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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 우리의 사회에 던져진 커다란 질문.

  • 작성자 백년어 물고기
  • 작성일 2014-01-30
  • 조회수 1,456

 

 

 

케빈에 대하여. -우리의 사회에 던져진 커다란 질문.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 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져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질문을 하나씩 해결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영화가 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케빈에 관하여가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영화라는 평을 받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최근 몇 년간 인터넷에는 이런 질문들이 돌아다녔다.

 

당신은 당신의 원수와함께 산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신의 원수가 낭떠러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그냥 간다.

2 구해준다.

3 손을 밟는다.

4 손가락을 하나씩 땐다.

 

사이코패스의 대답: 4번을 선택한다.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때면서 고통을 느끼도록 하기 때문이다.

 

위의 질문은 한때 인터넷과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다녔던 사이코패스 테스트이다. 이같이 사이코패스는 어느 순간, 우리들 사이에서 화두가 되기도 하였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영화의 주인공은 케빈이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케빈은 사이코패스보다는 소시오패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둘은 비슷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행동에서 죄책감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죄책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케빈은 자신의 엄마에게 대하는 태도와 아빠에게 대하는 태도가 극명하게 다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여동생에게 냉정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눈을 찌르기까지 하지만 엄마에게 대하는 태도는 악랄하기가 그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다. 케빈은 자신의 행동이 엄마에게 크나큰 고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아빠와 즐겁게 노는 와중에도 엄마를 향한 차가운 미소를 발산하는 모습에서 케빈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동생의 눈을 찌르고서 자신은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엄마를 향한 화살에 촉을 더 날카롭게 하기 위한 거짓말일 뿐인 것이다.

 

실로 케빈에 대하여의 줄거리를 정말로 간단히 소개해보자면 하룻밤의 속도위반으로 아이를 갖게 된 에바와 프랭클린은 케빈을 기르게 된다. 하지만 케빈은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라게 된다. 배변활동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고, 아빠와 엄마에게 대하는 태도와 확연히 다르며, 일부러 엄마를 골탕 먹이기까지 한다. 케빈은 청소년이 되어서도 교묘하게 엄마를 괴롭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적어놓고 보면 간단한 스토리이지만 이 영화는 절대로 간단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캐릭터들의 감정들이 서로에게서 조금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내고 있고,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반항도 아닌 케빈의 행동은 관객들에게 의아함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결국 이 줄거리를 이끌어나가는 힘은 케빈의 소시오패스적인 성향과 에바의 현실과 케빈의 반항에 대한 대응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영화의 장치들은 캐릭터의 감정과 스토리를 절묘하게 엮어내어 영화 전체를 힘차게 이끌어나간다. 영화가 진행되는 간간에 반복적으로 드러나며 줄거리와 교묘하게 엮어있는 장치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에바의 혼란을 표현한 장면들이다. 영화의 초반, 에바의 집은 빨갛게 칠해져있고, 에바는 이유 없이 뺨을 얻어맞고도 숨을 죽인다. ‘과연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풀어가는 것처럼 영화는 전개되어 가고 있다.

또 하나. 분명히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평온하고, 발랄한 BGM들이 거슬리는 장면들이 있었다. 영화의 분위기 조성은 BGM이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케빈에 대하여는 영상과 전혀 맞지 않는 BGM으로 에바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또한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여 보여주며 한시도 쉬지 않고 에바의 심경을 흔들고 있는 영상들은 매 순간이 명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번째는 에바의 극복의지이다. 차 앞 유리의 페인트를 닦아내기, 현관의 페인트를 물로 씻어내기, 유리의 페인트를 긁어내기. 이처럼 에바는 차례대로 차와 집의 페인트를 제거해 나간다. 그리고 그 장면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케빈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이 옳은 대화이든 비정상적인 대화이든 말이다. 이는 케빈이 스스로의 의지로 지금의 고난을 극복해나가고 있는 의지를 뚜렷하게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갓난아기였던 케빈을 안지 못하던 에바를 다시 일어서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에바는 케빈에게 쏟지 못한 애정을 뒤늦게 서야 얼룩을 지우며 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영화는 여러 가지 장치들도 에바의 혼란과 희망을 교차하고 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에바를 괴롭히던 스토리는 케빈의 태도변화로 잠깐 관계의 개선가능성을 내비춘다. 에바가 읽어주는 화살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케빈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이 행동조차 좀 더 에바를 철저히 무너뜨리기 위한 케빈의 전략이었음을 알게 된다. 잠깐의 달콤함으로 방심했던 에바는 다시 끔찍한 케빈의 채찍질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는 이쯤에서 케빈은 정말 지능적인 소시오패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케빈의 극악무도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케빈은 자신의 손에 묻은 페인트를 씻으며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런 에바를 무너뜨리기 위해 케빈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바로 자신의 학교친구들과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케빈의 그런 행동이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에바는 정말로 케빈에게 최선을 다했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한다.

실로 에바는 케빈이 자신을 향해 웃어도, 울어도 케빈을 안지 못한다. 과연 모정이 존재할까? 라는 의문이 들만큼 에바는 케빈을 두려워하고 있다. 과연 무엇인 그녀를 그렇게 두렵게 만든 것일까. 다른 임산부들 사이에는 섞이지도 못하고, 출산의 순간에는 그녀의 어지러운 감정들이 유리에 비춰 그녀의 감정을 상상할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린다. 아직 아기였던 케빈은 그녀에게서 어떤 감정을 교감했던 것일까. 아니, 엄마와 아이의 교감이라는 게 과연 성공하기는 한 것일까. 실로 세상에 많은 미혼모들이 에바와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준비되지 않았던 임신, 더군다나 자유로운 여행가였던 에바에게 케빈은 자신의 영혼과 몸을 묶어버린 사슬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에바와 많은 미혼모들은 축복이라고 말하던 생명의 탄생이 저주스러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가 던져주고 있는 가장 큰 질문을 맞닥뜨려야 한다. 과연 소시오패스 (또는 사이코패스)는 양육되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인가. 이 다르게 말하자면 질문은 케빈과 에바의 책임회피의 문제로도 볼 수 있겠다.

 

에바와 케빈이 동시에 서로를 탓하며 책임회피를 한다면 나는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못할 것 같다. 실로 우리 사회에서는 단절된 가족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구조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한다. 대화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방에 가둔 자식을 인터뷰한다. 끝끝내 인터뷰를 거부하던 그들은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를 털어놓고 가족을 이해하고 서로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뻔한 결말이다. 결국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좋은 결말로 얼버무리는 것이다. 케빈에 대해여 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가 케빈에게 “지금은 행복해보이지 않는 구나. 왜 그랬니?” 라고 물었을 때, 케빈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땐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끌어안는다. 케빈은 스스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아빠와 친구까지 모두 죽여 놓고 일부러 마지막까지 살려놓은 에바에게 왜 그랬는지조차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허무한 이유를 듣는다면 그 자리에서 에바는 무너졌을 것이다. 또는 “그냥”이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에바는 삶의 의지를 모두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그토록 열심히 청소하고, 케빈을 교육하고, 사람들의 모독을 버텨왔으니 에바는 여생도 그 이유를 남겨둔 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둘은 포옹을 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과연 그 둘의 포옹은 무엇을 의미할까. 서로에 대한 용서? 화해? 아니다. 내가 보기엔 둘의 포옹은 이별의 포옹인 것이다. 이제는 서로를 놓은 채, 조금 더 편해질 수 있게. 미워하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미나를 미워하던 사람의 결별을 쿨하게 보내주는 것.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용서함과 동시에 자신들을 용서한 것이 아닐까.

 

케빈에 대하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많은 질문들은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누구를 미워하고, 미움을 받고 그 과정들 속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감정들을 에바의 표정에서 느꼈으니 우리는 에바가 감정을 대리인이라고 된 것 마냥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멋진 연기를 해준 틸다 스윈튼에게도.) 그리고 극장을 나서면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현실에서 수많은 질문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것을 깨달았기에 케빈에 대하여가 극장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되는 영화라는 평을 듣게 된 이유일 것이다.

백년어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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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년어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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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년어 물고기
  • 201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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