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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둘째, 셋째 주 장원

  • 작성자 케이k
  • 작성일 2015-04-03
  • 조회수 347

이번에 너무 늦게 장원 선정 글을 올리게 되어 많이 기다리셨지요? 그 사이 황사도 몇 번 지나가고 완연한 봄이 되어가고,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덧 4월이네요! '시간이 쏜 살과 같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 너무도 사실적으로 체감되는 즈음입니다.

3월 둘째, 셋째 주 장원으로는 러블리아 님과 폴립 님의 글을 선정합니다. 분량이란 것은 사실 부차적이겠지만, 두 글 모두 길어질 수밖에 없는,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 매우 잘 전달되더군요. 그럼 다음 리뷰를 참조해주세요.

 

* 배배 님의 글 두 편은 함께 다뤄보겠습니다.

<개와 더불어 개같이-이문재 산문집>는 ‘작가 이문재의 독특성=>대상 텍스트에서 공감한 내용=>이문재의 산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바=>책 속 인상적인 점’의 순서로 쓰여진 글입니다. 문장이 간결하고 간결함에 반영되었을 정리정돈 잘 된 사고습관이 엿보이는 글이었는데요. 아무래도 글의 분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쳐가는 인상 정도만 서술된 느낌이 강합니다. 글의 골격만 있는 느낌이랄까요.

또한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이 글은 ‘이 소설에 대해 쓰기로 한 이유=>작가 김영하의 실제 발언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간략 줄거리=>인상적인 구절 소개’의 순서로 쓰여 있습니다. <개와 더불어 개같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간결하고 명료한 구성입니다. 그런데 역시 이 글에서도 아직 피와 살이 붙지 않은 골격의 느낌이 강한데요. 가령 ‘TED강연에 대한 소개’ ‘소설 속 설정인 알츠하이머 병이 소설 줄거리 상 하는 역할 또는 의미’ ‘시간과 늙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부분적인 내용들부터 보강하다보면 뭔가 글이 실감과 육체를 얻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두 편의 글로 처음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는데, 다음 글들은 이번 글들과 같은 단단한 골격 뿐 아니라 피와 살이 덧붙여진 좀더 생생한 글을 기대해 봐도 되겠지요?

 

* 러블리아, <배우지 않아도 진짜 화가와 진짜 작가는-이수지, 감상문>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보고 있을 어느 시의 화자가 오버랩되는 글입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우리는 종종 아쉬워하고 그때의 선택이 지금 얼마나 많은 것을 변화시켰는지 생각하곤 합니다. 지금의 나는 이 길을 가고 있지만, 그때 내가 그 가지 않은 길을 갔더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 글은 글쓴이의 표현을 빌자면 바로 그 “꿈을 접은 자리에 새로운 꿈을 채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말해 이 글은 이수지의 소설 <나의 명원화실>에 대한 감상문입니다. 소설을 읽어가며 독자로서의 순간순간의 감상을 구체화하며 서사화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감상, 비평문의 경우 대상 텍스트와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 글은 그 거리두기라는 암묵적 룰과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대상과 밀착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략으로서 텍스트와 밀착된 글쓰기라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텍스트와 밀착될 수밖에 없는 글쓴이의 경험과 그 표현의 진정성이 가늠되어 좋았습니다.

그림으로든 글로든 사실 ‘나’의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누군가가 읽어주고 보아주고 알아줄 때의 환희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겠지요. 글쓴이의 말대로 ‘진짜 작가’ ‘진짜 화가’란 어쩌면 전적으로 타인들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라기보다, 타인이나 세상과 소통하는 중의 기쁨과 깨달음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일 겁니다.

더 많이 소통하고 동력을 얻는 글쓰기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 폴립, <모순>

스티븐 킹의 소설 <그린 마일>에 대한 감상 비평문입니다. 1년 전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에 대한 글쓴이의 도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저로서는 우선은 반가웠고, 그리고 다 읽고 나서는 그때보다 여러모로 발전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일단, 문장력이 좋아졌어요. 이전 이야기를 하는 게 반칙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전 글들에 비해 비문, 오문이 거의 없네요. 다루는 텍스트가 달라져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이전 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난해함을 배가시키는 느낌을 주었다면, 이번 글은 확실히 문장과 전체 구성이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가독성 측면에서는 다소 독자를 의식해야 할 부분이 좀 있으나, 6번 챕터를 읽고 나니 폴립 님의 스타일이 확실히 이해가 되네요.

또한 “정말 좋은 작품은 절대 바로 감상을 쓴다거나, 남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다.” 이 구절은 개인적으로도 공감이 많이 됩니다. 이는 아그책 님의 글쓰기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느낄 고충이기도 할 것 같아요. 확실히 파토스가 차고 넘치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절히 조절하고 재구성해내는 것도 능력이니까요.

마지막으로, 폴립 님의 글이 좀더 가독성을 가질 수 있으려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주관적 감상이나 비평에서 시작하지 말고, 앞부분에서 텍스트의 줄거리라든지, 작가에 대한 소개 등의 객관적 사항부터 간략하게 정리, 소개하고 시작하는 게 어떨까 해요. 챕터를 나누기는 했으나, 그것을 통합하는 내러티브가 없는 느낌이어서 아쉽거든요. 그것을 무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줄 객관적 내용 정리. 즉, 도입부를 좀 신경 쓰면 훨씬 가독성이 있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글 기다려 봐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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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k
  • 2015-07-10
5월 마지막 주 주장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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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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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k
  • 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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