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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빛이라 부르기 시작할 때 - 소설 '여우의 빛'을 읽고

  • 작성자 파르페
  • 작성일 2022-09-06
  • 조회수 508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내용일 것이다.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전개와 매력적인 캐릭터, 깊은 여운을 남겨 주는 끝마무리까지. 이렇듯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나타내는 것인 만큼 내용의 구성이 중요하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왔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여우의 빛>은 우리가 평소 생각해오던 소설의 형태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이 소설이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들 속의 이야기는 짧지만 그런 만큼 더 깊은 여운을 남겨준다. 그렇지만 내가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언급한 이유는 분명 있다. 이 소설을 두 번째로 읽었을 때 나는 그제서야 내용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내가 이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었을 때 내 기억에 더 잘 남아있던 것은 내용이 아닌 아름답고 감각적인 문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단편소설을 모아 놓은 단편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인 여우의 빛, 마이 퍼니 발렌타인, 애플 시드, 로커룸, 야간 비행, 드라이브 미, 아케이드, 프리마 돈나 이렇게 8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늘 나는 이 8개의 이야기들 중 표제작인 ‘여우의 빛’에 대해서 다뤄보려 한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나’는 킬러다. ‘나’는 어느 날 조직으로부터 한때 나의 멘토였던 L을 죽이라는 지시를 받지만 실패하고 만다. 조직은 ‘나’에게 또 한 번의 마지막 기회를 준다. 그러면서 ‘나’는 L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이야기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서 ‘나’는 끝내 L을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 이야기는 ‘나’가 아무도 없는 L의 집에 찾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몇 문장으로 다 정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나’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한때 가장 소중했던 사람인, 멘토를 죽이라는 지시를 받고도 ‘나’의 감정은 무덤덤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아니다. 감정의 물결을 그대로 옮겨적기 보다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비유적인 표현들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달의 표면에는 실패한 감정이 무수한 탄착흔처럼 쌓여 있다. 진정한 공포는 스코프 밖에 있다. 원 밖에 있는 것들은 모두 생의 외곽이다.

<여우의 빛> 11pg 중

 

‘나’는 빌딩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달의 표면, 그러니까 즉 자신이 보고 있는, 그러면서도 나를 비추고 있는 것의 표면에 실패한 감정이 무수한 탄착흔처럼 쌓여 있다는. 달은 ‘나’의 또 다른 존재이다. ‘나’는 자신의 마음에 내려앉은 실패와 절망의 감정들에 슬퍼하면서도 스코프 밖, 그러니까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벗어나 무섭도록 광활한 현실의 세상에 도달하였을 때, 진정한 공포는 그곳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원 밖에 있는 것들이라는 건 둥근 달의 밖, 즉 자신의 밖에 있는 것들이라는 것일 수도 있고 동그란 스코프로 보는 시선의 밖, 즉 현실의 밖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생의 외곽’이라고 칭함으로써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든 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생의 외곽처럼 가려져 보이지 않아 더욱 쓸쓸한 것들일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의 서술은 매우 시적이다. 이 소설을 쓴 이동욱 작가가 시도 쓴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오히려 현실이 꿈 같고 꿈이 현실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내용을 뼈대로 잡고 그 위에 서술과 상황을 얹는 것이 아닌 그 반대처럼 느껴진다. 내용은 단편적이지만 꿈꾸는 듯한 기묘한 문체가 그것을 보완해 준다. 이야기보다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일 정도다. 이 소설은 슬픔을 슬픔이라 말하지 않고 그와 상반되는 여러 장의 사진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사진들은 빛과 같은 밝고 무한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상반되는 것들이 결합함으로써 슬픔은 오히려 무덤덤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화려하고 복잡한 서술에 홀려 이 이야기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 뻔 했다.

 

여우의 빛은 오로라의 다른 이름이다. 북극에서는 오로라를 그렇게 부른다. L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안부를 묻듯 벽에 볼을 대고 조그맣게 숨을 쉬어 본다.

<여우의 빛> 45pg 중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제목인 ‘여우의 빛’은 오로라를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L을 떠올린다. ‘나’에게 오로라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던 것일까. 아름다운 빛으로 일렁이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어두울 때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어쩌면 ‘나’에게 오로라란 L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는 L을 죽인 뒤 거의 바로 자신이 첫 작업을 마쳤을 때 L과 함께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죄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대상이 사라진 살의는 다른 감정이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의지이다. 순수한 살의에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야기 속의 ‘나’가 아니기에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없지만 L에게서는 ‘나’를 향한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었기에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살의의 무취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자신이 L을 죽인 뒤였다. 이 이후로 ‘나’의 감정은 전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L과 함께했던 지난 기억의 파편들이 무작위하게 펼쳐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나’가 L을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는지에 대한 혼란이 조금 있었지만 이 마지막 문장으로 인해 그 혼란이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L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단 한 순간도.

이 소설은 서술이 모호하고 이미지에 치중되어 있어 숨은 뜻을 생각해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슬픔과 혼란을 나타내려면 단순 감정의 지나친 나열 대신 감정의 조각을 녹인 시각화된 무언가가 더 효과적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말이다.

파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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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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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안녕하세요 파르페님. 감정을 표현할 때, 단순 감정어만 나열하는 대신에 감정 조각을 녹인 시각화된 무언가가가 더 효과적인 전달방식이라고 써준 마지막 대목이 인상 깊은데요. 지난번 글에서도 그렇고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감각적인 이미지, 음악 장치들을 감지하고 그것이 내용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시는 방식이 매우 유려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특히나 말대신 이미지로 많은 것을 말하는 작품들이 있죠. 작품의 이모조모를 뜯어보며 단순히 줄거리들만이 아니라 그것이 전달되고 있는 효과들에 주목하는 것은 능숙한 독해의 시작입니다. 작품 선택, 비평의 주제를 잡는 방식 등이 안정적입니다. 앞으로의 글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2022-11-17 21:03:29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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