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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이상 여름이 아니다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7-12-31
  • 조회수 1,178

우리는 더 이상 여름이 아니다

─ 김사과, 『천국에서』, 창비, 2013

 

 

0

 

“여기는 천국이야. 그런데 왜 나는 울지? 이건 결국 같은 얘기야.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아? 왜 다 무너져내렸는데 아무것도 끝장나지 않지?”(천국에서, 337쪽)

 

 

1

 

<02>와 <미나>에 이르기까지 김사과의 작품들은 일관된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화를 주체할 수 없거나 무력하거나 슬프고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각자의 외줄을 타고 결국에는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머리가 아파. 우울해. 죽고 싶어.”(미나, 40쪽)

“나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울었습니다.”(02, 98쪽)

“안 죽은 거 다 알아! 일어나 이 씨발년아!”(미나, 292쪽)

“우리는 슬프네. 자꾸만 슬프네. 날이 저물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네. 그래서 우리는 기쁘네. 우리는 기쁘네.”(미나, 308쪽)

 

쉬어갈 틈조차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하는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와 행동거지들은 지극히 명료하고 객관적인(척하나 굉장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김사과 특유의 문체로 서술되곤 했다. 각 인물들이 주장하는 폭력의 당위성은 그럴듯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어느 쪽에도 치중되지 않은 깔끔한 공연을 선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 찬찬히 살펴보면 감정을 온전히 배제한 문장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미나>의 ‘이수정’이나 ‘김미나’, 혹은 <02>의 ‘이나’나 ‘나’가 문장 사이사이에 교묘하게 묻어 있다. 이야기에 매혹되어 김사과의 목소리를 따라가면 어떠한 모순도 없이 김사과가 의도했던 결말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정말 이것들이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인지 작품 밖에서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그렇지 않다, 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현실을 완벽에 가깝게 투영한 김사과의 작품 속 배경과 인물들의 빈틈없는 설정들과는 달리, 극단에 가까운 사건들은 대부분 인물의 (불안정하고 날카로운) 심리 상태에 주로 의지하여 전개된다. 각별했던 친구를 죽이고 그 친구의 손윗형제와 행복하게 웃어 보인다던가, 인물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충동으로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 두 명을 연달아 죽이는 것은 이 세상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김사과가 그토록 표출하던 분노에는 방향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화는 나는데 정확히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니 인물의 갈등을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정보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인들의 타자화된 감정이나, 전작들의 소설적 배경이 되었던 입시 사회의 답답한 현실에 울분을 터트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러면 김사과가 지향하는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굳이 답한다면, 어차피 이 세계는 썩어빠졌으니 모조리 파괴하는 것만이 답이며 그 이외의 정답은 존재할 수 없다, 라고 추측할 정도로 폭력을 제외한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2

 

<천국에서>의 인물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빼곡하고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뉴욕으로 유학을 간 케이, 생각 없이 삶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이는 뉴욕 아가씨 써머를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되지만, 사건을 직접적으로 이끄는 인물뿐만 아니라 케이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들은 대체로 굉장히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려진다. 각 장의 도입부에서 서술되는 인물이 자란 환경이나 가족사를 포함한 이야기들은 인물들 각자의 내면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받침대를 구축한다. 이를 위해 김사과는 때로는 인물의 부모, 멀리 가서는 조부모의 일생까지를 마치 장황한 연대기처럼 늘어놓는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빚어진 인물들에게서 김사과가 늘 고수했던 분위기를 또다시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거리낌 없이 마약을 하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욕설을 내뱉는 것 또한 김사과의 눈에 띄는 폭력성에서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타자화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하여 전전긍긍한다. <미나>의 수정이 그러했고, <02>의 수많은 ‘나’가 그러했다.

 

“사실 요즘 나는 많은 게 뭔지 모르겠어. 확실한 건 뉴욕에 돌아가고 싶다는 거야.”(천국에서, 116쪽)

 

케이는 뉴욕을 그리워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케이의 관심사가 아니며, 잠시 불타다 꺼지는, 별 볼일 없는 사랑 따위에 매혹되어 있지 않은 모든 순간에 케이는 뉴욕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순전히 케이가 뉴욕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케이가 써머와 댄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뉴욕에서 나고 자란 써머와 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걱정도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생을 즐기고, 원할 때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자신의 주위 것들을 자신이 쥐고 휘두르는 것처럼 군다. 써머와 댄이 보여준 행동들로 하여금 아주 근거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케이는 인지했기에, 케이는 써머와 댄을 ‘단단한 사람’이라 멋대로 치부하고 어울리며 동경한다.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동경할 대상이 필요할 뿐이다.

 

‘단단한 사람’은 자신의 자존감에 있어서 남의 평가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다. 케이 자신처럼 자꾸만 타인의 눈에 담길 자신을 가늠하며 불안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타격을 받지 않는 사람이다. 케이의 부모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사람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아간다. 비단 둘뿐만이 아니라,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그렇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도 퍽 닮아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외됨을 두려워한다. 특히 파급력과 이동성이 큰 정보 사회에서 말과 행동이 어떻게 변형되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지를 안다. 폐쇄된 환경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일 것이다. 우리는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말을 줄이고,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이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평판을 우리가, 그리고 케이가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부러워하는 이유이다.

 

<천국에서>는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자각하는지, 그 폭력적인 무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중축으로 삼아 사건을 전개한다. 케이가 <천국에서>의 중심인물로 발탁된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케이는 정의하자면, 혼종이다. 케이는 아들이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는데도 아들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더 중요시하는 부모 아래에서 성장했다. 케이에게 유년이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관념을 세뇌당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유학을 다녀오면서 케이는 닫힌 것 같았던 새장의 문이 열려 있음을 자각한다. 다시 말하면 케이는 뉴욕에서 굳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생각했던 것만큼 큰 일이 벌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년에 주입된 경직되고 획일화된 지식은 케이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발을 내딛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강요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격이 과도기의 케이를 만들어내었고, 케이는 뉴욕에서만 혹은 한국에서만 자라나 별다른 갈등 없이 순응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괴리에 휩싸여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케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대부분 어떻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할 것인지로 해석된다. 동시에 케이는 어떻게 자신을 옭아매는 눈빛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민한다. 케이가 선택한 방식은 마이웨이 부류에 속하는 타인을 동경하고 그와 함께함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자신 안에서 높이는 것이었다. 케이가 재현에게 그토록 빠르게 끌렸던 것은 재현이 어딘가 세상과 결별한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었고, 일순간 타오르던 불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었던 것 또한 재현이 세상의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순환을 반복하면서, 케이는 점차 한국에 정착한 모든 것이 시시하다고 느끼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유일한 이상향이었던 뉴욕, 그리고 써머와 댄을 광적으로 그리워하게 된다. 우울하고 무력할 때마다 자신의 찬란했던 뉴요커 시절 과거를 회상하며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케이의 전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사과는 써머와 댄 또한 다르지 않은 단지 ‘사람’임이 밝혀질 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내세우는 포장의 외견과 견고함만이 다를 뿐이지 사실 본성은 동일하다는 논리를 주장하면서, 케이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도록 만든 것이었다.

 

 

3

 

<천국에서>를 읽으면 김사과의 전작들과는 다른 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인물들의 행동 묘사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배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나열하여 객관적으로 보이고자 애썼던 <02>와는 다르게, 김사과는 사회 전반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과 안정적인 경제 상황 속에서 자라났으나 간헐적인 경제위기의 지속으로 인해 시장이 외면할, 이 중산층 젊은이들이 처한 슬픈 상황을 소설 안에서 가감 없이 내보인다.

 

“끝장이 나려면 아직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쥐어짤 수 있을 때까지 쥐어짜는 것. 그건 전형적인 자본의 속성이 아니었던가.”(천국에서, 91쪽)

 

르포르타주 또는 저널리즘에 가까운 이 소설은 사실상 케이와 주변 인물들의 상호작용이 하나의 이야기로 집약되는 소설의 일반적인 구조보다는 케이의 행동들이 과연 정당한가를 판단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케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고 머무르기도 하고 종래에는 지나쳐 가지만, 인물들은 결국 케이의 행동을 평가하고, 자신의 시각에서의 케이를 기준으로 케이를 대한다. 사회가 그러하고, 인물 개개인이 그러하다.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을 아무리 만나고 이야기해도 그저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케이가 뉴욕의 자유분방함을 잊지 못해 그토록 매달렸던 써머조차도 다를 바 없다.

 

그러하여 이 소설에서는 유일한 개척자, 케이의 결심 내지는 발걸음이 그렇게 외롭도록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떠난다. 단적으로 방황하던 케이가 치킨집 남자의 인생사를 듣고, 무엇인가 그럴듯해 보이고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는 수족관 이야기를 경청하고, 케이의 모든 걸 안다는 듯이 굴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빛 같이 보일 무렵에 케이의 몸을 더듬는 행동은 몇 페이지에 걸쳐 장광하게 늘어놓았던 서사로 하여금 품게 만들었던 설득력을 모조리 무너뜨린다.

 

“내가 요새 케이 양 나이대 애들을 보면, 시기 질투가 아니라, 진짜 그런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아주 그냥 뭐냐, 수족관 속 물고기들 같아요. 온화한 열대 바다도 아니고 진짜 완전 수족관. 그래, 요새 수족관들 별거 별거 다 있더라. 진짜 바다 같애. 그래서 거기가 진짜 바다라고 믿어버리는 거지. 근데 그거 진짜 바다 아니다?”(천국에서, 298쪽)

“수족관 속에 있는 물고기가 수족관을 부수면 어떻게 돼? 죽겠지. 뻔하지. 하지만 수족관 속에 있는 건 살아 있는 거야?”(천국에서, 339쪽)

 

케이의 천국은 뉴욕에서, 애인이었던 재현으로, 또 새 애인 지원으로, 댄과 써머로, 마지막으로는 수족관 안의 자신으로 이동한다. 케이는 자신이 속한 천국에서 고통스럽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묻는다. 만일 고통스럽다면 천국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자신의 천국을 포함해서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느냐고. 이 지점에서 김사과는 한 번 더 성장한다. 무력감에 사로잡혀 폭력 이외의 타협점을 찾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전작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타인을 분노에 못 이겨 무자비하게 죽여 버리거나 세계 자체를 부수는 대신, 케이 자신의 온전한 선택으로 앞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다시 말해, 김사과가 내고자 하는 목소리의 방향성이 세워진 것이다.

 

“아니, 난 더 이상 우연을 믿지 않겠다. 더 이상 믿지 않겠다. 아무것도, 흘러가도록,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천국에서, 341쪽)

 

김사과는 이것을 케이가, 나아가 우리가 굳건히 내딛어야 할 결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더 이상 케이는 두렵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천국에서 통증을 느낄 때 두렵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케이가 기억의 푸른 물을 두고 달렸듯, 끝내 온몸으로 부딪혀 봐야만 알 수 있을 테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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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별님, 안녕하세요? 김사과 작가의 장편소설 『천국에서』를 전작인 『02』·『미나』 등과 비교해서 쓴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럼 퇴고할 때 한번 생각해볼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02』·『미나』 등에 대한 일반적 평가를 넘어서 비평의 임무 중 하나는, 어떤 작품에 대한 기존 독법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윤별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김사과가 그토록 표출하던 분노에는 방향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화는 나는데 정확히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니 인물의 갈등을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은 이미 비평계에 제출됐던 논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품을 꼼꼼히 읽으면 윤별님만의 다른 견해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사과의 작품은 말하자면 ‘정확히 무엇에 대해 분노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없으므로 폭력적인 세계에 (자기) 폭력적인 양상으로 대응한 것’이라고요. 분열증적 세계에 분열증적 방식으로 맞선 작가의 태도가 그렇게 단순한 감정 폭발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윤별님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인물들의 행동 묘사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배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나열하여 객관적으로 보이고자 애썼던 와는 다르게, 김사과는 사회 전반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과 안정적인 경제 상황 속에서 자라났으나 간헐적인 경제위기의 지속으로 인해 시장이 외면할, 이 중산층 젊은이들이 처한 슬픈 상황을 소설 안에서 가감 없이 내보인다.” 윤별님 지적대로 『천국에서』가 전작들과의 연속선상에 놓이면서도 달라지는 분기점의 작품이라면, 『02』·『미나』 등에 잠재된 (그러나 아직 제대로 설명된 바가 없는) 가능성―시스템을 문제 삼는 시선의 정체를 상세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2) 자기주장에 대한 근거 들기 이를테면 다음 문장들에 대한 근거가 마련돼야 이 글에 좀 더 설득력이 생길 겁니다. “쉬어갈 틈조차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하는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와 행동거지들은 지극히 명료하고 객관적인(척하나 굉장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김사과 특유의 문체로 서술되곤 했다.” → 김사과 특유의 문체에 대한 구체적 예를 들고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이 지점에서 김사과는 한 번 더 성장한다. 무력감에 사로잡혀 폭력 이외의 타협점을 찾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전작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타인을 분노에 못 이겨 무자비하게 죽여 버리거나 세계 자체를 부수는 대신, 케이 자신의 온전한 선택으로 앞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다시 말해, 김사과가 내고자 하는 목소리의 방향성이 세워진 것이다. ‘아니, 난 더 이상 우연을 믿지 않겠다. 더 이상 믿지 않겠다. 아무것도, 흘러가도록,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천국에서, 341쪽)” → 윤별님의 주장이 소설의 한 문장 인용만으로 뒷받침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 제가 2014년 『자음과모음』 봄호에 『천국에서』를 다룬 비평을 하나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 참고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예컨대 아래에 인용하는 제 글의 일부는 윤별님의 해석과 배치되니까요. 「천국은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다. 『천국에서』는 케이의 순례를 통해 이 세계 전체가 위계화 된 지옥임을 폭로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결말부에서 “아무것도, 흘러가도록,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341쪽)라고 의지를 다지는 케이의 모습은 억지스러운 전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라리 ‘아픈 천국’에서 살고 있는 한 시인처럼 “괴로워했으므로 다 나았다, 라고 말할 순 없을까.” 그동안 김사과의 작품을 따라 읽어 온 독자에게 출구 없는 세계의 틈새―미래 가능성을 암시하며 마무리하는 이 소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합 300쪽이 넘는 장편에서 2쪽이 채 되지 않은 분량에 할애된 희망은 너무 희박하다. 단순히 비중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김사과의 야심은 작가로서의 소설 쓰기보다는 문화평론가로서의 비평 쓰기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작가의 육성인 편집자적 논평은 소설 ‘2부의 1’(90~97쪽)을 비롯한 곳곳에서 출현한다. 예컨대 “쥐어짤 수 있을 때까지 쥐어짜는 것, 마지막 한푼까지 뜯어내고 마는 것, 그건 전형적인 자본의 속성이 아니었던가.”(91쪽)라는 구절은 소설이 아니라 논평의 문장에 가깝다.」

    • 2018-01-02 10: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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