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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 작성자 GLOBE
  • 작성일 2020-09-28
  • 조회수 694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똘스또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열린책들, 2019.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이 죽음의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똘스또이 최고의 중단편 소설로 손꼽힌다. 그렇게 이름만 알던 소설이었지만, 어느 선생님의 인생책이라는 이야기에 홀린듯 구매했다. 그리고 늦은 새벽 책을 꺼내들고 똘스또이가 써내려간 이야기에 빠져들어 단숨에 읽어버리고 말았다. 똘스또이의 묘사는 직관적이고 초월적이여서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어딘가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 대신 엄청난 몰입감과 관념의 서사가 그 느낌의 공백을 채운다.

 우리는 죽음을 멀리하며 살아간다. 언젠가는 다가올 것을 알지만, 이반 일리치의 동료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보고 생각하듯, 나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태도로 일관하다. 모두가 죽음을 멀리하는데 병자가 죽어가는 자신을 본 다면 그는 얼마나 절망적일까. 이반 일리치는 올바르고 정직한 길을 걸어온 판사이다. 비록 가정을 그리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직업적인 면과 표상적인 면에서는 부족함 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이반 일리치의 승진과 이사의 기쁨 뒤에서 죽음이라는 것이 그에게 슬그머니 찾아왔다. 작은 통증이었지만, 고통은 갈수록 점점 심해져갔고 의사들도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하며 쓸모없는 희망을 흘렸다.

 이반 일리치가 고통을 토해내며 가족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은 너무나도 처절했다. 하루하루 병들어가며 죽어가는 자신과 다르게 건강하고 생기있게 살아가는 가족들을 증오하는 그를 보자니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불현듯 나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병문안을 위해 요양병원에 간 적이 있다. 모두가 병들어가는 그 곳에서 나는 그 죽음의 향기가 나에게 들어오는게 싫어서 더욱 나의 건강을 과시했다. 계단을 빠르게 오르내리고, 허리를 펴서 꼿꼿이 섰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들 모두에게도 이반 일리치의 젊은 시절과 같고, 지금의 나와 같은 젊음을 간직했던 때가 있었을텐데. 그날의 나의 행동을 후회하고 내 젊음과 그 앞의 죽음을 동시에 목격했을 그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을 가질 뿐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자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이 억울하다고 느끼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자신이 잘못 살아오지 않았는지. 병과 고통 이전에는 상류층으로서 그런 고민을 한 적도 없는 인물이 말이다. 죽음이란 참 평등하다. 돈으로 죽음을 조금 미룰 수는 있지만, 결국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보편적인 통찰이지만, 이보다 두렵고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죽음을 마주하는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이 처음이라 정확히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는 모른다. 그런 이유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죽음이 나에게 다가오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가족들은 나를 어떻게 대할지.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나는 이반 일리치가 된 것처럼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결국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는 죽는다.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어떻게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는지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해피엔딩이 없다. 모든 것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기에 죽음 그 자체를 새드엔딩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반 일리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느끼고 자신과 가족들을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에게 죽음이 사라졌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빛을 향했고 죽음은 끝났다. 가족들에게 그의 모습은 사경을 헤매다가 돌연 죽어버린 것이다. 죽음이 빛이라니. 나는 그 반대되는 개념이 어찌 같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빛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환희와 자유를 준다. 그렇다면 고통으로부터의 죽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반 일리치는 죽었다. 우리 모두 죽을 것이다. 다만 죽음은 빛이다. 빛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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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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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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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2 22:09:04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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