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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셋째 주 리뷰

  • 작성자 케이k
  • 작성일 2014-01-21
  • 조회수 309

두 편의 글이 올라왔는데, 두 편 모두 각각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잘 상쇄되지 않아서 이번 주 장원은 선정하지 않았습니다. 리뷰 참고해주세요~

 

* 아그책, <오버룩을 휘감은 쇠사슬>

스티븐 킹의 소설 <샤이닝>을 인물의 관계도, 공간(오버룩)의 특이성을 통해 꼼꼼히 읽어낸 글입니다. 이 소설을 편협한 공포물로 읽지 않으려고 노력한 점이 좋았는데요. 가족 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든지, (사회적 자아를 가진) 현대인 초상을 적극적으로 읽어내려 한 점이 눈에 띕니다.

그런데 글 전체가 다소 파편적이네요.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의욕은 충만한데, 그게 한 편의 유기적인 글이 되지는 못한 것 같아요. 각각의 소제목 별로 각각의 이야기들은 흥미롭게 다가오지만, 글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선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각 단락과 소제목 사이의 관계를 조금 더 고민해서 수정해보면 좋은 글이 될 것 같네요.

 

* 에메, <악은 가능한가? >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유미주의, 탐미주의를 키워드로 해서 읽은 글인데요. 주요인물 분석들이 저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금각사'의 아름다움과 그것에 강박하는 주인공 너머에서 역설적으로 ‘악’을 읽어낸 것이 특징적이네요.

그런데 미시마 유키오나 여기에서 다루는 <금각사>는 이론의 여지없이 늘 유미주의, 탐미주의의 계보에서 다루어져 왔기에, 에메 님의 감상, 평가가 썩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설파하는 미에 대한 주장, 묘사에 글쓴이가 너무 밀착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작가의 강한 주제의식(?)의 기운에 글쓴이가 처음부터 너무 얽매어 있는 느낌이랄까요. 차라리 이 소설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강박적인 미에 대한 욕망이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지, 또는 예술, 아름다과 윤리(선/악)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의,. 소설을 메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조금은 삐딱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면 더 좋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케이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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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가 늦었습니다.

올해 첫 매미소리가 들린 날입니다. 조금 빠른 것 아닌 것 여겨집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이 여름도 곧 지날 것이고 어김없이 새로운 계절이 돌아오겠지요. 지난 2년 동안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제 어린 시절의 모습을 많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 시절에 나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쓰고 무엇을 생각하며 지냈는지. 여러분들의 글 속에서 지금의 저와 과거의 저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어서, 여러분에게 오히려 고마움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꿈이 있고, 그것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과 욕망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사람들은 종종 쉽게 지치고, 때로는 포기합니다. 무엇이든, 우리 스스로의 삶이 궁극적인 이유이자 목적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꿈, 욕망이란 그  도정에 놓인 것이고, 결국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삶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에 놓인 존재일테니까요. 글을 쓰고자 하는 여러분이 너무 조급함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무 스스로의 역량과 에너지를 소진해 버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글쓰기이건, 어떤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이건, 결국은 '완급조절'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하게 '비평'이란 말이 이 게시판 제목에 붙었기는 하지만, 사실 모든 비평 감상의 첫출발에는, 내가 너무 좋아서 누군가에게 그걸 전하고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욕망이 있다는 점, 부담없이 이곳에 와주기를 다시금 강조하고 싶어요. 건강, 건필하세요!

  • 케이k
  • 2015-07-10
5월 마지막 주 주장원 발표

* 배예진!! 님의  <새는 새는 나무 자고> 를 5월 마지막 주 주장원으로 선정합니다. 다루고 있는 책의 성격 때문일까요, 책의 제목 때문일까요, 글쓴이의 안정된 문장과 차분한 톤때문일까요. 따뜻한  느낌이 넘치는 글입니다. 본격적인 서평이나 감상,비평문은 아니지만, 인종,언어,종교,국적 등이 달라도 인간은 함께 공감하고 그것을 나누어야 하는 존재임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더불어 산다는 것의 가치가 점점 소중해지는 지금 시대에, 소박한 일깨움을 던지는 글로 읽혔습니다.동네의 북까페도 더불어 궁금해지게 하는 글이었네요. 늦었지만 5월 마지막 주 주장원으로 선정합니다.  

  • 케이k
  • 2015-06-16
4월 넷째주 주장원 발표 및 리뷰

4월 넷째주 장원은 슈뢰딩거 님의 <진실의 파괴력(영화 ‘오이디푸스 왕’과 ‘스토커’의 비교>로 선정했습니다. 다음 리뷰 참조해주세요.   * 슈뢰딩거, <진실의 파괴력(영화 ‘오이디푸스 왕’과 ‘스토커’의 비교)> 다루고 있는 영화 두 편이 모두 어려운 영화들이었네요. 게다가 주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이 사고와 감성의 동물인 한 영원히 탐구될 주제이기도 하겠고요. 그 어려움에 한 번 빠져 헤매기 시작하면 좀처럼 실타래를 풀기 어려운데, 슈뢰딩거 님의 글은 대체로 이 문제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두 편의 영화 각각에서 공통적으로 도출되는 문제, 영화 속에서 그것을 풀어가는 양상, 그리고 각각의 다른 결론과 의미. 좀더 풍부한 영화 속 사례들과 분석이 제시되면서 이 이야기들이 전개되었으면 훨씬 설득력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자체로 명료화한 것도 중요한 장점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두 영화를 각각의 방식으로 의미부여하고 주제화한 것이 큰 무리 없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고려했다면 논의가 더 풍요로웠을 것이고, 어쩌면 다른 결론의 글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오이디푸스의 자기 탐구와 <스토커> 속 인물들의 자기 찾기는 애초에 그 인물들의 존재 자체가 놓인 장소가 달랐다는 점인데요. 즉, 같은 ‘진실의 파괴력’으로 두 인물들이 이야기될 수 있다 해도, 애초에 그들은 다른 조건 속의 존재였다는 것인데요. 가령 오이디푸스가 애초에 신탁에 의한 정해진 <운명>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비극적 인물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 그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문제, 그의 내면의 고통은 단지 진실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는지. 이런 것이 영화 <스토커>의 현대인들과 얼마만큼 공유되는 조건인지도 비교되었다면 훨씬 더 깊이 있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면 진짜 어려워졌을 수 있겠지만 말이지요) 아무튼, 이 글의 맥락에서 조금 비껴나는 이야기일지라도, 어떤 의미에서건 ‘진실’은 ‘파괴력’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 우리미, <파닥파닥(padak)-홍보를 잘못한 수작> 이 게시판에서 처음 만난 우리미 님의 글입니다. 단락 구분이 안 되어 있는 것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문장도 좋은 편이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명료하고, 생각도 잘 정리되어 있는데, 그것이 단편적으로 나열만 되어 있어서 어떤 <글>이라는 느낌을 잘 주지 않아요. 제목도 내용도 공감되는 바가 많은 글이었는데, 끝부분을 읽으니 이 아쉬움은 역시 이 게시판에서의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던 것 같네요. ‘절절한 감정’은 지금 이 글에서도 잘 전달이 됩니다. 그러나 역시 좀더 풍부한 영화 이야기나 인터넷 후기의 아이들 반응 등을 소개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고요. 다음 글은 문장을 나열한 메모 느낌이 아니라, 단락으로 형성된 글을 기대해도 되겠지요?! ^^

  • 케이k
  • 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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