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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르, 에테르, 에테르 -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보고

  • 작성자 파르페
  • 작성일 2022-09-04
  • 조회수 1,069

나는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상미라고 생각한다. 다른 매체가 아닌 오직 영상으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나는 그런 것들이 잘 담겨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아주 슬프거나, 아주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상미라는 것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덧대 그 비극적임이 조금이나마 덜해 보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별 뜻도 별 내용도 없는 영화를 포장해 기어이 그 영화를 좋아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나는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조금 달랐다. 경이로울 정도의 영상미와 음악이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이 영화 속의 폭력을 아주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끔찍한 현실 위로 아름다운 것이 끼얹어지며 그것이 가려진다기보다 오히려 더 부각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일단 이 영화는 괴롭힘, 그것도 학교 폭력에 관한 영화다. 줄거리를 아주 짧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릴리 슈슈라는 가수의 노래를 사랑하는 열네 살 소년 유이치는 옛 친구인 호시노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던 도중 릴리 슈슈의 콘서트장에서 호시노를 만나게 된 유이치는 자신이 인터넷상에서 의지하던 '푸른 고양이'가 실은 호시노였다는 사실을 알고 호시노를 살해한다. 만약 이 영화가 음악도 영상도 아름답지 않고, 그저 본연의 우울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그런 영화였다면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영화 속 아이들의 방황과 폭력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영상의 아름다움과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기묘한, 그러나 분명히 감각적이고 깊은 울림의 음악 때문에 어두움이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 속의 음악 중 내 가슴에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였다. 주인공 유이치가 사랑하는 릴리 슈슈는 드뷔시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아 릴리 슈슈의 음반 중 이 아라베스크와 동일한 제목의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유이치의 첫사랑인 쿠노가 주로 연주하는 피아노 곡 역시 이것이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음악은 등장한다. 이 음악은 상당히 감각적이면서도 편안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주인공이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대상, 그러니까 평화와 행복이 주체가 되어야 할 음악들이 가장 폭력적인 상황에 덧입혀지며 탄생하는 분위기는 이들이 겪고 있는 불행과 혼란을 더욱 동정하도록 만든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우울함과 절망감이 포근한 감각과 함께 부조화를 이루며 여실히 밀려온다. 끔찍함과 결부되는 감수성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까지 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지닌 장점이면서도 단점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영화는 폭력을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든다. 시작부터 끝까지 예술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있다. 인터넷 속에서의 대화를 오류가 난 듯한 깨진 글자로 표현하여 보여주는 장면과 벼밭 한가운데 홀로 선 유이치가 음악을 듣는 장면이 교차할 때 난생 처음 맞닥뜨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답다는 자각이었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에테르'가 꽤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에테르의 사전적 의미는 위쪽 하늘의 공기, 또는 위쪽 하늘 그 자체이지만 철학의 개념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에테르'는 릴리 슈슈의 음악에서는 어떠한 감성 그 자체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릴리 슈슈의 음악에서의 에테르는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두려움에 갇혀 사는 유이치, 자신도 과거 피해자였으나 지금은 완전한 가해자로 돌변해 폭력을 행사하는 호시노. 이 둘은 서로 양 극단에 서 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런 둘에게는 릴리 슈슈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둘에게 에테르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영화 속의 세계에서 유일신처럼 여겨지는 에테르는 위쪽 하늘의 맑은 공기와 순수한 빛을 나타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순수한 빛 대신 우울의 극치가 있을 뿐이다. 자, 다시 영화 속의 내용으로 돌아가보자. 호시노는 괴롭힘 당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지 못하고 또 다른 폭력의 주동자가 되어 옛 친구인, 그러나 지금은 자신보다 약자가 되어버린 유이치를 괴롭힌다. 동갑내기 여학생의 약점을 잡아 성매매를 시키고,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자를 성적으로 폭행하는 등 호시노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인이다. 그렇다면 유이치는 어떤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깊게 베인 상처를 홀로 썩히다 결국 그것을 아물게 하는 방법으로 살인이라는 비극을 택하고 만다. 하지만 호시노를 죽이지 않았다면 유이치는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며 지옥 같은 나날에 갇혀 살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삶을 더욱 비관하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비참함과 고독은 그 크기가 너무나도 컸기에. 그리하여 에테르라는 것은 이들의 비극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에테르가 존재함으로 인해 순수하고 맑은 이상을 꿈꾸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것은 절망뿐이다. 오히려 에테르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삶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존재하지 않을 수밖에 없던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우울하다. 한 줄기의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우중충한 영화다. 사춘기 시절의 방황과 고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우울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음악과 영상이 어두움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어도 그것은 잠시뿐이다. 화면 속으로는 맑은 하늘을 비추고 있지만 그와 맞닿아 있는 현실의 아이들은 너무나도 어리고 그만큼 또 상처받고 혼란스러워할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우울하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최고의 찬사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미적인 우울이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기에.

파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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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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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파르페님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파르페님만의 예민한 감각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참담한 현실 위에 끼얹어 있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잘 포착한 영화이고, 그 부분을 잘 캐치하신 것 같아요. 편안하고 서정적인 음악이 영상 안으로 환한 빛을 데리고 들어오는 듯 하지만, 그 환한 빛이 폭력의 이미지로 이어진다는 분석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파르페님이 잘 설명해주신 것을 토대로 서사학적인 분석을 해볼 수 있겠는데요. 이야기를 보통 이야기 그 자체와 이야기 장치, 학술적인 용어로는 미메시스와 디에게시스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라면 학교폭력의 내용이 미메시스, 이것을 서술하는 방식인 카메라와 음악 등의 장치들의 디에게시스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물론 영상 매체에서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언제나 적확하진 않습니다) 이 영화는 이 두 차원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미학을 잘 이용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고, 파프페님도 그 점을 감명 깊게 보신 것 같아요. 참담한 이야기와 지나치게 아름다운 영상미, 그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설명해주셨는데, 단점이 될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도 더 서술해보시면 글의 논의 자체가 더욱 두터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꾸준히 비평적인 독해를 이어나가시길 바랍니다.

    • 2022-10-30 12:34:44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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