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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화 되는 인간과 진짜 인간-이승우 중추완월

  • 작성자 cum
  • 작성일 2017-09-08
  • 조회수 1,213

인간의 부품화와 진짜 인간

 

중추완월을 읽다보면 소설 전체가 거대한 상징 하나를 끌고 나간다.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상징을 끌고 나가기 위해서 모호함이라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이 하나의 부품 혹은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에 대한 내용인 거 같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인 위에 대해 살펴보면 아무 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위가 지금 하고있는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위는 기억을 잃었다. 이는 그가 일하고 있는 곳이 범죄조직이라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추정하기에는 단서가 너무 모자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위가 어느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 기억을 잃었다는 것 같다. 위를 보편적인 사람들로 해석해보면 이런 말이 나름 일리있어 보인다. 우리가 어떤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회사의 가치관에 내 가치관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회사들은 그런 것들을 자신들이 바라는 인재상이라고 하며 그런 사람을 선호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 말을 뒤집어 말하면 그런 사람을 뽑겠다는 거다. 즉 우리는 인재상이 되기 위해서 내 자신이 생각하는 인재상을 버리고 회사라는 곳의 부품이 되는 것이다. 위가 과거의 기억을 잃은 것도 그런 부분의 연장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에 편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보면 상상계를 뛰어넘어야만 상징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라캉의 이론인데 그런 면에서 위라는 인물은 인간의 보편적임으로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위가 일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위는 사람을 죽이고 해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해치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까지 타락해버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고민하지도 않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 학교에 와서 제일 많이 느낀 부분이 그런 부분이다. 최소한에 무언가를 창작해내는 사람은 그러지 말아야하지만 나 역시 글을 왜 쓰는지에 대해 잊고있었다. 작가는 이런 부분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공지능 보다 대단한 면은 인식을 하고 생각해내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인간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은 그런 부분에서 보면 퇴화한 인간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퇴화한 인간이기 전에 기계화 되어버린 인간이라는 거다.

위는 그러면서도 인간의 온기에 대해 그리워한다. 이건 단순한 기계가 될 수 없는 인간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다. 그렇지만 알파고 등의 인공지능을 보면 이젠 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기계라고 하면 생각나는 속성이 차갑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철이라서와 같은 이유가 아니다. 그건 기계의 한계가 지식이나 지성에 국한되어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이성과 함께 지식,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생물체다. 인간이 아무리 기계화가 되어도 완전한 기계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본능이 향하고 있는 곳이 온정이기 때문에 계속 돌아가려 하는 걸로 추정해볼 수 있다.

주인공이 계속해서 망설이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다. 연어에게는 산란한 뒤 강으로 다시 올 수 있는 귀소본능이 있다고 한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신이 비록 망가지기는 했지만 그 전의 상태로 돌아가려하는 귀소본능이 작동하는 거다. 그래서인지 위는 자꾸,인간으로 돌아가려 하고 온정을 느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는 위를 다른 등장인물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중화권 국가로 추정된다. 중화권 국가의 경우 많은 인구수를 장점으로 내세워 산업화를 쉽게 이루었다. 즉 인간을 하나의 부품으로 여긴 것이다. 이런 사회의 특징 역시 소설의 거대한 알레고리를 이끌어가기 위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중추완월의 작품성은 사실 뭐라 표현하기 힘들다. 잘 쓰기는 했지만 끝까지 풀 수 없는 상징 몇가지들이 있다. 그렇지만 시에서 자주 사용하는 느낌의 표현방식을 소설에 끌어온 것이 이 소설의 작품성이라 여겨진다.

c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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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희

    안녕하세요? cum님은 현재 출간되는 한국 소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데요.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이 글을 고치실 때, 참고하실만한 점을 조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오자와 비문의 문제 「중추완월(中秋玩月)」이라는 소설은 중견 소설가 이승우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신인 소설가 이상우 작가의 작품이지요. 그런데 cum님은 제목에 「부품화 되는 인간과 진짜 인간-이승우 중추완월」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오자라서 반드시 고치셔야 합니다.) 본문의 제목은 또 다릅니다. 「인간의 부품화와 진짜 인간」이라고 되어 있지요. 짧은 글인데 제목이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중추완월을 읽다보면 소설 전체가 거대한 상징 하나를 끌고 나간다.”라는 첫 문장은 비문입니다. ‘읽다보면’과 ‘끌고 나간다’가 호응이 되지 않지요. 이 문장에서 ‘읽는 주체(주어)’는 cum님인데, ‘끌고 나가는 주체’는 「중추완월」이니까요. 한 문장의 주체를 통일시켜야합니다. 예컨대 이 경우는 문장을 이렇게 바꾸셔야 해요. ① “중추완월을 읽으면 소설 전체가 거대한 상징 하나를 끌고 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② “중추완월은 거대한 상징 하나를 전체적으로 끌고 나가는 소설이다.” ①과 ② 어느 쪽을 택하셔도 되지만, 저라면 간결하고 명확한 뜻을 가진 ②를 택할 것 같습니다. cum님 글에서 오자와 비문을 먼저 지적한 이유는, 이 글이 별로 퇴고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제대로 퇴고하지 않은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곤란합니다. 이 글이 좋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도, 오자와 비문은 글에 대한 가치 평가를 떨어뜨리지요. 이 점을 주의해주셨으면 합니다. (2) 해석의 단순성 문제 cum님이 「중추완월」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문장으로 집약됩니다. “내 생각에는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이 하나의 부품 혹은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에 대한 내용인 거 같다.”(이 문장도 어색합니다. 다음과 같이 고치는 것을 고려해보기 바랍니다. “이 소설은 하나의 부품 혹은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데 저는 이 소설이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 대한 평을 참조해보면 더 그렇습니다. 「중추완월」은 2011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된 작품인데요. 그때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에 대해 코멘트한 부분을 조금 옮겨 보겠습니다. 〈“이미지로 읽는 이의 감관을 자극하여 매혹으로 이끄는” 작가,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이미 포로가 되었음을 당혹스럽게 시인하게 만드는” 작품(문학평론가 차미령), “인물의 심정에 대해 일일이 말하는 것보다 어떤 이미지를 장악하는 것이 문학적으로 상수(上手)에 속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상수 중의 상수”(문학평론가 황종연)다.〉 꼭 심사위원들의 방식대로 이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저는 이 심사평이 「중추완월」의 매우 중요한 점을 짚어내고 있다고 봅니다. 「중추완월」이 서사가 중심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소설이라는 점입니다. cum님도 마지막 문장에서 이 부분을 언급했습니다. “중추완월의 작품성은 사실 뭐라 표현하기 힘들다. 잘 쓰기는 했지만 끝까지 풀 수 없는 상징 몇가지들이 있다. 그렇지만 시에서 자주 사용하는 느낌의 표현방식을 소설에 끌어온 것이 이 소설의 작품성이라 여겨진다.” ‘시에서 자주 사용하는 느낌의 표현방식’은 이미지의 요소를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cum님은 다른 무엇보다, 이 부분에 천착해서 소설을 분석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의 설득력이 약화된 것이지요. (3) 이론의 오남용 문제 작품을 분석하는 데 이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을 사용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론은 반드시 적재적소에 써야 하지요. cum님은 정신분석학-라캉의 이론을 이 글에서 썼습니다. “즉 우리는 인재상이 되기 위해서 내 자신이 생각하는 인재상을 버리고 회사라는 곳의 부품이 되는 것이다. 위가 과거의 기억을 잃은 것도 그런 부분의 연장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에 편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보면 상상계를 뛰어넘어야만 상징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라캉의 이론인데 그런 면에서 위라는 인물은 인간의 보편적임으로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cum님이 라캉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에 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정도의 설명을 하기 위해서였다면, 굳이 정신분석학을 거론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사용하기로 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정신분석학-라캉의 논의를 진전시켜야 했습니다. 또한 저에게 「중추완월」은 상징계가 아니라, 상상계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작품으로 보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cum님이 라캉의 저작을 직접 읽기는 어려우니, 슬라보예 지젝이 쓴 『HOW TO READ 라캉』이라는 책을 우선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 책에는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체스 게임에 비유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상상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이 구절을 잘 읽어보면(물론 더 깊은 공부도 필요합니다), 여러 가상적 게임의 세계를 주관하는 상상계적 측면에서 「중추완월」을 더 상세하게 해석할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이론을 작품에 편의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cum님이 이 점을 꼭 기억해두고 글을 새롭게 고치셨으면 합니다.

    • 2017-09-10 00:13:45
    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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