수 754

나는 얼마 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던 전시 <2022 타이틀 매치 : 임흥순 vs. 오메르 파스트 <컷!>>을 관람하고 왔다. 나는 평소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단지 그 공간에 내가 간다는 것에 의미를 둘뿐 어떤 전시가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는지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이 전시의 관람을 끝마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전시는 영상설치 미술가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인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 두 사람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임흥순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고, 오메르 파스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현재 독일에 거주 중이다. 자란 환경과 문화가 다른 만큼 둘의 작품은 척 보아도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임흥순의 작품 역시 훌륭했지만, 내 마음에 더 가까이 와닿았던 것은 오메르 파스트의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그동안 나의 머릿속으로 수집되었던 이미지들을 건드리고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의 작품을 통해 영상미술이라는 장르를 잘 몰랐던 내가 한순간에 영상미술에 빠져들 수 있게 되었다. 영화인 듯하면서도 알 수 없게 철학적이며 공간적인 것. 이것이 내가 마주한 영상미술의, 그의 작품의 첫인상이었다.

우선 내가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차고 세일> 이다. 우선 이 작품에는 세 개의 텔레비전 스크린이 있으며 그 뒤로는 불규칙하게 뼈대를 이룬 쇠파이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크린 아래로는 잡동사니들이 세 구역을 나누어 바닥에 늘어져 있다. 화분, 토스트기, 청소기, 믹서기, 작은 크기의 조각상이 그것이다. 세 개의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해 작품 <차고 세일>은 우리에게 보여진다. 이 작품은 가장 처음 얀 판 에이크의 그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림을 놓고 본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늘어놓다가 갑작스럽게 내용을 전개하는 장소가 바뀌고 이야기가 섞이며 점점 서사의 본질이 불분명해진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들 중 하나는 영상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여러 장의 사진 위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목소리인 여성 화자가 ‘줌 인’과 ‘줌 아웃’을 지시하면 화면은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것을 따를 뿐 장면 속의 피사체에게 움직임이란 끝내 부여되지 않는다. 화자는 세 개의 스크린마다 각기 다른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기획했던 프로젝트가 실패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인 부부가 살고 있는 미국 뉴저지의 한 주택 뒷마당에서 열린 차고 세일에 그들이 차고 속에 십몇 년이나 방치해 두었던 ‘잔디정원용 장식’이 물품으로 나와 있다. 화자는 이것은 다소 인종차별적인 상징을 담고 있는 물건이라는 것만을 이야기해 줄 뿐 이 물건의 모습은 작품 내에서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 흑인 여자가 나타나 이 물건을 사겠다고 이야기하지만, 백인 부부는 그녀를 강하게 말리며 이 물건에 대해 사과하고 자신도 이 물건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흑인 여자는 꿋꿋하다. 흑인 여자는 결국 이 물건을 지닌 채로 집에 도착하지만 그 잠시 동안의 일을 모두 잊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화자는 이 흑인 여자에 대한, 그러니까 이 잔디정원용 장식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했으나, 이야기의 후반부에 다다르고서는 흑인 여자가 화자에게 화를 내며 결국 프로젝트가 무산되어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화자는 집 앞의 쓰레기봉투를 화면에 비추어주며 이 모든 이야기는 픽션이라고 실토한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대체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지만 복잡하다.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그 형체가 보여져서는 안 되는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물건 취급당하는 ‘인종차별적 의미를 지닌’ 잔디정원용 장식은 폭력 그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이, 제목이 <차고 세일>인 이유도 그러하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이 차고 세일에 물품으로 나온 잔디정원용 장식처럼 폭력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편재하고 있지만 그에 방관하고 침묵을 통한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이들은 앞서 나온 백인 부부처럼 이 사회 내에서는 대부분 차별받을 일 따위는 없는 사람들뿐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 그 잔디정원용 장식을 싫어했더라면, 그들은 그것을 차고 세일에 물품으로 나가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차고에 십몇 년 동안이나 모른 체 하고 방치해 두었을까? 단순한 말 뿐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고, 그것이 폭력이나 차별, 혐오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이 그것을 버리지 않고 간직함으로써, 그것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방치해버림으로써 이미 폭력의 존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저 하나의 조각상일지라도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의 고통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을 의미 전달이 분명하거나 직접적이지 않은, 다소 혼란스러운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세 개의 스크린마다 각기 다른 사진이 보여지는 것 역시 이미지의 증폭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아주 훌륭한 장치이다. 진실과 허구의 구분이 불분명한 이야기와 콜라주 기법처럼 뒤섞이는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잠시 이야기에 대한 혼동을 불러일으키다가도 이야기를 이해하려 함에 따라 내용의 흐름을 타고 뒤로 이어갈 때 비로소 작품이 드러내려 하는 작품의 본질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스크린 주위의 바닥 위로 화분, 토스트기, 청소기, 믹서기, 작은 크기의 조각상처럼 차고 세일에 물품으로 나올 만한, 우리 일상 속에서의 친숙한 물건들이 놓여 있는 것 역시 폭력과 혐오는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도구이다.

첫 번째로 이야기했던 <차고 세일> 다음으로 내가 특히나 인상 깊게 감상한 그의 작품은 <세상은 골렘이다>였다. 이 작품은 다소 기이하면서도 복잡하고 또 신비롭다. 어느 한 스키장의 리프트에 한 여자와 남자가 함께 탑승한다. 남자는 검은 양복과 검은 모자와 길게 기른 구레나룻, 즉 정통 유대교 복장을 한 채 여자에게 금 세공사가 등장하는 한 유대인 설화를 들려주지만 여자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꿋꿋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이에 참지 못한 여자는 남자의 모자를 뺏어 의도치 않게 스키장 바닥으로 떨어트리기까지 한다. 그 둘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잠시 뒤, 스키장의 직원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스키장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어딘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방금 전 여자가 남자에게서 빼앗았던, 남자의 모자와 똑같은 모양의 모자들이 끝도 없이 들어차 있었다. 장면의 순간은 다시 이상한 곳으로 도달해 이번에는 스키장 내 숙소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처음 등장하여 남자의 모자를 빼앗았던 여자의 독백을 비춘다. 여자는 어째서인지 자신이 마주했던 남자의 모습처럼 검은 모자를 쓰고, 모자 밖의 앞쪽으로 빠져나온 긴 두 갈래의 머리를 한, 정통 유대교의 복장을 하고서는 듣는 이가 불분명한 혼잣말을 계속해서 내뱉으며 작품은 끝이 난다. 처음 접하였을 때는 다소 난해하고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작품이었으나 원제를 보고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 작품의 원제는 <De Oylem iz a Goylem>이다. 결국 말장난을 사용한 제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세상이라는 다소 거대하고 중요한 영역마저도 말장난으로 엮어 세상의 시간의 흐름과 공간을 완전히 뒤집고 있다. 끊임없이 흘러가며 당위성이 부여되는 세상 모든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허구와 진실을 과감히 섞어 무엇이 무엇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잔뜩 섞여버린 퍼즐 조각처럼 말이다. 스키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갑자기 설화를 들려주는 것도, 알 수 없는 공간에 수많은 모자가 쌓여 있는 것도, 여자가 의미 없는 혼잣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것도 모두 정교한 세상에 저도 모르게 떠밀려온 일종의 오류들이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한밤중에 여자가 눈길을 거닐 때 이미 모든 것은 정리된 현재처럼 보이지만, 아직 답을 말해주지 않은 수수께끼들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며 이토록 평범한 순간들에도 언제나 흠집이란 존재함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세상이란 불변하지 않으며 꼭 어디엔가는 미지의 존재들이 우리와 함께 공생하고 있다는 기이한 이야기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만물의 필연적인 불완전함과 그로 인한 본래 형태의 혼란을 당연한 것처럼 우리에게 납득시켜주고 있다. 모든 것에는 불량품이 있고 예기치 못한 에러가 있다. 그것이 세상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틀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전의 나에게는 영상미술이라는 것이 낯설고 생소하게만 느껴졌듯이, 대부분의 사람들도 영상미술이라는 것을 떠올렸을 때 그와 다르지 않게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영상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국내에도 이러한 영상미술이 더더욱 알려져서 더 많은 예술가들과 좋은 작품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언젠가 영상미술이 예술의 주류가 되는 그날을 상상해보며 말이다.

파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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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아 시인의 이 첫 번째 시집 <오트 쿠튀르>에 실린 시편들은 여태까지 축적되어왔던 ‘시’의 이미지를 완전히 부수고 파괴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형식을 한 시 대신 새로운 시를 창조해내려는 움직임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 역동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시집을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 시집에 ‘언어의 무한한 변화성’이라는 말을 감히 붙여보려 한다.   어떤 고어의 건너편에 가기 위해 가방을 팔아야 한다. 나무들이 서 있다. 지상을 들고 다니던 손잡이처럼. 강아지 한 마리를 산다. 데리고 다니는 걸 좋아해서 가방이라 부르기로 한다.   가방, 거기에 싸면 안 돼, 착한 짓을 해야 간식을 주지. 가방, 알았지. 조용히 있어.   퇴원한 아버지 혹은 아무거나 머물던 자리. 베개도 없이 가방을 베고 잤다. 추웠어. 계속 추웠지. 퇴근 후에 잠에게 용서를 빌면 된다. 씨앗은 눈을 옮기고. 사람을 옮기고. 목도리. 도리 도리.   가방. 너도 멀리 갈 거니.   가방이 짖는다. 나를. 보면서. 새침하게. 나는 계속 흐느적거리는 문장을 말한다. 흐느적거리는 공예가 될 테야. 결의도 없이. 세계인이 즐기는 공예 축제는 계속된다.   특이하고. 온유적이고. 감각을 잃지 말고. 유유자적 용맹스럽게. 목도리. 목을 조르며 아버지는 내 머리카락을 다 가져가신다.   시집에 수록된 시 <여름 나무들은 계속 장발이 되었지> 전문   이 시에서 드러나듯이 대부분의 이지아 시에서는 하나의 주제로 시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아닌 어떤 공통점을 지닌 것인지 짐작하기 힘든 몇 개의 시어들이 시의 주축이 되고, 또다시 의미가 불분명한 사물과 개념의 연속이 시의 전체적인 틀을 꾸미며 시의 본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 붙일 때 일정한 호흡으로 써 내려간 것이 아닌 잡지나 공연의 해설, 시나 소설의 한 구절들을 조각조각 모아 하나의 시편으로 응축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위의 시 <여름 나무들은 계속 장발이 되었지>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가방’을 팔아야 하지만 새로 산 강아지에겐 그 ‘가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퇴원한’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화자의 머리칼을 전부 다 가져가며 목을 조른다. 앞서 말한 아버지가 화자의 머리칼을 ‘가져갔다’ 했지만 정작 제목에는 그와 정반대의 뜻을 지닌 단어 ‘장발’이 들어간다. 정반대로 성립되는 의미들이 하나의 시 속에서 엉키며 기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문장과 문장이 잘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듯한 느낌 또한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시의 흐름이 잘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지아의 시는 쓰여진 글 그대로를 이해하려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와 시 쓰기 자체를 일종의 ‘놀이’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장난감 놀이하듯 시로써 풀어나가고 있다.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 파르페
  •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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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안녕하세요. 파르페님! 영상 미술을 철학적이며 공간적인 것, 이라고 정의한 것이 솔직하면서도 정말 그럴 듯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미술관에 가면 많은 영상 설치물들을 볼 수 있고, 내러티브 영화들이 해내지 못하는 영상 예술의 감각이 그곳에서 많이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요. 사색적이면서도 깊이감을 주는 미술관 속 각종 스크린들을 볼 때마다 파르페님의 정의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문학 감상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 또한 미술을 감상하는 데에도 탄탄한 독해력에서 나오는 자기 해석과 확신이 돋보이는 멋진 글이었는데요. 각 작품들의 내용을 요약하고 의미를 유추하는 파르페님의 글 얼개에서 보이는 파르페님의 텍스트 구성 능력에 다시금 감탄하면서도 저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고 세일에서 나타나는 인종차별주의, 즉 정원이 있는 집을 가지고 그것을 꾸밀만한 여유가 있는 백인 가정과, 역사적으로 또한 비유적으로 백인들의 정원을 가꾸는 일에 동원되었던 흑인이 그들의 장식품을 사는 일, 거부당하는 일, 프로젝트를 하려고 했다 무산되는 일 등 일련의 과정들에 대한 해석도 멋졌습니다. 제가 작품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파르페님이 작품에 인식적으로 감정적으로 연루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골렘이다에 대한 해석은 제게 조금 더 추상적으로 다가왔는데요. 의미론의 해체, 말장난, 파르페님의 멋진 표현에 따르자면 "정교한 세상에서 저도 모르게 떠밀려온 일종의 오류들"에 대한 감각들을 더 전면에 부각한 것이여서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의미의 해체와 기표의 유희는 이미 문법화 되어 있는 기법이기도 한데요. 그렇기에 그 기법만을 가지고 새롭고 독창적인 예술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더이상 쉽지 않아진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파르페님도 잘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흠집, 불완전함, 이치에 맞지 않음, 상실, 중언부언 등 이 작품의 요소들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하고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다면 이 글이 더더욱 탄탄해질 것 같습니다. 골렘은 유대교 신화에 등장하는 흙으로 빚어진 형체를 가리키는데, 세속화된 사회에서 그것은 비규범성과 무지함 등을 상징한다고 하기도 해요. 그것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랍비나 유대인 전통의상, 작가의 출신 등과 엮어서 해석해볼 수 있다면 이 작품의 테크닉과 콘텐츠를 더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멋진글인데, 파르페님께서 워낙 좋은 비평가로서의 자질이 있으니 언제나 조금 더 기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네요! 좋은 전시 소개시켜줘서 고맙습니다. 또 만나요.

    • 2023-02-12 03:41:53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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