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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와 비논리를 직면하며 한국문학의 전통을 깨뜨리다: [미나], 김사과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09-29
  • 조회수 801

 한국문학의 전통, 그리고 김사과
으레 한국문학이라 함은 이별의 정한을 담고 있거나 자연친화적이면서 여운을 남기는 글들을 칭한다. 이상향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지조와 절개를 담고 있으면서 풍자와 해학으로 미의식을 드러내는 수준 높은 글들이 한국문학의 이름표를 달아 전해 내려져 왔다. 이 전통은 한국문학작품의 완성도를 판별하는 중요한 척도로 작용했다. 전통에 부합하는 소재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최근까지 규율은 없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평론가와 독자들 모두 열거한 원칙들에 부합하는 작품을 대작으로 인정한다. 사람의 본성은 다름을 배척하는 것으로부터 생동한다. 생존을 위한 무리의 판별이다. 이 아름답지만 진부한 클리셰를 여태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며 작품을 짓는 근거이다. 동질감만으로도 하나가 된다. 여러 세기에 걸쳐 습득한 존립의 방법이다. 군중심리에 동요되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다량의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 한국문학의 전통을 완전히 깨뜨리는 작가가 있다. 흔해빠지고 진부한 사랑은 그의 소설에 존재할 수 없다. 외려 여타 사건들에 왜소한 체격으로 대항하다가 잡아먹힐 뿐. 김사과의 글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자신의 분노를 그대로 표출한다. 그의 등단작부터 기묘했다. 기묘하고 기괴했다. 평론가들은 활자에서 느껴지는 날것의 분노와 적나라한 묘사에 경탄했고 몇몇 독자들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저들이 마주하지 않고자 하는 세상을 김사과는 직면한다. 가식의 가면을 벗겨내고 나체를 드러낸다. 애써 외면했던 사회의 모순들을 눈앞에 들이민다. 김사과는 작가다. 작가의 소임을 다하는 작가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김사과의 소설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사회에 기반을 둔 디스토피아적 신념과 아방가르드적 예술성은 한국문학의 전통성을 부정한다. 지금 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힘든데 도대체 무엇이 전통이고 무엇이 현대란 말인가?

 

 김사과, <미나>
김사과가 지금까지 투고한 작품 중 걸작을 꼽으라고 하면 필자는 망설이지 않고 <미나>를 택한다. 물론 <02>와 <천국에서> 또한 그에 준하는 수작이나 미나는 장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주인공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각각의 인물들의 감정표현과 그에 어울리는 문체 선정이 천재적이라고 평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이다. 신예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영이>를 발표하던 시절부터 김사과의 독창성은 빛났고, 피크에 도달했을 때의 작품이 <미나>라고 볼 수 있겠다.
<미나>는 대부분의 한국문학이 그렇듯 이상향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이상향이 유토피아, 즉 미의식을 자극하는 순수함을 불러일으켰다면, 김사과의 이상향은 꼭 디스토피아와 아포칼립스의 혼재를 그리게 하는데 이것은 기존의 한국문학의 전통이라고 불리던 틀을 깨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병리학적 지점에서 <미나>의 주인공 수정은 정서적 결여와 분리장애, 그리고 경계선 인격장애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대체적으로 지니고 있는-그러나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각하는 행위조차 죄악으로 여기는-정신분석학적 문제들이다. 김사과는 사회의 염증을 그대로 직면하고 돌파한다.
또 다른 주인공 미나 또한 수정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둘 다 현대사회의 부조리함과 모순점을 인지하고 염증을 느끼며 증오와 경멸을 품고 있는 동시에 무관심한 태도를 내비친다. 둘은 사회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은 서로를 이해한다.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명민한 미나와 수정은, 더 나아가 아이들은 세계에서 비추어지는 핑크빛 미래가 허상과 허영과 가식과 황홀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렇기에 세계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개념과 질서와 규칙과 법률들을 배반하고 무시하고 증오한다.
이것은 수동화이다. 수동화는 세계에게서 감각을 제거하는 행위이다. 무뎌지고 무뎌져서 이제는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수동적인 세계를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경멸이다. 경멸과 무관심으로 대응함으로서 아이들은 세계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성을 인정한 이들은 낙오자로 치부한다. 이것은 방어기제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이 방어기제가 깨지는 것은 자살과 살인이 일어날 때뿐이다. 이 때 방어기제는 필요가 없어진다. 세상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던 감정의 전원을 내려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박지예가 자살함으로서 미나와 수정은 세계의 타자성을 인식한다. 자신과 세계는 별개의 문제이다.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시험을 보아야 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에서 미나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무관심을 꺼뜨려버린다. 수정은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나가 떠난다. 그래서 수정은 미나의 슬픔을 질투한다. 질투는 애착과 사랑을 유발하고 극단적으로 피폭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어야 한다. 미나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간단하다. 죽이면 된다. 소유의 개념으로 전락시키면 된다.
수정의 사고방식은 전형적인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의 사고방식이다. 다가올 때는 불안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유하고 싶어 한다. 두 충돌은 사람의 정신을 공격해 두 인격이 마치 한 몸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다가온 사람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한다. 수정은 21세기의 엘리트들의 극단적인 표상이다. 사회의 염증을 느끼고 무관심과 증오로 일관하지만 영리한 수정은 제게 유리한 것을 인지할 만큼 영악하다. 수정은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이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는 수정의 논술 답안에서도 드러나는데, 조악한 세계를 완벽한 글로서 박제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서 떠나려 하면 극단적인 부정현상을 보이며 폭력적이고 악하게 변모하는 경향이 있다. BPD(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중립은 없다. 오로지 선과 악만 존재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밀하게 붙어 다녔던 이가 오늘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악이 되는 것이 BPD의 주요 증상이다. 그렇기에 수정에게 중립은 없다. 미나는 이제 절대선이 아니라 절대악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하기 위해 다가갔으나 미나는 이미 수정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수정이 낙오자로 부르는 그 세계에서 미나는 만족하고 살아간다. 수정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완벽주의를 작품 전반에서 드러낸다. 알 수 없으면 알아내야만 하고 완벽하지 않으면 완벽해야만 한다. 이것이 수정이 미나를 죽이는 이유다. 자신이 모르는 감정을 알기 위해서.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 정당화 현상에 의해 이것은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자신의 권리라고 수정은 생각한다. 수정의 감정은 극에 달한다. 미나를 죽이기 전 아기고양이를 죽일 때, 수정은 일시적 해리상태를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수정은 생물에서 무생물로 전락한다. 의식이 있는 상태의 수정은 생물이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수정은 무생물이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아니라며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 사람이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사용하는 제1단계 방어기제다.
미나를 죽일 때 수정은 고백한다. 이제야 네 심장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노라고. 수정은 황홀해한다. 정복감과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쾌락은 어떠한 행위로도 대체될 수 없다. 수정은 그것을 안다. 마침내 수정은 미나의 심장을 손에 쥔다. 감정을 느꼈을까? 작가는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수정은 행복해한다. 몰랐던 지식을 마침내 습득했다는 것에 대한 흥분감과 미나를 드디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성취감의 혼재다.
지금까지 수정이 알고 있던 세상은 자신이 노력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세상이다. 곧 기출문제나 수학문제와도 같은 것이다. 기출문제는 글 안에서 내내 수정의 세상으로 표상된다. 가장 안락하고 아늑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이것은 수정에게 절대적 진리이고 수동적 행태를 취하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공리이다. 동시에 어른들이 주입하려는 거짓된 정보이고 십대들이 나름대로의 시기를 거치면서 거짓임을 알아가게 되는 한 가지의 작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수정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인정하지 못해서 죽여야만 한다. 이것은 수정의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는 계획적 범죄다.
수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답이 없는 난제를 인정하지 못한다. 수동성으로 무장하고 있던 수정에게 닥친 최초의 난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수동성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미나이다. 난제는 풀어야만 한다. 수정의 세상에서는 그렇다. 엘리트의 길을 걸어왔고 어른들이 쌓아올린 모든 사고방식과 정치적 교육적 체제를 부정하고 깔보고 우스워하면서 자라난 수정은 그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수정은 미나를 죽임으로서 난제를 해결한다. <미나>는 수정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제시함으로서 맺음을 인정한다.
사랑이 애증으로 변하고 애증이 증오와 경멸과 살해의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상당히 비약적이고 격동적이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극단성을 지니고 있으나, 실은 그것이 사회의 염증으로 인해 벌어진 상처를 감추는 과정에서 드러난 피폐성을 눈앞에 가져다 둔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수정의 문제가 아니다. 미나의 문제가 아니다. 박지예의 문제도 아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어떠한 사람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의 문제이다. 김사과는 이러한 현실에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글을 택했고 <미나>는 정점의 폭발이었다.

 

 우리, 전통을 감지할 수 있는 순간은 없다
21세기의 우리는 SNS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한시라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면 우리는 불안해한다.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불안은 곧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뇌의 일부를 잠식한다. 세르토닌이 감소하고 도파민이 감소한다. 뇌는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한다. 더 강렬하게 인정받고 싶어 하며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기를 원하고 다른 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을 틀에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보인다. 세르토닌이 분비된다. 그것으로 청소년들은 안정감을 얻는다. 소속감을 느낌으로서 분리장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대표적인 한국문학의 전통인 이별의 정한은 김사과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다. 김사과의 소설에서 이별은 곧 문제의 해결을 암시한다. 수정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함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튼다. 앞서 말했던 방어기제다. 자살과 살인의 간극 간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숨구멍을 마련한 셈이다. 수정과 미나의 이별은 수정의 난제가 해결되었음을 암시한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다분히 드러난 이 장면은 외려 쾌락과 성취욕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SNS는 단문장으로 이루어진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열거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주식 시장은 요동치며 전 세계에서는 각국의 회담과 정치며 경제 이야기들을 보도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지식에 노출되어 있다. 수많은 만남이 있고 수많은 이별이 있다.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 외의 일회성의 사람들을 전부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너무 잦게 경험한다. 이별의 정한과 슬픔에 빠져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한심하고 무능력하며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찍는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별에 익숙해져야 한다. 마음정리에 익숙해져야 한다. 슬프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미나>에서 미나는 부유한 삶을 누린다. 복권에 당첨되어 얻은 부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부의 축적은 당연한 일이다. <미나>에서 자연을 묘사한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미나>의 문체는 간결하고 건조하며 심지어 유치하기까지 한데, 이것은 황량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었던 옛 상황과 대조된다. 문서에 따르면 산업화 전의 한국, 그리고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조선과 고려는 산천이 아름답고 초목이 우거져 있으며 동물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자연친화적인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뿐이고, 자연히 자연친화적인 작품들을 써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고 4차 산업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자연친화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 집필된 것이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극대화하는 김사과의 글은 이 같은 사회상황을 잘 보인다. 자연을 칭송했던 옛 시조와는 달리 김사과는 세상을 ‘칸막이’로 단정 지어 버린다. 얼마나 척박한가. 그리고 얼마나 직설적이고 현실적인가!
한국문학에서 이상향은 유토피아와 무릉도원의 집합체로 보인다. 걱정근심 없는 세계를 추구하고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이상향은 그 시절을 회고하여 보았을 때 당연한 순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김사과는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던 이상향을 깨뜨린다. 김사과의 이상향은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디스토피아적 아포칼립스다. 중세와 근대 작가들이 보이는 자신과 실제 자신의 괴리에서 괴로워하고 이상향을 추구하는 반면 김사과는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격렬한 분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이 내면 세계를 어떻게 잠재울 것인지, 또는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이상향이 파생된다. 고로 김사과의 이상향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직설적인 경향을 내보인다.
풍자와 해학은 김사과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문학에서 내려오는 전통을 파괴한 대표적인 예이다. 김사과는 풍자와 해학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날로기(analogy)와 비유조차 굉장히 적고 건조한 문체의 특성을 살려 간결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단어의 사용이 굉장히 적절하고 동적이기에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고 몰입도도 굉장히 높다.
김사과는 죽는 장면을 풍자하거나 해학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날것 그대로, 최대한 잔인하고 최대한 아프고 최대한 그로테스크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의 범주 내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여타 작가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적나라한 묘사들을 김사과는 해낸다.
묘사를 위해서는 어떠한 대상을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끊임없이 상상해야 하고 이것저것 생각해야 하고 고려해야 한다. 끔찍한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나 과거에 트라우마가 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꼭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모습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상당하다. 과거에 있었던 크고 작은 트라우마는 무생물보다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파생된 경우가 훨씬 많은데, 이 때문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억지로 바라보려고 하면 플래시백(flashback)현상이 일어나 트라우마 상황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액팅아웃(acting out)에 이르기도 한다.
김사과는 그것들을 견뎌낸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을 바라본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부하고 또 보통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대상에 대하여 행한 후 글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언어의 나체에서 비수로 꽂히는 말을 구현해내는 것이다. 김사과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오래 관찰하고, 더 오래 분석하고, 더 오래 곱씹은 후, 써 낼 때는 마치 불꽃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거친 문체를 사용한다. 그래서 김사과의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김사과의 작품을 읽으면 손이 떨리고 숨이 거칠어지고 적어도 반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까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조리와 비논리를 인지하는 기폭제
한국문학의 전통을 지켜내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통들은 지금까지의 고전문학 속에서 속속들이 찾아볼 수 있다. 전통은 계승하는 것뿐만 아니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진부한 클리셰에서 벗어날 때이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들은 조금 더 적나라해져야 한다. 조금 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사회는 척박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다. 20대들은 취업난에 허덕이고 10대들은 입시에 허덕인다. 꿈은 무시당하고 짓밟히기 일쑤다. 어느 새인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우선시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세계는 황폐화되었고 모노톤으로 덧칠되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이상향만 좇고 있을 것인가?
작가들의 임무는 자신들의 주제의식을 보여 내는 것이다. 이를 이용하여 일제강점기 혹은 민주화시대의 작가들은 글로서 자신의 의식을 살아 있게 하였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양반 사회를 비판한 조선 후기의 작가와 시조로서 관리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파헤친 문인들이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되었다.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가? 비논리적이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암흑이 세상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몇몇은 이 세상을 바꿀 필요성을 다분히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 국한되어 있다. 그저 순응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은 어느 시대에나 같았다.
작가들은 이들에게 현실의 상황을 내밀어야 한다. 이것이 아무리 아프고 버겁고 또 힘들지라도 그래야만 한다. 직면하는 것이 자신을 망가뜨릴 것만 같아 두렵더라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모든 문제 타파의 시발이다. 이것이 첫발이 될 것이다. 이것이 혁명의 시초가 될 것이다. 김사과는 이러한 측면에서 작가의 의무를 성실히 다하고 있다. 폭력적이고 잔인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사회임을 극대화시켜 보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전통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지금껏 지켜 오던 전통을 깨고서라도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것이 앞으로의 한국문학의 발전에 있어 큰 범주를 차지할 것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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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의 입증과 분류 ─On point 기사에 대한 반박을 바탕으로   Abstract 우리는 재능이 존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바로 옆을 둘러보면 그것이 극명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보인다. 재능이 전부는 아니지만,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의 영향은 크다. 그러나 On point에서는 재능보다는 노력을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오히려 재능을 믿는 것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이 소논문에서는 그러한 기사들 두 개를 선정하여 논리적 허점을 파헤치며, 그 후 이상적인 재능분류의 모델을 설정하고 나아가 그렇다면 재능을 인정하면서 모두가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소고한다.   I. 서론 1. 연구동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향한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에 관계없이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경쟁을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는 인프라가 기본 토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성공의 기준이 개개인마다 다르다고 해도 사회의 시선에 따른 성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모든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일종의 계급이다. 모든 사람들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같은 노력을 해도 누군가는 훨씬 발전해 있고 누군가는 아래에 머물러 있다. 완벽히 같은 실력을 가진 두 사람을 임의추출하여 연구해도 둘의 연습시간이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다. 노력이 전부라고 주장한다면, 노력하고도 실패한 모든 사람들의 실패원인이 노력의 부재로 이어지는 문제점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의 원인이 다양하다는 것을 안다. 소위 재능이 노력한 방향으로 발달해 있지 않을 수도 있고, 재능은 있으나 환경이 뒷받침해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On point에서는 ‘노력한다면 뭐든 이룰 수 있어’ 따위의 허황된 이상을 제시함으로서 독자들-특히 독자들의 연령층이 청소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객관적으로 성인에 비해 전두엽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자신의 주관보다 타인의 의견에 쉽게 휘둘린다-의 판단력을 저하시키고, 성공하지 못한 이들의 원인이 전부 노력이라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비하한다. 이것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문제점이다.   2. 연구목적 이 소논문에서는 On point에 실린 재능에 관련된 기사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서 배척되었던 재능의 기준을 바로 세운다. 선정한 기사는 On point 3에 실린 Are Malcolm Gladwell's 10,000 hours of practice really all you need(by Dan Vergeno, 2014, National Geographic Creative)와 The truth about talent: Can genius be learned or is it preordained?(Matthew Syed, 2011, the independent)로, 모두 재능과 노력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기사들이다. 이로서 인정해야 할 재능에 관한 이야기는 인정하고,

  • 윤별
  • 2017-12-31
우리는 더 이상 여름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여름이 아니다 ─ 김사과, 『천국에서』, 창비, 2013     0   “여기는 천국이야. 그런데 왜 나는 울지? 이건 결국 같은 얘기야.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아? 왜 다 무너져내렸는데 아무것도 끝장나지 않지?”(천국에서, 337쪽)     1   <02>와 <미나>에 이르기까지 김사과의 작품들은 일관된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화를 주체할 수 없거나 무력하거나 슬프고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각자의 외줄을 타고 결국에는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머리가 아파. 우울해. 죽고 싶어.”(미나, 40쪽) “나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울었습니다.”(02, 98쪽) “안 죽은 거 다 알아! 일어나 이 씨발년아!”(미나, 292쪽) “우리는 슬프네. 자꾸만 슬프네. 날이 저물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네. 그래서 우리는 기쁘네. 우리는 기쁘네.”(미나, 308쪽)   쉬어갈 틈조차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하는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와 행동거지들은 지극히 명료하고 객관적인(척하나 굉장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김사과 특유의 문체로 서술되곤 했다. 각 인물들이 주장하는 폭력의 당위성은 그럴듯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어느 쪽에도 치중되지 않은 깔끔한 공연을 선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 찬찬히 살펴보면 감정을 온전히 배제한 문장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미나>의 ‘이수정’이나 ‘김미나’, 혹은 <02>의 ‘이나’나 ‘나’가 문장 사이사이에 교묘하게 묻어 있다. 이야기에 매혹되어 김사과의 목소리를 따라가면 어떠한 모순도 없이 김사과가 의도했던 결말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정말 이것들이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인지 작품 밖에서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그렇지 않다, 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현실을 완벽에 가깝게 투영한 김사과의 작품 속 배경과 인물들의 빈틈없는 설정들과는 달리, 극단에 가까운 사건들은 대부분 인물의 (불안정하고 날카로운) 심리 상태에 주로 의지하여 전개된다. 각별했던 친구를 죽이고 그 친구의 손윗형제와 행복하게 웃어 보인다던가, 인물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충동으로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 두 명을 연달아 죽이는 것은 이 세상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김사과가 그토록 표출하던 분노에는 방향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화는 나는데 정확히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니 인물의 갈등을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정보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인들의 타자화된 감정이나, 전작들의 소설적 배경이 되었던 입시 사회의 답답한 현실에 울분을 터트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러면 김사과가 지향하는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굳이 답한다면, 어차피 이 세계는 썩어빠졌으니 모조리 파괴하는 것만이 답이며 그

  • 윤별
  •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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