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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라볼 줄 아는 거리유지의 감각 - 은희경론

  • 작성자 조셉 고든 레빗
  • 작성일 2013-11-18
  • 조회수 400

1. 삶을 바라볼 줄 아는 거리유지의 감각

 

 

망설임 없는 단정적인 어조, 표정을 드러내거나 감정을 분출하지 않고 줄곧 일관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은희경은 시종 냉소적이고 위악적인 태도로 삶을 비관한다. 몇몇의 얕은 지식과 현학적인 문장으로 삶을 분석하여 설명하려하지도 않고 부러 과장된 몸짓, 큰 웃음을 지어보이며 현실의 긍정적인 면모만을 보고자하는 태도 또한 지양함에, 그것들에 피식 비소를 날리며 자신이 겪어왔던 삶을 바탕삼아 현실을 관철해낸다. 휘황찬란한 표면속의 이면을 단숨에 꿰뚫는, 미묘한 감정의 파장마저 관철하는 통찰력과 나긋하고 조곤한듯 하지만 독자의 폐부를 찌르는 진중하고 날카로운 사유와 관찰들을 보건대 그녀가 겪어왔던 삶또한 단순하진 않았음을, 삶의 편린에 속하는 것들조차 그 무게가 둔중했음을 짐작케한다. 비관을 신중함으로 냉정함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냉소섞인 문장을 구사하는 와중에 작품 곳곳에서 감지되는 운명론적. 체념적 시선은, 뜨거웠던 삶의 열기를 온전히 대면한 후 차갑게 식어버린, 열정 또한 모조리 소진한 이의 무기력한 몸짓, 이미 단념해버린듯한 얼굴을 연상시킨다.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한편으로는 누구의 삶에서든 기쁨과 슬픔은 거의 같은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므로 이처럼 기쁜일이 있다는 것은 이만큼의 슬픈 일이 있다는 뜻임을 상기하자.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그러니 상처받지않고 평정속에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된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새의 선물-

 

 

이것은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심결에 주고받은 눈빛에도 설렘을 느끼고, 이뤄지지 않을 막연한 상상을 하며 진한 웃음을 짓는, '사랑'의 낭만적인 속성,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그려내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러한 감정에 휘말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현상의 이면, '사랑'이라는 파도가 휩쓸고 간 황폐한 흔적을 응시하는데 주력한다.

 

 

'사랑은 자의적인 것이다. 작은 친절일 뿐인데도 자기의 환심을 사려는 조바심으로 보이고 스쳐가는 눈빛일 뿐인데도 자기의 가슴에 운명적 각인을 남기려는 의사표시로 믿게 만드는 어리석은 맹목성이 사랑에는 있다. 허석이 다만 한번 쳐다본 것을 가지고 그것이 '이렇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너' 라는 의미라도 되는 듯이 가슴이 설레는 것을 보면 진정 나는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지닌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떄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 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새의 선물-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 극대화 되는데, 소설이 근본적으로 지녀야 할 서사마저도 최소한으로 축소시킨채, 우리의 머릿속에서 맴돌지만 입 밖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형태 없는 공상이나, 사색, 사랑에 대한 감정을 소설 속 주인공에 대입시켜 활자로서 풀어놓는 점이 그러하다. 물론 그 어느 소설이 작가의 생각과 자의식을 반영하지 않겠냐마는, 작가 또한 일개의 개인이며 개인이 지닌 미미한 영향력의 생각들을 대중으로 하여금 공감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넓은 시야, 냉소섞인 통찰력을 바탕으로 좀처럼 표현키 어려웠던 삶과 일상을 파헤치는 은희경의 소설은, 대단한 문학적 성취를 거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2. 이야기의 아쉬움

 

 

문학이 반드시 거창한 주제의식을 지닐 필요는 없다. 거시적인 접근으로 사회에 대한 진중한 문제의식을 역설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뚜렷하고 명징한 주제의식을 갖추었다 한들, 짜임새있게 축조된 이야기가 없다면, 번지르르한 외관을 지녔으나 불완전한 기반을 가진 건물의 형상과 다를바가 없다. 주제의 거대함에 비해 얕고 얄팍한 이야기를, 그로인해 그 거대함마저도 공허한 외침으로 변질된 작품은 무수히 존재하기에 문학에서 가장 우선시되야 할 것은 서사, 이야기의 응집력임이 자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문학에서 주제의식은 거추장스럽고 지나치게 화려한 치장'이라는 이론을 펼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창작자가 자신의 원대한 야심과 문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탄탄한 이야기를 먼저 서술해야 한다는 당연한 원론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은희경의 소설이 지닌 장, 단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삶과 일상의 깊숙한 곳을 헤집는 통찰력, 과시와 과장, 괜한 야심을 섞지않은 부담없는 진솔함이 그녀의 장점이나, 기실 은희경의 소설이 치밀하고 디테일한 서사를 구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소설중 '마이너리그'만이 그럴듯한 이야기의 형태를 갖추었을뿐, 최고작이라 일컬어지는 '새의 선물'조차 유장한 흐름의 서사가 아닌, 몇몇의 에피소드를 차례로 나열해 놓은 채, '진희'라는 똘똘한 12세 소녀의 캐릭터성에 기댄 측면이 크다. 불완전한 서사를 구사하는 것은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태연한 인생'에서 더욱이 깊어진다. 쿤데라를 연상시키는 문학적 비유, 한층 수준 높아진 삶에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탄성을 자아내지만,

 

 

'햇빛이 강렬한 날이었다. 잔디밭에 떨어진 커다란 삼나무 그림자가 마치 검은색 레이스 탁자보를 펼친 것처럼 섬세하고 화려했다. 오후가 되면서 그림자는 모양과 색깔이 조금씩 변해갔으며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때마다 순차적으로 부드럽게 물결쳤다. 잔디밭에 빛이 사선으로 들기 시작했다. 한때의 찬란함은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었다. 류의 어머니는 오랜시간 그 모든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의 흐름과 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 어머니가 또 한가지 본 것은 자기인생의 퇴락이었다.'

'그리고 이미 의심이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기가 가장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자존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인생을 자기가 아는 방법으로 보존하려는 의지였다. 그녀는 자기가 의존해온 틀을 지키려는 어리석은 긍정과 교활한 평화가 어떻게 사람들을 보수적인 이데올로기 안으로 끌어들이며 또한 자신조차 신뢰하지 않은채로 그것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데 앞장서게 만드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의심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상처받지 않으려면 의심스러운 것을 의심하지 않아야 했다.'

                                                                                                                                                        -태연한 인생-

 

 

문학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난듯한 일상성의 지나친 심화는 소설속에 존재하는 잠언, 대단히 좋은 표현들을 표면에서만 부유하게끔 한다. 군부독재라는 정치적 억압과 긴장에 거센 저항을 시도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던 80년대가 지나가고 사회적으로 안정감이 맴돌았던 90년대, 미시적차원의 개인적 욕망과 일상이 부각되었던 시기에서 은희경의 소설은 그러한 시류에 어울리며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소설들이 지닌 한계점이 분명히 드러났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을 맞이하게 된다.

 

 

3. 변화의 조짐, '소년을 위로해줘'

 

 

2010년 발표한 본작에서 그녀는 변화를 시도한다. 고등학생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의 인물을 화자로 설정하면서 '새의 선물' 때로의 회귀를 시도할 것이라는 예상을 자아냈지만, 날선 냉소를 한층 걷어내고, 요시다 슈이치,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일본감성문학과 유사한 분위기의 작품을 탄생시키며 세간의 예측을 뒤엎는다. 고등학생다운 발랄한 어조, 아웃사이더들에대한 고찰이 주를 이루는 와중에 트렌디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전개는 어색하면서도 신선하다. 그러나 작품 후반부 무리하게 작위적인 설정을 첨가하면서 작품을 휘청이게 만드는데, 작위적이나마 서사의 형태를 갖추려 노력한 시도의 의의는 인정할만하다. 이 작품도 에피소드 형식의 이야기라는데에서, 완연한 발전을 이뤄냈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마이너리그', '새의 선물'과 더불어 뚜렷한 이야기의 형태가 보인다는 점, 여지껏 은희경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아련한 감성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녀가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음을 증명해낸다.

그녀의 문학세계에서 좀처럼 빠지기 힘들었던 냉소와 위악을 걷어내었지만 적어도 필자에겐 성공적인 변화의 시도였다고 느껴진다. 제목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생생한 감성의 결은 아름답기 까지 하다. 그녀의 다음작품이 더더욱 기대된다.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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